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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사

건축년도 : 1896년 4월 7일 창간, 1899년 12월 4일종간
소재지 : 서소문동 38번지 (추정)

상세설명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 날을 신문의 날로 제정한 것은 지난 1957년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을 기리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갑신정변 때의 망명객이었던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1864~1951)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은 민간신문의 효시를 이루는 동시에 최초의 한글전용 일간지이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4개면 가운데 3개면은 국문으로, 제4면은 라는 제호의 영문판을 격일간으로 발행하는 편제였다.이후 1897년 1월 5일부터는 영문판을분리하여 각기 4면씩 국문판과 영문판을 따로발행하였으나, 1898년 7월 1일 부터는 국문판을 일간으로 전환하였고 영문판은 그대로 격일간의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영문판은 1898년 1월 29일자를 마지막으로한동안 휴간에 들어갔다가 5개월이 지난 이듬해 1899년 6월 8일자로 주간으로 전환하여 속간호를 발행한 내력을 지녔다.
독립신문을 창간한서재필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지난 1994년 4월에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이에 앞서 1990년 4월 7일에는 서대문 독립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화려한 제막식이 거행된 바도 있었다.
그는 당초갑신정년의 여파로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귀화한 미국인 신분으로 청일전쟁이 종결된 1895년 12월 26일에 서울로 되돌아와1896년 1년 13일자로 내각과의 약정서 체결을 통해 중추원 고문관의 직위를 취득하였는데,이후로는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한편 독립신문의 창간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집권세력과의 알력으로 1898년 5월 14일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해방이 되자 1947년 7월 1일에 귀국하여 국내에 체류한 적이 있으며,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11일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51년 1월 3일 미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서재필이느닷없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된 직후 1898년 5월 12일부터 독립신문은 윤치오(尹致昊, 1865~1945)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후 1899년 1월경에는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가 편집권을 넘겨 받았고, 다시 1899년 6월 1일에는 마지막으로 영국 사람 엠벌리(W. H. Emberley, 音法里)가 독립신문의 사장에 취임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자를 끝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관련시설일체가 인수되면서 폐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내력을 지닌 독립신문사가 자리했던 곳은 바로 정동(貞洞)이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독닙신문이 본국과 외국사정을 자세히 기록할 터이요 정부속과 민간 소문을 다 보고 할 터이라. 정치상 일과 농사, 장사, 의술상 일을 얼만큼씩이 신문상 매일 기록함. 값은 일년에 일원 삼삽전, 한달에 십이전, 한장에 동정 한푼, 독닙신문 분국이 제물포, 원산, 부산, 파주, 송도, 평양, 수원, 강화 등지에 있더라. 신문을 달로 정하든지 일년간으로 정하여 사보고픈 이는 정동 독닙신문사로 와서 돈을 미리 내고 성명과 집이 어디라고 적어놓고 가면 하루 걸러 신문을 보내줄 터이니 ......"
이것은 <독립신문> 창간호 제1면 상단에 수록된 '광고'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독립신문사가 '정동'에 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동에 있는 독립신문사의 위치가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던 탓인지, 이것말고는 더 이상의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하다못해 어디어디 옆이라거나, 어디어디 부근이라거나 하는 따위의 '사소한' 안내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독립신문사의 위치는 각자의 짐작대로, 또는 단편적인 기록에만 의지하여 그 위치가 추론되고 실정이다.
가령, 지난 1985년 10월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에서 '정동 34-5번지' 구역내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에다 "독립신문사터(獨立新聞社址)" 표석이 설치된 바 있었다. 이 자리가 선정된 사유는 그나마 추론 가능한 위치가 '배재학당 근처'라는 사실 뿐이고 초창기의 인쇄지가배재학당 안에 있던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he Trilingual Press, 미이미활판소, 美以美活版所)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에 반해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교 교수를 지낸 오인환 선생은 지난 2002년에 <신문과 방송> 통권 382호 (2002년 10월호)에 기고한 "신아빌딩 바른쪽 앞으로 추정, 독립신문사 있던 곳 여기 아닐까"라는 글을 통해 독립신문사가 정동교회의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 대지의 '바른쪽의 앞쪽' 부분 일부와 그 앞의 도로 일부에 걸쳐 포진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러한 논지는 해방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과 정무참사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이 1959년 '로얄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한국지부 회지' 제35권에 기고한 "정동지역과 미국대사관저의 역사"라는 글에 근거를 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21쪽) 구내에 있는 현 대사관의 게스트하우스는 1884년과 1948년 사이에 미국공사관 혹은 미국총영사관이었다. 이곳 출입구건너편에 법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옆에서는필립 제이슨 박사가 그의 유명한 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오인환 교수는헨더슨이 채록한 이 내용과 더불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서소문동 39-1번지'로 표시된 신아빌딩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곳이지금의 지번으로는 서소문동에 속하지만, 이는 단순히 1914년에 일제의 의한 정동구역개편에 따른 것으로 그 이전에는 의당 '정동' 권역에 포함된 곳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육영공원이 1891년 떠난 뒤 그 부지의 일부에 독일공사관이 옮겨와 1902년까지 있었는데 ...... 그 나머지 터는 그대로 정부소유로 남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독립신문이 발간준비를 하고 있던 1896년 봄 현재 그 터에 있던 집을 가운데 빈집이 하나 있어서, 서재필 초대사장이 밝힌 대로 그 빈집을 전부가 독립신문사옥으로 쓰게 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증은 어느 정도로 믿을만한 것일까 그리고 그레고리 헨더슨의 글 말고는 독립신문사의 위치를 찾아낼 만한 근거자료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선 독립신문사가 정동에 있던 정부 소유의 '어떤' 가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 1899년 7월 15일자에는 '궁내부에서 환수하고자 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 건물의 반환문제에 대해 논란이 된 사실이 드러난다.
"4년 전에 미국인 졔손씨가 우리 신문을 영문과 국문으로 시작할 때에 대황제 폐하께서 본사 사무소를 사급하시와 우리가 지금까지 성은을 감축하옵더니 재작일에 대한 궁내부에서 본사에 보낸 편지를 받아본즉 하였으되 경계자는 귀사 방옥이 본부에 속한 것인데 귀사에 빌려준 지 여러 해 된 사실은 귀사장도 알려니와 본부에서 그 집을 긴히 쓸 데가 있사오니 종속히 반이 하라 하였기에 우리가 회답하기를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것이 없으니 이 일에 더 알아 볼 일이 있거든 미국과 영국 두 공관에 말하라고 하였으나 본사 사무소는 대황제 폐하께서 사급하옵신 방옥인줄을 궁내부 관인들이 몰랐는지 이 편지 사연인즉 궁내부 참서관이 한 편지요 ......"
물론 아쉽게도 이 기사에조차 그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찾고보면, 독립신문사의 위치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몇 가지 기록에는 독립신문사의 위치와 관련된 짤막한 언급들이 들어 있다.
첫째, <독립신문> 1897년 3월 4일자에 수록된 '대군주 폐하의 경운궁 환궁' 관련기사가 주목된다.
"이월 이십일 오정 일각 대군주 폐하께서와 왕태자 전하께서 아라사공사관을 떠나셔서 경운궁으로 환어하시는데 아관에서 경운궁까지 가는 길에 길 좌우로 친위대병정들과 순검들이 늘어서고 혹간 옛적 의장들이 섞여 어가를 호위하고 가더라. 배재학당 학도들이독립신문사 건너편에 정제하게 서서 어가 지나실 때에 갓들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학도 셋이 좋은 꽃들을 가지고 어가 지나시는 길에 뿌려 학도들의 애군하는 마음과 나라가 꽃같이 향내나고 보기좋게 되기를 바라는 뜻을 보이더라 ......"
둘째, <제국신문> 1900년 3월 10일자에도 독립신문사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한다.
"정동 독립신문사 아래집 덕국영사관을 정부에서 오만 오천원을과 또 남촌 상동근처 토지 얼마를 주고 샀다더라."
여기에서는 '아래집'이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이는 곧 독립신문사가 독일영사관의 위쪽에 위치하였거나 지대가 더높은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따라 독일영사관의 위치가 어디냐를 가리는 것은 독립신문사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영사관의 영역에 대해서는 일일이 고증하기가 어렵지만, 지금의 서소문동 38번지 및 39번지에 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선 언덕 일대와 그 아래쪽에 붙어있는 신아빌딩이 모두 포함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독립신문> 1897년 4월 13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정동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히고 고칠 터인데 이 길 좌우쪽 땅은 미국 미미교회와 덕국영사관 땅이라" 하였으므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으로 이어지는 서소문길의 건너편이 모두 독일영사관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독립신문사의 위치확인과 관련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의미있는 증언은 바로 '윤치호'의 것이다. 윤치호는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 이어 1898년 5월 12일 이후 독립신문의 편집과 운영을 책임졌던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윤치호일기> 1898년 11월 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찮게도 이 날은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내린 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6시에 궁궐 문지기 하나가 사무소로 와서는 폐하께서 당장 나를 보시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어두어지고, 나홀로 궁중에 들어간다는 것이 안전치 못하다는 것을 느겼지만, 폐하의 호출에 복종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궁궐에 들었고, 내관들의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황국협회(皇國協會) 회장인 이기동이 들어와 있었다. '밀담꾼' 김명제도 있었다. 밤 9시 무렵에 알현이 있었다. 폐하께서는 독립협회에서 선출될 추밀고문관들을 어떻게, 언제 뽑을 거냐고 하문하셨다. 나는 내일 투표로서 뽑을 예정이라고 알려드렸다. 여느 때에 하시듯이, 여러 방식으로 동일한 질문을 거듭하셨다. 그러시더니 내가 어디서 잤느냐고 하문하셨다. 나는 때로는 정동에서 거처하며 때로는 집에서 거처한다고 대답하였다. 폐하는 내가 독립신문 사무소에서도 가끔 자는지 하문하셨다. "그렇습니다"라는 내 말에 폐하께서는 온후하게도 이 사무소가 독일의 자산인지 우리 것인지를 물으셨다. 나는이 사무소가 독일영사관 건물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한국소유의 가옥이라는 대답을 올렸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실수를 했는데, 이 사무소는 미국소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단한 몇가지 질문을 하시고는 폐하께서는 나를 물리치셨다. 내각사무실에서 조병식 대감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밤 10시가 되어서야 나는 집에 당도하였다. ......"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독립신문사가 독일영사관이 자리했던 '서소문 38번지(39번지)' 구역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건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독립신문사 아래집 독일영사관'이라는 구절이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독립신문사는 지금의 신아빌딩 혹은 정동길 교차로의 도로면에 접한 곳이라기 보다는 이보다 약간 높은 자리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커보인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ㅡ 이것 역시 아직은 추정에 지나지 않겠지만 ㅡ 신아빌딩의 뒤편쪽이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가지 덧붙여 둔다면,<제국신문> 1900년 11월 3일자에는 "[잡보] 평양진위대 일중대를 이전 독립신문사로 이설하였다더라"고 하여 독립신문사 사옥의 처리와 관련된 보도가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독립신문사에 관한 가장 늦은 시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그 위치가 오리무중에 갖혀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 <윤치호일기> 5권, 1898년 11월 4일자, "...... in the Independent office ......"
- 정진석,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 <언론과 사회> 1994년 가을호 통권 제5호 (1994년 9월) pp.5~28
-정봉근, "정동 배재학당 근처 정부소유건물에서 : 독립신문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문과 방송> 통권 304호 (1996년 4월호) pp.34~39
- 오인환, "신아빌딩 바른쪽 앞으로 추정, 독립신문사 있던 곳 여기 아닐까", <신문과 방송> 통권 382호 (2002년 10월호) pp.85-94
- 장규식,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각 ⑥ :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독립신문사터", <프레시안> 2003년 9월 27일자
- 안종묵, "언론인 아펜젤러 연구 : 그의 문서 선교활동", <동서언로> 제16호 (2003년 12월)pp.61~88
- 채백, <독립신문 연구> (한나래, 2006)
- Gregory Henderson, "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Vol. 35 (1959)pp.1~31
- <독립신문> 1897년 3월 4일자, "이월 이십일 오정 일각 대군주 폐하께서와 경운궁으로 환어 ...... 배재학당 학도들이독립신문사 건너편에 ......"
- <독립신문> 1899년 7월 15일자, "궁내부에 환수하고자 함"
- 1899/07/20, "The Independent's Property"
- <제국신문> 1899년 12월 28일자, "[잡보] 독립신문이 지금은 우리 나라 사람의 소유가 되었는 고로 ......"
- <제국신문> 1900년 1월 17일자, "독립신문사 기자 노릇할 사람 영국이 오시씨가 ...... 정동 이왕 독립신문사 집은 ......"
- <제국신문> 1900년 3월 10일자, "정동 독립신문사 아래집 덕국영사관을 정부에서 ......"
- <제국신문> 1900년 11월 3일자, "[잡보] 평양진위대 일중대를 이전 독립신문사로 이설하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