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명주 明州

시기

고려시대/고려전기

이칭/별칭

영파(寧波)/경원부(慶元府

정의

중국의 남방항로의 출발지

주요내용

현재의 영파(寧波)이다. 남송 이종(理宗) 때 명주는 경원부(慶元府)로 고쳤으며 원대에 다시 경원로(慶元路)라 불렀다.
명 주원장이 방국진(方國珍)을 평정한 후, ‘경원(慶元)’에 원조를 경하하는 뜻이 있다고 하자 다시 명주부(明州府)로 바꾸었다. 1381년 명주의 ‘명(明)’자가 국호와 같아 영파부로 또 다시 개칭하였다.
영파의 행정구역은 당왕조 때에 대체가 이루어졌다. 북방(요,금,원)의 전쟁으로 육로 교통이 막히자 명주는 고려 및 기타 해외국가와의 유일한 합법적인 항구가 되었다. 특히 고려와 일본과의 무역규모가 커지면서, 1117년 명주 태수 누이(樓異)가 송 휘종(徽宗)의 뜻을 받들어 명주에 ‘고려사(高麗司)’를 설치하고 고려와의 관계 업무를 관장토록 하였으며 월호(月湖) 동쪽 ‘국화주(菊花洲)’ 위에 국가급 영빈관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을 건립하였다.
이외에 페르시아 상인들을 위한 파사관(波斯館)이 있었으며 외국상인들을 위한 청진사(清真寺)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송원 시기 명주는 중국의 고려와 일본에 대한 중요 무역항구였다. 송 신종 때인 1079년에 중국 상인이 고려를 왕래하면서 무역한 금액은 5000민(緡)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시박사(市舶司)가 있어서 반드시 먼저 명주에서 등기를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밀수로 단정하여 논죄하였다.
명주항의 무역액은 매우 컸다. 송 신종 때인 1077년 명주에서 수출한 향약(香藥)이 4739근으로 수량으로 중국 전 항구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원대 명주에서 출산한 상품이 많은데 그 중 ‘명주석(明州席)’이 가장 유명하다.
이처럼 명주는 송원시기를 기점으로 무역이 흥성하였고 인구가 증가하여 북송말에 호구가 3-4배로 증가하였고 인구수도 대략 22만이나 되었다. 원대에는 인구가 50만인으로 전통사회의 핵심적 무역항이었다.

집필자 의견

집필: 김문

남방항로 남방항로
참고문헌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문헌통고(文獻通考)』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
『경원조법사류(慶元條法事類)』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
『평주가담(萍州可談)』
『소동파전집(蘇東坡全集)』
진고화(陳高華),오밀(吳密), 『송원시기적해외무역(宋元時期的海外貿易)』, (天津人民出版社)
황순염(黃純豔), 『송대해외무역(宋代海外貿易)』, (社會科學文獻出版社)
상원즐장(桑原騭藏)撰,양련(楊鍊)譯, 『당송무역항연구(唐宋貿易港研究)』, (臺灣商務)
장손(章巽), 『중국항해기술사(中國航海科技史)』, (湖北教育出版社, 2000)
오진화(吳振華), 『항주고항사(杭州古港史)』, (人民交通出版社,1989)
정소창(鄭紹昌), 『영파항사(寧波港史)』, (人民交通出版社,1989)
송희(宋晞), 「明州在宋麗貿易史上的地位」(『송사연구논총(宋史硏究論叢)』第3輯)
임사민(林士民), 「論宋元時期明州與高麗的友好交往」(『해교사연구(海交史研究』28, 1995)
허맹광(許孟光), 「明州與高麗的交往以及高麗使館」(『해교사연구(海交史研究)』28, 1995)
강길중(姜吉仲), 「宋與高麗海上交通路線之演變及其原因」(『대륙잡지(大陸雜誌)』第78卷 第6期, 1989)
심복위(沈福偉), 「論唐代對外貿易的四大海港」(『해교사연구(海交史研究)』, 1986)
장심(章深), 「宋朝與海外國家的貢賜貿易」(『학술연구(學術研究)』, 1998)
조봉(趙丰), 「古代中朝絲綢文化的交流」(『해교사연구(海交史研究)』12,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