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석조전

분류 : 궁중건축
건축년도 : 1900년 착공, 1910년 준공
소재지 : 정동 3-1번지 (정동 5번지)


덕수궁사'의 석조전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덕수궁사(德壽宮史)> (李王職, 1938)
(68~71쪽)
[석조전(石造殿)] 본전(本殿)은 특별한 명칭 없이 보통의 석조전(石造殿)이라 칭하는데, 본궁 건축물 중 가장 이채를 발하는 곳이다. 그 전부 준성(竣成)된 것은 조금 나중이지만, 이것이 기공(起工)에 착수했던 것은 갑진(甲辰, 1904년)의 화재(火災) 이전이었으므로, 이곳에 있어서 설술(設述)할 일로 삼는다.
애당초 경운궁(慶運宮) 내 다수의 건축물 가운데 순서양식(純西洋式)의 것으로는 돈덕전(惇德殿), 구성헌(九成軒),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明殿) 등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지나연와(支那煉瓦, 중국벽돌)를 건축재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본전만은 화강석(花岡石)으로써 건조되었고 그 양식도 르네상스식으로 규모도 다른 것과 다르게 무리에서 빼어나, 본궁 제건축물중에서 백미(白眉)로 칭할만한 것이다. 그렇지만 본전 건설(本殿 建設)의 연대를 비롯하여 본전에 관한 제반 사항은 당시의 궁정기록(宮廷記錄) 중에도 하등의 기사를 찾아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본전에 관해 기록된 것이 없는 것은 심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생각건대 본전의 건축은 오로지 영국인의 손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자연히 이것들에 관한 문서, 기록을 망실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석조전의 건축감독자(建築監督者)였던 영국인 데이비드슨(M. H. W. Davidson)씨가 아직까지도 경성(京城)에 살고 있으므로, 동씨(同氏)를 통해 대충 본전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아래에 그 개요를 적어둔다.
본전(本殿)은 구 한국정부 총세무사(舊 韓國政府 總稅務司) 영국인 브라운(Sir John Mclevy Brown)의 지휘 하에 창시(創始)됨으로써 메가다 재무고문(目賀田 財務顧問)의 시절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본전은 최초에 경희궁(慶熙宮) 내에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후에 총세무사의 의견으로 현재의 위치에 결정되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명치 33년(광무 4년, 1900년)이었다. 본전의 건축은 영국기사(英國技師) 하딩(Mr. G. R. Harding)의 설계(設計)로 이루어졌고, 내부공사(內部工事)는 동국(同國) 건축기사 로벨(Mr. Lovell)가 설계했던 것이다.
최초에는 우선 화강석을 동대문외(東大門外)의 채석소(採石所, 채석장)에서 가져오고, 기초공사(基礎工事)는 한국기사(韓國技師)[내부기사 심의석(內部技師 沈宜碩)] 감독 하에 실행되었다. 다음의 건축은 이를 오쿠라구미(大倉組)에서 청부(請負)하여, 일본인 감독(日本人 監督)과 더불어 그 아래의 일본인 기사(日本人 技師)2명(名)으로 본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데이비드슨씨가 본전 건축에 관해 일체의 책임을 갖기에 이른 것은 명치 38년(광무 9년, 1905년)부터인데, 이 때에는 제2층도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영국기사 로벨에게 내부공사의 설계를 하명한 것은 명치 40년(광무 11년, 1907년)으로, 연관부설(鉛管敷設), 난로(煖爐) 및 전등장치(電燈裝置)는 런던의 크리탈(Crittall &Co.)에, 내부장치(內部裝置) 및 조도품(調度品)은 런던의 메이플회사(Messrs Maple &Co.)에 이를 청부(請負)하였다. 그리하여 공사 전부가 준성된 것은 명치 42년(융희 3년, 1909년)이며, 본건축물이 이왕가(李王家)에 인계된 것은 명치 43년(융희 4년, 1910년) 8월이었다.
이어서 본전의 주위를 정리하여 본전의 장관(壯觀)을 꾸밀 정원(庭園)이 완성된 것은 공사준성의 익년(翌年) 즉, 명치 43년이었는데, 너도밤나무, 칠엽수, 야앵(野櫻), 월계수(月桂樹), 석남(石楠) 등의 나무를 특별히 외국에서 가져와 식재하였으나 최후의 2종 외에는 전부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본전 건축에 들어간 총경비는 최초 총세무사로부터 94만원을 지출했고, 그 후 메가다 고문으로부터 35만원을 지출하였으므로, 전후 합하여 약 129만원에 달하고 있다. (이상은 데이비드슨씨 수기에 따랐다.)
여기에 한마디 부기(附記)하여 둘 일은 본궁(本宮)과 돈덕전(惇德殿)과의 관계가 석조전 건축 이후 비상(非常)하게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지금의 석조전의 배후(背後)에서 영국영사관(英國領事館)의 장벽(墻壁)에 붙어서 좁은 도로가 있었고, 돈덕전은 전혀 본궁의 궁장(宮墻) 밖이 되었으며, 그 도로의 남측에 붙어서 구성헌(九成軒)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이 있었다. 그런데 석조전의 건설에 의하여 데이비드슨씨의 알선결과, 마침내 이 도로를 본궁역내(本宮域內)에 들이고, 돈덕전의 서측으로 도로를 변경하는 것으로 성효(成效)되어, 이 때문에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예전의 구성헌 및 집하문의 부지는 때마침 석조전의 부지내에 편입되어 지는 것으로 되었다.
[주] 브라운(柏卓安, 백탁안)은 명치 26년(1893년)부터 조선정부의 총세무사가 되어 재정의 실권을 쥐었는데, 명치 37년(1904년) 제1차 일한협약의 결과 일본인 1명을 재무고문으로삼는 것이 되어, 동년 10월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쇼타로(大藏省 主稅局長 目賀田種太郞)씨가 초빙되면서 고문이 되어 명치 37년(1904년) 11월 총세무사의 사무를 인계하였다.

상세설명

사적 제124호인 덕수궁(德壽宮) 권역에 포함된 여러 전각을 통틀어 그 으뜸은 단연 석조전(石造殿)이다. '돌로 만든 대궐'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뜻을 담은 명칭이기는 하지만, 화강석으로 지어진 이 석조전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서양식 근대건축물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 규모에 비추어 보더라도 최대이다.

그렇다면 이 석조전의 건축은 과연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자료는 일제 말기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1871~1954)가 저술한 <덕수궁사(德壽宮史)>이다. 1938년에 이왕직(李王職)에서 펴낸 이 책자는 덕수궁 내에 신축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의 개관에 맞추어, 일찍이 오다가 <조선(朝鮮)> 1934년 11월호에 "덕수궁약사(德壽宮略史)"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내용을 새롭게 보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오다 세이고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장과 경성제대 교수, 그리고 숙명여자전문학교교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1941년 10월 1일에는 총독부 시정기념일을 맞아 제2회 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도 있었다.

아무튼 오다 세이고가 정리한 '석조전'의 건립내력을 간추리면, 대략 이러하다. 석조전의 경우, 공사기간이 워낙 긴 편이어서 돈덕전(惇德殿), 구성헌(九成軒),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明殿) 등 여타의 궁궐내 서양식 건축물에 비하면 완공시기는 다소 늦은 편에 속한다.

"(68~71쪽) 본전(本殿)은 구 한국정부 총세무사(舊 韓國政府 總稅務司) 영국인 브라운(Sir John Mclevy Brown)의 지휘 하에 창시(創始)됨으로써 메가다 재무고문(目賀田 財務顧問)의 시절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본전은 최초에 경희궁(慶熙宮) 내에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후에 총세무사의 의견으로 현재의 위치에 결정되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명치 33년(광무 4년, 1900년)이었다. 본전의 건축은 영국기사(英國技師) 하딩(Mr. G. R. Harding)의 설계(設計)로 이루어졌고, 내부공사(內部工事)는 동국(同國) 건축기사 로벨(Mr. Lovell)가 설계했던 것이다.

최초에는 우선 화강석을 동대문외(東大門外)의 채석소(採石所, 채석장)에서 가져오고, 기초공사(基礎工事)는 한국기사(韓國技師) [내부기사 심의석(內部技師 沈宜碩)] 감독 하에 실행되었다. 다음의 건축은 이를 오쿠라구미(大倉組)에서 청부(請負)하여, 일본인 감독(日本人 監督)과 더불어 그 아래의 일본인 기사(日本人 技師) 2명(名)으로 본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데이비드슨(M. H. W. Davidson)씨가 본전 건축에 관해 일체의 책임을 갖기에 이른 것은 명치 38년(광무 9년, 1905년)부터인데, 이 때에는 제2층도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영국기사 로벨에게 내부공사의 설계를 하명한 것은 명치 40년(광무 11년, 1907년)으로, 연관부설(鉛管敷設), 난로(煖爐) 및 전등장치(電燈裝置)는 런던의 크리탈(Crittall & Co.)에, 내부장치(內部裝置) 및 조도품(調度品)은 런던의 메이플회사(Messrs Maple & Co.)에 이를 청부(請負)하였다. 그리하여 공사 전부가 준성된 것은 명치 42년(융희 3년, 1909년)이며, 본건축물이 이왕가(李王家)에 인계된 것은 명치 43년(융희 4년, 1910년) 8월이었다.

이어서 본전의 주위를 정리하여 본전의 장관(壯觀)을 꾸밀 정원(庭園)이 완성된 것은 공사준성의 익년(翌年) 즉, 명치 43년이었는데, 너도밤나무, 칠엽수, 야앵(野櫻), 월계수(月桂樹), 석남(石楠) 등의 나무를 특별히 외국에서 가져와 식재하였으나 최후의 2종 외에는 전부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조전의 건립은 1900년에 착공하여, 우여곡절 끝에 1909년에 준공된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석조전의 골격이 그 무렵에 대개 완성된 사실은 인정할 수 있으나, 공식적인 낙성은 1910년 이후에 있었으므로 이 부분은 실제와 약간 어긋나게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매일신보> 1910년 12월 3일자에 수록된 '석조전준공기(石造殿竣工期)'라는 제목의 기사내용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여기에는 석조전의 완공시점은 물론이거니와 이 건물의 건립내력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의 전부를 여기에 옮겨두기로 한다.

"동양유일(東洋唯一)의 건축(建築)이라 칭(稱)하는 덕수궁내(德守宮內) 석조전(石造殿)은 거금(距今) 12년전에 당시(當時) 총세무사(總稅務司) 백탁안씨(柏卓安氏)가 삼백만원(三百萬圓)의 예산(豫算)으로써 설계(設計)한 터인데 일본(日本)으로부터 소천기사(小川技師)를 초빙(招聘)하여 위선(爲先) 창의문(彰義門) 부근(附近)의 화강석재(花崗石材)를 채(採)하여 34년(즉 1901년) 추(秋)에 석초(石礎)를 종(終)하고 미기(未幾)에 정변(政變)이 기(起)하매 35, 6년(즉 1902, 3년) 양년간(兩年間)을 부득이(不得已) 휴공(休工)하였다가 갱(更)히 36년(즉 1903년) 9월부터 기공(起工)하여 동대문(東大門) 영풍정(暎風亭) 부근(附近)의 화강석(花崗石)을 채(採)하여 이층(二層) 급(及) 삼층(三層)의 건축(建築)에 용(用)하다가 39년(즉 1906년)에 지(至)하여 백탁안씨(柏卓安氏)가 해임 귀국(解任 歸國)하매 데비손씨(氏)가 백씨(柏氏)를 대(代)하여 전일(前日)의 설계(設計)대로 해공사(該工事)를 계속 진행(繼續 進行)하더니 40년(즉 1907년) 6월에 지(至)하여 약약준성(略略竣成)하고 이래(爾來)로는 연측 기타 옥상(椽側 其他 屋上)의 장식(裝飾) 등에 무장축파(武藏筑波)의 석재(石材)를 운래(運來)하여 공사(工事)를 진행(進行)한 결과(結果)로 현금(現今)에는 여관 급 종자(女官 及 從者)의 옥실(屋室)에 충(充)할 지하실(地下室)을 제(除)한 외(外)에는 태(殆)히 준공(竣工)되었는데 총평수(總坪數)가 사백평(四百坪), 고(高)가 칠칸반(七間半), 횡(橫)이 이십오칸(二十五間)되는 굉대(宏大)한 석조전당(石造殿堂)이라. 기(其) 석전내(石殿內)에는 접견실(接見室), 침실(寢室)과 이태왕(李太王) 급(及) 엄비(嚴妃) 양전하(兩殿下)의 거실(居室)과 기타(其他) 담화실(談話室), 목욕실(沐浴室) 등이 무루완비(無漏完備)한지라. 과일(過日) 이왕 전하(李王 殿下)께서 덕수궁(德壽宮)에 문안(問安)하실 시(時)에 동(同) 석전식당(石殿食堂)에서 이태왕 전하(李太王 殿下)와 오찬(午餐)을 공어(共御)하샤 동(同) 신축(新築)의 화려(華麗)한 전당(殿堂)을 어람(御覽)하실 터이더니 적(適)히 이태왕 전하(李太王 殿下)의 불예(不豫)하심을 인(因)하여 중지(中止)하셨고 엄비 전하(嚴妃 殿下)만 참열(參列)하셨다는데 접견실(接見室) 등의 장식(裝飾)이 찬란(燦爛)함은 이무가론(已無可論)이어니와 잔부공사(殘部工事)의 예산잔여(豫算殘餘)가 근(僅)히 삼만원(三萬圓)에 불과(不過)한 즉 기(其) 준공(竣工)도 또한 불원간(不遠間)에 재(在)하리라더라."

공식적으로 명명된 바도 없고 또한 이 건물에 '석조전'이라는 편액을 만들어 따로 걸어둔 일도 없지만, 이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석조궁전', '석궁', '석조전당', '석전' 등이라고 하였다가 자연스레 '석조전'이라는 명칭이 정착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발행된 <건축잡지(建築雜誌)> 1905년 6월호에는 한창 공사중인 석조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한 장 수록되어 있는데, 여길 보면 이 당시에도 벌써 상당한 공사의 진척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삼아, 석조전 건물의 실측치를 살펴보면 3층의 면적합계는 1,226평에 달하며, 건물의 전면 길이는 54.2미터, 폭이 31미터, 높이가 17.5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부가하여 적어둘 일은 석조전 앞 정원공사(庭園工事)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은 이 자리에 물개동상을 비롯한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지만, 이러한 형태로 변한 것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 지금의 덕수궁미술관)의 준공에 이뤄진 1938년으로 한참 나중의 일인 셈이다. 초기에는 다소간 완만한 형태의 공간처리만 이뤄졌는데, 석조전 앞 정원공사는 1911년 3월 이후에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인접한 중화전(中和殿)의 회랑이 철거된 것도 이때의 일로 알려진다. 앞서 소개한 오다 세이고의 <덕수궁사>에는 석조전 앞 정원공사가 준성된 것은 "명치 43년(즉 1910년)"이라고 채록하였으나, 이 부분 역시 당시의 신문기사 등과 비교해 보면 잘못된 서술인 것이 분명해진다.

아무튼 1911년 3월 이후에 벌어진 석조전 앞 정원공사에 대해 <매일신보> 1911년 2월 28일자에 수록된 기사내용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낭자(낭者) 덕수궁(德壽宮)에서는 일백만원(一百萬圓)을 투(投)하여 광대(廣大)한 양식석전(洋式石殿)을 건축(建築)하였는데 금회(今回) 동전전(同殿前)에 대정원(大庭園)을 작(作)하기 위(爲)하여 전이사실(前理事室), 평성문(平成門), 전위병소(前衛兵所)를 훼철(毁撤)하기로 작일(昨日) 정오(正午)에 입찰(入札)을 종(終)하였는데 차(此) 대정원(大庭園)은 데빗더완씨(氏)의 설계로 성(成)한 자(者)인데 총(總)히 외국식을 용(用)하여 분수지(噴水池), 수목(水木)의 배열(排列) 급(及) 정내(庭內)를 통(通)하는 도로(道路) 등은 외국대정원(外國大庭園)을 모방(模倣)할 계획(計劃)이오, 차(此) 비용(費用)은 총액(總額) 오만원(五萬圓)을 요(要)하리라더라."

그렇다면 이 석조전은 건립 이후 과연 누구를 위한, 어떠한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오랜 공사기간을 거쳐 이 석조전이 거의 완공될 무렵, 이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심지어 일본어 신문인 <경성신보(京城新報)> 1908년 2월 19일자에는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은 경운궁 내에 신궁전으로 건축된 석조의 건물로써 충당하기로 한다"는 내용까지도 언급된 사실이 있지만, 나중에는 결국 '황태자'를 위한 공간으로 정리되었던 모양이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30일자(국문판)에는 석조전의 용도에 대해 이러한 기사가 남아 있다. 보아하니 기사의 제목 자체가 '황태자 어용실 필역기한'이라고 되어 있다.

"덕수궁 안에 새로이 돌로 건축하는 궁전은 역사하는 부비가 일백만환이오 필역될 기한이 본년 칠월이라. 이것은 황태자의 어용실[御用室]로 경영함인데 즉금은 덕수궁 폐현실로 쓴다더라."

물론 이 당시는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1897~1970)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나가 있던 상태였으므로, 당장에 그가 이곳을 사용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경술국치 이후 이른바 '이왕세자'의 신분으로 전락한 뒤에 서울로 되돌아올 때마다 석조전은 예외 없이 그의 숙소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그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처음 귀국하던 때 (제1차 귀선, 1911.7.23~8.5),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하여 귀국하던 때 (제2차 귀선, 1918.1.13~1.26), 고종의 환후 소식을 듣고 위문차 급거 귀국하던 때 (제3차 귀선, 1918.8.28~9.2), 그리고 1919년 1월 22일 고종 훙거로 급거 귀국하던 때 (제4차 귀선, 1919.1.24~)에는 한결 같이 한동안 비어 있던 석조전을 말끔히 수리까지 하여 이곳을 그의 숙소로 사용했던 것이다.

특히 1922년 4월 26일에는 이른바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세자비(李王世子妃)', '왕손 이진(王孫 李晉)' 등 삼전하(三殿下)가 함께 조선을 찾아왔을 때, 이들 일행의 숙소 또한 덕수궁 안 석조전으로 정해졌다. 당시 창덕궁 왕세자 이은과 일본황실의 이본궁 방자여왕(梨本宮 方子女王,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여왕)의 가례식(嘉禮式)이 거행된 것은 1920년 4월 28일이었고, 장소는 동경 도리이사카(鳥居坂)에 있는 어용저(御用邸)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진작에 본가(本家)되는 창덕궁을 찾아뵙지는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갓난' 아기를 데리고 겨우 서울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성대한 환영행사가 준비되었고, 2주일 가량으로 예정된 체류기간은 꽤나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졌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왕세자 일행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왕실 근현례(覲見禮)를 갖는 것을 시작으로 종묘, 의효전, 선원전, 육궁, 덕안궁, 대원왕묘, 홍릉, 영휘원 등을 두루 찾아 전알(展謁)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것 말고도 왕세자의 생모인 엄비(嚴妃)가 창립한 것이라 하여 진명여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둘러보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왕세자 일가의 조선방문은 막바지에 이르러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일본으로 막 떠나려던 차에 왕손 아기가 토사와 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알려진 병명은 '소화불량'이었다. 그런데 일이 생각만큼 가볍게 끝나질 않고 병세는 점점 깊어져, 1922년 5월 11일 오후 3시 12분에 이르러 끝내 숙소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른바 '이왕가'의 원손인 이진(李晉) 전하가 탄생한 것이 1921년 8월 18일이었으니, 그는 미처 돌맞이도 하지 못한 채 8개월여만에 허망하게도 삶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며칠 후 왕손의 장지는 청량리 영휘원 구내로 결정되었으니 이곳이 곧 지금의 '숭인원(崇仁園)'이다. 게다가 이곳과 나란히 붙어 있는 영휘원(永徽園)은 왕세자의 생모되는 엄귀비(嚴貴妃)의 묘소이다. 말하자면 서로 얼굴을 모르는 친할머니와 손자가 이웃하여 누워있는 셈이 된다. 이렇듯 덕수궁 석조전은 퇴락한 왕실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석조전은 간혹 외국귀빈을 위한 숙소이거나 왕실의 연회와 접견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자 혹은 경술국치 이후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른바 이왕세자(1926년 이후 창덕궁 이왕을 승계)가 평소 일본에 거처를 두었고 국내에는 간간히 찾아오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석조전은 대부분의 기간이 비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석조전의 위상과 용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일제강점기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1933년 10월 1일에는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덕수궁의 일반개방이 이뤄졌고, 이와 아울러 석조전도 미술관으로 전환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수궁 일대가 봄에는 모란꽃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다시 가을이 되면 국화전시회장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이에 곁들여 소동물원까지 개설되어 덕수궁 일대가 온통 일반시민을 위한 위락공간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36년에는 석조전의 서편 공터에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의 신축이 결정되어 공사가 착수되었으며, 이후 1938년에는 이왕가미술관의 정식개관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혹은 미술관 구관)이라 하였고, 새로 지은 이왕가미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혹은 미술관 신관)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비록 두 건물이 각각 짝을 이뤄 하나의 이왕가미술관을 구성하였으나, 석조전과 신축 미술관은 전혀 별개의 시기와 건립연혁을 지니고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간혹 신축미술관을 일컬어 '석조전 신관(서관)'이라고 하고, 원래의 석조전을 '석조전 구관(동관)'이라고 하는 식으로 버젓이 표기하는 오류가 눈에 띄는데, 이는 전혀 잘못된 고증에 따른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표기한 용례도 거의 찾을 수 없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정조치가 뒤따라야 할 줄로 믿는다.

한편 일제 말기에 일본화가들이 그린 미술품의 진열공간으로 전락한 석조전은 해방 이후에도 미소공동위원회,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차지하였으며, 다시 한국전쟁 때는 큰 피해를 입어 수리공사까지 벌인 다음 국립박물관이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고, 그 이후로는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의 용도로 바뀌면서 나름으로 근현대사의 풍상을 겪은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2004년 2월 26일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주목되어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0호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원래 덕수궁 자체(지상건물 일체를 포함)가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편 '지정문화재가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문화재보호법의 관련조항이 엄연히 존재함에 비추어본다면, 애당초 이곳은 등록문화재에 포함될 수 없는 대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이 석조전을 덕수궁 자체와 분리하여 별도의 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조금 세월이 지난 때의 얘기이지만, 지난 1977년도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그해 2월 26일에 개최된 제1분과위원회 제1차회의에서 '현대여명기 양식건물 문화재지정 안건(現代黎明期 洋式建物 文化財指定 案件)'과 관련하여 약현성당, 명동성당, 정동교회, 구러시아공사관, 구벨기에영사관, 용산신학교 등에 대한 사적지정이 의결된 바 있으며, 여기에 바로 덕수궁 안 "정관헌과 석조전"도 사적지정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당시의 지정내용에는 "기지정되어 있는 사적 제124호 덕수궁 지정사항에 포함 지정하기로 함"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이러한 중복지정문제로 그후 약현성당 등이 <대한민국 관보> 1977년 11월 25일자에 게재된 문화공보부 고시 제376호를 통해 사적 제252호 내지 사적 제258호로 일괄지정될 당시에 정관헌과 석조전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이러한 행정조치 또한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 <대한민국 관보> 1963년 1월 18일자(호외)에 게재된 문교부 고시 제161호 '창덕궁, 창경원, 덕수궁, 종묘의 지정번호 변경고시'를 보면, 사적 제124호 덕수궁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5-1번, 대지, 20,114평, 국유)에는 비고란을 통해 "지상건물 일체를 포함한다"는 표시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미 석조전 그 자체가 덕수궁의 일부로서 사적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고, 더구나 이러한 사실에 관보를 통해 고시까지 이루어진 판국에,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공연히 석조전(정관헌도 마찬가지의 경우)을 사적으로 추가지정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일인 것이다. 더구나 국가지정사적의 신분인 석조전을 가리켜 훨썬 더 낮은 등급의 '등록문화재'로 편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원인무효이며, 문화재 관계당국의 무감각과 불성실을 표출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요컨대 "지나침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경우에 딱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석조전 관련 참고자료목록]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略史", <朝鮮> 1934年 11月號, pp.39~103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野中健造(노나카 켄조), "石造殿建築の 經緯", 藤村德一(후지무라 토쿠이치) <居留民之昔物語 : 第一編> (朝鮮二昔會, 1927) pp.82~84
- [竣工建築物] 李王家美術館新館, <建築雜誌> 第52輯 第642號 (1938年 9月) pp.93~97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윤일주교수논문집편찬회,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윤일주, "경운궁(덕수궁)의 양관건축에 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제6집 (1965년 12월) pp.151~157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의 발자취(4) 독립문과 덕수궁의 양관", <공간> 80, 제8권 제11호 (1973년 11·12월호) pp.51~72
- 김순일, "경운궁의 영건에 관한 연구 ; 공사의 체제와 집행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년 6월)
- 한영우, "1904~1906년 경운궁 중건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한국학보> 제108집 (2002년 가을호) pp.2~30
- "문화재위원회회의록 (1977년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제12호 (1979년 10월) pp.195~198
- <대한민국 관보> 1977년 11월 25일자, "문화공보부 고시 제376호 약현성당 등 6건 사적지정"
- <대한민보> 1910년 3월 9일자, "양제신건(洋製新建)"
- <대한민보> 1910년 3월 9일자, "이사청 이접(理事廳 移接)"
-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30일자, "석전준공기(石殿竣工期)"
-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30일자 (국문판), "황태자어용실 필역 기한"
-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7일자, "석궁완공(石宮完工)"
-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7일자 (국문판), "건축필역"
- <황성신문> 1910년 4월 7일자, "석조궁전준공(石造宮殿竣工)"
- <황성신문> 1910년 4월 8일자, "일관배관(日官拜觀)"
- <황성신문> 1910년 4월 22일자, "낙성후만찬(落成後晩餐)"
-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22일자 (국문판), "화월루 연회"
- <매일신보> 1910년 12월 3일자, "석조전준공기(石造殿竣工期)"
- <매일신보> 1911년 2월 28일자, "덕수궁대정원(德壽宮大庭園), 총공비 오만원(總工費 五萬圓)"
- <매일신보> 1911년 3월 18일자, "대정원(大庭園)과 월랑훼철(越廊毁撤)"
- <매일신보> 1912년 8월 8일자, "[사진] 덕수궁 석조전"
- <매일신보> 1918년 1월 9일자, "어전의 수리와 제설비, 도착하실 때까지에 완성됨"
- <매일신보> 1918년 1월 15일자, "[사진] 왕세자전하의 어숙소된 석조전 (우상) 표층계, (동좌) 어거실, (하) 공실"
- <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15일자, "석조전 위에서 내부가 보인다고 영국영사관에서 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