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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사관학교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913년 11월평동 76-9번지에서 신축준공, 1927년 10월 정동 1-23번지에 신축 착공, 1928년 9월준공 이전
소재지 : 정동 1-23번지 (정동 1-36번지 포함)

상세설명

"기독교회 중에 구세군은 세계만국 임금의 임금되시는 예수의 복음을 지구끝에까지 전파하는데 선봉장이 되어 군대를 편제하여 힘써 앞으로 나아가고 어려움을 임하여도 구차로히 면하지 아니하여 사람을 만나면 입으로 싸워 상제인애를 지도하며 곳곳에 진을 베풀어 구세주의 은혜를 감복케 하는 자이라. 그 진을 베푼 곳에 쓰는 군기는 북을 치며 징을 울리고 저를 불며 거문고를 희롱할 뿐이며 그 싸울 때에 모략은 상제의 인애하심과 구세주의 은덕이며 성령의 감동함을 의뢰할 뿐이오 승전하여 얻는 전리품은 전도에 열심하여 믿는 자를 단취하며 온 천하 인민의 마귀에게 빠진 것을 구하여 내는 것이라. 지금 영미 양국과 다른 나라에서 이 구세군이 대원수 예수께 마음을 바치고 몸을 바쳐서 각국에 군대를 파송하야 신자를 불러 모으는데 지금 예수의 휘하 친병이 몇천만명인지 이루 헤일 수 없는지라. 대개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함으로 의리를 삼는 고로 이 한국인민이 도탄과 죄악중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군대를 이곳에 파송하여 주둔할 새 구세군 중에 길을 여는 선봉대의 사관들이 영국에서 발정하야 만리창해를 기쁜 마음으로 건너와서 지난 수요일에 한성에 무사도착한지라. 정령 허가두씨는 한국 안에 주둔한 대대장이 되여 위관 롭손씨와그 부하 사관을 거느리고 함께 입성하였더라.
참령 반만거씨와 그 부인은 함께 본국에 있을 때에도 긴요한 직무를 맡아서 여러 해 경력이 많으므로 공로가 자못 많거니와 이곳에서도 허정령의 상등보좌원이 되고 정교 밀톤씨와 그 부인과 정교 우아도씨도 본국에서 오래 노력하야 효력이 많던 자이라, 이제 한국 안에서 직무를 담임할지라. 그 직무는 본 신문광고에 설명함고 같이 서문밖 평동 구세군 본영 안에서 일요일 오전 십일시와 오후 삼시와 칠시반에 개회하고 새로온 사관들이 그 직무를 집행하는데 그 강론하는 말을 분명히 번역하야 여러 사람의 듣기를 이바지하노니 일반 한일들은 이를 환영하며 자세히 듣기를바라노라."
이것은<대한매일신보>1908년 10월 18일자 (국문판)에 수록된"구세대군출주"라는 제목의 기사 전문으로, 우리 나라에 구세군이 처음 등장했다는 소식을담고 있다. 새로운 종교조직체의 출현을 이렇듯 신문지상에서 소상히알려주는 것도 그렇거니와 친절하게도 여기에 찬동하라고 권유하는 내용까지 담은 것은 분명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신문지상에서 널리 광고해준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구세군은 서울에 첫 선을 보인 지 불과 한달여에 "수삼천명"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9일자 '구세교 입참' 보도내용)이 몰려드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든 데는 '구세군'이라는 명칭 때문에 이것을 정말로 총칼들고 싸우는 군대조직인 줄로 '오인'하는 이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게 아니라면 구세군에 가입하면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함께 얻을 것으로 착각한 고단한 민초들이 그만큼 많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감리교 목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부스(General William Booth, 1829~1912)에 의해 창시된 구세군은 처음에 '기독교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라고 하였다가 1978년에 조직의 구조를 상징적인 군대식으로 개편하면서 그 이름을 지금의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말하자면 정식 군대는 아니지만 군대편제를 차용한 종교단체인 것이다.
이러한 구세군 조직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앞서 보았듯이 1908년 10월의 일이며, 이는 전년도인 1907년에 윌리엄 부스 대장이 일본을 순회할 때에 어느 한국유학생의 요청을 접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따라호가드 정령(Colonel Robert Hoggard, 許嘉斗, 許加斗)와 본윅 참령(M. Bonwick, 班禹巨) 일행을 우리 나라에 파견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도착과 더불어 서울에서 큰 환영과 관심을 받아 이례적으로 매우 빠르게 교세를 늘려나갈 수 있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들이 처음 구세군의 터전으로 잡은 곳은 서대문밖에 평동(平洞) 76번지(영국인 또난씨 가옥)일대이며, 곧이어 한달여 뒤에는 평동의 지리적 여건이 서울의 귀퉁이에 속한다는 점을감안하여 성문 안쪽인야주개 흥화경매소(夜珠峴 興化競賣所)로 구세군 본영을 옮기게 되었으니, 이곳은 곧 오늘날의 '구세군회관'(신문로 1가 58번지)이 들어선 자리이다.
다만 <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8일자 (국문판)의 기사에 따르면,"야주개 등지에 건축하는 구세군 영문이 차차 필역이 되므로1910년 6월 19일에낙성식이 거행될 예정"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렇다면 이때 준공된 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다소 혼란스럽다. 왜냐하면일제강점기 내내 존속했던 구세군 본영 건물은 서대문로의 확장공사와 관련하여 1915년 7월에 신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는 별도로 평동 쪽에는 1910년 이후 구세군학교를배치하여 이곳을 성경대학(Training Garrison)이라고 불렀으며, 1912년 8월에는 이 학교의 이름을 구세군사관학교(救世軍士官學校, Officer Training College)로 개칭하였다.1913년 11월 11일에는 전년에 세상을 떠난 '윌리엄 부스 대장 기념사업'의 하나로 당시의 테라우치 조선총독에게도 약간의 보조를 얻어 사관학교 건물이 신축되어 이날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28년에 이르러 정동 1-23번지에 건물을 신축하여 이곳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정동 안길에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재의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이곳은 2002년 3월 5일 이후 서울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상태인데,당초의 지정명칭은 '구세군본관'이었으나 가장 오랜 기간동안 이 건물의 공식적인 이름이 '구세군중앙회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2006년 2월 2일자로 지정명칭을 이것으로 수정하여 고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구세군사관학교의 건립은 당초에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대장의 아들이자 구세군 만국본영 제2대 사령관인 브람웰 부스 대장(General Bramwell Booth, 1856~1929)의 칠순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한국구세군 대표단은 기금모금을 위해 1925년 12월부터 6개월간에 걸쳐 캐나다와 미국 등지를 순회한 결과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졌고, 구세군사관학교도 이러한 기념행사의 하나로 모두 7만원의 건축비로써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세군중앙회관의 중앙현관 좌우벽에 부착되어 있는 대리석 돌판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새겨져 있다.
"차 건물(此 建物)은 주강생 일천구백이십육년(主降生 一千九百二十六年) 대장(大將) 뿌람왤 뿌드 씨(氏)의 만칠순 생신기념(滿七旬 生辰紀念)으로 재미국구세군사관병사급친우(在米國救世軍士官兵士及親友)의 의연금(義捐金)으로 건축(建築)한 바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며 여러 영혼(靈魂)의 구원(救援)을 위(爲)하야 봉헌(奉獻)함."
특히, 1926년에 칠순을 맞은 부스 대장은 그 해 연말에 몸소 우리 나라를 찾았다가 큰 환영을 받았으나, 때마침 불거진 '구세군 선교사 배척운동'에 휩싸여 끝내는 아주 곤혹스러운 마음으로조선에서 물러난 일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할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된 바 있다.
새로운 구세군사관학교의 건립부지로 선정된 곳은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소유였던 정동 1-23번지 (851평 5홉)였다. 이 땅은 옛 덕수궁 선원전 영역에 포함된 곳으로 원래 이왕직(李王職)의 것이었으나, 1915년 9월에 봉래정 4정목 237번지와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대정친목회에 넘겨진 것으로 확인된다. 1927년 5월 31일에 계약이 체결되어 정동 1-23번지는 구세군의 소유로 확보되었으며, 다만 경성방송국의 진입도로에 편입될 면적(36평)은 정동 1-36번지로 따로 떼어내어 넘겨주는 대신 반대편에 있는 정동 1-12번지(현재의 덕수초등학교)의 동일한 면적을 정동 1-35번로 분할하여 넘겨받는 정리과정이 뒤따랐다.
한편, <매일신보> 1927년 7월 20일자에는'구세군사관학교 교사신축내용충실, 새로 지을 터전도 샀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구세군사관학교 부지 매입사실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부내 정동(貞洞) 16번지 구세군사관학교(救世軍士官學校)는 건물과 모든 설비가 충분치 못하야 당사자들은 이를 개량하고자 노력하던 중 근일 동리 1번지에 토지 팔백평을 이만사천원에 사들이여 모든 설비를 일신케하야 굉장한 건축물을 건설하기에 착수하였다더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외일보> 1927년 8월 3일자에도 '구세군사관학교 정동에 신축, 육만원 들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동일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구세군 조선본부(救世軍 朝鮮本部)에서는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이번에 신축하기로 되어 시내 정동(貞洞) 26번지에 경비 육천원을 들여 근근 공사에 착수하리라더라."
여기에서는 엉뚱하게도 구세군사관학교가 '정동 16번지'에 있는 듯이 서술하거나 신축부지가 '정동 26번지'인 듯이 적어놓은 대목이 눈에 띈다. 얼핏 기사의 오류라고 여겨지지만, 이러한 지번이 어떻게 이러한 기사에 등장하고 있는지가 무척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구세군사관학교는 1927년 10월에 착공하여 1928년 9월 27일에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이 건물의 설계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으리라고 추측되고 있으며, 건물 전체는 벽돌조 세멘와즙의 2층 구조로 1층은 225평이고 2층은 108평이었는데, 당초의 계획보다는 다소간 줄어든 크기로 완공되었다.
이러한 구세군사관학교도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 시절을 비껴나지는 못하고 1942년 3월 6일에는 끝내 폐교조치가 내려졌다가, 해방이후 1947년 10월 15일에 되어서야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후 1959년 5월부터 11월에는 '50주년 기념회관'으로 증축공사를 벌였고, 곧이어 그 해 12월부터는 이곳을 '구세군중앙회관'이라고 불렀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철근콘크리트 방식을 적용한 이 당시의 증축공사로 인하여 구세군사관학교는 1층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좌측부와 우측부의 후면이 모두 2층으로 고쳐졌고, 이로써 108평이었던 2층 면적은 216평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천장을 높이 올림으로써 외관지붕도 크게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거쳐왔던 구세군사관학교는 다시 1985년 11월이 되자 그 동안 과천시 중앙동 83-2번지에 건설중이던 신축교사가 준공됨에 따라 그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1928년 이래 지속되어왔던 구세군사관학교의 정동 시절은 57년의 유구한 역사를 뒤로 하고마감이 되었다.
그런데 구세군하면 뭐니뭐니 해도 가장 퍼뜩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선냄비(자선남비, 慈善鍋, Charity Kettle)이다. 그렇다면 구세군의 대명사, '자선냄비'는 과연 언제 처음 이땅에 등장했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1928년 12월 22일자에 '구세군 자선남비'의 첫 등장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가 남아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부내 구세군에서는 추운 동절에 한파에 좇기는 가련한 빈한자에게 쌀과 의복을 주어 연연히 구제사업을 하여 오는 바 금년에도 ○○○의 구제사업을 할 자금을 얻기 위하여 21, 22, 24, 25, 29, 31일 6일간 예정으로 구세군 일동이 총출동하야 부내 각주요처에 자선과(남비)를 걸어놓고 널리 동정금을 모집하는 중인데 일반을 많은 동정을 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며 ...... (사진있음)"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에 자선냄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던 때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해마다 빠짐없이 구세군의 자선남비가 서울의 거리에 등장하여 세밑의 온정을 함께 나누도록 크게 일조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구세군대한본영, 1975)
- 김준철 편저, <허가두 생애와 사역> (구세군출판부,2007)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이덕주,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2002)
- 이현이, "구세군 중앙회관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3년 12월)
- 조마리아, "구세군", <가톨릭청년> 제5권 제2호 (1947년 5월) pp.52~55
- <대한매일신보>1908년 10월 18일자 (국문판), "[잡보] 구세대군출주"
- <황성신문> 1908년 10월 24일자, "구세군 포교"
-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9일자 (국문판), "구세교입참"
- <황성신문> 1908년 11월 18일자, "구세군영 이접"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자 (국문판), "구세군 흥왕"
- <대한매일신보> 1909년2월 4일자 (국문판), "[논설] 구세군"
- <대한민보> 1909년 10월 12일자, "구세군기념, 설립 1주년기념회"
- <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8일자 (국문판), "구세군영 낙성"
- <매일신보> 1912년 8월 23일자, "부-스대장 약력"
- <매일신보> 1912년 8월 29일자, "부스대장 추도회"
- <매일신보> 1913년 11월 8일자, "구세군사관학교"
- <매일신보> 1913년 11월 9일자, "구세군의 개교식"
- <매일신보> 1913년 11월 12일자, "구세군 개교식"
- <매일신보> 1918년 10월 11일자, "구세군의 10주년, 평동구석에 처음 기치를 세워, 십년 후의 금일에는 영문이 백여곳이다"
- <매일신보> 1918년 10월 15일자, "분전고투 십주년을 기념하는 대회"
- <매일신보> 1927년 7월 20일자, "구세군사관학교 교사신축내용충실, 새로 지을 터전도 샀다"
- <중외일보> 1927년 8월 3일자, "구세군사관학교 정동에 신축, 육만원 들여"
- <구세신문> 1928년 1월 1일자, "신축중에 있는 사관학교"
- <매일신보> 1928년 12월 22일자, "구세군의 자선남비, 가여운 이를 위하야 희사하라, 빈곤동포에 의식혜시"
- <매일신보> 1929년 6월 18일자, "구세군의 개조 푸대장 서거"
- <매일신보> 1929년 12월 22일자, "구세군 조선본영의 세말구제운동, 거리마다 자선과(남비)를 배치하야 일반의 동정을 청해"
- <매일신보> 1930년 12월 24일자, "경오세만경 (2)있는 이 희사 바라는 구세군자선남비, 뎅그렁 또 뎅그렁 요령소리는 없는 이의 기한성"
- <애일신보> 1935년 9월 8일자, "심전도장순례 (3) 우리들의 천직은 세상사람 영혼의 구제, 구세군사관학교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