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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현

분류 : 궁중건축
건축년도 : 1899년 이전 준공, 철거시기는 불분명(단, 1907년까지는 존속 확인)
소재지 : 정동 3-1번지 (정동 5번지)

상세설명

근대시기를 거치는 동안 궁궐 안에 건립된 온갖 서양식 건축물치고 그 건립내력이나 건축시기 등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되는 경우가 좀 드문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경운궁 안에 존재했던 '구성헌(九成軒)'의 사례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런 탓인지 언제, 누가, 무슨 연유로 이 건물을 만들었는지 하는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정확하게 언제까지 이 건물이 존재했는지를 분명하게 규명해놓은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다가 눈에 띄는 사진자료라고 하는 것들도, 숫제 먼 거리에서 담아낸 모습만 남아 있을 뿐 세부구조를 짐작할 만한 정도의 것은 전혀 남아 있지도 못하다. 다만 현존하는 사진자료와 덕수궁 관련 배치도에 따라, 구성헌의 규모는 전면 약 10.6미터, 측면 약 9.7미터, 건평이 35평 정도인 소규모 2층 건물로, 남쪽으로 배치된 건물의 상하층에는 모두 아케이드로 한 발코니가 있으며, 벽돌건물에 회칠을 하고 지붕은 함석으로 얹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 때문인지 덕수궁과 관련된 역사자료를 집대성한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1871~1954)의 <덕수궁사(德壽宮史)> (이왕직, 1938)에도 '구성헌'의 내력에 관해서는 고작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구성헌] 준명전(浚明殿)의 서북에 자리하고, 본궁내 서양식 건물의 하나였다. 광무 8년(명치 37년, 1904년) 2월 일한협정서(日韓協定書)에 따라 일한양국의 맹약이 새로이 체결되어, 명치천황은 한국황실에 대해 심후한 어위문(御慰問)을 이르고자 후작 이토 히루부미(侯爵 伊藤博文)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였는데, 동 대사일행은 3월 17일 경성에 들어왔다. 때마침 황제는 명헌태후(明憲太后, 헌종계비 홍씨)의 상중(喪中)에 있었으므로, 대사를 본헌(本軒)에서 접견하고 또 오찬을 베풀었다. 기타 황제가 외국사신을 본헌에서 접견한 것은 여러차례이다. 본헌(本軒)의 부지(敷地)는 최근 석조전 건설할 때에 그 부지내에 들어가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건물이 언제 만들어졌으며, 언제 철거되었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리고 <고종실록>에도 구성헌에 관해서는 아주 드물게 그 흔적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고종실록>을 통틀어 구성헌과 관계된 기사는 단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먼저 <고종실록> 1899년 11월 14일자에 "일본공사(日本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巴禹路厚, Pavlow)를 구성헌(九成軒)에서 접견(接見)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다시 <고종실록> 1904년 4월 14일자에 당시의 경운궁 대화재사건과 관련하여 "...... 병신년(1896)에 이어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즉조당(卽堂)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몽땅 불탔지만 가정당(嘉靖堂), 돈덕전(惇德殿), 구성헌(九成軒)이 아직 온전하게 있는 만큼 그때에 비하면 도리어 낫다. 즉조당으로 말하면 몇 백 년 동안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서까래 하나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는데, 몽땅 타 버렸으니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는 황제의 언급이 인용된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 이 기록을 통해 구성헌이 적어도 1899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음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구성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말 밝혀낼 수 없는 것일까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가 발행을 담당했던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1904년 4월호에 수록된 "경운궁 화재사건(The Burning of the Palace)" 관련 약도에는 이에 관한 한 가지 단서가 남아 있다. 여기에 첨부된 설명문 가운데 "6. New Unfinished Palace [새로 짓는 미완성 궁전; '공사중인 석조전(石造殿)']"과 "10. Former Custom House [전 해관(前 海關)]이라는 표시가 눈에 띈다. 특히 10번은 석조전의 바로 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성헌' 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설명이 맞다면, 구성헌은 곧 이웃하는 돈덕전(惇德殿)의 경우처럼 애당초 '해관(海關)' 용도로 지어졌다가 경운궁 영내로 편입된 것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애당초 궁궐의 건물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소규모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총세무사 브라운이 장악했던 해관 구역과도 아주 인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혹여 브라운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곳이 아닌가도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로서는'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전 해관'이라는 표시는 구성헌의 연원을 밝혀줄 중요한 단서이니만큼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자료확인이 더 뒤따라야 할 줄로 믿는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옛 '구성헌'의 편액(유물번호#466, 42X107cm)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데, 글씨는 송나라의 문장가 동파 소식(東坡 蘇軾)의 것을 집자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구성헌'이라고 할 때 '구성(九成)'은 "소소(簫韶)의 음악 아홉곡을 연주하니 봉황새가 와서 춤을 춘다(簫韶九成 鳳凰來儀)"는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에서 따온 말이라고 알려진다.

그런데 구성헌과 관련하여 종종 빚어지는 오해가 하나 있다. 구성헌이 마치 석조전의 영역에 그대로 중첩되어, 그 바람에 석조전의 착공과 더불어 건물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여 구성헌과 석조전은 전혀 건물이 중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석조전이 거의 완공될 무렵까지도 분명히 그 실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료를 통해서 석조전과는 무관하게 구성헌의 잔존여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히노테상행(日之出商行)이 발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朝鮮風俗風景寫眞帖)> (1914)에 수록된 덕수궁 일대의 사진자료가 그것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두겹으로 배치된 궁장 바로 뒤편으로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中和殿)의 지붕이 보이고, 그 너머로 완공을 앞둔 석조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석조전의 동편 기둥 사이로 자세히 보면, 으레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구성헌의 전면 오른쪽 일부가 살짝 드러나 있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석조전 바로 뒤편의 영국공사관 제2호관과 다소 혼동될 우려가 있지만, 기둥 사이로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구성헌의 일부이다. 이것으로 보면, 구성헌과 석조전은 각각 별개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것도 석조전의 외형이 거의 갖추어질 무렵까지도 구성헌은 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대한제국 관보> 1907년 9월 30일자 (호외)에 게재된 '[궁정록사(宮廷錄事)] 궁내부달(宮內府達) 제9호(第九號)'의 내용이 구성헌에 관한 또 다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황태자의 순람행로를 다음과 같이 공표하고 있다.

"황태자 전하(皇太子 殿下)께옵서 10월 1일 상오 11시 30분에 구성헌(九成軒)에서 출어(出御)하사 고등학교(高等學校)와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어순람(御巡覽)하옵시고 동일 하오 4시 30분에 환어(還御)하옵실 지(旨)를 봉승(奉承)하온 바 도로(道路)는 여좌(如左)함이라.
구성헌 정문(九成軒 正門) 평성문 전로(平成門 前路) 운교 하로(雲橋 下路) 대한문 전로(大漢門 前路) 포덕문 전로(布德門 前路)를 과(過)하사 신교(新橋) 황토현(黃土峴) 혜정교(惠政橋) 종로(鍾路) 철교(鐵橋) 사동(寺洞) 안동별궁 전로(安洞別宮 前路)로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임어(臨御)하시고, 고등학교(高等學校)에서 별궁 전로(別宮 前路)로 안동(安洞) 재동 사가(齋洞 四街) 관현(觀峴) 원동(苑洞)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임어(臨御)하시고,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원동(苑洞)으로 관현(觀峴) 재동 사가(齋洞 四街) 안동(安洞) 사동(寺洞) 철교(鐵橋) 종로(鍾路) 혜정교(惠政橋) 황토현(黃土峴) 신교(新橋) 포덕문 전로(布德門 前路) 대한문 전로(大漢門 前路) 운교 하로(雲橋 下路) 평성문 전로(平成門 前路)로 구성헌(九成軒)에 환어(還御)하심이라.
융희 원년(隆熙 元年) 9월 28일, 궁내부대신 훈일등 이윤용(宮內府大臣 勳一等 李允用)"

여길 보면, "황태자전하께옵서 ...... 구성헌에서 출어하사 ...... 구성헌에 환어하심이라"는 구절이 분명히 들어 있다. 1907년 9월이면 석조전의 외형은 사실상 거의 완공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구성헌은 황태자의 공간으로 엄연히 사용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렇듯 구성헌과 석조전은 전혀 별개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이 완전히 중첩되었다고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헌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가능한 듯하다. 우선은 두 곳이 너무 인접한 탓인지 결국 구성헌은 석조전의 그늘에 가려져 철거가 결정되었지 않나 여겨진다. 그리고 구성헌 자체가 너무 협소한 공간이었다는 점도 철거결정을 재촉한 요인이 되었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전면에 웅장하고 화려한 석조전이 속속 준공을 앞둔 마당에 비록 아담하기는 하나 구성헌과 같은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공간에 얽매일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구성헌의 최후가 언제였는지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자료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대로 채록만 되었다면, 근대 시기 경운궁 안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남을 뻔 했던 작은 건물 하나는 망국의 뒤안길에서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던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略史", <朝鮮> 1934年 11月號, pp.39~103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윤일주교수논문집편찬회,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고궁현판전 (1994.6.14~6.30) 전시도록,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예술의 전당, 1994)
- 문화재청, <궁중현판> (1999)
- 윤일주, "경운궁(덕수궁)의 양관건축에 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제6집 91965년 12월, pp.151~157
- 김순일, "경운궁의 영건에 관한 연구 ; 공사의 체제와 집행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년 6월)
- 한영우, "1904~1906년 경운궁 중건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한국학보> 제108집 (2002년 가을호) pp.2~30
- (April 1904), "The Burning of the Palace"
- <대한제국관보> 1907년 9월 30일자(호외), "[궁정록사] 궁내부달 제9호 황태자전하께옵서 구성헌에서 출어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