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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

금와
1. 금와 설화
금와(金蛙) 설화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1 시조동명성왕조(始祖東明聖王條)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기이(紀異) 제1, 동부여 고구려조에 나타나 있는 금와왕의 탄생에 얽힌 문헌설화이다. 위의 두 책에 실려 있는 설화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옛날, 송화강 유역에 부여라고 하는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따뜻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늘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살기 좋은 나라를 거느린 부여왕 해부루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걱정이 더해 갔다. 그는 아들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을 하나 얻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해부루는 여느 때처럼 기도를 하고 대궐로 돌아오는 길에 곤연이라는 연못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이 타고 가던 말이 연못 옆에 있는 바위 앞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게다가 말은 눈물까지 흘리며 슬피 우는 것이었다. 해부루는 퍽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신하들에게 그 바위를 치우도록 했다. 그랬더니 바위 밑에서 누런 황금빛이 찬연하게 빛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바위 밑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바위 밑에는 온 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 형상의 아기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해부루는 이제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귀한 아들을 주었다며 몹시 기뻐했다.
해부루왕은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가 개구리 모양으로 생긴데다 금빛을 발하므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지었다. 금와는 해부루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해부루왕은 금와를 태자로 삼았다.
해부루에게는 아란불(阿蘭弗)이라는 어진 재상이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천제가 꿈 속에 나타났던 것이다. 천제는 아란불에게 지금 이 땅은 장차 자신의 자손이 나라를 세울 땅이니 너희들은 이 곳을 떠나 동해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가라고 일렀다. 또 그곳은 땅이 매우 기름지며 오곡이 풍성한 곳이므로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도록 하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아란불은 이튿날 아침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해부루왕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그는 곧 아란불의 말대로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늙은 해부루왕이 죽고 태자로 있던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는 해부루가 낳지 않았지만 하늘이 내린 인물이기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렸다.
하루는 금와왕이 신하들로부터 강물의 고기를 훔쳐 가는 짐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부로 하여금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니 마침내 한 여자가 걸려 나왔는데, 입술이 너무나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차례나 입술을 잘라버리자 그제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금와왕은 유화가 천제의 아들의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궁궐의 별실에 기거하게 하였는데 햇빛이 늘 그 방을 비췄다. 유화가 피해도 햇빛이 따라와 비추더니,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커다란 알 하나를 나았다. 그 크기가 닷되들이 말(斗)만 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 개나 돼지에게 주려 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 내다버리게 하였더니, 소와 말이 모두 그 알을 피해서 지나갔다. 또 들에 내다버리니 새와 짐승이 오히려 덮어주었다. 이에 왕이 그것을 쪼개보려고 했으나 쪼갤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파리가 귀찮게 굴어서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어머니 유화부인에게 활을 만들어 달라고 하여 유화가 조그만 장난감 활을 만들어 주자 그것으로 파리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대궐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쏘는데 역시 백번 쏘면 백 번 다 맞았다. 이 나이에 주몽은 기골이 준수하니 범인(凡人)과 달랐다.
그 나라의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해서 그는 주몽이란 이름을 얻었다. 주몽이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빼어난 재주를 보이자 그는 이내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때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주몽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주몽을 죽이자고 졸랐다. 하지만 금와왕이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인 구가(狗加), 저가(豬加), 우가(牛加), 마가(馬加)를 무시하고 독재를 할 만큼 왕권을 확립하지 못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기에 주몽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 때 주몽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주몽에게 장차 왕자들이 해코지할 터이니 미리부터 방도를 마련해두라 일렀다. 주몽이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 하고 다른 여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필만은 바늘로 혀밑을 찔러서 비쩍 마르게 만들었다. 금와왕이 마구간을 둘러보고 주몽에게 말을 잘 돌보았다며 칭찬한 뒤 상으로 가장 여윈 그 말을 주었다.
그해 10월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주몽이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는데 금와왕은 주몽이 혹시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 걱정되어 화살을 한 대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탄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궁인지라 말 달리고 짐승을 몰아 쏘면 쏘는 대로 명중시키니 주몽 혼자서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일곱 왕자가 잡은 짐승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대소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또다시 아우들과 합세하여 주몽을 기어코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이를 알고 주몽으로 하여금 한시바삐 먼 곳으로 도망치도록 재촉했다.
그 해에 주몽은 스물한 살이었다. 주몽은 평소 따르던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명의 심복을 거느리고 동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몽이 도망친 사실을 안 금와왕과 대소 부자가 군사들을 풀어 그 뒤를 추격토록 했다. 그러면서 산 채로 잡아도 좋고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주몽 일행이 동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다가 그만 엄호수라는 큰 강물에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벌써 저 멀리 추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주몽이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켜 탄식하며 자신은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해 이곳이 이르렀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쳤다.
그렇게 소리쳐 기도한 뒤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갑자기 수많은 자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와 꼬리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주몽 일행이 건너자 조금 뒤 추격병들이 뒤따라 건너려다가 자라들이 흩어지므로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강을 건넌 주몽 일행은 큰 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 때 비둘기 한 쌍이 나무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주몽이 활을 들어 쏘자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날살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주몽이 비둘기들을 주워들며 이 비둘기들은 어머니께서 보내신 사자(使者)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유화부인이 보리의 종자를 싸주었는데 경황없이 도망치는 중에 잃어버렸던 것이다. 주몽이 비둘기의 부리를 벌리고 보니 과연 입안에 보리씨가 들어 있었다. 주몽이 보리씨를 꺼내고 물을 뿜자 비둘기들이 되살아나 다시 날아갔다.
2. 동부여의 왕 금와
금와는 해부루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두 번째 왕이 된다. 고구려의 시조 이야기인 주몽신화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많았으나 고구려 이전의 북부여와 동부여의 시조 이야기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소홀했다. 해모수의 뒤를 이은 북부여의 해부루나 금와왕의 뒤를 이은 동부여의 대소는 한결같이 나라를 물려받았지만 온전하게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권력을 이양받았을 뿐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지 못했던 처지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거나 나라의 역사가 단명했던 탓에 그들의 건국신화는 전승력을 잃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 또한 끌지 못하고 말았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버지로서만 문제될 뿐 그 자체로서는 주목되지 않았다. 동부여의 금와왕 역시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가두어 두었던 부정적인 왕으로, 유화가 낳은 알 곧 주몽의 태(胎)를 짐승이 먹도록 던져 버리게 했던 몹쓸 왕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그러나 북부여와 동부여의 처지에서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한 위대한 시조왕이며 금와는 해부루에 이어 동부여를 계승한 위대한 왕이다. 다만 이들 부여왕들은 고구려 건국에 장애가 되었기에 고구려의 처지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졌을 따름이다.
『삼국유사』권 제1 ‘북부여’와 ‘동부여’ 항목을 보면 해모수와 금와왕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뉘어 각각 기록되어 있으되 사실은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58년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수도인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라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 천제는 이 성에다가 도읍을 정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으며,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성을 해(解)씨로 삼았다. 해부루는 해모수를 이어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
해부루왕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로부터 장차 자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는 말과 함께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란불이 꿈 이야기를 왕께 아뢰고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겨서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라 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자 태자가 되었으며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금와왕은 다시 태자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대소왕은 서기 22년인 지황(地皇) 3년 임오에 고구려왕 무휼(無恤)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의 공격을 받아 죽고, 이로써 동부여도 망한다.
북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에 기원 전후 수세기 동안 존속하였던 예맥족의 나라이다. 북부여의 중심 지역인 부여성은 지금의 농안(農安)과 장춘(長春) 부근 또는 길림성(吉林城)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기원전 58년경으로 밝혀져 있고 중국측 문헌에도 기원전 1세기경부터 등장하므로 그 이전부터 북부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금와족의 대표
해부루에게는 친자식이 없었다. 그는 금와를 곤연이라는 연못 가의 큰 돌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금와의 등극은 곧 태양신을 표방하던 ‘해’씨족의 몰락을 뜻하며, 해모수의 등장과 함께 세워진 부여국의 쇠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 해부루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은 금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돌 밑에서 발견되었고 금빛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묘사에서 금와 집단의 성격을 추정한다면, 금와족은 해부루처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아니라, 동부여 지역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토착세력이며, 쇠붙이를 다룰 수 있는 철기문화를 소유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해모수의 후예들처럼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무력을 앞세워 영토를 넓히거나 이웃 부족을 병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부족이다. 돌 밑에 있으면서 해부루가 돌을 치우지 않았다면 결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금와의 정체를 통해서 이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서하의 하백족은 금와족과 다르다. 토착세력이라는 점에서 금와족과 같은 성격을 지녔으되, 해모수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거나 술법으로 맞서는 등 상당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지닌 집단이었다. 주몽이 부여를 누르고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힘도 해모수족이 하백족과 결연을 맺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주몽과 해부루는 모두 해모수의 아들임을 자처하거나 표방하고 있지만 그 토착적인지지 기반은 이처럼 다르다. 주몽이 하백족을 모계로 삼아지지 기반을 구축했으므로 고구려를 건국하는 힘을 마련했다면, 해부루는 뚜렷한 모계 세력 없이 해모수로부터 북부여를 이어받은 까닭에 뒤늦게 금와족과 연대를 함으로써 말년의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그 후 그들에게 왕권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지역에 붙박이로 살면서 오직 생업에만 종사하던 금와족은, 해부루에 의해 왕권을 넘겨받았으나 건강한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정치적 경륜이나 군사적 위력을 갖춘 인물이 아니므로 해부루 이상의 국력을 축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금와는 왕위를 태자인 대소(帶素)에게 이양했으나 고구려의 무휼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의해 대소가 죽고 동부여마저 붕괴되고 만다. 이로써 해모수가 세운 부여국은 ‘해모수족’ 2대와 ‘금와족’ 2대로서 그 역사를 마감한다.
부여가 이처럼 쉽게 망한 까닭은 태양신을 자처하는 천손강림의 해모수족과 토착세력인 금와족이 온전히 화합하여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해모수족이 정치적 권위를 내세워 일방적인 지배만 할 것이 아니라, 토착세력과 연대하여 공동으로 나라를 세워 나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부여국의 초기를 한층 튼실하게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천신족인 환웅이 토착세력인 곰족의 곰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세우듯이, 해모수도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워야 나라의 기반을 튼실하게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해부루가 북부여를 지키지 못하고 왕권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해부루가 토착세력과 연대하여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않은 까닭이며, 신화적 문맥 속에서는 해부루의 모계가 뚜렷하지 않은 까닭이다.
해모수는 찬란한 ‘해 모습’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금와왕은 금빛 개구리 모습을 하고 바위 밑에서 솟아오른 영웅이다. 해모수와 금와왕은 한결같이 위대한 왕의 신이한 출현 모습과 대단한 위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으킨 나라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왕의 출현과 등장이 아무리 화려하고 위엄 있어도 왕권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스스로 신성함을 자처하고 왕권을 강화하면 할수록 백성과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4. 주몽의 아버지
주몽은 흔히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주몽의 아버지가 금와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 학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부인임을 알고 별실에 거처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유화부인의 정체를 이 정도로 알았다면 그녀가 서하의 주인인 하백왕의 맏공주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화에게 별실을 따로 마련하여 특별히 거처하게 하는 예우를 베푸는 일은 자연스럽다. 왕이 궁전에다 별실을 마련하여 특정 여성을 거처하게 했다는 것은 거의 왕후의 예로써 대한 것이라 해도 좋겠다.
그리고 유화의 아들인 주몽이 늘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과 더불어 사냥을 다니며 함께 행동했을 뿐 아니라 태자 대소가 왕위 계승의 위협을 느껴 금와왕에게 주몽을 없애자고 요청한 것을 보면 금와왕은 주몽을 서왕자(庶王子)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몽이 왕자들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태자가 왕위계승의 위협을 느껴 그를 해치려 할 까닭도 없다. 뒤에 유화부인이 죽자 북부여에서 국모로 예우하여 장례를 치뤘다는 사실이 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한다. 결국 유화는 금와왕의 후비 노릇을 하였으며, 왕자들 또한 그녀를 서모로 받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의 동명왕편 기록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유화가 금와왕에 의해 태후로 받들렸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몽이나 해부루는 모두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였다. 주몽과 해부루가 해모수의 배다른 아들일 수 있다면, 해부루를 이어 왕위에 오른 금와왕은 아버지에 해당되는 해부루의 배다른 형제인 주몽을 아버지격으로 인식하고 그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태후의 예로 섬겼을 가능성이 있다. 더 간략하게 말하면 해부루의 어머니뻘인 유화는 자신에게 할머니에 해당된다. 왕의 할머니이니 태후의 예로써 섬겨 마땅하다. 그리고 주몽은 금와왕의 아버지격에 해당된다.
그러나 북부여에서 주몽은 금와왕의 아버지격은커녕 형제격도 아니었다. 아들격이었다. 금와왕의 궁전 별실에서 잉태되고 출산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를 금와왕의 후비(後妃)로, 주몽을 금와왕의 서왕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그러면 주몽은 왜 햇빛에 의하여 잉태되었다고 하고 해모수의 아들로 인정되며 또 스스로 그렇게 행세하였을까? 그것은 순전히 유화부인의 뜻에 의한 것이다. 일찍이 해모수와 영웅적 사랑을 나누고 또 정식으로 그와 혼인까지 한 유화로서는 금와왕의 후비로서 만족할 수 없다. 더군다나 아들 주몽은 능력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서왕자로 차별받을 뿐만 아니라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는 처지에 있어, 큰 뜻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화의 마음고생은 이 때부터 다시 증폭된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아들 주몽에게 금와의 왕자들과 맞설 수 있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었다.
따라서 유화는 일찍부터 주몽에게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이며 외할아버지는 서하의 왕 하백이라는 사실을 줄곧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인 해모수 없이 임신한 상황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잉태 과정도 햇빛에 의한 신이한 임신으로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몽은 항상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나라를 세우려는 꿈을 키우며 성장하였고,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아무런 주저없이 어머니 유화에게서 들은 대로 “천제의 손이며 하백의 외손”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천지신명의 도움을 청하였다.
해모수는 주몽의 정신적 아버지였을 뿐 실제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물론 주몽이 아버지 해모수를 직접 만난 적도 없다. 유화를 버리고 떠난 다음 해모수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유화는 해모수의 사랑받는 여인이었으며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부인이었기 때문에, 주몽은 유화의 말에 따라 해모수를 아버지로 믿는 데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따라서 북부여를 탈출하여 별도의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자연히 고구려 건국과 더불어 널리 전승된 주몽신화에는 그가 해모수의 아들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위치에 있었던 금와왕은 고구려 건국의 방해자로 인식되고 그의 태자 대소는 적대자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금와를 이어 대소가 북부여의 왕이 되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쳐들어가 대소를 죽여 버린다.
그러나 금와왕의 처지에서 보면 유화가 자기 궁전의 별실에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주몽이므로, 당연히 주몽을 자기의 서왕자로 알고 태자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너그럽게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금와왕의 북부여는 아들 대소에 이르러 고구려의 침략을 당해 일찍 망해 버렸고, 금와왕 중심의 북부여신화는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 금와왕의 처지에서 유화를 자신의 후비로 주몽을 자신의 서자로 이야기할 전승 기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건국신화 속에서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천제의 손자이자 하백의 외손으로 그 위상이 신성시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햇빛이 유화부인에게 비추어서 잉태되었다는 사실이 유화부인이 꾸며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며, 이러한 주장은 『삼국유사』권 제1 ‘북부여’와 ‘동부여’ 항목을 보면 해모수와 금와왕에 관한 이야기 중 아란불이 천제로부터 충고를 듣는 항목과 배치되는 것이다.
기원전 58년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수도인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라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 천제는 이 성에다가 도읍을 정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으며,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성을 해(解)씨로 삼았다. 해부루는 해모수를 이어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
해부루왕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로부터 장차 자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는 말과 함께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란불이 꿈 이야기를 왕께 아뢰고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겨서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라 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자 태자가 되었으며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금와왕은 다시 태자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대소왕은 서기 22년인 지황(地皇) 3년 임오에 고구려왕 무휼(無恤)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의 공격을 받아 죽고, 이로써 동부여도 망한다.
위 기록에 따르면 천제는 자신의 자손이 해부루왕이 있던 북부여 땅에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제의 자손이란 주몽을 일컫는 말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주몽은 천제, 즉 해모수의 아들인 것이다.
5. 부여사(夫餘史)
북부여 시조는 해모수(BC 239-BC 194)고, 2대는 모수리(BC 194-BC 169), 3대는 고해사(BC 169-BC 120), 4대는 고(해)우루(BC 120-BC 108), 5대는 고두막(BC 108-BC 59), 6대는 고무서(BC 59-BC 58)이다.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기 (迦葉原夫餘)의 시조는 해부루(BC 86-BC 47), 2대는 금와(BC 47-BC 6), 3대는 대소(BC6-AD22)이다.
동부여의 세 왕인 해부루와 금와와 대소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1. 시조 해부루(解夫婁)
첫해(乙未 기원전 86년)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3년(기원전 83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을 내려, 진대(賑貸) 제도를 만들고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이 제 때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였다.
8년(기원전 78년) 이보다 앞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가 놀다가 부여(夫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의 꾀임을 받아 강제로 끌려가 압록강의 가에 있는 방에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고모수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 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를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였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10년(기원전 76년)에 왕이 늙고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어 뒤를 이를 아들이 있기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관연에 이르러 큰 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렸더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
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기원전 5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 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39년(기원전 47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5.2. 2대 금와(金蛙)
첫해(甲戌 기원전 47년)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24년(기원전 23년)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떴다. 고구려가 호위하는 군사 수만명을 시켜 졸본으로 돌아가 황태후의 예로 산릉(山陵)에 장사지내고 옆에 사당을 세웠다.
41년(기원전 6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5.3. 3대 대소(帶素)
첫해(乙卯 기원전 6년)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19년(서기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28년(서기 22년) 2월에 고구려가 온 나라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진창을 만나 왕이 탄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怪由)가 앞으로 다가와 이를 죽였다. 그러나 군사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이레 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군사를 몰아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도망갔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가 자기를 따르는 자 수백명과 함께 달려가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이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해 달아나 갈사수(曷思水)가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갈사(曷思)이다.
갈사(曷思)는 고구려 막힐부의 힐주였던 길이가랑(吉爾가浪)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갈사국은 고구려 태조왕에게 항복하고 다시 두만강가 훈춘(琿春)으로 옮겨갔다. 해두왕(海頭王)은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되며 해모수가 수도로 삼았던 웅심산이 있는 강평현 북쪽 해주(海州)의 왕으로 추정된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서기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 (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두(都頭)를 명하여 우태(于台)를 삼아 집을 내려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고 그를 봉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를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 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 (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뒤에 차음 자립하게 되자 개원(開原) 서북 쪽으로부터 이사하여 백낭곡(白狼谷 연국(燕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부신시(阜新市) 지역)에 이르니 연(燕)과 가까운 땅이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甲戌 494년)에 이르러 그 나라를 가지고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굽히고 들어가니 낙씨들이 드디어 제사 지내지 않았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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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譯註 三國史記 2, 연구부 (편), 정신문화연구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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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숙,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집문당, 1996
이중재, 『고대조선과 일본의 역사』, 명문당, 1997
임재해,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 천재교육, 1995
장덕순, 『한국설화문학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8
조선역사연구회,『고구려왕조 700년사』, 오상,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