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손탁호텔

분류 : 호텔건축
건축년도 : 1902년 신축, 1922년 철거
소재지 : 정동 29번지


미스 손탁에 관한 평전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그다지 많은 사실이 알려진 바는 없는 상태이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에, 그것도 일본인의 시각으로정리된 몇 가지 '제한된' 자료를 근거로 2차설명이 이루어지다 보니, 매우 불분명하거나 왜곡된 사실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다. 아래에서는 그 실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관련자료의 전부를 차례대로 옮겨두기로 한다.

(1) 코마츠 미도리(小松綠), <명치사실 외교비화(明治史實 外交秘話)> (중외상업신보사, 1927)(377~382쪽)[133. 음모의 뒤에 여성이 있다]동양통(東洋通)의 평론가(評論家)로 유명한 조지 케난은 조선사정을 시찰하러 왔을 때는 광무제(光武帝)에 대해 몹시 무례한 비평을 남기면서,"한국왕(韓國王)은 조선인 독특의 음모성(陰謀性)을 지니고 있는데다 젖먹이 같은 무신경(無神經)에다 보아인과 같이 집요하고, 지나인(支那人)과 같이 몽매하며, 그리고 호텐토트인과 같은 허영심(虛榮心)으로 가득 찬 사나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이토통감(伊藤統監)의 인격(人格)을 추칭(推稱)한 뒤에,"이토공과 같이 공정(公正)을 존중하는 문명류(文明流)의 정치가는 반드시 이러한 무절조(無節操)한 이교자(悧巧者)에 농락(籠絡)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예언하였는데, 이 예언은 불행히도 사실로 적중되어, 보호제도 실시후(保護制度 實施後) 이내, 광무제(光武帝)는 음모의 중심이 되어 충실(忠實)한 이토통감을 번롱(번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저자는 전후 10년에 걸처 여러번 광무제를 알현하고 또 그 언동을 주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데, 황제는 자안풍협(慈眼豊頰)하고 거지전아(擧止典雅)하여 확실히 대도(大度)의 군주(君主)처럼 보였으나, 여하튼 이토가 통감으로서 경성에 갔을 때에는 이미 43년이라고 하는 긴 성상(星霜, 세월)을 파란 많은 정해(政海)를 헤쳐왔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실부(實父)인 대원군 일파(大院君 一派)과 민비일족(閔妃一族)과의 중간에 끼어 간계사략(奸計詐略)의 와중에 부침(浮沈)하여 왔기 때문에, 양심(良心)은 황폐하고 분별(分別)은 어지러워, 오로지 급급하여 일시의 유안위락(유安爲樂)에만 굴탁(屈託)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황제의 주위에는 자기의 이해에만 몰두하여 국가의 휴척(休戚, 평안과 근심) 따위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환관잡배(宦官雜輩)가 많이 있었고, 또한 한인책사(韓人策士)의 배후에는 불의(不義)의 이득을 찾아 헤매고자 하는 외국인(外國人)의 유상무상(有象無象, 어중이떠중이)가 버티고 있어서, 한정(韓廷, 한국조정)이 마치 복마전(伏魔殿)과 같이 생각되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왕궁에 가까이 손탁 호텔이라고 하는 외인전문(外人專門)의 여관(旅館)이 있었다. 그 주인은 손탁양(孃)이라고 하는 도이치인(人)으로 용모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꽤나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시종(始終) 궁중(宮中)에 출입하며 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왕에게까지도 안내(案內)없이 근접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중보(重寶)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왕실(王室)과 외인(外人)과의 연락은 물론, 운동비(運動費)의 취차(取次, 중간전달)에 이르기가지 대저(大抵)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그 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경영했던 손탁호텔은 자연히 음모(陰謀)의 책원지(策源地)로 변하였다. 온갖 음모의 뒤에는 여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달리 빈계(牝鷄, 암탉)가 새벽을 알리는 조선의 일로서, 왕비엄씨(王妃嚴氏)는 이 손탁양과 서로 호응하여 여자의 얕은 지혜로서 사태를 배드(bad)로부터 워스(worse)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이토공이 광무제에 알현하는 때에는, 엄비(嚴妃)가 반드시 뒤의 장막 안에 몰래 숨어있어, 마치 시바이(芝居, 연극)의 쿠론보(黑補, 무대 뒤에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가 대사를 일러주는 것처럼 국왕에게 응대의 방법을 작은 소리로 지도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었다. 이것은 엄비만이 아니라 전후(前后)인 민비(閔妃) 등이 이보다도 일층 심하여 몸소 참견하여 민족(閔族)의 대신(大臣)을 조종하고, 섭정(攝政)을 자처한 대원군(大院君)을 배척했던 탓에, 결국 대원군이 노여움을 드러내어 임금 곁의 간신을 제거하고자 일본장사(日本壯士)를 사주하여 황료치(荒療治, 단호한 조치 또는 잔인한 살상)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민비암살사건이다.)엄비는 민비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손탁이라고 하는 외국인의 짝이 되었던 것인데, 그 음모는 국제적 중대미를 띤 모양이 되었으므로 그 해독은 도리어 심각하였다.[134. 손탁양(孃)의 누화(淚話)]
손탁호텔의 밀실(密室)이 외교적 음모의 상담소(相談所)가 되어 있었던 것이나 일한병합(日韓倂合) 이전에는 치외법권(治外法權)이 존재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토통감의 위광(威光)에도 아직 정위(情僞, 진정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저자(著者)는 외국영사 등과의 교제상, 자주 손탁호텔에서 연회를 했던 것인데, 어느 날 저녁 손탁양을 붙잡고 얘기를 걸어보았다. 그 무렵은 벌써 50가량의 노양(老孃)이었는데, 그렇게까지 간녕(奸녕)한 인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시험삼아"국왕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국왕을 위해서 되지도 않을 음모를 하고 있었는가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국왕의 몰락으로 되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물어보았다.그랬더니 손탁은"세간의 사람들이 나를 비상(非常)한 악인(惡人)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걸 전해듣고 분하고 분하여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단지 심부름의 역할을 의뢰받은 것뿐으로, 내가 먼저 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임금에게서 맡겨진 일의 선악(善惡)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내가 거절하면 반드시 다른 한인(韓人)이거나 외인(外人)이거나가 인수하라고 정해진다. 예를 들면 뭔가 국왕으로부터 전언을 의뢰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융통성이 좋은 것처럼 얼버무리는 지라 임금의 의사와 반대되는 결과로 되는 일이 간혹 있는데, 나는 국왕이 분부하신 그대로 언제나 정직(正直)하게 중간에서 전달을 했다. 임금께서 내증(內證, 비밀스럽게)으로 오만원의 운동비(運動費)를 건네주신 일이 있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라면 이 가운데서 일만이나 이만은 도중에 착복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한푼도 호마화(胡麻化, 고마카스, 속이다)하지 않고 전부 보내주었다. 다른 사람이 만착(瞞着, 속임수)하는 것을, 나는 정직하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악익(惡人)이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눈물과 더불어 얘기했다. 이 손탁양은 도이치(독일)인이지만, 영불어(英佛語)에도 조선어(朝鮮語)에도 매우 능통했으므로 사방팔방에서 중보(重寶)가 되었던 것이다. 손탁의 손을 거쳐, 왕실로부터 돈을 인출했던 자는 수도 없지만, 그 중요한 자는 영국인 토마스 베셀(베델), 이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韓文) 및 코리아 데이리 뉴스(영문)의 양신문을 발행하며 왕성하게 배일론(排日論)을 고취하던 자. 그 다음은 미국인 할버트(헐버트) 및 콜브란으로, 전자(前者)는 학교교원(學校敎員)이면서도 정치운동에 부신(浮身)을 했던 자이고, 후자(後者)는 전차(電車)의 차장(車掌)에서 일약 전기회사사장(電氣會社社長), 광산회사사장(鑛山會社社長)이 되어 거만(巨萬)의 부(富)를 이룬 자. 그리고 또 도이치인 크뢰벨 부처(夫妻) 등도 모두 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험가(冒險家)일 뿐이었다. ...... (하략)

(2) 키쿠치 켄조(菊池謙讓), <조선잡기(朝鮮雜記)> 제2권 (鷄鳴社, 1931)
한국(韓國)의 근대사(近代史)에 등장(登場)했던 여성(女性)......(98~105쪽)제2 호텔의 주인공 미스손탁[손탁의 소전(小傳)] 미스손탁의 등장을 읽음에 있어 그 소전(小傳)을 말한다.손탁은 독일이 전승(戰勝)의 조건으로 프랑스에서 할양(割讓)받은 알사스 로렌의 태생이다. 여동생의 남편이 러시아 주한공사인 웨베르였던 관계로 서기 1885년 웨베르 공사에 수종(隨從)하여 경성(京城)으로 왔다.손탁양이 경성에 왔던 때는 32세의 묘령(妙齡)이었다. 그 온화한 풍모와 단려한 미모는 경성외교단(京城外交團)의 꽃이었다.경성에 와서 몇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그녀는 웨베르 공사의 추천에 따라 민비(閔妃)에 소견(召見)되고, 왕궁의 외인접대계(外人接待係)에 촉탁(囑託)되었다. 자주 민비에게 불려가서 서양요리(西洋料理)의 이야기랑 음악회화(音樂繪畵)의 일 등을 아뢰었다. 1895년 정동(貞洞)에 있는 왕궁부속의 토지가옥을 하사받고, 외인접대 외에 왕궁친근의 귀족에게 서양식기(西洋食器)를 들여놓거나 서양실(西洋室)의 장식 등을 중개도 하면서 살았는데, 왕궁내의 서양식은 손탁양의 지휘에 따라 행해졌다.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되거나, 또 왕궁출입의 외국인도 거의 손탁의 집을 그 회합소로 삼았다.1902년 10월, 미리 공사중이던 양관(洋館)이 준공되매, 공연(公然)히 손탁호텔이라 불렀으며, 그 윗층은 왕궁귀빈의 객사(客舍)로 충당하고, 그 아래층은 보통의 숙박, 집회, 식탁으로 충당하였는데, 손탁양의 거주공간도 아래층으로 정하였다.1904년 11월, 일본에서 이토공(伊藤公)이 김대비(金大妃)의 훙거(薨去)를 조문(弔問)하고자 특파대사로 내한하였다. 이때 왕궁의 객관(客館)이었던 대관정(大觀亭)은 하세가와대장(長谷川大將)의 관저(官邸)가 되어 있었으므로, 손탁호텔을 대사의 여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주: 1904년 11월이면 황태자비 민씨의 장례인 듯하고,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내한한 것인지는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위의 내용은 여러 모로 착오인 듯함.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와서 정동에 숙소를 정한 때는 1904년 3월의 일로 확인됨.]
1909년 9월, 손탁양은 조선을 물러났다. 그의 친구는 거의 돌아갔고, 그의 우방은 패전하여 조선에서 구축(驅逐)되었다. 그녀가 조선에 왔을 때는 30세의 단려한 꽃과 같은 미모를 지녔으나, 그 떠남에 있어서 훤하던 풍협(豊頰)과 빛나던 완용(婉容)은 파란 많은 조선의 30년사를 짊어진 듯, 그 두둑해진 돈주머니의 무게보다도, 내동댕이쳐진 경성(京城)의 풍파(風波)에 의해 쫓겨나는 것처럼 돌아갔다.그는 고국에 돌아가자마자 명승(名勝) 지구인 칸에 청상(淸爽)한 별장(別莊)을 지었다. 그곳에다 극동의 왕국에서 가져온 재산을 쌓아두고, 유유히 만년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재산의 대부분은 여동생인 웨베르부인의 명의로 러시아의 은행에 저금되어 러시아의 기업에 투자되었다. 이윽고 러시아 혁명, 공상정부의 적화는 손탁의 저금도 투자도 한꺼번에 몰각(沒却)시켜버렸다. 극동왕국의 말기를 목격하고, 극동제국의 패망을 바라보며, 그는 일대의 영화가 꿈과 같이 말살된 채로, 1925년 러시아에서 객사(客死)했다. 그때 그는 71세의 노양(老孃)이었다.
손탁의 형제는 3인으로, 그 동생은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가 전사했고, 그 여동생은 웨베르부인으로 지금도 여전히 러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손탁호텔은 한때 보에르(Boher)에 위임되어 있었다가, 1918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매각되었다.
[미스손탁은 러시아와 조선의 다리] 러시아공사 웨베르는 서기 1885년 경성에 도래(到來)하였다.
지나(支那, 중국)도, 일본(日本)도,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했다는 것은 마치 바위위에서 포효하는 맹호의 자태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지나에서 전해지는 비평도, 일본에서 날라오는 얘기를 따르더라도, 러시아공사가 경성에 주재하는 것은 국제의 폭풍이 언제 불지모르는 근심거리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전전긍긍하면서 러시아공사를 맞아들였다.
웨베르공사는 북경을 거쳐 경성에 당도하자 지나의 풍문이나 일본의 평판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온화하고 침묵하여 조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없었고, 양국의 통상에 있어서도 서두르는 것이 없이 가능하다면 경흥(慶興)과 러시아 국경의 육상무역을 개설하자는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반하여 지나는 임오군란, 갑신전변에 다수의 군대를 사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속국(屬國)의 대우를 행하여, 드디어는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권력을 부여하였는데, 마치 위안스카이는 조선총독(朝鮮總督)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지나의 그러한 태도는 민비(閔妃) 및 민족정부(閔族政府)에 있어서는 만족될 수 없었다.
때마침 대원군(大院君)은 이홍장(李鴻章)과 자주 회견하고 청국의 후원을 얻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는데, 지나는 대원군의 귀국을 국왕의 효도에 따른 것으로서 조정의 은택(恩澤)이라는 것을 퍼뜨리면서 돌아오게했다. 민비는 대원군의 귀국을 보며 한가하게 있을 까닭은 없어서, 벌써 이에 대항할 러시아의 강대함을 배후에 끌어들였다. 민비는 위안스카이에 웨베르로써 대항시키려던 심산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러시아공사와 왕궁 사이에는 친밀한 외교도로가 개설되었다. 국제정책의 궤도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미스 손탁은 그 도로를 왕래하면서, 그 궤도를 왕복할 노한(露韓)의 비밀함(秘密函)을 운반하는역할을 맡았다.
러시아 일류의 외교정략(外交政略)은 먼저 손탁양에게서 제1보를 내디었는데, 1888년 파기된 노한의 밀약(密約)은 뭴렌도르프의 반기(叛旗)와 손탁양의 어사(御使)로서 성립된 것이었다. 민비가 손탁양을 가까이한 제1의 이유는 배후의 러시아와 통신(通信)하는 데 있었다.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와 손탁 저택] 서기 1885년 하반기부터 정동의 손탁집에 회합한 정객신사(政客神士)로서 중요인물은 전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오래도록 아메리카에서 유학했던 신사 서재필(徐載弼), 일본과 아메리카에 유학했고 신진의 논객으로서 청년간에 환영을 받았던 윤치호(尹致昊), 미국공사관서기관이며 또한 민씨일족의 수재로서 촉망을 받던 민상호(閔商鎬), 궁내의 예식관(禮式官)이던 이학균(李學均), 왕궁의 용달인(用達人)으로 부자였던 이봉래(李鳳來) 등 모두가 아메리카인사와 친밀한 사람들이어서, 세상에서 이르기를 친미파(親米派)로 칭해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청전역(日淸戰役, 청일전쟁)후, 일본이 전승의 여위(餘威)로써 일본 단독으로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면서 일본 독점으로 조선의 개혁을 전담하는 것에 호응하지 않고, 일본의 세력을 배척하며 일본의 문화를 구축하고자 그 평정소(評定所)로 손탁의 집을 차입(借入)하였고 손탁양도 또한 그들의 구락부에 충당되는 것을 승인하여, 바야흐로 손탁 저택은 배일파(排日派)의 집회소(集會所)가 되었다.
이 구락부는 10월 8일 사변(을미사변을 말함) 이래 아연(俄然) 기세가 올라 1895년 말부터 1896년 초에는 러시아파도, 프랑스파도, 일본을 제외한 제국파(諸國派)가 합류하여 이 구락부로써 일본 친근의 내각을 포위공격했다.
왕궁의 외인접대계(外人接待係)인 손탁양은 배일단(排日團)의 식당(食堂)을 알선하고, 배일파의 집회소 지배인이 되었다. 그녀는 왕궁의 요리번인(料理番人, 감독)에서 일전(一轉)하고 궁중의 어화장부옥(御化粧部屋, 실내장식)으로부터 도약하여, 궁전의 접대소에서 벗어나 정객상수(政客相手)의 비밀집합수 주인공이 되었다. 정동구락부의 거두였던 이완용은 10년 후에는 배일파의 제일선에서 친일당(親日黨)의 제1선으로 전회(轉回)하였을 때, 당년의 후원자였던 손탁양은 조선을 버리고 고국(故國)의 청산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재차 정동구락부의 리더와 악수의 고별을 하지 않았다.
[손탁의 평판] 미스 손탁은 프랑스인의 혈통이지만 그녀의 국적은 독일(獨乙)이었으며, 게다가 그 일생은 러시아제국과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30세 때, 러시아공사 웨베르에 수행하여 내한(來韓)한 25년간 러시아에 희생하여 그의 최후까지 러시아세 그 생명과 재산과 명예까지도 헌신했다
그녀는 풍미한 풍모를 지녔다. 진령군(眞靈君)의 안색과 같이 자비와 온정과 관화와는 그에 대한 호감은 충분했으며, 그는 암흑으로 둘러쳐진 정계(政界), 음탕방종에 빠져든 전궁생활(殿宮生活), 비밀에 던져진 외교관의 악옥생애(樂屋生涯, 이면세계)에 빠져들어, 그녀의 미모를 손상시키거나 그녀의 품성을 더럽히는 추성(醜聲)에 휩싸이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굳건히 사랑하며, 굳건이 믿는다는 소중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용되었던 2, 3인의 사용인(使用人)은 아직 오늘날까지도 잔존해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손탁양의 친절했던 것, 무슨일에도 정도로서 확실하게 일을 했던 것을 상찬(賞讚)했으며, 특히 그녀의 자애심(慈愛心)은 완전히 그들의 추억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에 전속되고, 경운궁(慶運宮)으로부터의 밀사(密使)가 최후의 활동을 하고자 브라디보스톡으로, 상하이로, 페테르부르그로, 파리로, 헤이그로 분주할 무렵, 그도 역시 표연(飄然)히 고국으로 떠났다. 짐작컨대 그의 포켓 가운데는 비밀문서의 몇 조각이라도 들어있지 않았을까

(3) 경성부, <경성부사> 제1권 (1934)
(651~654쪽)
[손탁양] 러시아공사 웨바(=웨베르)에 관련하여 기술할만한 것은 손탁양(孃)의 활약이다. 그녀는 개국 494년(명치 18년, 서력 1885년) 10월 웨바가 영사(領事)로서 착임했을 때, 동반하여 입성(入城)했던 자로, 알사스 로렌의 태생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그후 수년을 거치면서 웨바의 추천에 따라 궁정(宮廷)의 외인접대계(外人接待係)에 임명되어, 본업무 외에 국왕 및 양반의 서양식기(西洋食器), 양식실내장식품류(洋式室內裝飾品類)의 구입을 떠맡아 왕궁내 양식의 제조도(諸調度)는 전부 다 이를 마련하였다.
뒤이어 누차 왕비(王妃)에게 불려가서 서양사정에 대한 얘기 상대가 되었다. 그녀는 재기환발(才氣煥發)하여 영불어(英佛語) 및 조선어(朝鮮語)에 숙달하여 왕비는 물론이고 드디어는 고종(高宗)마저도 안내(案內)없이 지척에 갈 수 있기에 이르렀다.
[정계의 이면과 손탁양] 왕비가 노국(露國, 러시아)의 세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손탁양 및 웨바부인을 매개로 했던 일이 많았고 또 노국이 한국에 세력을 부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면 활동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그녀는 또 단지 궁정뿐만 아니라 각방면으로도 중용(重用)되어 궁정에서 지출하는 각종운동비의 수수는 거의 그녀의 손을 거치기에 이르러, 일개 부인이면서도 그 세력은 왕성한 점이 있었다.
아울러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거듭 행해졌던 음모사건에도 접촉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녀에 의해 운동비를 얻은 주요한 인물들은 배일지(排日紙) 대한매일신보,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간했던 영국인 토마스 베셀(베델), 학교교사(學校敎師)로 있으면서 정치운동에 몰두했던 미국인 할버트(헐버트), 전기회사장(電氣會社長) 미국인 콜브란 및 독일일 크레벨 부처(夫妻) 등이었다고 전한다.
[손탁호텔과 배일파] 손탁양은 명치 28년(즉 1895년)에 이르러 고종으로부터 경운궁(慶運宮)과 도로를 마주보는 서방의 지소(地所)의 가옥을 하사받았는데, 그 저택은 외인(外人)의 집회소(集會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청전역후 친미파(親米派) 일당이 조직했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도, 그 회관을 지금의 법원 앞에 건설하기 까지는 손탁의 집으로써 집회소했던 것이다. 명치 35년(즉 1902년) 10월부터 구가옥을 헐고 양관을 건축하여 호텔을 경영하여, 2층은 귀인(貴人)의 객실로 하고 1층은 보통의 객실과 식당으로 충당하였다. 손탁호텔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인용출처: 키쿠치 켄조의 조선잡기 권2, 코마츠 미도리의 외교비화]
명치 37년(즉 1904년) 3월 및 동 38년(즉 1905년) 11월 이토후작(伊藤後爵)이 입성(入城)할 때에도 이 호텔에 숙박하였다. 손탁양은 명치 42년(즉 1909년) 9월 5일 재주(在住) 24년으로서 경성을 떠났으나, 귀국후 여기저기 유전인생(流轉人生)의 괴로움을 맛보았으며, 대정 14년(즉 1925년) 71세로써 러시아에서 객사했다고 전한다. 손탁호텔은 대정 7년(즉 1918년)에 이르러, 사립학교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이를 매수하고 후에 이를 헐어내어 신교사를 건축했다. 현 정동 32번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소재지 북방의 일부가 곧 그 터전이다.

(4)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 [에밀 마르텔(Emil Martel) 회고]
(199~200쪽)
[손탁호텔, 손탁여사]
손탁여사는 알사스 태생으로 그녀의 누이(妹)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씨 부인의 손위시누이(嫂, 올케)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그녀는 웨베르씨와 더불어 조선에 건너왔으나, 항상 노국공사관(러시아공사관) 내에 기거하였다.
때마침조선의 국왕이 동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머무르게 되어 임금의 식사, 기타 만단의 세화(世話, 돌보아줌)를 동 여사가 인수하게 되었는데, 왕은 유달리 손탁여사를 마음에 들어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는 왕궁(王宮)의 조리(調理)부터 연회(宴會)의 어세화(御世話, 주선) 일체를 맡기기에 이르럿다. 이리하여 왕은 그후 다시 그녀를 위해 토지를 사들여 가옥을 지어 하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큰 신식의 건물이었는데, 그녀는 거기에 손탁호텔이라고 이름을 짓고 직접 그 여장(女將=오카미, 여주인 겸 총지배인)이 되어 호텔을 경영하게 되었다. 현재 정동(貞洞)에 있는 사립 이화학당(私立 梨花學堂)의 건물이 그 터이다.
당시 그녀는 45세 가량의 뚱뚱한 사람으로 미망인(未亡人)이었다. 1907년, 일로전쟁(日露戰爭) 종료후 그녀는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씨에게 양도하고 막대한 돈을 쥐어 프랑스로 귀국하여 남방에 '니스'라고 하는 지방의 벽촌에 별장을 사들여 살고 있었으나,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죽어버렸다.
아직 왕성(王城)에 있던 때, 여사는 연회계(宴會係)에 많은 뽀이들 가운데서 한 사람의 조선인을 골라 양자(養子)로 삼고 임금께 청하여 관도(官途)에 앉혔다.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조롱했던 것이나, 그 양자는 귀국할 제에 여사와 더불어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 후 양자는 여사의 곁에서 벗어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고도 들었으나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관용(官用) 호텔]
왕성내(王城內)에 있어서 여사의 세력은 큰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녀가 경영했던 손탁 호텔과 같은 것도 전적으로 임금의 신임에 따른 결과로 하사된 것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명성을 날린 호텔도 관용(官用)호텔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손님의 종류도 자연히 각국대관(各國大官)이 으레 있었다. 이를테면 키시나경(卿), 이토경(伊藤卿), 각국육해군대장(各國陸海軍大將) 등 아주 빼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귀국할 제에는 그 처분(處分)에 잠시 복잡한 사정이 있었으나, 결국 그녀의 재산이 되어 이를 처분하여 돈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5) 문일평, <사외이문비화 : 호암전집 제3권> (조광사, 1945)
(75~76쪽)
66. 손택양(孫澤孃)호텔
서양여자(西洋女子) 손택(孫澤)호텔은 비록 규모(規模)는 적으나마 조선(朝鮮)에 있는 근대식(近代式) 호텔의 효시(嚆矢)가 될 것이다.
상업(商業)과 교통(交通)이 발달(發達)되지 못한 조선(朝鮮)에는 예로부터 여관(旅館)이 발달(發達)되지 못하였다.
여객(旅客)을 숙박(宿泊)케 하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화(物貨)를 중개(仲介)하는 물상객주(物商客主)가 있기는 있었으나 이것은 모두 오늘날 의미(意味)의 여관(旅館)은 아니다.
조선(朝鮮)이 외국(外國)과 상통(相通)하게 된 이후(以後) 빈번(頻繁)히 내유(來遊)하는 외인여객(外人旅客)의 유숙(留宿)할 여관(旅館)의 설비(設備) 하나이 없었음은 조선인(朝鮮人)의 수치(羞恥)가 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문화중심(文化中心)인 대경성(大京城)에 근대식(近代式) 호텔이 생긴 것은 요사이 일로서 지금부터 한 3, 40년전(年前)만 하여도 일본인(日本人)의 경영(經營)에 속(屬)한 파성관(巴城館)호텔 같은 것이 있을 뿐이오 이밖에 서양인(西洋人)의 경영(經營)으로는 팔레스호텔과 손택(孫澤)호텔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손택(孫澤)호텔이 그 규모(規模) 및 그 설비(設備)에 있어 오늘날 조선(朝鮮)호텔에 비(比)하면 동일(同日)의 어(語)가 아니지마는 그 당시(當時)에는 경성 유일(京城 唯一)의 호텔이어서 열방(列邦)의 사절(使節)과 귀빈(貴賓)이 오면 반드시 여기서 유숙(留宿)하게 되었으며 이런 의미(意味)에서 손택(孫澤)호텔은 조선근대식(朝鮮近代式)호텔의 효시(嚆矢)라고 볼 수 있다. 적연와제(赤煉瓦製)의 커다란 이층양옥(二層洋屋)이 정동가상(貞洞街上)에 외연(巍然)히 솟아 있었는 바 그 주인 손택(主人 孫澤)은 독일처녀(獨逸處女)로 그 이름을 한역(漢譯)하여 손택(孫澤, 손탁)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조선(朝鮮)에 오게 된 것은 노국공사(露國公使, 러시아공사) 위패부인(韋貝夫人, 웨베르부인)과 인사(姻査)의 관계(關係)가 있는 때문이오 또 호텔을 경영(經營)하게 된 것은 노관파천시(露館播遷時, 아관파천시)에 고종(高宗)께 지성(至誠)으로 봉사(奉事)한 그 보수(報酬)로 거액(巨額)의 내탕(內帑)을 내리어 '호텔'을 지어준 것이니 손택(孫澤)호텔은 이렇게 구한국황실(舊韓國皇室)의 후원(後援)아래 손택(孫澤)이 경영(經營)하던 것이다.
손택양(孫澤孃, 손탁양)은 당시(當時) 왕궁(王宮)을 위요(圍繞)한 여러 여성(女性) 중에 있어 일종이채(一種異彩)를 놓았었다.

상세설명

손탁호텔은 구차한 설명을 달 필요도 없이 근대시기 서양인들에 의해 설립된 숙박시설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도 주목을 받는 공간이었다.
흔히 이곳을 일컬어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인호텔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손탁호텔에 앞서정거장호텔(서대문역 앞)과 프렌치호텔(대안문 앞) 등이 있었으므로,이 대목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이 설령 최초의 서양인호텔은 아닐지라도 근대사의 전개에 있어서 그 존재의미는 남다르다.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이 운영했던 이곳은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던 시절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호텔이자 사교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운명을 뒤흔들어놓았던 1905년 을사조약 당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경운궁 인근에 터를 잡고 여러 날을 머물려 조약체결의 압박을 가했던 곳이 여기였다. 또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로 넘어오던 시기에 외세의 흐름에 따라 일진일퇴했던 여러 정치세력의 집합소이자 본거지였으며, 특히 아관파천 이후 손탁 자신이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은 밀사의 역할을 수행했던 때가 많았으므로 숱한 근대사의 비화를낳았던 장소가 이곳 손탁호텔이었다. 대한제국의 쇠망기에 반일파로 이름이 높았던헐버트와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의 활동도 주로 이곳 손탁호텔에서 이루어졌다.
1885년 조선에 부임하던 러시아공사 웨베르(Carl Ivanovich Waeber)를 따라 32세의 나이로 처음 서울에 온 손탁은 독어, 불어, 영어에다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탁월한 언어감각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시의 궁중과 연결고리를 만들었으며, 서양식 요리와 실내장식 등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자연히 손탁의 손을 거쳐 국왕과 왕비에게 소개된 서양식 관습과 풍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그가 서울 외교가의 중심인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02년 10월에 정식으로 개설된 손탁호텔은, 원래 1888년 10월 이후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가 살던 곳이었으나1896년에 손탁이 이를 매입하여 이곳에다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었다. 간혹 손탁호텔의 건립부지는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땅이라는 주장이 통용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고증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한국외교문서> 권 18, 아안(俄案) 2에 보면'부로공관좌변 양관(附露公館左邊 洋館)을 손탁여사에게 하사하는 증서'가 수록되어 있고, 여기에 "1898년 3월 16일자로 황성 정동 러시아공사관 대문 왼쪽 편에 황실소유의 방 5개가 딸린 벽돌건물(塼屋) 한 채를 덕국규녀(德國閨女) 손탁(宋多奇)에게 상으로 내려, 이로써그 노고를 치하한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그러한 주장의 근거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양관은 '정동 16번지' (현 캐나다대사관 위치)에 있던 것으로나중에 프램톤 하우스(Frampton House)와 이화여전 음악관 시절을 거쳐 해방 이후 하남호텔로 변모되는 바로 그 건물이 아닌가 판단된다.
또한 그 위치를 분명히 "러시아공사관 좌변"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므로, 길 건너편 쪽에 있던손탁호텔 자리와는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17년에 발행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보면 손탁호텔 자리인 정동 29번지 (1,184평)와 더불어 정동 16번지 (418평) 또한 그 소유자가 모두'독일국 손탁'이라고 표시되어 있다는 점도 이러한 관계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손탁빈관(孫澤賓館) 또는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호텔은 황실(Imperial Household)의'프라이빗 호텔(Private Hotel ; 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호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건물의 설계자와 시공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간혹 건축양식과 시대상황에 비추어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것으로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고있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 당시 윗층은 귀빈실의 용도로 사용하였고, 아랫층은 일반객실과 식당 등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손탁 그 자신의 거주공간도 아래층으로 정하였다.
1910년대의 광고문안에 따르면, 손탁호텔에는 '각방에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이 있고,바(Bar)와 대형 당구장(Billiard-room)이 든 별관'이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에다 프랑스인 요리장이 감독하는 식당과 널찍한 정원도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등 각국의 언어로 접객이 가능하고, 통역자, 가이드, 짐꾼, 승마(乘馬)의 제공도 가능하다고 표시하고 있다.
원래 손탁의 집은 호텔로 전환하기 이전부터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되곤 했다. 이에 대해 고종황제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 분쉬 박사는 1902년 4월 9일자로 작성한 서한을 통해 손탁의 집에 자주 내왕한 일을이렇게 적었다.
" ...... 저는 요리사를 지난달 말에 해고해버렸고 지금은 황실의 으뜸시녀인 손탁(Songtag)여사한테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집 요리는 일품입니다. 손탁여사는 한국에 온지 벌서 18년이나 되었습니다. 벨기에영사와 프랑스공사의 비서도 거기서 식사를 하며 프랑스어로 대화를 합니다. 점식식사는 가져오게 하며 저녁은 궁에서 퇴근하면 거기로 가서 먹습니다. 여사의 집은 궁 바로 뒤에 있습니다."
이렇듯 주요한 정치인물이나 서울주재 외국인들의집합공간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손탁호텔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세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꾸준히 그명맥을 이어갔으나,결국 1909년에 이르러 손탁은 이 호텔을 다른 서양인 호텔이었던 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넘기고 그 자신은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행로를 걸었다.
이후 '손탁이 없는 손탁호텔'은 그 이름만은 그대로 지켰으나, 경영난 탓인지 1917년에 그 건물 부지가 이화학당에게 넘겨져 여러 해 동안 여학생 기숙사(메인홀 기숙사의 별관)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1922년에 프라이홀(Frey Hall)의 신축을 위해 헐려지면서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손탁호텔의 자리에 세워진 프라이 홀은 1922년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준공되었으나,1975년에 이르러 화재로 전소되어 철거되었다.
그렇다면 손탁호텔의 여주인, 미스 손탁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지 독신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통칭 '미스 손탁(Miss Sontag)'라고만 통했던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출신, 배경, 행적 등에 대해서는 정작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근대사의 격변기에 그녀가 지녔던 위상에 비해서는 이렇다할 회고담이나 전기록조차 남겨지질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흔히 손탁의 신분에 대해서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처형으로 알려진 자료가 많이 있으나, <윤치호일기> 1896년 7월 2일자에서 채록한 내용에 따르면 "웨베르 공사부인의 남동생인 미스터 맥(Mr. Maack)의 부인되는 사람이 손탁의 여동생"이라고 하였으므로 결국 손탁은 '웨베르공사의 처남의 처형'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손탁의 신분에 관한 얘기는 이러한 정도가 전부이다. 그녀가 우리나라에 오기 이전까지 무엇을 했으며, 결혼은 하였다거나 경력이 무엇이라거나 하는 따위는 전혀 확인되거나 알려진 바가 없다. 한때 휴가차 본국으로 일시귀국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1885년 이후 1909년까지 한결같이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팔레(패리스)호텔의 주인 보에르(J. Boher)에게 [일설에는 손탁호텔의 뽀이로 있던 장경춘(張慶春)과의 공동경영으로 넘길 계획이었다고 전함]손탁호텔을 넘기고 이땅을 떠날 당시 순종황제를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여 은으로 만든 술잔과 상당한 금품 및 물종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가 귀국할 때 한국인 한 사람도 동반하였다는 내용이다. 프랑스인 교사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이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일찍이 손탁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많은 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양자로 삼고 임금께 청하여 관직에도 앉혔던 적이 있었는데, 그 양자는 귀국할 제에 손탁여사와 더불어 프랑스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그 후 양자는 여사의 곁에서 벗어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고도 들었으나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윤치호일기> 1905년 6월 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미스 손탁이 윤치호에게 말하길, 그의 딸을 자신에게 양녀로 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 윤치호는중국인 처 마애방(馬愛芳, 1871~1905)이 병으로 막 세상을 떠난 상태였으며, 그의 딸 로라(Laura)는 1894년에 태어난 장녀 봉희(鳳姬)를 말한다.
"[5월 15일에] ...... 저녁을 마치고 미스 손탁의 방으로 그녀를 찾아갔더니, 위로의 말이 너무도 애절하여 나로서도 간신히 참긴 했지만, 크게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 그녀도 역시 눈물을 흘렸소이다. 그리고 먼저 내 이마에, 다시내 뺨에도 입마춤을 하였다오. 그녀는 내게 우리 로라(Laura)를 자기의 양녀(adopted daughter)로 줄 수 있는지를 물었소이다. 자기가 로라를 가장 잘 돌볼 수 있다며, "내가 가진 것을 남겨줄 누군가가 필요하답니다"라고 말을 했다오. 여보, 어찌해야할지 말해주오. 나는 우리 로라를 한국 가정에 시집을 보내는 건 싫소이다. 그건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오. 그리고 한국에는 그녀를 위한 학교가 없어요. 만약에 내가 미스 손탁의 지속적인 사랑과 보살핌에 대한 확신만 선다면, 나는 우리의 딸을 그녀에게 가도록 허락했을 것이요. 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미스 손탁은감정적인 충동에 의해 그 순간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건 내가 지켜봐야겠소."
만약에 이 일이 성사되었더라면, 손탁은 우리 나라와 더 깊은 인연을 맺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윤치호 일가를 통해 손탁에 관한후일담도 좀 더 소상하게 남겨졌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았을까 말이다.
그런데 근대사의 격랑에 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인의 말로는 더욱 극적이다. 일본인 키쿠치 켄조(菊池謙讓)는 <조선잡기> (1931)라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9월, 손탁양은 조선을 물러났다. 그의 친구는 거의 돌아갔고, 그의 우방은 패전하여 조선에서 구축(驅逐)되었다. 그녀가 조선에 왔을 때는 30세의 단려한 꽃과 같은 미모를 지녔으나, 그 떠남에 있어서 훤하던 풍협(豊頰)과 빛나던 완용(婉容)은 파란 많은 조선의 30년사를 짊어진 듯, 그 두둑해진 돈주머니의 무게보다도, 내동댕이쳐진 경성(京城)의 풍파(風波)에 의해 쫓겨나는 것처럼 돌아갔다.그는 고국에 돌아가자마자 명승(名勝) 지구인 칸에 청상(淸爽)한 별장(別莊)을 지었다. 그곳에다 극동의 왕국에서 가져온 재산을 쌓아두고, 유유히 만년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재산의 대부분은 여동생인 웨베르부인의 명의로 러시아의 은행에 저금되어 러시아의 기업에 투자되었다. 이윽고 러시아 혁명, 공상정부의 적화는 손탁의 저금도 투자도 한꺼번에 몰각(沒却)시켜버렸다. 극동왕국의 말기를 목격하고, 극동제국의 패망을 바라보며, 그는 일대의 영화가 꿈과 같이 말살된 채로, 1925년 러시아에서 객사(客死)했다. 그때 그는 71세의 노양(老孃)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지만 만약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회고록을 남겼거나 누군가 이 여인의 존재에 주목하여 한 권의 전기물이라도 남겼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흥미롭고 생생한 근대사의 비화를 풍부하게 되새길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목록]
- 코마츠 미도리(小松綠), <명치사실 외교비화(明治史實 外交秘話)> (중외상업신보사, 1927), 377~382쪽, "손탁양(孃)의 누화(淚話)"
- 키쿠치 켄조(菊池謙讓), <조선잡기(朝鮮雜記)> 제2권 (鷄鳴社, 1931), 98~105쪽, "한국(韓國)의 근대사(近代史)에 등장(登場)했던 여성(女性) : 제2 호텔의 주인공 미스손탁"
- 키쿠치 켄조(菊池謙讓), "한말(韓末)에등장(登場)했던 여성(女性) : 제2 호텔의 주인 미스손탁", 와다 야치오(和田八千穗)·후지하라 키조(藤原喜藏) 공편, <조선의 회고(朝鮮の 回顧)> (近澤書店, 1945), 309~313쪽
- 경성부, <경성부사> 제1권 (1934), 651~654쪽, "손탁양과 손탁호텔" 관련항목
-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사(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회고], 199~200쪽, "손탁호텔, 손탁여사, 관용(官用)호텔" 관련항목
- 문일평, <사외이문비화 : 호암전집 제3권> (조광사, 1945), 75~76쪽, "66. 손택양(孫澤孃)호텔"
- Villetard de Laguerie, (1898, 1904)
- T. Philip Terry, (Houghton Mifflin Company, 1914)
- 정충량, <이화팔십년사> (이대출판부, 1967), 141~143쪽, "손탁호텔 매입경위" 관련항목
- 리하르트 분쉬,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 민영환 지음, 조재곤 편역, <해천추범(海天秋帆),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책과함께, 2007)
- 김원모, <개화기 한미교섭관계사> (단국대학교출판부, 2003)
- 김원모, "미스 손탁과 손탁호텔", <향토서울> 제56호 (1996년 12월), pp.173~220
- 김원모, "손탁양의 친로반일운동", <중재 장충식박사 화갑기념논총 : 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 김원모, "정동구락부의 친로반일정책", <한국사학논총 : 수촌 박영석교수 화갑기념논총> (탐구당,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