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보구여관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887년 11월 개설, 1912년 동대문 릴리안 해리스기념병원으로 합설
소재지 : 정동 32번지 (이화학당 구내)

상세설명

1887년 11월에 문을 연 보구여관(保救女館, 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1885년 이래 이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Hospital)'을 개설하여 의료선교를 진행하고 있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施蘭敦; 1856~1922)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병원이었다. 그는 일찍이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는 한국의 풍속 때문에 병이 난 여자를 남자 의사가 치료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여성해외선교회에다여의사를 파견하여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줄 것을 청원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1887년 10월 31일에는 그토록 원하던 여의사 메타 하워드(Miss Meta Howard)가 파견되었고, 이내 '시병원'과 이웃하는 자리에'보구여관'을 설치하게 되었으니,이것이 곧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자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의 모체가 된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흔히 명성황후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잘 알지 못한다.
보구여관에서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쉽사리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개시하였으나,여의사 하워드는 도착한 그해에만도 1,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과로에 노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되어1889년에는 부득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일시적인 공백을 다시 메운 것은 흔히 '홀부인'으로 유명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 1892년에 WIlliam James Hall과 결혼)였다. 셔우드 의사가 우리 나라에 당도하여 서울로 진입한 것은 1890년 10월 14일이었는데, 이날의 감상은 그녀의 아들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이저술한 <닥터 홀의 조선회상> (1978)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 이제는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해야겠다. 도착 첫날 가본 병원은 집에서 가까웠다. 다음날부터 곧 병원 일을 시작했다. 병원과 시료원을 돌아본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약간 구조를 고친 조선집이었지만 보기에도 훌륭하고 병원으로도 부족하지않았다. 크고 좋은 약국, 저장소용 방, 병 같은 것들을 씻는 세탁장이 있다. 또 충분하고 넓은 환자 대기실도 있고 이 대기실과 약국 사이에 진찰실이 있다. 맨앞에 있는 방은 넓고 밝기 때문에 수술실로 쓸 수 있다. 입원환자들을 위한 방은 5개, 이 방들을 병동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작다. 각방은 환자들 여러 명이 편히 기거할 수 있는 크기다. 방들은 온돌이며 환자들은 따뜻한 방바닥 위에서 쉬고 있다. 바닥에 까는 조선식 요는 낮이면 개켜놓기 때문에 덮는 담요를 추가로 제공했다. ...... 병원에는 약품이 꽤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닥터 스크랜튼은 닥터 하워드가 귀국한 뒤 여성전용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가기고 온 의료기구도 꽤 도움이 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의료기구가 필요하다. 나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곧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약품을 주문했다. 그러나 기구를 더 살 돈이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할 때 도와주는 은행과 같은 리버티의 내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 병원에는 첫날 4명, 그 다음날 9명, 그후 석달동안 549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 그 중의 270면은 처음 오는 환자들이고 279명은 다시 찾아온 환자들이다. 나의 진찰카드를 보면 50종 이상의 다양한 질병들이 관찰된 것을 볼 수 있다. 연주창, 매독, 회충, 눈병, 귓병, 피부병이 가장 많다. 재야 할 종기와 제거해야 할 이빨이 대부분이다. 8명의 환자를 치료하는데 무려 21가지의 전문적인 병을 치료해야 했다."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8월호에는 제8회 감리교선교회연차총회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보구여관(Woman's Hospital, '普救女館'으로 표기되어 있음)이 처치한 진료건수를 모두 4,022건(입원, 왕진,진료소 포함)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곧이어 홀부인은 1892년동대문에도 보구여관의 분원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1893년에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를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볼드윈진료소(Baldwin Dispensary)로 불렀다. 이 진료소는 1897년 이래로 여의사 릴리안 해리스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으며, 그녀는 1902년에 사망하였다. 그 후 1912에 이르러 이 자리에 새로운 병원이 준공되자 이 건물에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릴리안 해리스기념병원(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으로 부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동대문부인병원' 시절을 거쳐 오늘날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보구여관에서는 자체적인 의료교육을 실시한 것으로도 주목이 되는데,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로 손꼽히는박에스더(Mrs Esther Kim Park, 1877~1910; 본명은 '김점동')도 보구여관 출신이다.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셔우드 의사의 조수 겸 통역으로 활동하다가 마침내 미국유학의 기회를 얻어 정식 의사가 되었으며,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는 다시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우리 나라에서 서양의 근대의학과 간호지식에 근거한 정규간호교육이 처음 이루어진 곳 역시 보구여관이다.
이 일은 미국 북감리교에서 한국인 간호부를 양성하기 위해 1902년에 우리 나라로 파견된마가렛 에드먼드(Margaret Edmunds)에게 맡겨졌다. 이리하여이듬해인 1903년에는 보구여관 내에 '간호원양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간호원(看護員)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가정잡지> 제1년 제4호 (1906년 9월 25일자 발행)에는 간호원양성학교의 입학을 권하는 기사 하나가 남아 있다.
"(31쪽) 서울 대정동에 보구녀관이라는 여(女)병원이 있는데 각색 병든 여인들을 지성껏 잘 보아주며 또 그 병원 안에 합설(合設)한 간호원양성학교가 있으니 이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와 같이 지리, 역사 같은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총민한 여자를 뽑아 각색 병 치료하는 법을 눈으로 보며 귀로 듣고 손으로 행하여 시시로 배우게 하며 병 종류를 나누고 일등분을 분별하여 열심히 가르치며 그외에도 여러 고명한 의원과 선생을 청하여 좋은 공부를 많이 시키더라. 그 주장하는 이의 말을 들은즉 자기들은 대한 젊은좋은 여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공부하게 하였으니 어떤 여자든지 와서 공부하기를 시험하여보고 자기의향에 어렵든지 소원에 합당하지 못하면 공부할 수 없다 말하고 가도 관계찮다 하니 우리 나라에서 이런 공부를 하면 다른 나라에서보다 더 귀하고 좋겠으니 장성한 여자들과 젊으신 여인들은 좋은 때를 허송치 말고 이런 학교에 많이 가서 시험하여 보고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우리 나라 여인들도 같이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 바라나이다."
그러나 이곳 보구여관은 병상수가 20개를 넘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작았으므로 학생들의 실습경험을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여타 민간병원에서 견학이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세브란스 간호부양성소에 가서 강의를 받고, 실습은 대부분 그곳 수술장을 통해 진행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1906년 1월 25일에는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라는 두 명의 간호원이 입학 3년만에 보구여관 대기실에서 대관식을 하고 수료증을 받았으며, 다시 1908년 11월 5일에는 정식 졸업이 이루어지게되었다. 그리고 1907년에 거행된 제2회 가관식은 정동교회에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가 공동으로 실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자 (국문판)에는 이 당시 간호원의 남다른 활동에 관한 기사 하나가 남아 있어 주목이 된다. 여기에 나타난 상황은 1907년에 단행된 군대해산조치에 맞서 한국군병사들이 일본군에 맞서 시가전을 벌이던 때의 일이다.
"[여학도 의리]삼작일에 한일병이 접전할 때에 부상한 한국병정들을 남문밖 제중원에서 데려다가 치료한단 말은 이왕에 게재하였거니와 해원에 있는 남녀간호원과 보구여관에 있는 간호원들이 지성으로 구호함은 다 말할 수 없거니와 연동여중학교에 있는 여학도들이 모여 서로 의론왈 저 동포들은 나라를 위하여 죽는 자도 있는데 우리는 비록 여자나 어찌 의리가 없으리오 하고 그날밤부터 제중원에 일제히 가서 부상한 장졸을 열심으로 간호하매 그 장졸들도 여학도의 의리를 감복하야 눈물을 흘리며 치하하고 또 그날에 반양복한 여자 하나가 능히 영어와 일어를 통하며 탄환을 무릅쓰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 동포를 우리가 구하지 아니하면 누가 구하리 하고 친히 좇아 다니며 상한 병정을 사면으로 찾아서 병원으로 메어갔고 또 한국 간호부 하나는 전장 속에서 상한 병정을 구호하기로 온뭄에 피가 묻었으매 보는 자들이 감동하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더라."
제중원은 곧 세브란스병원을 말하는 것이며, 이곳에 '보구여관'의 간호원들이 있었다는 것은 앞서 얘기한 실습여건이 그러했던 탓이었다는 것과 연관된 상황인 듯이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구여관은 언제쯤 사라지는 것일까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이 나중에 설립된 '동대문병원' 쪽으로 합쳐짐으로써 정리되는 것은 분명한데,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엇갈린다.
가령, <이화팔십년사> (1967)의 말미에 붙어있는 '연표'에는 "정동 보구여관이 동대문 L.H.M. Hospital로 이전병합"한 것을 "1925년 4월"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 보구여관이 정동지역에 유지되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게 입증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화백년사> (1994)에서는 물론이고 <이화팔십년사> (1967) 스스로도 교실난에 허덕이던 "1914년에 옛 보구여관을 교실과 침실로 개조"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 무렵까지 보구여관이 정동에 존속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겠다. 그나마 이렇게 남겨진 옛 보구여관 건물은 1921년에 에드가 후퍼 기념유치원(Ralph Edgar Hooper Mo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을 지을 때에 헐려 사라지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보구여관이 '동대문병원'으로 합쳐지는시점은 몇몇 자료에 보이다시피, 이곳 병원이 신축 준공되는 "1912년"으로 '잠정'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참고자료목록]
-정충량, 이화팔십년사편찬위원회, <이화팔십년사> (이대출판부, 1967)
- 이화100년사편찬위원회, <이화 100년사 1886~1986> (이화여자고등학교, 1994)
- 김초강 외, <이화기숙사 110년 이야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제3권)> (서울특별시, 1979)
- 셔우드 홀, 김동열, <닥터 홀의 조선회상> (좋은 씨앗, 2003)
- 알렌 디그레이 클락크, <에비슨 전기 : 한국근대의학의 개척자> (연세대학교출판부, 1979)
- 이광린, <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 : 한국근대 서양의학과 근대교육의 개척자> (연세대학교출판부, 1992)
- 이꽃메, <한국근대간호사> (한울,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이덕주,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2002)
- 박형우, <제중원> (몸과마음, 2002)
- 박형우, <세브란스와 한국의료의 여명> (청년의사, 2006)
- 연세의료원 120년기념화보집 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한국근대의학 120년 (1885~1957)> (청년의사, 2007)
- (Aug. 1892), "[Editorial Notes] The Eighth Annual Meeting of the Methodist Episcopal Mission is in session ...... "
-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자 (국문판), "여학도 의리, 삼작일에 한일병이 접전할 때에 부상한 한국병정들을 ...... 보구여관에 있는 간호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