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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성당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890년12월 장림성당 개설, 1922년 성당신축 착공, 1926년 5월 1단계 준공, 1996년 5월 최종완공
소재지 : 정동 3번지

상세설명

정동 4번지에 정착한 영국대사관과 바로 이웃하는 정동 3번지 구역에는성공회대성당(聖公會大聖堂)이 들어서 있다. 이 자리는 1889년 11월에 조선선교의 책임을 지고 초대주교로 승품이 된 코프(Charles John Corfe, 고요한; 1843~1921)에 의해 선교기지로 마련되어 1890년 12월 21일 이후 기존의 건물을 장림성당(將臨聖堂, The Church of Advent)이라고 이름을 고쳐 붙인 데서 그 역사는 시작된다.
곧이어 1892년 11월 27일에는 이곳에다 한옥건물로 '교회다운 모습과 크기'로 성당을 신축하고, 다시 이를 장림성당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이 당시 선교활동의 중심은 대개제물포였지만, 만주지역까지 코프 주교의 관할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서울 성공회성당은 자연스레 그중심지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이해 가을에는 성베드로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근처의 고가옥을 구입하여 교회대지를 확대하였으며, 1896년에는 또 다시 너른 대지의 집을 매입하여 영역확장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1893년에는 이곳에다 고아원을 개설하여 정동에서 첫 사회사업을 개시하였는데, 이 일은 1913년까지 계속되었다. 1900년에 와서는 정동대지의 일부를 영국공사관의 필요에 따라 그쪽으로 일부 넘기도 하였으나, 1909년에는 성공회 주교와 사제들의 공관을 건립할 목적으로 근처에 상당히 큰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의 부지를 다시 확장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순종실록부록> 1912년 3월 18일자 기사에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옛 수학원(修學院)의 토지와 건물을 영국교회에 5년기한으로 빌려주기로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곳 역시 결국에는 상당한 구역이 영국성공회 측으로 완전히넘겨진 것으로 드러난다.정동 1-5번지 및 1-16번지일대에 자리했던 수학원은 황태자(영친왕)와 황족·귀족의 자제를 위한 황실교육기관으로 1906년 10월에 설치되었다가 1910년 8월까지 존재하였다.이 구역 안에 있던수학원 건물 양이재(養怡齋)는 그대로 잔존하였다가, 2006년 9월 19일자로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267호로 등록고시된 바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은1911년 5월 제3대 주교로 임명된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 1862~1930)에 의해 건립이 주도된 것으로 아더 딕슨(Arthur Dixson; 1856~1929)의 설계와 레슬리 브룩스(Leslie C. Brooks)의 감독에 따라1922년에 착공되고, 1926년 5월 2일에 1단계 준공을 보았던 3층짜리 건물이다. 당초의 설계도와 계획에 비해서는 많은 부분이 미완성상태로 남겨지긴 하였으나, 때마침 태평로 일대의 확장과 더불어 성공회성당은 오래도록 서울 중심부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되어 왔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성공회월보> 제69호 (1914년 3월)에는 성당의 건립계획이 착수되던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지금에 고아원은 수원(水原)으로 반이하였으므로 그 집을 다 헐고 단(端)주교 기념성전 짓기를 위하여 예비하는 중인데 이미 남대문으로부터 경복궁까지 대로가 준공되었으매 이제 건축하고자 하는 새 성전이 미려한 위치를 점력하겠고 성내 4면이 보이기 쉽겠도다. 지금 주교께서 영국에 있는 가옥건축제도인에게 부탁하여 성전의 도본과 병제를 마련하게 할 터인데 온전히 석재로 짓기를 희망하나 그러하나 거액의 돈이 더 수렴되기 전에는 일시에 성전 전체를 준공할 수 없겠도다."
여기에서 보듯이 성공회성당은 원래 제2대 주교인 터너 (Arthur Beresford Turner, 단아덕; 1862~1910)의 성전을 마련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며, 실제로 1922년 9월 22일에 정초식을 거행한 이후 이듬해인 1923년 5월 15일에 가장 먼저 지하성당이 완공되자 이것은'터너주교 기념성전'으로 명명된데서도 그 연유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당초에 라틴형 십자가모양으로 설계되었던 건축비의 부족으로 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밋밋한 일자모양의 건물만 만들어진 채 1926년 5월 2일에 본당축성석을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성모 마리아와 성니콜라스 성당'이었으나, 트롤로프 주교는 애써 '예비대성당(pro-cathedral)'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미완성이 성당 건물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는 얘기가 된다.
못 다 이룬 그의 꿈이 이뤄진 것은 무려 70년이나 지난 1996년 5월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1990년 9월에 개최된 '대한성공회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계기가 되어 1993년 4월에는 대한성공회관구가 설립되고 초대관구장으로 김성수 주교가 취임하면서 '서울주교좌성당'의 완공을 위한움직임이 촉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공회성당은 이미 1978년 12월 18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상태였는데, 원형의 훼손을 우려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의해 이러한 계획은 기각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7월경에 런던 교외의 렉싱턴도서관에 성공회성당의 설계도 원본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한 잔여부분에 대한 증축승인은 무난히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94년 5월 27일에 신축기공예배가 있었고, 착고 2년이 지난 1996년 5월 2일에 트롤로프 주교와 설계자 아더 딕슨이 그토록 갈망했을 성공회성당은 당초의 설계도와 같은 규모로 완전한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성공회대성당은 수려한 외관만이 아니라 유신독재시절과 그 이후 신군부독재시절에 번번이 민주화운동의 발상지로 그 역할을 다 해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비록 주변을 둘러싼 빌딩숲에 많이 가려지긴 했지만, 그러한 점에서 성공회성당은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살아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한국사연구협의회, <한영수교 100년사> (1984)
- 대한성공회백년사편찬위원회 편, 이재정 대표집필, <대한성공회백년사 : 1890~1990> (대한성공회출판부, 1990)
- 박영숙 편저, <서양인이 본 꼬레아> (남보사연, 1998)
- 김정동,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 (푸른역사, 1999)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이덕주,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2002)
- 김갑득·김순일, "구한말 서울 정동 외국인 주거지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제17권 제7호 통권 제153호 (2001년 7월) pp.153~162
- 김갑득, "구한말 정동 외인거주지와 건축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공학박사 학위논문> (2003년 2월)
- Gregory Henderson, "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Vol. 35 (1959)pp.1~31
- J. E. Hoare, (Curzon Press, 1999)
- <동아일보> 1926년 5월 1일자, "성공회 헌당식, 5월 2일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