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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현

분류 : 궁중건축
건축년도 : 1900년 이전 준공
소재지 : 정동 3-1번지 (정동 5번지),

상세설명

"...... 그런 중에서 옛날 시절에 외국사절(外國使節)을 인견하옵시고 연회를 베푸시던 돈덕전(敦德殿, 惇德殿의 잘못)은 전일에 보던 광채는 하나도 없고 떨어진 잎새와 무성한 봄풀에 첩첩히 싸이어 보이는 족족 무슨 눈물과 한숨을 금할 수 없는 가운데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옛날 시절에 영국에 유명한 효장(驍將) '키치 원수'를 인견하시고 창해력사가 박랑사중에서 쓰던 팔십근 철퇴를 들이어 남의 나라의 장군에게 적당하신 대접을 하시던 곳임을 이제 다시금 추억하게 되었다. 그리하고 함녕전(咸寧殿) 후원에 양식으로 건축한 정관헌(靜觀軒)이 있으니 이곳은 전일에 왕세자 전하께서 '애기'로 계실 때 이태왕 전하께옵서 옥교타시고 이곳에 듭시어 사랑하시는 '애기'와 함께 여름날의 더위를 잊어버리시던 곳인데 이곳이야말로 더욱 황량하여 앞뒤에 우거진 잡초는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경색을 보이며 구리로 만들어 수림 사이에 세워놓은 학두루미는 사랑하는 주인이 없어서 모두 땅에 파묻히게 된 것도 보기가 과연 안되었고 시절따라 제 가치를 발하는 목단화(牧丹花)가 화중왕(花中王)이라는 것을 자랑할 곳이 없다가 배관하는 사람을 보고 기쁜 추파를 보내는 듯한 경색도 적지 않은 이상스런 감상이 일어나며 "아ㅡ 너의 탐스럽고 찬란한 채를 이곳에 깊이 숨기어 너의 얼굴을 자랑할 곳이 바이 없구나" 하면서 따듯한 '키ㅡ쓰'를 아끼지 않았다."

이상은 <매일신보> 1920년 5월 15일자에 수록된 "자규(子規)야 우지마라, 주인(主人) 잃은 덕수궁(德壽宮), '백량동작생황진(栢梁銅雀生黃塵)'이 옛 이야기가 아니러구나"라는 제하 기사의 한 부분으로, 고종의 승하 이후 더욱 황량해진 덕수궁 일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정관헌 앞에 "구리로 만들어 수림 사이에 학두루미를 세워 놓았다"는 대목은 다소 생소하기는 하나, 자못 흥미로운 증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듯이 궁궐 안에 드물게 남아 있는 서양식 건축물 정관헌(靜觀軒)은 피서공간 쯤으로 묘사되어 있다. 흔히 정관헌이라고 하면 손탁호텔의 미스 손탁이 드나들던 일종의 커피숍 역할을 했다는 식의 뜬금없는 얘기가 떠도는 것도 필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일인 듯하다.

지난 2004년 2월 6일자로 '문화재청 고시 제2005-6호'를 통해 덕수궁 정관헌이 등록문화재 제82호로 고시되었을 때, 함께 내세워진 '등록사유' 역시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문화재등록 제82호, 등록사유]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은 대한제국시절 고종황제가 다과 등 휴게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회랑 건축물(1900년)로 궁에 위치한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헌은 다양한 건축양식과 건축재료로 지어진 건축물로 궁궐에 서양 신문화의 이입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정관헌은 언제 건립되었으며, 휴게시설의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일까

우선 정관헌에 관한 것으로 그 시기가 가장 빠른 기록은 <고종실록> 1901년 2월 5일자에 등장하는 기사이다. 여기에는 전년도인 1900년 10월에 발생한 경운궁 선원전(璿源殿) 화재사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어진을 모사하는 일에 관한 의론을 담고 있다.

"...... "선원전(璿源殿)을 영성문(永成門) 안에 중건(重建)하는 일과 관련하여 이미 주하(奏下)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터를 살펴보건대 자연히 흥덕전(興德殿)과 매우 가까워 자칫하면 헐리게 될 것이니 임시로 봉안할 곳을 품지(稟旨)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준원전본(濬源殿本) 영정은 임시로 정관헌(靜觀軒)에 봉안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진전본(眞殿本) 영정은 임시로 중화전(中和殿)에 봉안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아직 전봉(展奉)도 못한 데다 제사도 올리지 못하였으니 이 점이 송구스럽다" 하였다. (하략)"

이러한 기록으로 미뤄보아 정관헌은 적어도 1900년 이전에 이미 완공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정관헌을 일컬어 한때 '경운당(慶運堂)'이라고도 불렀다는 얘기가 통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내용은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1871~1954)의 <덕수궁사(德壽宮史)> (이왕직, 1938)에 들어 있다.

"(47쪽) [정관헌] 서양식 건물로 함녕전(咸寧殿)의 북쪽에 있다. 광무 4년(1900년) 선원전 화재후 태조(太祖)의 영정을 봉안하여 한때 경운당(慶運堂)이라 칭하였다가 동 5년(1901년) 선원전에 환봉(環奉)했다. 동 6년(1902년) 흠문각(欽文閣)으로부터 고종의 어진, 그리고 계명각(繼明閣)으로부터 순종(황태자)의 예진을 일시 이 곳에 이안하였다가, 후에 어진과 예진을 모두 흠문각에 이봉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오해가 있는 듯하다. 앞에서 인용한 <고종실록> 1901년 2월 5일자 기사에서 보듯이, 태조의 어진을 정관헌에 봉안하라는 허락이 내려지긴 했으나, 실제로는 정관헌에 이것이 봉안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제국 관보> 1901년 2월 26일자(호외)에 게재된 [궁정록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초의 조칙 중 태조고황제영정 준원전본을 정관헌에 권안(權安)하라고 한 것을 경운당(慶運堂)으로 개서(改書)하여 내린다"는 내용으로 고쳐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여 당초 정관헌에 모시기로 했던 태조 어진은 경운당으로 봉안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얘기인데, 이는 곧 '정관헌'과 '경운당'이 별개의 장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관헌과 경운당을 동일시한 오다 세이고의 견해는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그가 정관헌에 봉안된 태조의 어진이 이듬해에 선원전으로 환봉했다고 하는 대목도 잘못된 내용이다.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ㅡ 당초 정관헌에 봉안하기로 하명이 됐던 ㅡ 태조의 어진은 선원전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함흥의 준원전(濬源殿)에 모셔졌던 것으로 두 달 후에 함흥으로 곧장 되돌려진 까닭이다.

혹여 태조의 어진(준원전본)을 봉안하는 동안만 정관헌을 '일시적으로' 경운당으로 이름을 고쳤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이것 역시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 1900년 12월 15일자(양력 1901년 2월 3일자)의 기사내용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고종 황제가 경운당(慶運堂)에서 융릉 등을 봉심한 각신을 소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경운당은 정관헌과 무관하게 존재했던 별개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당연히 오다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인데, 경운당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별도의 고증작업을 통해 규명되어야 하리라고 믿는 바이다.

한편, 정관헌에 관한 문헌자료를 통틀어 이곳이 '커피나 마시는' 휴식공간이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가령, <고종실록> 1902년 6월 21일자에는 "...... 정관헌(靜觀軒)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친히 어진(御眞)과 예진(睿眞)을 보고 표제(標題)를 서사(書寫)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며, 다시 <순종실록> 1908년 4월 2일자에는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풍경궁(慶宮)의 태극전(太極殿)과 중화전(重華殿)에 봉안(奉安)한 어진(御眞)을 정관헌(靜觀軒)에 이봉(移奉)

하라' 하였다"는 내용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순종실록부록> 1912년 7월 2일자에는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정관헌(靜觀軒)에 나아갔다. 어진(御眞)을 중화전(中和殿)으로 이봉(移奉)하였다"고 하여 정관헌은 곧 주로 어진을 그리는 작업을 하거나 이를 봉안하는 공간이었음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툭 트인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목조기둥과 철제난간, 그리고 안쪽으로 죽 늘어선 돌기둥과 전체의 외양이 어떠한 휴식공간 내지 여가시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관헌이 일종의 '야외다방'이었다는 생각은 우리의 선입관이 가져다 준 허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자료목록]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略史", <朝鮮> 1934年 11月號, pp.39~103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윤일주교수논문집편찬회,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김정동,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대원사, 2000)
- 윤일주, "경운궁(덕수궁)의 양관건축에 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제6집 (1965년 12월), pp.151~157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의 발자취(4) 독립문과 덕수궁의 양관", <공간> 80, 제8권 제11호 (1973년 11·12월호) pp.51~72
- 김순일, "경운궁의 영건에 관한 연구 ; 공사의 체제와 집행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년 6월)
- 한영우, "1904~1906년 경운궁 중건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한국학보> 제108집 (2002년 가을호) pp.2~30
- "문화재위원회회의록 (1977년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제12호 (1979년 10월) pp.195~198
- <대한민국 관보> 2004년 2월 6일자, "문화재청 고시 제2005-6호 '구소록도갱생원검시실' 등 18건의 문화재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