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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정교회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900년 3월 개설, 1902년 정동 22번지에 성 니콜라스성당 준공, 1922년 2월 일본하리스토스정교회 소속으로 이관, 1968년 아현동 424-1번지에 성당 재건
소재지 : 정동 22번지

상세설명

서대문 쪽에서 정동으로 진입하는 초입에 서 있는 경향신문사 사옥은 그 옛날 러시아정교회가 있었던 자리이다. 이곳의 바로 뒤편 언덕에 러시아공사관(정동 15번지)이 터를 잡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그 앞쪽 공간에 해당하는 정동 22번지 일대가 러시아정교회의 공간으로 전환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정동 4번지에 자리한 영국공사관 바로 앞에 성공회성당 (정동 3번지)가 터전을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하겠다.
러시아정교회에서 우리 나라에대한 선교계획이 처음 수립된 것은 1897년의 일인데, 이때 니콜라이 2세 러시아황제의 인준을 받아 수사사제 암브로시 신부 등 3명의 선교단이 구성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당시의 혼란했던 국제정세와 더불어 입국허가까지 지연되어 결국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제2차 선교단이 꾸려진 것은 1900년의 일이며, 이 당시 수수사제 흐리산프(Archimandrite Chrisanff, 하리오산부) 신부가 이끈 새로운 선교단일행은러시아공사관 구내에서 성찬예배를 올리는 것으로 첫 포교활동을 개시하였다. 1900년 3월 2일에 벌어진 이날의 행사에는 당시 제물포에 주둔하던 러시아해군 합창단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곧이어 1902년에는 정동 22번지(1,231평 규모)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이곳은 본래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정식명칭이 있었으나 이보다는대개 '아라사성당'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제국신문> 1900년 5월 18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남아 있다.
"아라사 희랍교사가 대한에 나온 후에 전도할 처소가 없어서 아국공관 안에 교당을 권설하고 전도하더니 새문고개에 희랍교당을 방장 건축한다더라."
그런데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이 정리한 <외교사연표> (1904)에는 러시아정교회선교단이 서울에 온 때와 이후의 경위에 대해 약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1899년 1월 10일] 러시아정교회선교단(The Russian Church Mission)이 서울에 도착하다. 니콜라스 신부(Rev. Deacon Nicholas)에 뒤이어 크리산프 신부(Right Rev. Archimandrite Chrisanff), 찬송가 작가 조나스 레프첸크 씨(Mr. Jonas Levtchenke)는 1900년 2월 12일에 당도하였다. 서대문 근처에 현존하는 거주지와 학교건물은 1900년 여름에 확보된 것이다."
하지만1904년에 이르러러일전쟁의 발발로 주한러시아인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러시아정교회는 일시 중단상태에 들어갔고,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1906년 이후에야 이곳은 다시 복구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발생으로 러시아정교회는 존재 자체가 큰 혼란에 빠져들었는데, 이 와중에 1922년 2월 26일에는 일본하리스토스정교회유지재단(日本Khristos正敎會維持財團)의 소유로 전환되고 말았다. 이것은 나중에 해방 이후 이곳이 적산(敵産)으로 간주되어 국유로 귀속되게 하였고, 이에 따라러시아정교회 부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는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정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개벽> 제48호 (1924년 6월)에 수록된'재경성 각교회의 본부를 역방하고'라는 글에 간략히 소개된 글이 남아 있어서 참고가 된다.
"(76~77쪽) [백군(白軍) 피난소(避亂所)인 로국정교회(露國正敎會)]우리가 서대문(西大門) 안 정동(貞洞) 골목을 향해서 들어가노라면, 문득 길 우편에 노국정교회(露國正敎會)의 간판을 볼 것이다. 이 교회는 원 한국시절(元 韓國時節) 로서아공관(露西亞公)이 경성(京城)에 설립(設立)되었을때에 공관 부속(公 附屬) 즉 공관 내(公 內)의 모든 의식을 위하야서 설립된 것이 후에 점차 확대되야, 재경 로서아인(在京 露西亞人) 또는 조선인(朝鮮人)을 상대로 포교를 행하게 되었는데, 이 정교회(正敎會)는 물론 노국(露國)의 국교(國敎)로서 국고금(國庫金)의 지출을 받아 경영을 했으나 구주대전(歐洲大戰) 후, 로서아(露西亞)에 무산자혁명(無産者革命)이 생기며 정교(政敎)를 분리하게 되매, 경비(經費)의 지출이 단절되야, 지금은 집세(집貰)를 놓아서 근근 현상(僅僅 現狀)을 유지하며, 근래에 망명의 백군(白軍)들이 몇 명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 신도(信徒)는 전조선(全朝鮮)을 통하야서 약 400여 명, 경성에만은 약 150명이며, 파주(坡州), 장단(長端), 고양(高陽)의 3지회(支會)가 있다. 현 교회장(現 敎會長)은 페오도 씨 대신부(大神父)인데, 혁명 전에는 해삼위교무원(海參威敎務院)의 지배를 받았으 작년부터는 임시로 일본(日本)에 있는 정교회 대교주(正敎會 大敎主, 물론 露人)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조선인 신부(朝鮮人 神父)로는 강한탁(姜漢倬) 씨 일인(一人)이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런데 이 노국 정교(露國 正敎)의 특색은 신도(信徒)가 죽으면 종교의 의식상(儀式上) 반드시 제사(祭祀)를 지낸다는 것이다. 같은 야소교 소속(耶蘇敎 所屬)으로는 크게 다른 점이다."
더구나 1925년 1월 20일에 쏘비에트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국교교섭이 타결됨에 따라 오랜 공백을 깨고그해 가을인 1925년 9월 24일에 이르러 쏘비에트 출신의 영사관이 재개관되면서 러시아정교회는 더욱 곤란한 처지에 빠져들고 말았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22일자에는 새로 부임하는 쏘비에트영사와 러시아정교회 간의 알력에 대한 보도와 더불어 '교당 건물'의 사진자료까지 게재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마침 '정교당(正敎堂)의 금석(今昔)'이라는 해설기사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이 로국정교회는 일천구백년에 로국공사관 안에 부설되어 예배를 보다가 그 후 현재 장소로 옮겨왔는데 교도는 전조선에 오백여명이 있다 하나 교당은 서울에 하나밖에 없으며 혁명 후에 더욱 전도비가 오지 않아 없는 듯한 속에서 겨우 있는 존재를 지속하여 왔는데, 더욱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교세가 날로 퇴화하여 토요일 저녁과 주일날 아침에 가는 향연이 보들보들 떠오르나 옛날에 장엄하던 자취는 이미 향연 속에 쓰러져버리고 '풰오도씨' 신부의 긴머리와 수염 속에서 오직 지나간 장엄을 찾아보는 듯할 뿐이다. 그런데 정교회 부속가옥에는 빵 파는 백색 피난민의 세 가정이 침대도 없이 마루 위에서 새우잠을 우리는 모양인데 그래도 '사모왈'의 차 끓던 소리와 어린애들의 만돌린 소리는 그 속에서도 새어나온다. (사진은 정교당)"
그런데 해방 이후에 러시아정교회 자리는 결국 큰 법률적 분쟁을 몰고왔다.
1922년 이후 일본정교회의 재산으로 돌려진 러시아정교회는 해방과 더불어 당연히 적산(敵産)으로 간주되어 국유로 귀속된 바 있는데, 사실은 이것이 쏘비에트 정부로 재산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정교회에 신탁으로 의뢰되어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이곳에 대한 본래의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64년에 러시아정교회 측에 소유권을반환하라는 대법원의 최종결정이 있었고, 이에 러시아정교회는 이곳 부지를 매각한 다음 1968년에 아현동 424-1번지에 신축한 '성 니콜라스 정교회성당'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다.
그 대신에 1967년 9월 20일에 문화방송국(文化放送局)에서는 이 자리에다 텔레비젼방송 개국을 위한 새사옥의 건립에 착수하였고, 1969년 8월 2일에 건물이 준공되자 이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이후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의 통합이 이뤄지면서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도 1974년 11월에 기존의 소공동 사옥을 버리고 문화방송 뒤편에 새로 지은 신관사옥으로 이전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1981년 3월에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이 다시 분리됨에 따라 기존의 MBC정동사옥은 경향신문사가 인수하여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자료목록]
- 문화경향사사편찬위원회, <문화경향사사, 경향신문 삼십년 문화방송 십오년> (주식회사 문화방송 경향신문, 1976)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이용선, <거부실록> 제6권 (양우당, 1983)
- Horace Allen, (1904)
- 김갑득·김순일, "구한말 서울 정동 외국인 주거지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제17권 제7호 통권 제153호 (2001년 7월) pp.153~162
- 김갑득, "구한말 정동 외인거주지와 건축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공학박사 학위논문> (2003년 2월)
- 기전, "재경성 각교회의 본부를 역방하고", <개벽> 제48호 (1924년 6월) pp.71~79
-초사, "조선 있는 외국인영사와 선교사의 활동현상", <삼천리>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pp.16~18
- <제국신문> 1899년 12월 13일자, "희랍교라는 교는 천주교와 비슷한 교인데 ......"
- <제국신문> 1900년 3월 10일자, "아라사 선교사 하리오산부씨씨를 선교사장으로 하고 그 남어 선교사 수인을 경성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는데 ......"
- <제국신문> 1900년 3월 27일자, "아라사 희랍교회를 설시한다는 말은 이왕에도 말하였거니와 그 교사가 나와서 두 공일째 정동 아라사공관 안에서 예배하고 ......"
- <황성신문> 1900년 3월 27일자, "아국 희랍교의 입경"
- <제국신문> 1900년 4월 6일자, "희랍교 교당은 아라사공사관 안에 있다는데 일전에 그 교당에서 ......"
- <제국신문> 1900년 4월 12일자, "근일에 희랍교에 참입하는 사람은 돈을 얼마씩 준다는 말이 있어서 ......"
- <제국신문> 1900년 5월 18일자, "아라사 희랍교사가 대한에 나온 후에 전도할 처소가 없어서 아국공관 안에 교당을 권설하고 ......"
- <제국신문> 1900년 5월 19일자,"아라사 희랍교에서 황평 양서 등지로 교사를 파송하여 전도케 ......"
- <제국신문> 1900년 9월 20일자, "지금 아라사 사람이 공관 근처의 토지를 사는데 ......"
- <제국신문> 1901년 2월 26일자, "작년부터 희랍교가 우리 나라에 전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
- <동아일보> 1925년 9월 22일자, "막사과(모스크바)의 전보와 정교당의 운명, 적색영사가 착임한 후로 첫번 정사, 새정교부의 인계문제를 처리, 적색영사의 제일착 적정"
- <매일신보> 1926년 10월 25일자, "팔려가는 정교회, 제정시대의 국유이라고"
- <동아일보> 1926년 10월26일자, "로 정교회 방매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