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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PVR

*정동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정동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도시화된 공간 곳곳에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존재하는 유적지 및 근대 건축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의 공간속에서 자랑스런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정동은 서울속의 역사문화거리로 탈바꿈하여 공연 및 전시, 관람 등을 총괄하는 관광문화의 명소로 세계속에 한국을 알리고 있다.

*정동길

정동의 동편인 대한문, 태평로, 영성문 일대가 궁궐(덕수궁)과 관계된 영역에 속한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정동 서편의 정동길 일대는 거의 전적으로 서양선교사 또는 각국외교관 등 외국인의 영역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곳을 일컬어 가장 흔하게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 또는 유럽인 거류지(European Settlement)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형편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또한 대한문 일대가 정동 안쪽을 드나드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였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서대문 일대는 정동의 끝자락이자 또 다른 시작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대한문에서 서대문까지 제법 길게 이어지는 정동길은 서양인들이 이곳으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통행로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대략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여경방(餘慶坊)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이룬 것으로 확인된다.

근대개화기 이후 정동 일대가 서양인들의 본거지로 변한 것은 1883년 미국공사관의 개설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리고 민간인 신분의 서양인 정착이 시작된 것은 그 이듬해인 1884년의 일로,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서울에 들어와서 미국공사관과 바로 이웃하는 장소에 터전을 잡은 것이 그 시초를 이루었다. 이들보다 나중에 우리 나라에 상륙한 서양인들은 그 신분이 외교관이건 선교사이건 간에 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마련하다보니, 수년도 못가 이 지역은 글자 그대로 서양인촌(西洋人村)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이 정동길의 오른쪽에는 미국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이, 그 위쪽으로는 러시아공사관이, 다시 이 길의 왼쪽에는 프랑스공사관이 포진하는 형상을 이루었으며, 선교구역도 대략 이 정동길을 경계선으로 양분되어 그 동쪽편에는 '미국 장로교선교회의 거주단지(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Compounds)'이 들어섰고 그 건너편인 서쪽 성벽 아래에는 '미국 감리교선교회의 거주단지(American Methodist Mission Compounds)'가 자리하게 되었다.

다만,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 영역의 확장이 시도되는 과정에서 궁궐지역에서 인접한 장로교선교회의 거주단지는 거의 대부분 해체되고 그 자리에는 궁궐에 부속된 전각들로 채워졌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동길 서편의 감리교선교기지는 그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날 이화여고에서부터 정동제일교회를 거쳐 배재고등학교 자리로 이어지는 공간이 대부분 그 영역을 지금껏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바로 이 당시에 '천만다행으로' 궁궐편입지역에서 벗어나 있었던 탓이 아주 컸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정동길은 개화기 이래로 서양인의 최초 정착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의 역할도 겸하였던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에서 정동길 일대는 '각국외교의 중심가'이자 '선교활동의 근거지'이자 '신학문의 발상지'이자 '근대문물의 전파지'였던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영성문고갯길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성문(永成門)이란 이름은 매우 생소하게 들리지만, 옛 경기여고 자리에 있었던 선원전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줄곧 '영성문대궐'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동제일교회 쪽으로 넘어가는 덕수궁돌담길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서도 그렇게 표현햇듯이 '영성문 고갯길'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지금의 신문로 쪽으로 접한 영성문은 덕수궁의 북쪽 대문격이었다. 이 대문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1900년이다. 때마침 <제국신문> 1900년 4월 1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들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영성문'의 존재가 드러나 있는 최초()의 기록이 아닌가 한다.

"삼작일에 대황제폐하께옵서와 황태자전하께서 전 수어청안 흥덕전에 친림하사 새로 짓는 영성문을 친감하옵셨다더라."
그리고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이 문이 헐려난 때는 1920년이었다.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탄생 직후에 만들어졌다가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곧장 헐려나감에 따라 딱 20년 동안만 존재했던 것이 영성문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 영성문은 왕실의 의례공간으로서도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1904년 명헌태후(헌종의 계비, 효정성황후 홍씨), 1905년 황태자비(순명효황후 민씨), 그리고 1911년 이른바 엄비(순헌귀비 엄씨)의 장의행렬이 모두 이 대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바로 이곳에 역대 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이 들어선 것은 1901년 7월의 일이었다.

선원전은 원래 아관파천 직전까지 경복궁 안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고종이 장차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을 다시 짓게 하면서, 명성황후의 빈전(殯殿)과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璿源殿)도 이곳으로 함께 옮겨오게 하였으니, 그때가 1896년 8월 23일이었다. 하지만 경운궁 내에 마련한 선원전은 1900년 10월 14일밤에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 바람에 7실의 어진을 잃어버리는 참화를 당하였던 것이다.

불타버린 어진들은 당연히 기존의 것들을 본떠서 다시 만들 도리밖에 없었고, 이에 1900년 11월 19일에는 영희전(永禧殿)과 냉천정(冷川亭)과 평락정(平樂亭) 등지에 흩어져 있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모두 흥덕전(興德殿)에 이봉(移奉)하여 모사에 착수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원전의 위치도 아예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여 선정하였으니 그 자리는 '영성문내서변신좌지지(永成門內西邊辛坐之地)'였다. 기존의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할 선원전의 신축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01년 7월 11일의 일이었다.

이보다 약간 세월이 더 흐른 뒤의 일이지만, 1908년 7월 23일에는 "영희전, 목청전, 화녕전, 냉천정, 평락정, 성일헌 등에 봉안하였던 어진을 모두 선원전에 이안하였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이리하여 영흥의 준원전(濬源殿)과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에 모셔진 조선 태조의 어진만을 제외하고는 역대 국왕의 어진들은 모두 덕수궁 선원전(璿源殿)과 사성당(思成堂)이 집합하여 모시는 형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성문 안쪽 구역에 만들어진 선원전도 결국 제 역할을 다 한 것은 20년 남짓한 세월에 불과하였다. 1919년 고종의 승하와 더불어 덕수궁 일대는 이내 해체의 수순에 들어갔던 탓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선원전 구역은 수난의 깊이가 가장 컸다. 덕수궁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궁궐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그 핑계였다.

결국 덕수궁 선원전에 봉안된 어진들은 1920년 2월 16일에 창덕궁의 '구선원전'으로 몽땅 옮겨지게 되었고, 창덕궁으로 옮겨진 어진들은 다시 그 이듬해인 1921년 3월 20일에 북일영(北一營) 자리에 신축된 '신선원전'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이곳에 모셔진 어진들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갔다가 1954년 12월 26일에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대부분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한편, 느닷없이 텅빈 공간으로 변한 덕수궁 선원전 일대는 1920년 봄부터 본격적인 해체공사에 착수하여 그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때에 철거공사와 병행하여 실시한 것이 덕수궁의 남북을 관통하는 신작로 개설공사였다. 이 길은 곧 영성문고갯길을 말한다.

그런데 선원전 구역의 철거 이후 이 일대의 변천사는 더욱 기구하다.


우선 선원전(璿源殿)과 사성당(思成堂)이 자리했던 "정동 1-24번지"에는 1920년 12월에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의 주도하에 '난데없는' 해인사포교소(海印寺布敎所)가 건립된 바 있으며, 더욱이 1923년 9월에는 불교제중원(佛敎濟衆院)까지 들어서서 이 일대는 졸지에 친일불교의 본거지로 변하고 말았다. 1925년 무렵 재정적 파탄문제와 더불어 이른바 '이회광 파문'이 크게 불거지면서 '정리위원회'가 구성되기까지 이르렀는데, 결국 이회광의 몰락과 더불어 불교포교소도 이내 막을 내렸다.

약간 특이한 기록으로는, 계동에 있던 보성초등학교(普成初等學校)가 1922년 봄부터 1924년 4월까지 이회광의 후원과 기부로 불교중앙포교소의 건물과 운동장을 빌려 사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 보성초등학교가 다시 떠난 공간에는 정칙강습원(正則講習院, 정측강습원)이라는 사설어학강습소가 1924년 10월 이후 들어와서 얼마간 활용한 사실도 있었다.

다시 1934년에는 조선저축은행이 이 터를 인수하여 중역사택을 짓는다는 기록이 보이나, 이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잘 알지 못한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은 그 후 "정동 1-39번지" 일대로 지번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1948년 한미행정이양협정에 따라 미국대사관 구내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곳과는 다르게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이 자리했던 "정동 1-8번지"에는 1922년 5월 13일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들어왔다. 원래 이 학교는 남산동 2가 2번지 즉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공립고등여학교였는데, 이곳으로 이전해오면서 학교 이름을 그렇게 변경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 1922년 11월호에 관련기록이 약간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1921년 9월에 기공하여 이듬해 3월에 전부 준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와 아울러 "부지는 1921년에 매수면적 2,418평 7합 이외에 총독부가 양여한 것으로 15평이 있었고, 1922년에는 다시 인접지 1063평 2합을 매수하여 합계 3,496평 9합에 달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고 표기하였으니, 이곳은 '정동 1-8번지, 1-13번지, 1-14번지, 1-15번지' 일대를 가리킨다.

이 자리는 해방 이후에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일이었을 뿐이지 그 이전에는 두 학교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를테면 정동 1-8번지에는 일제시대를 통틀어 줄곧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다시 길 건너편으로 의효전(懿孝殿)이 자리했던 "정동 1-6번지"에는 1922년 4월 12일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이전하여 들어왔다. 이 학교는 원래 서대문밖 충정로 1가 34번지에 있었으며,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동 지역으로 진입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는 1935년 봄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는 동시에 '덕수공립보통학교'로 학교이름도 변경되었는데, 곧 지금의 덕수초등학교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덕수공립보통학교는 1940년 4월 26일에 화재방생으로 학교가 전소(全燒)되는 사태를 겪기도 하였으나, 학교 건물은 재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아울러 덕수초등학교와 바로 이웃하는 자리인 "정동 1-23번지"에는 구세군사관학교(救世軍士官學校)가 들어섰다. 이곳은 원래 이왕직(李王職)의 소유로 되어 있던 것을 1915년 9월에 봉래정 4정목 237번지와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에 넘겨졌다가, 1927년에 이르러 다시 구세군측에 매도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해 1927년 5월 31일에 계약이 체결되어 정동 1-23번지는 구세군의 소유로 확보되었으며, 이곳에는 이내 구세군사관학교의 신축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28년 9월에 준공을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옛 덕수궁 선원전 구역은 불과 수년도 지나지 않아 건물의 해체는 물론이고 해당 지번의 부지까지 전부 매각되어 그 형태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덕수궁돌담길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싸여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데다가, 좌우편 담 안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턴넬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물정(物情)도 바뀌는 법인지, 오늘의 영성문 고개서는 이미 옛날의 그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나오는 구절이다. 영성문 고개는 옛 경기여고에서 정동 안쪽의 미국대사관저로 넘어오는 언덕길을 말한다. 흔히 덕수궁 돌담길로 알려진 바로 그 길이다.

옛 경기여고 일대는 1900년 이후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 있었고 이곳에 신문로 쪽으로 출입문을 낸 것이 영성문(永成門)이었다. 덕수궁의 후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이 대문은 1920년 여름에 헐려버렸다. 그러니까 영성문 고개는 예전에 영성문이 있었다는 데서 따온 명칭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로서의 면모를 벌써 잃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1954년이었으니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때의 얘기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돌담길을 낭만과 사랑의 거리로 기억하고 또 그렇게 애용하고 있건만, 50여년 전에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한 대목은 어쨌든 낯설게 들린다.

가을이 깊어지는 이맘때면 낙엽이 수북한 이 거리를 연인과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퍼뜩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덕수궁 돌담길은 해묵은 데이트 코스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면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근대역사의 굴곡이 숨어있는 것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덕수궁 때문에 생겨난 도로이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의 퇴위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고 그 전에는 경운궁으로 불렀다.
정동 일대에 경운궁이 크게 조성된 것은 1896년에 벌어진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었다. 1년 가까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옮겨왔는데, 주위에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외국공관이 몰려 있었던 것도 이곳으로 환궁을 결정하게 된 배경이라고 알려진다.

더구나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이곳은 그야말로 요동치는 근대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 경운궁의 영역확장은 지속되었다. 한창 때는 지금의 서울시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정동 안쪽으로 미국공사관 너머에 있던 수옥헌 구역과 선원전 일대의 광활한 면적이 모두 경운궁에 포함되기도 했다.

대한문 옆을 지나 정동 안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돌담길은 이렇게 새로이 확장된 경운궁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은 애당초 경운궁이 확장될 때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기껏해야 덕수궁의 남쪽 담장, 다시 말하여 정동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특히 고종의 국장이 있던 1919년 이후에는 용도폐기된 궁궐이라 하여 식민통치자들이 이곳을 빠르게 해체해버린 것이 지금과 같은 규모로 덕수궁 영역이 크게 줄어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꽤나 너른 구역이던 선원전과 영성문 일대가 1920년에 이르러 완전히 철거되면서 원래의 덕수궁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새길도 함께 생겨났는데, 이것이 앞에서 소개한 영성문고갯길이다. 이와 아울러 전에 없던 담장도 새로 쌓아 올렸으니 '사랑의 거리'로서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은 바로 이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자에 수록된 '경성소경(京城小景) 말하는 사진 (3) 고궁전(古宮殿)에 신작로(新作路), 영성문터에서'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영성문고갯길이 막 뚫린 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가 된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적적히 길가에 서서 가지 부러진 고목의 나머지 녹음 사이로 불볕에 아우른 갈무봉의 고탑만 행인의 눈에 보인다. 이곳은 어찌하여 이다지 몰라보게 변하였는가 경비가 군졸하여 이왕직에서는 대궐을 팔아간 까닭인데 이왕직에 출입하는 사람이 분참봉을 팔아먹었다고 검사국에서 오너라 가거라 하는 것도 이렇게 팔기를 잘하는데서 전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관대사모를 하고 양산 뒤에 호종하던 사람으로 금일에 이 길을 지나면서 감개가 깊을 자는 과연 누구가 있을는지."

그리고 이러한 돌담장의 변화는 대한문이 자리한 동쪽 방면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태평로 개설공사로 인하여
서울광장일대가 완전히 헐려나갔고, 이러한 일은 해방 이후에도 거듭되었다. 새로 쌓은 돌담장이나마 1961년에 이르러서는 덕수궁 내부가 보이게 한다는 명목으로 철책담장으로 교체하였고, 그 후 1968년에 태평로의 재확장공사로 담장이 16미터 가량 뒤로 물러날 때에 다시 돌담장으로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 덕수궁 돌담길이 사랑과 낭만의 거리이기만 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러일전쟁 이후 국권침탈을 노골화한 일본제국의 숱한 권력자들이 대한제국의 황제를 겁박하기 위해 부지런히 들락거리던 통로가 바로 이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을사조약의 현장인 중명전 역시 이 길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돌담길은 애당초 매국과 망국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고등법원,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고등법원과 같은 식민통치기구들이 이 길 한편에 잔뜩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때로 굴종과 수탈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로서는 실패한 자주독립의 길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덕수궁 돌담길은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된 고난의 행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배재학당길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서 있는 공간은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서소문동 38번지' 일대에 속하고 있으므로, 언뜻 보면 정동과는 무관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1914년에 일제에 의해 실시된 정동구역개정과 명칭변경에 따른 인위적인 결과일 뿐이므로 그다지 큰 의미를 담고 있지는 못한다.

지명변천의 유래로 보거나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거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정동의 권역에 당연히 포함되고 또한 오래도록 그렇게 인식되어 왔던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동지역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공간이라고도 평가될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도로구조를 지녔지만 정동제일교회가 들어선 위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정동 안길은 대한문 쪽으로도, 서대문 쪽으로도, 옛 선원전 구역쪽으로도, 또한 서소문 쪽으로 쉽사리 진출입이 가능한 상태라는 점은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한때나마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와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까지 자리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룬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은 아무래도 앞에서 얘기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가 되겠는데, 이곳은 오래 전 1886년 9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자리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직후 1891년에는 다시 독일영사관(獨逸領事館)으로 변모되었으며, 1902년에는 대한제국 궁내부가 이곳을 사들여 덕수궁의 영역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을 시작으로 식민통치기관들이 잇달아 이 부근에 자리함으로써 '암울하게도' 식민지시대의 새로운 관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곳과 지번은 동일하지만 덕수궁 대한문과 인접하는 공간에는 대한제국의 내각청사가 건립되었다가 이것이 탁지부청사를 거쳐 결국 일제에 의해 고등법원(高等法院)으로 점유된 바가 있고, 다시 이곳과 이웃하는 공간에는 중추원(中樞院)이 들어서서 친일세력의 본거지가 된 사실도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곳과는 반대로 서소문 쪽으로 곧장 빠져나갈 수 있는 배재학당 앞길로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이 배치되어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없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공간과 관련하여 <독립신문> 1897년 4월 13일자에는 흥미로운 기록 하나가 보인다.

"정동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히고 고칠 터인데 이 길 좌우쪽 땅은 미국 미미교회와 덕국영사관 땅이라. 교회에서와 덕국 사람 월터씨가 자기들 땅 다섯자 넓이씩을 한성부로 공히 주어 길을 더 넓히고 정하게 만들게 하였다니 이렇게 감사하게 조선 서울 도로를 잘 되도록 외국사람들이 자기들 땅을 주어가면서 도우니 이런 일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 만 하더라."

그리고 이에 앞서 <독립신문> 1897년 4월 6일자에도 이와 관련한 기사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 오서 자내에 길을 또 수치하려는데 길을 범하고 개천을 건너 지었던 가가와 방옥은 양력 사월 일일 이후로는 일병 다 헐리고 한성부에서 전일 내부지령대로 각 방곡에 고시하였는데 종각 밑에서 동대문까지와 대정동서 서소문까지가 그중에 더욱 급하다더라."

이것은 거의 골목길 수준에 불과했던 서소문 방향의 정동길이 독일영사관과 미미교회의 덕분에 크게 확장된 때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 미미교회는 정동감리교회 즉 정동제일교회를 말한다.

이렇게 넓혀진 길은 정동에 거주하는 숱한 서양인들이 애용하였을 테지만, 그보다도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가장 편의를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그러한 배재학당조차도 원래의 자리를 버리고 떠나고 말았지만, 오랜 세월에 흐르는 동안 무수한 배재학당의 학생들에게는 이 길이 곧 '미래의 길', '희망의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