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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병원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885년 9월 개업
소재지 : 정동 34-1번지

상세설명

지금의 정동제일교회가 서 있는 곳과 바로 이웃하는 자리[선교백주년기념예배당의 서쪽 터전 일대]는 원래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時奇蘭敦; 1856~1922)이 자신의 첫 병원을 설치했던 공간이다.
스크랜튼이 우리 나라에 도착한 것은 1885년 5월 3일이었는데, 서울에 먼저 들어와서 제중원(濟衆院)을 개설하고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에게 의탁하여 이곳에서 잠시 일을 도우는 것으로 첫 임무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내 의견충돌이 빚어져 둘은 결별하였으며, 스크랜튼은 미국공사관의 주선으로 정동에 독립가옥 두 채가 딸린 1,800여평의 대지를 사들여 장차 서울에서 벌일 선교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곧이어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내외와 자신의 어머니인 메리스크랜튼 부인(Mrs. Mary F. Scranton, 施蘭敦 大夫人; 1832~1909)등의 일행이 뒤따라 들어옴에 따라, 새로 구입한 대지 가운데 성벽에 붙어 있는 서쪽 집은 아펜젤러 가족이 사용하고 그 아래의 동쪽 집은 스크랜튼 가족이 터전을 잡기에 이르렀다. 다시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우리가 앞으로 사고자 원하는 소유지"로 지목한 정동 32번지 일대의 언덕을그해 10월에 사들였는데, 이곳이 바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 들어서는 자리이다.
이러한 와중에 의사 스크랜튼은 미국에서 보낸 의료기기와 약품이 도착하자 1885년 9월 10일에 우선 자신의 집에서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가이듬해에는 다시 "동쪽으로 붙은 집"을 사서이곳을 수리한 후 정식으로 병원을 열었는데, 이때가 바로 1886년 6월 15일이었다. 아직은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조차 붙기 이전의 일이었다.
아펜젤러가 운영하던 작은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이 내려진 것은 1887년 3월경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펜젤러 자신이 직접 남긴 1887년 4월 17일자 서한에 담긴 내용을 통해잘 살펴볼 수 있다.
"(62~63쪽) ...... 겨울이 끝날 무렵 외서(外署)의 관리인 어머님의 통역관은 어머님에게 와서 독판(督辦)과 그 관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야한다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에 대해 어머님은 한동안 주저하였으나 우리가 안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관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외서 독판과 그밖의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둘러보고 스크랜튼 부인의 일하는 목적을 좀 더 확실히 알기를 희망하였으므로 끝내는 그렇게 동의하였습니다. ...... 그가 국왕에게 건의하면서 끊임없이 이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 후 종종 들었습니다. 몇 주일 후 국왕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름 하나를 학교를 위해 고르셨습니다. 국왕은 우리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다소 화려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외서에 명하여 한자를 쓰게 하고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또한 일반군인들보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는 근위대의 기수(旗手)를 보내왔는데 이 부대는 공사관과 유력한 외국인들을 위한 경호대로 선발되는 부대입니다. 외아문(外衙門)에서 보내온 바로 그 종이에 판자를 붙이고 액자를 넣어 한국 장인(匠人)이 이를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칠을 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 학교(Woman's House)의 정문에 걸려있습니다. 이 종이는 약 2~4피트이며 한자의 크기는 한 자가 사방 10인치 정도입니다. 우리 학교에 이것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우리와 비슷한 승인과 기수가 아펜젤러씨가 경영하는 학교에도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몇 주후에 병원에도 비슷한 방식의 승인이 났습니다. 병원의 이름은 번역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시병원(施病院)을 좀더 간결하게 표현한 유니버설 호스피탈(Universal Hospital)이라고 영어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화백년사> (1994), 62~63쪽에서 재인용]
'시병원'이라는 말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스크랜튼 자신의 한자식 이름이 '施蘭敦'이라는 점과 더불어 원래 '시(施)'라는 것이 '베푼다'는 뜻을 담고 있는 데서 따온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여하튼 스크랜튼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을 좀더 간결하게 표현한 유니버설 호스피탈(Universal Hospital)"로 불렀던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8월호에는 제8회 감리교선교회연차총회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이 가운데 '정동병원(The Chong Dong Hospital)'이라는 항목에 "입원 1,000명, 진료소환자 2,224명, 합계 3,224명"이라고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동병원'은 '시병원'의 다른 표현인 듯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것말고도 '남대문병원(The South Gate Hospital)'이라는 항목에 "[10개월치 집계] 입원 542명, 왕진 9명, 외과수술 43명, 진료소환자 1,636명, 합계 2,200명"이라고 표시된 것도 남아 있다. 이 '남대문병원'은 '상동병원(尙洞病院)'을 말하는 것으로, 1890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의사맥길(William B. McGill)이 이곳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주로 서민계층들이 모여 사는 남대문로 주변의 상동지역에는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인 스크랜튼 대부인이 지금의 상동교회 자리(남창동 1번지)일대약 2,200평의 대지를 먼저 사들여 이곳으로 진출한 것은 1889년의 일이었다.그 당시 이곳에는벽돌 건물 한채와 몇 채의 기와집이 서 있었는데, 이것을 개수하여 상동병원을 설치하였으니 이때가 1890년 10월이었다.
평소 스크랜튼 의사는 정동에다 시병원을 꾸려나가면서도 항상 '상동'으로 자신의 병원을 옮기기를 갈망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1893년도 연차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었다.
"병원을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붐비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남대문 상동에 있는 병원이야말로 그 위치며, 주변의 교통량이며, 상주인구수를 감안할 때 참으로 바람직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민중이 있는 곳이 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주거지역입니다."
이러한 그의 바람은 마침내 실현되어 1895년에 정동의 시병원(General Hospital)은 상동병원과 통합이 이루어졌다. 정동의 병원이 상동으로 옮겨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다만<더 포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9월호에 수록된 '제11차 감리회 연차총회'에 이 사실이 간략히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시기를 대략 짐작할 따름이다.
한편, 시병원의 창립자 스크랜튼 의사는 1907년에 친일성향이농후했던 감리교 선교부의 해리스(M. C. Harris) 감독과의 의견충돌로 선교사와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옮기고 말았으며, 그때부터국내와 중국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후 1922년에코베에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스크랜튼의 말년 행적에 대해서는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국내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매일신보> 1913년 1월 21일자 이후에는 느닷없이 '시란돈병원(施蘭敦病院)'에 대한 광고가 여려 차례 등장한다. 다만 이 광고는 그 직후 3월 무렵까지만 광고에 등장하고 더 이상 눈에 띄질 않는다. 따라서 이 병원이 언제까지 유지된 것인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여하튼이러한 자료는 이러한 공백기에 그의 활동이 어떠했는지를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이이서 크게 주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참고 삼아 그 내용의 전부를 옮겨보면, 이러하다.
"[광고] 시란돈 병원(施蘭敦病院), 남대문내 달성위궁(南大門內 達城尉宮), 본병원(本病院)의 창설(創設)은 주강생 일천팔백팔십오년(主降生 壹千八百八拾五年)이요 전반(全般)의 치료원(治療院)을 복설(復設)함은 주강생 일천구백십이년(主降生 壹千九百拾二年)인 바 금회(今回)에 화려장미(華麗壯美)한 삼층양옥내(三層洋屋內)에 내과(內科), 외과(外科), 산과(産科), 전기치료과(電氣治療科)를 치(置)하고 특별(特別)한 주의(注意)로 간호(看護)함. 시란돈병원장 시란돈 백(施蘭敦病院長 施蘭敦 白)"
여기에 나오는 달성위궁은 옛 저경궁(儲慶宮)의 안쪽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한국은행 바로 뒤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일찍이 자신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이곳에 거처했으며, 대한제국시절 궁내부 시의를 지낸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도1901년말부터 2년 남짓 이곳을 임대하여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또한 일제강점기의 후반부에는경성치과의학전문(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 치과의전)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스크랜튼이 떠난 옛 시병원 자리는 그 후 어떻게 변모되었을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1895년 8월 7일에는 옛 시병원 건물이 헐리고 대신그 자리에 정동제일교회가 건립되었다"고 설명하는 자료들이 자주 눈에 띄지만, 이러한 내용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전의 시병원이라고 지칭되는 한옥건물이 정동제일교회의 준공 이후에도 잘 남아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1930년 5월호에는 이 건물의 실존을 알려주는 확실한 기록 하나가 남아 있다.블록(M. Bernita Block)이 쓴"아무도 모르는 집(The House Nobody Knows)이라는 글에는 시병원 건물의 후일담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108쪽) ...... 이 후로 몇 년동안 진료는 계속되었으나, 결국 이 집은 거주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지금은 황폐해진 이 작은 가옥은 여러 나라와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머물렀던 숙소가 되어왔던 것이다.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첫번째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다른 인물로는 영국해외성경회의 알렉스 켄무어(Alex Kenmure), 영국영사관의 어네스트 홈즈(Ernest Holmes), 테일러 목사 내외(Rev and Mrs. H. C. Taylor), 닥터 루퍼스 내외(Dr. and Mrs. W. C. Rufus) 그리고 닥터 케이블 내외(Dr. and Mrs. E. M. Cable) 등이 있다. 현재 이곳에 살고하고 있는 버딕씨(Mr. Burdick)를 제외하면, 빌링스 일가(The Billings family)가 최장거주기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곳에 만족하였으며, 흔들거리는 벽에 널판지를 대고 또한 비가 새는 지붕 아래에서5년간을 살았다고 들었다. 벡 목사 내외(Rev. and Mrs. S. A. Beck), 쥐베르씨 내외(Mr. and Mrs. M. Zuber), 그리고 레이시 일가(The J. V. Lacy family)는 좀 더 최근에 이곳에 주소를 두었었다.
이 집은 여러 차례 불이 붙었고, 얼마 전에도 이곳에 다시 불길이 번지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 집이 정말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우리는 최초의 선교병원이 시작된 바로 이 집에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이 글에 따르면 진작에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옛 시병원 건물은 비록 크게 퇴락하기는 했으나, 1930년 당시까지도 여전히 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이 글의 제목에 등장하는 표현처럼여기에 이러한 병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드물 정도로 스크랜튼의 병원은 "아무도 모르는 집"이 되고 말았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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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3년 1월 21일자, "[광고] 시란돈 병원, 남대문내 달성위궁"
-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 "[광고] 시란돈 병원, 남대문내 달성위궁"
- <매일신보> 1913년 2월 8일자, "[광고] 시란돈 병원, 남대문내 달성위궁"
- <매일신보> 1913년 3월 5일자, "[광고] 시란돈 병원, 남대문내 달성위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