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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

분류 : 궁중건축
건축년도 : 1901년 준공, 1921년 이후 철거
소재지 : 정동 5번지


[돈덕전 - 아관파천 오인사진의 정체]


평복차림의 고종황제, 황태자(즉 순종), 그리고 영친왕이 내관들을 등 뒤로 한 채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의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장면을 담은 한 장의 사진 자료가 있다. 그리고 이것과는 사실 별개의 사진이지만, 이 건물 바로 아래로 대포를 끌고 나타난 한 무리의 일본군 장병들이 무력시위를 하면서 도열한 사진도 퍼뜩 기억이 난다.

이것들은 근대사와 관련한 교과서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서울시내 역사탐방에 관한 안내서에서조차 한결 같이 '아관파천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진입하여 고종을 알현하고자 위협하는 일본군들'이라는 식의 설명문을 달아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소개된 바 있는 그러한 사진들이다. 그러한 탓인지 우리들에게는 이것들이 '아관파천'이라는 이미지로 꽤나 익숙한 장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속에 보이는 공간은 바로 러시아공사관이라는 것이 머리속에 박혀버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틀렸다. 말하자면 엉터리 설명이다.

조금이라도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아관파천 당시의 것도, 더구나 이곳이 러시아공사관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금세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앙증맞은 갓을 쓰고 난간에서 내려다 보는 영친왕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가 태어난 때는 1897년 10월 20이며, 그 장소는 궁인 엄씨가 거처하던 경운궁 숙옹재라는 곳이다. 당연히 아관파천과는 무관하며, 어느 정도 성장한 모습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아관파천 시절보다는 한참 늦은 때에 촬영된 사진자료라는 것은 저절로 입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러시아공사관의 외형에 관한 사진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 어느 것을 갖다놓고 비교해보더라도, 결코 저러한 모습을 찾아낼 수 없다. 더구나 러시아공사관은 단지 언덕 위에 건립된 탓에 훌쩍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실상 단층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외형상의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이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공사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 부주의한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정답부터 먼저 말하면, 이곳은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경운궁 안의 돈덕전(惇德殿)이라는 서양식 건물이다. 처음에는 대한제국 시절 총세무사(總稅務司)를 지낸 영국사람 브라운(Sir. John McLeavy Brown, 柏卓安, 白卓安; 1835~1926)에 의해 해관(海關) 건물로 건립되었다가, 이내 궁내부로 넘겨져 경운궁 영내로 편입된 공간이다. 이 건물의 완공시기는 1901년이라고 알려진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아관파천' 시절의 것들로 오인되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이라는 자료가 미씸적다. 이 책이 처음 발행된 때는 1978년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항목 (100~101쪽)에 문제의 사진 두 점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사진의 옆에 붙어 있는 다음의 설명문이다.

"1. 러시아공사관으로 찾아온 일군(日軍)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있는 고종(高宗) :

2층 흰 두루마기를 입은 두 사람 중 오른쪽이 고종(高宗)이고 왼쪽은 당시의 황태자 순종(皇太子 純宗)이다. 그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간 각부의 대신들이다. 사진 1, 2는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귀중한 사진들이다.

2.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포(大砲)까지 끌고 들어가서 고종 알현을 강요하고 있는 일본군들 :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 많은 이권을 상실한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종을 환궁시키려고 했다. 무엄하게도 남의 나라 공사관에까지 대포를 끌고 들어가서 국왕의 알현을 위협해야 할 정도로 그들은 이에 안간힘을 다 했다. 일본은 이때의 패배를 8년후 노일전쟁에서 설욕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사진첩의 집필진 스스로가 "이 사진들은 이제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귀중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이 아관파천 광경으로 오인된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일 가능성이 아주, 아주 높다.

그런데 이 사진들이 담아내고 있는 장면은 그 실체가 무엇일까

돈덕전의 이층 난간에 선 고종황제와 황태자 일행의 사진은 일찍이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9.7일자 및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 1907.9.14일자에 잇달아 소개된 것과 동일한 도판으로 확인된다. 이 당시의 보도에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의 여파로 고종황제가 퇴위한 상황을 전달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때문인지 양쪽 다 "한국의 쿠데타: 옛 황제와 새 황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진자료를 고종퇴위 당시의 상황을 담아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이 사진은 단지 옛 황제가 누구이며, 새로 등극한 한국황제가 누구인지 그 면면을 보여주기 위한 참고도판의 의미로 소개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진의 설명문안에 보면, 창가에 선 사람이 누구누구라는 소개만 잔뜩 나와 있을 뿐이지 황제 퇴위를 압박하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하는 식의 설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멕켄지(F. A. McKenzie)가 저술한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P.Dutton&Co., 1908)에도 돈덕전 이층 난간에 선 고종황제 일행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은 인위적으로 편집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데, <일뤼스트라시옹>이나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수록된 것과는 약간 시선처리가 다른 사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이 사진이 어떤 장면이라는 세세한 설명은 없고, 단지 누구 누구라는 식의 단순한 인물소개만 나와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도대체 언제 촬영된 것이며 또한 어떤 상황을 담아낸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연합뉴스> 2006년 11월 5일자에는 "아관파천 사진은 데라우치의 대포 헌납장면, 고종 퇴위 협박과도 무관, 1910년대 사진집"이라는 제목의 발굴기사가 수록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여기에 그 내용의 전부를 옮겨보면, 이러하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이른바 아관파천 장면을 담은 사진 중 하나로 한동안 알려진 자료가 실제는 아관파천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지난해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이런 주장을 제기하면서, 문제의 사진은 1907년 7월22일 고종 복위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려던 대한제국 시위대를 일본군이 진압한 뒤의 장면일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1910년대 초반 일본에서 발간된 사진 자료집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 박종수 사장이 2001년 재일교포 모리다 도미아키에게서 구입한 이 사진집에 의하면 '아관파천 사진'은 메이지(明治) 39년(1906) 일본 육군장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가 덕수궁 돈덕전에서 신식대포 여러 문을 이왕가(李王家)에 헌납하면서 그 사용법을 설명하는 장면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아관파천 현장인 러시아공사관은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넓은 대지가 있을 수 없는 데다, 무엇보다 러시아 영토인 공사관에 일본군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사진이 아관파천과 무관한 것임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1906년 돈덕전의 대포 헌납장면이라고 소개한 사진 설명은 일본측으로 보아서는 사실일 터이지만,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번 사진집에는 그동안 별다른 배경 설명없이 러일전쟁, 또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무고한 양민학살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국사교과서 등지에서 제시되던 사진을 수록하면서 '일러 전쟁기간 중 군용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사형에 처함'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총살 장면 외에도 이 사진집에는 '총살 후 검시'하는 장면도 수록했다.
일본의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도쿄의 유락사(有樂社)라는 곳에서 발간한 이 사진집에는 원색과 흑백사진 200여 컷 외에도 ▲한국병합전말서 ▲조선사정 ▲조선의 부력(朝鮮之富力) ▲궁정비밀외교 ▲명사담총(名士談叢), 그리고 ▲명치일한외교소사와 같은 텍스트 자료가 추가돼 있다. 이 중 사진자료는 대한제국의 궁정과 그 내부시설, 당시 고종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고위관리, 조선통감부 및 총독부 관련 인물, 8도 풍물과 당시 조선인의 풍속 관련 자료 등을 망라하고 있다. (끝)"

그렇다면 위의 기사에서 전달하는 설명은 제대로 맞는 것일까

대부분의 설명은 사실관계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으나, "명치 39년(즉 1906년) 대포 수문을 이왕가(李王家)에 헌납한 테라우치 장군(寺內 將軍)이 돈덕전(惇德殿)에서 몸소 그 사용법을 설명하다"는 설명문에도 약간의 오류는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테라우치 육군대신이 만주지역 시찰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를 찾아온 때는 1906년이 아닌 1907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테라우치 자신이 남긴 일기책에는 물론이고 당시의 신문인 <만세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두루 그의 행적이 채록되어 있어 이를 참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다녀간 얼마 뒤 <대한제국 관보> 1907년 7월 3일자에도 테라우치 육군대신과 그의 수행원 전부에 대해 훈장이 수여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테라우치의 일기에 수록된 해당 일자의 내용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이 자료는 야마모토 시로(山本四郞) 편, <테라우치 마사타케 일기(寺內正毅日記) : 1900~1918> (京都女子大學硏究叢刊5, 1980)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1907년 6월 10일 (일) 흐림, 서늘함] 오전 10시 평양을 출발하여 경성(京城)에 다다르다. 의주(義州)에서 별기차(別汽車)를 내어 승차하였는데, 편의가 심했다. 7시 40분 경성에 도착하다. 하세가와 대장(長谷川 大將) 이하 출영, 황제(皇帝)와 황태자(皇太子)로부터 시종무관(侍從武官)을 보내사 출영하게 하다. 일행과 더불어 파성관(巴城館, 하죠칸)에서 묵다. 히데오(兒玉秀雄을 말함) 부처(夫妻) 용산(龍山)에서 출영하다. 도중에 비가 내림. (* 10일 아침 평양 출발 오후 7시 30분 경성에 도착하다. 폐하 시종무관을 보내시사 멀리서 오는 노고를 위로하시다. 기타 한국대신 등 일본측 제관 지인 내영자 다수였다.)

[1907년 6월 11일 (화) 비] 10시에 하세가와 대장(長谷川 大將)과 함께 통감(統監)을 방문하다. 잠시 대담(對談) 11시반에 모두 더불어 궁중(宮中)에 이르러 황제(皇帝)께 배알(拜謁)하다. 대포(大砲) 기관총(機關銃) 기타 증품(其他 贈品)을 정진(呈進)하다. 종종(種種)의 칙어(勅語)가 있으시다. 황태자(皇太子) 영친왕(英親王)을 알현하다. 12시 궁중대신(宮中大臣)이 개최한 식사(食事)를 하다. 통감 및 나의 연설이 있었다. 오후 2시 황제 영친왕과 더불어 돈덕전(敦德殿, 惇德殿의 착오)에 출어하사 대포(大砲)를 친람(親覽)하시다. 저녁에 대장의 만찬에 참석하다. (* 11일 아침 10시에 숙소를 나서 하세가와 대장을 동반, 이토통감(伊藤統監)을 방문하고 11시 지나서까지 대담을 한 다음 다함께 궁중(宮中)에서 폐하께 배알, 여러 담화가 있었다. 휴대한 대포(大砲)와 더불어 기관포(機關砲) 2문(門)을 증진(贈進)할 뜻을 말해 올리다. 가납(嘉納)하시다. 파하고 돈덕전(敦德殿)에서 궁내대신(宮內大臣)이 주인(主人)되는 식사가 있었다. 식후(食後) 증진(贈進)한 대포(大砲)를 폐하 돈덕전에 출어하사 어람하시다. 통감 및 사령관을 방문, 오후 8시 하세가와 대장의 저녁식사에 초대되다. 통감과 더불어 민간인이 약간."

이상의 자료를 정리하면, 흔히 아관파천 사진으로 오인된 문제의 사진자료는 정확하게 말하여 1907년 6월 11일 일본 육군대신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돈덕전에서 기관포를 헌납할 당시의 장면을 담아낸 것으로, 때마침 40여일 뒤에 고종퇴위사건이 벌어지자 이와 관련된 참고도판으로 가장 최근에 황제와 황태자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이 해외로 발송되어 마치 황제퇴위 당시의 것인양 오인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진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고증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1978년 이후' 터무니 없게도 공연히 아관파천 당시의 것으로 둔갑하는 2차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공사관은 2층이 아닌 단층건물이었다는 점, 영친왕이 태어난 때는 아관파천이 종결된 1897년이라는 점, 그리고 사진에 보이다시피 영친왕이 저만큼이라도 성장하였다면 이것은 아관파천 당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사진 스스로가 말해주고 있는 셈인데, 왜 이러한 오류는 진작에 바로 고쳐지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상세설명

덕수궁 내에 건립된 구성헌(九成軒), 수옥헌(漱玉軒, 중명전), 정관헌(靜觀軒), 돈덕전(惇德殿),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축물을 통틀어 그 으뜸은 단연 석조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1910년 이후에 준공된 탓에 대한제국 말기의 긴박했던 국운과는 한걸음 물러나 있는 공간이다. 이에 비하여 돈덕전은 그 규모에 비추어보더라도 석조전에 거의 버금가는 정도이고, 더구나 각국사절과의 외교의례는 물론이고 1907년에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벌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주목되는 공간이다. 그야말로 돈덕전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근대사의 핵심적인 현장이었다.

돈덕전이라고 할 때, '돈덕(惇德)'이라는 것은 <서경(書經)> 순전편(舜典篇)에 나오는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며 어진 이를 믿는다(惇德允元)"는 글귀에 따온 말이다. 간혹 이 시기의 자료에는 돈덕전(惇德殿)을 '敦德殿'으로 인쇄한 것들이 눈에 띄지만,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당나라의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집자하여 만든 옛 '돈덕전'의 편액(유물번호#468, 37X96cm)이 그대로 남아 보관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분명히 '惇德殿'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덕수궁 내의 여느 서양식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돈덕전의 경우에도 그 내력이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관한 가장 흔한 조사자료는 역시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1871~1954)가 저술한 <덕수궁사(德壽宮史)> (1938)이다. 여기에는 돈덕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52~53쪽) 회극문(會極門)밖 즉 현재 영국영사관의 서방에 해당하며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돈덕전의 구획이 있었다. 회극문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은 곧 이 작은 길을 나서 동전(同殿)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나중에 석조전(石造殿)의 건축에 즈음하여 이 작은 길은 돈덕전 부지와 더불어 본궁역내에 들어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하나의 구역으로 삼는다.

돈덕전은 이층구조의 순서양식 건물로 알현소(謁見所) 또는 연회장(宴會場)으로 사용되었으며, 황제는 누차 외국사신을 본전에서 접견했다. 명치 40년(1907년) 순종(고 이왕)이 고종의 선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게 되자, 8월 27일 즉위례식을 본전에서 행하였다. 이어서 우리 황태자 요시히토친왕전하(嘉仁親王殿下, 대정천황)가 명치천황의 성지를 받들어 한국황실 어방문을 위해 동년 10월 아리스가와미야 타케히토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 육국대장 카츠라 타로(桂太郞),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을 거느리고 경성에 행계하였는데, 그때에 한국황제, 황후와 더불어 태황제와 회견하고 또 황제와 오찬을 함께 했던 곳이 본전(本殿)이었다.

본전의 건축연차(建築年次)에 관해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실견자(實見者)의 말에 따르면 확실히 명치 34년(광무 5년, 1901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건축물은 어느 때엔가 해체되어져 현재 그 부지만을 남기고 있으며, 지금은 사진에 의해 가까스로 그 편린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돈덕전의 준공시기에 대해서는 후지무라 토쿠이치(藤村德一)가 편찬한 <거류민지석물어 : 제1편(居留民之昔物語 : 第一編)> (1927)에 한 가지 단서가 남아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노나카 켄조(野中健造), "석조전 건축의 경위"라는 글에 "(83쪽) ...... 이 돈덕전은 명치 34년(1901년)에 낙성된 것으로 공사비는 16만원이었으나, 그 실비는 5만원 내외라고 하는 말이 있어 재정의 문란한 일반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오다 세이고의 책에 채록된 증언이란 것이 혹여 이러한 기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돈덕전의 건립시기를 살펴볼 만한 참고 자료가 하나 더 있다. 독일인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가 남긴 목격담에는 이러한 구절이 등장한다. 그가 우리 나라를 찾은 때는 1901년 6월이다.

"...... 모방은 궁중 살림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러시아공사관저도 깊은 인상을 주어, 정동의 새 궁궐 바로 옆 해관(海關)이 들어설 부지에 러시아공사관을 모델로 현재 많은 비용을 들여 궁전을 새로 짓고 있다. 다만 좀 더 화려하고 위엄 있게 짓는다고 한다. 계속되는 지출로 비어가는 국고가 만약 지탱해줄 수 있다면, 대기실과 기둥을 갖춘 베란다가 딸린 전체 건물은 튼튼한 화강암으로 세워 정말 장엄해 보일 것이다. 하여튼 국왕이 몸소 새 궁전에 거주할 지는 의문이다. 황제의 생활습관도 아직 순수한 조선식이기 때문이다. 신축을 부추긴 외국인들에 대한 체면에 왕은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유럽인들의 궁궐방문이 아시아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이 된다면 바로 왕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튼튼한 화강암으로 ... 운운' 하는 대목이 들어 있는 걸로 보아, 언뜻 석조전의 착공과 관계된 내용인 듯도 하다. 하지만 새 궁궐 바로 옆 해관이 들어설 부지라고 하는 점 등으로 판단하건대 돈덕전의 건립과 관련된 증언인 듯이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 보듯이 돈덕전은 원래 총세무사(總稅務司)인 영국사람 브라운(Sir. John McLeavy Brown, 柏卓安, 白卓安; 1835~1926)이 관장하던 해관구역(Custom Compound)안에 해관청사(海關廳舍)의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경운궁 영역의 확장과 관련하여 이웃하는 궁궐 안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럼 이 해관건물은 언제 경운궁으로 정식 편입된 때는 과연 언제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이 정리한 <외교사연표> (1904)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1901년 3월 21일] 한국 관리들이 해관재산 및 총세무사 관사의 인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총세무사를 해고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해 6월 24일에 이뤄진 협정에 따라 해관재산은 1년 이내에 이양하는 동시에 새로운 부지와 관사를 제공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당시 한국정부 측에서는 경운궁의 확장을 위해 해관영역을 편입하고자 적극적인 조취를 취한 바 있으며, 이에 맞서 브라운 총세무사 측에서도 거절로 맞섬에 따라 큰 분란이 일어났던 것은 당시의 여러 매체에 수록된 보도내용을 통해 충분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해관청사는 늦어도 1901년 하반기 내지 1902년 무렵에 대한제국 궁내부의 재산으로 넘겨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돈덕전'이라는 이름은 언제 처음 부여되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기록도 확실치 않은 상태이다. 다만, 1904년 경운궁 대화재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실록> 1904년 11월 14일자에 "...... 병신년(1896)에 이어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즉조당(卽堂)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몽땅 불탔지만 가정당(嘉靖堂), 돈덕전(惇德殿), 구성헌(九成軒)이 아직 온전하게 있는 만큼 그때에 비하면 도리어 낫다"고 한 것이 돈덕전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용례로 확인된다.

당연히 1904년 이전에는 돈덕전이 황제의 주요 활동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1905년 2월 7일에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태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청국의 교체된 공사(公使) 허태신(許台身), 신임공사(新任公使) 증광전(曾廣詮)과 궁내부 고문관(宮內府顧問官) 카토 마스오(加藤增雄)를 접견"한 것을 시작으로 돈덕전은 1905년 이후에야 외교사절의 접견장 또는 연회장의 용도로 적극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돈덕전'은 과연 언제까지 존속한 것일까 <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돈덕전은 고종황제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각종 연회가 벌어진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덕수궁의 주인을 잃은 1919년 이후에는 거의 방치되다시파 했던 모양인데,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0년 5월 15일자에 수록된 "자규(子規)야 우지마라, 주인(主人) 잃은 덕수궁(德壽宮), '백량동작생황진(栢梁銅雀生黃塵)'이 옛 이야기가 아니러구나"라는 제하 기사에 잘 그려져 있다.

"...... 그런 중에서 옛날 시절에 외국사절(外國使節)을 인견하옵시고 연회를 베푸시던 돈덕전(敦德殿, 惇德殿의 잘못)은 전일에 보던 광채는 하나도 없고 떨어진 잎새와 무성한 봄풀에 첩첩히 싸이어 보이는 족족 무슨 눈물과 한숨을 금할 수 없는 가운데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옛날 시절에 영국에 유명한 효장(驍將) '키치 원수'를 인견하시고 창해력사가 박랑사중에서 쓰던 팔십근 철퇴를 들이어 남의 나라의 장군에게 적당하신 대접을 하시던 곳임을 이제 다시금 추억하게 되었다."

이미 폐허상태에 들어간 돈덕전이 정확하게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다. 다만,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자에 수록된 "경성소경(京城小景) 말하는 사진 (3) 고궁전(古宮殿)에 신작로(新作路), 영성문터에서"라는 보도내용이 돈덕전에 관한 최후의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이 기사에는 희미하나마 돈덕전의 첨탑이 묘사된 사진자료까지 첨부되어 있는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적적히 길가에 서서 가지 부러진 고목의 나머지 녹음 사이로 불볕에 이우른 갈무봉의 고탑만 행인의 눈에 보이다. 이곳은 어찌하여 이다지 몰라보게 변하였는가 경비가 군졸하여 이왕직에서는 대궐을 팔아간 까닭인데 이왕직에 출입하는 사람이 분참봉을 팔아먹었다고 검사국에서 오너라 가거라 하는 것도 이렇게 팔기를 잘하는데서 전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관대사모를 하고 양산 뒤에 호종하던 사람으로 금일에 이 길을 지나면서 감개가 깊을 자는 과연 누구가 있을는지."



[석조전 관련 참고자료목록]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略史", <朝鮮> 1934年 11月號, pp.39~103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野中健造(노나카 켄조), "石造殿建築の 經緯", 藤村德一(후지무라 토쿠이치) <居留民之昔物語 : 第一編> (朝鮮二昔會, 1927) pp.82~84
- [竣工建築物] 李王家美術館新館, <建築雜誌> 第52輯 第642號 (1938年 9月) pp.93~97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윤일주교수논문집편찬회,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고궁현판전 (1994.6.14~6.30) 전시도록,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예술의 전당, 1994)
- 문화재청, <궁중현판> (1999)
- 지그프리트 겐테, 권영경,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책과함께, 2007)
- 윤일주, "경운궁(덕수궁)의 양관건축에 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제6집 (1965년 12월) pp.151~157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의 발자취(4) 독립문과 덕수궁의 양관", <공간> 80, 제8권 제11호 (1973년 11·12월호) pp.51~72
- 김순일, "경운궁의 영건에 관한 연구 ; 공사의 체제와 집행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년 6월)
- 한영우, "1904~1906년 경운궁 중건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한국학보> 제108집 (2002년 가을호) pp.2~30
- 1897/07/01, "[Local Items] Numerous buildings are coming up inside of the Kyongwon Palace ......"
- (April 1901), "[Editorial Comment] The new imperial palace has been steadily growing in size ......"
- <제국신문> 1901년 3월 28일자, "[잡보] 해관 총세무사 백탁안씨를 해고 하기로 외부에서 ......"
- <제국신문> 1901년 3월 28일자, "[잡보] 해관 총세무사 백탁안씨를 해고할 사건으로 정부에서 ......"
- <제국신문> 1901년 4월 1일자, "[잡보] 궁내부에서 상주하기를 외부조회를 즉견하온즉 백탁안에 반이할 사건으로 ......"
- <매일신보> 1913년 8월 29일자, "이태왕전하(李太王殿下) 어환력연(御還曆宴)과 근상(近狀), 이태왕 전하 환갑 수연"
- <매일신보> 1917년 9월 8일자, "덕수궁의 탄신일, 돈덕전의 오찬회와 여흥의 활동사진"
- <매일신보> 1917년 9월 9일자, "돈덕전의 탄신연, 화기만궁한 중에 성대한 탄신경축"
- <매일신보> 1920년 5월 15일자, "자규(子規)야 우지마라, 주인(主人) 잃은 덕수궁(德壽宮), '백량동작생황진'이 옛 이야기가 아니러구나"
-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자, "경성소경(京城小景) 말하는 사진 (3) 고궁전(古宮殿)에 신작로(新作路), 영성문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