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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마르텔(Emil Martel: 1874-1949)

이름:에밀 마르텔(Emil Martel: 1874-1949)
직업:교육가
한국명:마태을(馬太乙)
국적:프랑스

상세설명

근대개화기에 법어학교(法語學校)의 교장이라는 신분으로 우리 나라와 첫 인연을 맺은 이래로 거의 한평생을 이 땅에서 살다가 끝내 안식처까지 마련한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은 자신의 이력도 이력이지만, 그 자신이 대학제국 애국가의 작곡가이자 대한제국 군악대 악장이었던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사위였다는 점에도 자못 주목이 된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신보사 기자인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의 손을 빌려 자신의 회고담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으로 엮어낸 바 있었는데, 이 책은 근대사 연구자들에게 비교적 인용빈도가 높은 참고문헌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여기에는 다소간 일본 편향적인 시각이 노출된 점이 거슬리긴 하지만, 근대 시기에 벌어진 역사사건이나 외교, 문화, 사회사 등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고 또한 여러 인물에 대한 증언이나 감상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어, 이러한 그의 회고담은 근대사의 이면을 탐구하는 데에 여러 모로 기여를 하고 있는 편이다.

에밀 마르텔은 1874년 12월 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프랑스인 세관리(稅關吏) 알퐁소 마르텔(Alphonse Martel)과 일본여인 루이스 곤도(Louise 近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중국 상해, 천진 등지의 프랑스 상사에서 근무하게 된 그의 부친을 따라 천진에 있는 프랑스중학교를 마쳤으며 다시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모국인 프랑스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그는 쌩 에띠엔느 광산학교(Ecole de Mine de St. Etienne)에서 4년간 대학생활을 마쳤는데, 그가 광산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외국인 광산기사에 대한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부친의 권고에 따라 결정한 일로 알려진다.

광산학교 졸업 이후에 자신의 부친과 더불어 상해해관(上海海關)에 근무하던 중 조선정부에 의해 법어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이때가 1894년 7월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기록에서 그 내용이 엇갈린다. 우선 마르텔 자신의 회고를 담은 <조선외교비화> (1934)에서는 거듭 청일전쟁 때인 1894년 7월에 인천항에 당도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본인 스스로가 하는 말이므로 기억의 착오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하겠다. 하지만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이 정리한 <외교사연표> (1904)에는 이와는 다르게 마르텔이 우리 나라에 온 때를 '1895년 10월 5일'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칙령 제88호로 외국어학교관제(外國語學校官制)가 공포된 것이 1895년 5월 10일이고, 법어학교가 정식으로 개설된 것은 다시 해를 넘겨 1896년에 이뤄진 일인데, 그가 1894년 7월부터 조선에 들어와있었다는 것은 전후 맥락이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셈이다. 아마도 자세히 설명되지 못한 그에 관한 이력이 따로 있지 않나 싶기도 하나, 이 부분은 잘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는 <조선외교비화>에서 조선에 건너와서 법어학교를 설립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233~235쪽) ...... 그 당시 허치슨(Hutchison)씨가 영어학교의 교장이 되어 제1번으로 외국어학교를 개설했다. 나는 당시 애써 조선에 왔던 것이나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소동으로 생도의 모집이 되질 않아 놀고 있었으므로, 허치슨씨의 학교에 도와주러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전쟁후 불란서공사(佛蘭西公使)가 조선정부에 대해 몇번이나 개교(開校)를 재촉하였지만,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하고 결국 교사설립(校舍設立)의 장소가 없다고 하는 것이 되어, 나는 부랴부랴 정동(貞洞)의 불란서공사관 앞의 자택(自宅)에서 식당에다 생도를 모집하여 교수(敎授)를 개시하였다. 그 당시의 생도는 18인으로 대개 양반의 자제였으나, 개중에는 대신(大臣)의 자제도 2인 정도 섞여 있었고 이들은 모두가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몇해전에 총독부의 학무국을 물러나서 현재 이왕직(李王職)에 근무하고 있는 이능화(李能和)씨도 당시의 생도이다. 또 현재 불란서영사관의 통역관을 하고 있는 윤정혁(尹丁赫)씨 (전 빠리 조선공사관 부 서기관)이랑 프랑스회사 경영의 광산에 근무하고 있는 이구만(李求萬), 김정종(金鼎鍾), 그리고 안후손(安厚孫) 등의 제씨도 모두 그 무렵 우리 학교의 생도였다. ...... 당시의 영어학교(英語學校)는 지금의 체신국(遞信局)의 구내에 있었는데, 현재도 그 건물은 뒤편에 남아 있다. 불어학교(佛語學校)는 경기도청(京畿道廳)의 뒤편에 수송동(壽松洞)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 일(日), 독(獨), 지(支)의 각 외국어학교는 안국동(安國洞)의 부근에 있었으나, 예전의 건물은 오늘날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그는 정동에서 거처를 마련하였으며, 그의 집은 곧 법어학교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프랑스공사관 자리와 인접한 곳으로 한때 외교관구락부로도 사용했던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르텔이 자신의 집에 개설한 법어학교는 잠시 동안만 이곳에 머물렀을 뿐 이 학교는 이내 수하동을 거쳐 박동(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일대)의 옛 육영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십여년 이상을 머물렀으며, 다시 1908년에 일어, 영어, 한어, 법어, 덕어 등 다섯개의 어학교를 합쳐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로 전면 개편하였다가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인 1911년에 해산되어 사리지는 과정을 거쳤다.

그 사이에 마르텔은 줄곧 법어학교교사로서의 고빙관계가 지속되었으며, 어학교습의 분야 외에도 한국정부와 관련한 여러 분야에서 두루 활동한 흔적을 남겼으나, 외국어학교의 해체와 더불어 끝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마르텔은 1905년 2월 7일에 명동성당에서 뮤텔 주교의 주례로 결혼식을 가졌는데, 그의 신부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자로 유명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큰딸 아멜리아(Amelia)였다. 이들 사이에는 2남 3녀를 두었으며, 맏딸인 마리 루이스(Marie-Louis, 1906년생)는 수녀가 되어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우리 나라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프랑스로 돌아간 마르텔은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참전군인이 되었는데, 처가의 나라와는 적대국이 되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 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매일신보> 1916년 8월 8일자는 그의 장인이 되는 프란츠 에케르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 어찐 일인고 하였더니 불행히 전쟁으로 인하여 금년 사월의 고용계약기한을 한정삼아 해고된 후 경성에서 여생을 보내이더니 작금에 병이 침중하여 욱정의 자기 집에서 6일 오후 9시반에 자는 듯이 운명하였더라. 이 덕국 음악가는 '프란스 에켈트'씨이니 일즉이 음악에 천재가 있어 본국에서는 제국악사장 노릇도 한 일이 있었고 유명한 비사맥에게 선택되어 일본에 파견된 수재이라. 명치 11년(즉 1878년)부터 35년(즉 1902년)까지 스물 다섯 해 동안 일본정부에 고빙되어 일본의 가곡을 서양음악으로 고치는 데 진력하였으니 지금의 국가 '기미가요'라는 것도 씨의 손으로 곡조를 지은 것이라. 그뿐 아니라 한국정부에 고빙된 뒤에 진력하였으니 '그 상제는 ㅡㅡ'이라 노래의 작곡에도 비상한 고심을 허비하였고 기타 이왕직의 양악대가 금일의 좋은 성적을 걷기에 씨의 공로는 실로 많다 할 것이라. 경성에는 다만 부인이 있을 뿐이오 아들 하나는 일본 신호(=고베)에 있고 또 하나는 군사가 되여 지금 덕국에 전장에 출진하였으며 그 사위 '마태을'군은 법국사람으로 지금 본국의 전장에 있어 사위와 아들이 적국으로 서로 대하게 되었더라."

종전 후 그가 다시 서울에 온 것은 1920년이었으며, 이때 영자지 '서울 프레스'의 번역사로 활동하는 한편 경성제대의 출범과 더불어 이곳에서 예과 프랑스어 강사가 되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의 약력에 대해서는 <조선외교비화> (1934)의 서두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바인데, 이곳에 수록된 내용을 참고삼아 옮겨보면 이러하다.

"에밀 마르텔 씨는 현재 벨기에국명예영사로 조선총독부 체신국촉탁,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불어강사, 동성학교 불어강사,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불어동호회 강사 등으로 있지만, 일찍이 테라우치총독의 시정기념일에 제하여 조선왹 및 문화사업의 공로자로서 훈사등(勳四等)을 수여받았다. 씨는 프랑스 리용 태생으로 거금 40년 전인 1894년, 부군과 더불어 상해해관에 근무하던 중 21세 때에 조선정부가 불어학교개설에 임하여 그 교장으로 초빙하여 도선(渡鮮)했던 것이다. ...... 가족은 부인과의 사이에 5명의 자녀가 있고, 장남은 일시 천진의 불란서군에 입영중이었으나 지금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젊은 학구(學求)이다. 씨의 현 거주는 경성부 북미창정(京城府 北米倉町)으로 ......"

그런데 일제 말기에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2차대전 발발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에 강제로 추방되어 중국 천진에 머물렀다는 정도의 얘기만 나와 있으나, 사실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중국에서 종전을 맞이하였고, 이후 1947년 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1949년 9월 19일에 서대문자택에서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살던 이 서대문 자택은 곧 자유당 시절 이기붕이 가옥이 되었던 그 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장인이 되는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지와는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이며, 그의 묘지석에는 간략히 "R.I.P.(고이 잠드소서)'라는 구절만 새겨져 있다. 1894년 이후 우리 나라와는 무려 50년이 훨씬 넘는 긴 인연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짧고도 함축적인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참고자료목록]

-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회고]
- 경성부, <경성부사> 제2권 (1936)
- 까를로 로제티, 서울학연구소,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 조르주 뒤크로, 최미경,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눈빛, 2001)
- 경기도박물관, "먼나라 꼬레 - 이폴리트 프랑뎅의 기억속으로" (경인문화사, 2003)
-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행사, "서울의 추억, 한·불 1886-1905"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고려대학교박물관, 2006)
- 이현종, "구한말 외국인 고빙고", <한국사연구> 제8집 (1972) pp.113~148
- 홍순호,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의 생애와 활동", <교회와 역사> 9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 홍순호, "한불인사교류와 프랑스 고문관의 내한", 한국사연구협의회, <한불수교 100년사> (1986) pp.95~132
- <대한민보> 1910.3.8일자, "법어교사 속빙"
- <한국일보> 1968.8.10일자, "한국에 바친 3대, 구한국 애국가 작곡자 에케르트씨 외손녀 대구수녀원에 생존, 양화진에 묘소 아버지도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