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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공원

분류 : 학교건축
건축년도 : 1886년 9월 개교, 1891년 11월 박동으로 이전, 1894년 1월 폐지
소재지 : 서소문동 38번지 (39번지 포함)

상세설명

현재 서울시립박물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흔히대법원(大法院)이 있었던 곳으로 언급되거나, 더 나아가 일제 때는 경성법원(京城法院)이 있었던 자리 정도로 기억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있었고, 또 그에 앞서 독일영사관(獨逸領事館)이 있었고, 다시 그에 앞서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English School, Royal College)이 있었던 공간이었다.
육영공원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86년 9월에조선정부에서 직접 주관하여 설립한 신식교육기관이었다. 같은 해에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나 이화학당(梨花學堂)에 비해서는 약간 늦었고, 더구나 설립 이후 8년만에 폐지되어 존속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었지만, 초기의 서양식 교육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분명히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학교의 설립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이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귀국후 신식교육기관의 설치를 건의하고이에 조선의 국왕이 1884년 9월에 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 福德, 福特; 1826~1913)를 통해 영어교사(英語敎師) 1인과 소학교사(小學敎師) 3인을 선발하여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정식으로 발송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의 발생으로 주춤하였으나 학교설치의 방침은 확고하여, 이듬해 4월에 미국무장관으로부터 3인의 교사선정이 완료되었다는 통보를 계기로 교사초빙에 관한 제반교섭을 진행하여, 마침내 1886년 7월에 3명의 교사가 서울에 당도함과 더불어 관련규칙의 제정을 서둘러 1886년 9월 23일에 정식으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개설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에 초빙된 3인의 미국인 교사는 벙커(Dalzella A. Bunker, 房巨; 1853~1932), 길모어(George W. Gilmore, 吉模; 1858~1933),헐버트(Homer B. Hulbert, 訖法, 紇法, 轄甫; 1863~1949) 등이었는데, 모두가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이었다. 이 가운데 길모어는 1889년, 헐버트는 1894년에 각각 사임하였고, 벙커만은 이 학교의 폐교 때까지 교사직에서 그대로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다.벙커의 경우, 육영공원의 폐지 이후 1895년 7월부터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아펜젤러가 사망한 1902년 이후제2대 총리교사의 직책을 물려받기도 하였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을 나누어 학생을 선발하였는데, 좌원은 과거급제자, 출신(出身, 무과나 잡과에는합격하였으나 관직을 임명받지 못한 자를 말함), 참하관(參下官)중 연소한 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우원은 총명한 유학(幼學)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선발방식은 고위관리들에 의한 추천이었는데, 첫해에는 10일 동안 추천을 받아 좌원에 13명, 우원에 22명을 선발하였으며, 이듬해인 1887년에는 좌원 6명, 우원 14명을 선발하였고, 다시 1889년에는 좌원은 선발하지 않고 우원의 학생만 57면을 선발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발된 학생들은 대부분 고관의 자제이거나 이들의 추천을 받은 자였으며, 좌원의 학생들은 현직 관리이면서도 학교에 출석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새로운 인원선발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수업내용은 서구의 문물을 광범위하게 습득하는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외국어교육(특히영어의 습득)에 주안점이 놓여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육영공원의 책임자였던 민종묵(閔種默)은 '육영공원규칙서(育英公院規則序)'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한 바 있었다.
"육영공원을 설치항 서양교사를 맞이하고 총명한 자를 선발하되 모두 젋은 문무신사로 하였다. 그리하여 엉어문자를 가르쳐서 외국과 교섭하는 의식을 상세히 알고 통상할 때의 규칙을 분명히 알게 된 연후에 외국으로부터 기만을 당하거나 그들의 계책에 끌여다니는 꼴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근래 사대부들은 회합에 나가면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는데 어찌 그들 자신의 잘못이겠는가 외국어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영공원등록, 규장각 문서번호 3374]
그런데 육영공원에 앞서 이러한 외국어교육기관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1883년 9월에 세워진 동문학교(同文學校)라는 이름의 영어학교가 그것이었다.
흔히'동문학(同文學)'으로도 부르는 이 학교는 중국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따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협판 겸 총세무사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穆麟德; 1847~1901)의 주도하에 통상아문(외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재동(齋洞)에다 설치하였으며, 중국인 세관리(稅關吏)였던 당소위(唐紹威, 1860~1938)와 방판(幇辦)이었던 오중현(吳仲賢), 그리고 선원 출신의 영국인 핼리팩스(T. E. Halifax, 奚來百士)가 영어교습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는 해관업무와 관련된 상무(商務)를 익히고 이를 위한 영어의 교습이 우선시되었으며, 이 학교가 영어로 '핼리팩스 통역관학교(T. E. Halifax's School for Interpreters)'으로 표기된 것도 그러한 까닭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인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은 이곳 동문학 학생들과의 경험과 이들의 영어실력에 대한 목격담을이렇게 채록하고 있다. 그가 우리 나라를 처음 찾은 때는1883년 12월이었는데,당시의 풍경이 어떠했는지를 들여다 보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된다.
"...... 그 상인이 가격흥정에 실패하고 자신의 물건을 거둬 물러간 뒤, 또 다시 바깥에 인기척이 있었고 종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웃 학교에 있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봉창문을 통해 나를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폭넓게 교류하고자 하는 욕망의 유일한 물질적 표시로서 그 당시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의 설립이 있었고, 그때 이곳을 담당할 영국인 한 명을 일본에서 데려왔다. 학생들은 얼마 안 되는 것이라도 이미 학습한 것에 자부심이 뿌듯했고, 나에게서 원어민의 발음으로 아침인사를 듣고자 하는 것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자 자신들의 동료보다 훨씬 더 모험심이 강하거나 성적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들 중에 한 명이 몇 개의 단어들을 꿰맞춰 보려고 애를 썼고, 이내 숫기가 없는 친구 녀석들에 의해 즉석에서 지적이 뒤따랐는데, 이는 모든 문제에 무차별적으로 끼어들려는 청춘시절의 급작스런 만용으로 야기된 것이지만 그 같은 지적도 맞는 쪽보다는 틀릴 때가 더 많았다." [Percival Lowell,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Harvard University Press, 1885)]
이러한 동문학은짧은 기간에 영어실력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는 데에 나름의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나, 1886년 육영공원의 설립이 본격화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더구나 새로이 설립된 육영공원은 당상관의 추천을 받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졌으므로, 여기에 낄 수 없는보통신분의 영어교습생들은 때마침 설립된 아펠젤러의 '배재학당'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대대적인 정부의 지원 아래에 출범한 육영공원은 생각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좌원의 학생들은 공무의 일을 핑계로 결석하기 일쑤이고, 양반의 자제들인우원의 학생들도 신식교육에 적응하기는커녕 공부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학교의 운영을 담당했던 수문사당상(修文司堂上)조차도 이를 방관하는 처지에 이르렀던 탓이었다.
당시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길모어(George W. Gilmore, 吉模; 1858~1933)는 1892년에 저술한 자신의 책을 통해, 이때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작업은 동양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이 학교를 맡았던 관원들은 학원(學員)들의 나태한 경향을 눈감아 주었다. 꾸준하게 추진하려는 우리들의 생각은 조선사람들에게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듯이, 우리들의 학원들도 물론 공부를 해야 했다. 우리는 당연히 패기만만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전수해야할 것들을 그들이 철저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학교수업시간은 여섯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우리는 이 조치에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수업은 너무 어려웠고, 관직을 지닌 학원들은 전하의 호의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내 우리는 매번 동일한 학도들이 ‘궁중의 공무(公務)’를 핑계로 여러 날을 결석하고 있으며, 그저 하루 정도의 일이 아니라 석 달이나 빠진다면 그 어떠한 학도라 할지라도 성적이 엉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학교의 책임자와 부책임자는 괜찮은 편이지만, 좋은 게 좋다는 동료들은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고, 그들을 우리들의 불평에 변명을 대기에 급급했다. 마침내 극소수의 관리, 즉 공직을 지닌 학원들만이 출석했다. 그들은 건성건성으로 영어를 알고 있었기에 간신히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 없이도 일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므로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도 나태하였던 것이다." [George W. Gilmore, 〈Korea from its Capital : with a Chapter on Mission〉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 School Work, 1892)]
길모어 자신이 몇해를 넘기지 못하고 1889년에 육영공원의 교사직에서 사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길모어는 1888년 6월에 자식의 병을 핑계로 사임을 청하였다가 이듬해에 사임이 허용되고 귀국하였으며, 그의 자리는 장로교 선교사인 기포드(Daniel L. Gifford, 奇普; 1861~1900)가 물려 받았다가 그 역시 수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육영공원에서물러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 <고종실록> 1889년 1월 13일자에도 당시의 형편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교하기를, '육영 공원(育英公院)을 설치한 데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좌원(左院)인 경우에는 모두 자기 직책에 매여서 날마다 원(院)에 나가는 데 장애가 없지 않으니, 이제부터 좌원 소속인 경우에는 자기 집에서 공부하게 하고 매 3일마다 한 번씩 원에 나가서 강론하게 할 것이며, 우원(右院) 소속인 경우에는 종전대로 원에 나가 있게 하라. 그러나 계속 학원(學員)을 선발하여 어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넓히지 않을 수 없으니 내외아문(衙門) 관청의 당상(堂上)과 낭청(廳)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로서 나이가 20세 미만이고 총명하고 우수한 사람을 각각 1인(人)씩 추천하여 이달 20일 안으로 명단을 만들어 들여오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두 심력을 다하여 마음먹고 학업을 마치도록 독려하게 하며 매번 네 절기의 마지막 달에 학업 성적과 근태 상황을 해당 원의 당상이 교사(敎師)와 함께 등급을 나누어 적어 들여와 상과 벌을 명백히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곧이어 <고종실록> 3월 20일자 기사에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또 하교하기를, '요즘 듣건대 육영공원(育英公院)의 학도들이 까닭 없이 병을 핑계 대고 공부를 성실히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교사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이제부터 좌원(左院)에서는 하루 건너 원에 나가고, 우원(右院)에서는 날마다 성실히 공부하여 실지 성과가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칙한 후에 다시 종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그의 부형은 엄하게 감처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부형이 없으면 천주(薦主)를 경고할 것이며, 해당 당상도 신칙하지 않은 잘못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 육영공원 학생들 가운데 부지런히 학업에 애쓰지 않은 자가 부지기수였다는 얘기가 애석하게도 사실이었음을증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육영공원은 신식교육을 받은 다수의 신진관료를 배출하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94년에 이르러 끝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때마침 1894년 2월에 영국인 허치슨(W. du F. Hutchison, 轄治臣; ~1901)이 벙커의 후임으로 육영공원을 인계받게 되면서 학교의 이름도 영어학교(English Language School)로 변경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나오는 허치슨은 전년도인 1893년 3월 이후 강화도에 설치된 해군무관학교(海軍武官學橋)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인물이었다.
여기에다 예전에 동문학(同文學)에서 3년 가량 영어를 교습했던 핼리팩스도 다시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후1895년 5월 12일자 칙령 제88호 외국어학교관제(外國語學校官制)에 근거하여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로 전환된 사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당시 이 학교는 1895년말까지 기존의 육영공원이 쓰던 자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가 이곳이 임시경찰청사로 변함에 따라 부득이 육조거리의 농상공부 뒤편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력을 지닌 육영공원 위치의 변천사는 과연 어떠했을까
앞에서 이미말했다시피육영공원은 지금의서울시립미술관이 서 있는 '서소문동 38번지'에 터를 잡았으니, 이것은 곧 육영공원의 '첫' 자리가 된다.하지만 이곳에서 육영공원은 4~5년 가량밖에 머물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영공원이 정동 지역에 터를 잡을 무렵, 지금의 중앙우체국 뒤편에 해당하는 낙동의 비좁은 가옥에 있던 독일영사관은 예전의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박동(洞)의 저택(지금의 수송동 82번지 수송공원 일대로 추정)으로 새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가 바로1886년 11월이었다. 이곳은원래 선혜청 당상관(宣惠廳 堂上官) 민겸호(閔謙鎬)의 집이었으나 묄렌도르프에게 하사되어 그가 1885년 12월에 중국으로 소환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 독일영사관은 조선정부와 교섭할 때에 조선정부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내어준다는 조건하에 옛 묄렌도르프의 집을 2년 임대기간으로 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공관을 옮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박동 시절의 독일영사관은 생각보다 아주 오래 지속되질 못하였다. 1889년 5월 무렵 독일의세창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 &Co.)은 "독일영사관이 사용하는 부지는 과거 묄렌도르프가 조선을 떠날 때에 자기네에게 매각하여 관리해 왔던 것이므로 세창양행의 소유"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양국간의 의견충돌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1889년 9월 3일에는 독일영사가 이 문제의 땅을 육영공원(育英公院) 자리와 교환하기를 원한다는 조회를 발송하여 그 처리를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이에 대한 해답은 즉각 주어지지 않았으나 1891년 1월 25일에 이르러 "원래 묄렌도르프의 것이라고 주장되던 양옥(洋屋)은 그의 것이 맞으나 그 집터는조선정부의 소유"라고 최종확인됨으로써 소유권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이 육영공원 자리로 교환하여 옮겨가는 일은 그대로 성사되어 독일영사관은 마침내 정동 권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영사관과 육영공원이 자리를 맞바꾼 시기에 대해서는기록이 엇갈린다. 이 점에 관하여 <경성부사> 제2권 (81쪽)에서는 '1889년 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이중화의 <경성기략> (권4, 124쪽)에서는 '1890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호레이스 알렌의 <외교사연표>에도 '1890년'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인들 사실관계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한독수교100년사> (1983)에 정리된 자료에 "정부에서 독일영사서리에게 독일공관과 육영공원 교환에 관한 파원(派員)을 면상(面商)하도록 통보한 것이1891년 11월 1일"이라는 설명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이 기록을 취하는 것이 제일 합당할 듯하다.
이리하여 정동에 있던 육영공원은 독일영사관 측에 그 부지를 넘겨주면서 박동(지금의 수송동 82번지 일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곳마저도 육영공원은 1895년말에 그 존재가 흐지부지되면서 경무청(警務廳)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1896년 5월에는 수하동에 있던 법어학교와 아어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한동안 이곳은 '법어학교'로 사람들의 머리게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박동의 법어학교는 그 후 1907년 3월에 이르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 1911년에 폐지되었고 재학생들은 모두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되는 형태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 어느 곳ㅡ 서소문동 38번지 또는 수송동 82번지 ㅡ 에도 '표지석' 하나 변변하게 남기지 못하였을 만큼 육영공원은 그 존재마저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지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육영공원 그 자체의 말로가 지극히 '흐지부지'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자료목록]
- Daniel Lyman Gifford, "Education in the Capital of Korea, Part. I", (July 1896) pp.281~287
- Daniel Lyman Gifford, "Education in the Capital of Korea, Part. II", (August 1896) pp.304~311
- (Oct. 1898), "[Editorial Department] Our School" pp.388~392
- Percival Lowell, (Harvard University Press, 1885)
- 퍼시벌 로웰, 조경철,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 (예담, 2001)
- George W. Gilmore,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 School Work, 1892)
- G. W. 길모어·신복룡, <서울풍물지> (집문당, 1999)
- 까를로 로제티, 서울학연구소,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편, <(융희 3년 3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일람> (관립한성외국어학교, 1909)
-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회고]
- 유자후, <이준선생전> (동방문화사, 1947)
- 이광린, "육영공원의 설치와 그 변천에 대하여", <동방학지> 제6집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1963) pp.101~129
- 이광린, "구한말의 관립 외국어학교에 대하여", <향토서울> 제20호, (1964) pp.5~34
- 이현종, "구한말 외국인 고빙고", <한국사연구>제8집 (1972) pp.113~148
- 유방란, "육영공원 소고", <교육사학연구> 제4집 (1992년 8월) pp.121~136
- Gregory Henderson, "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Vol. 35 (1959)pp.1~31
- <독립신문> 1896.5.9일자, "박동 그전 육영공원에서 경무공부하던 ......"
- <독립신문> 1896.5.12일자, "무너리골 도화서에 있던 법어학교와 아어학교가 ... 박동 그전 육영공원 ......"
- <독립신문> 1896년 6월 25일자, "[논설] 육영공원 교원 세분과 학도 구십팔명이 학부대신에게 한 편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