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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

김수로왕
1. 김수로왕과 금관가야의 건국
1.1. 김수로왕의 설화
『삼국유사』, '제 2권 기이편 가락국기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더니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의 구간이 있어, 이들이 추장이 되어 인민을 거느리니 그 수효가 무릇 1백호 7만 5천인이었다. 산야에 도읍하여 우물을 파 마시고 밭을 갈아 먹더니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42년) 임인3월 계욕일에 그 곳 북쪽 구지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 이삼백명이 이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는 나는 듯 하되 그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9간들이 이르되,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이냐.” 대답하되 “구지입니다”라 하였다. 또 말하되 “황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여 임금이 되라 하였으므로 이곳에 일부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산꼭대기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하고 춤을 추고 땅을 밟으면 대왕을 맞이하여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구간등이 그 말을 듣고 하나같이 모두 기뻐서 노래하고 춤을 추다가 얼마 아니하여 처다 보니 보랏빛 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지라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폭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6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절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싸 가지고 아도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12시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여니, 여섯 알이 변하여 동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므로 상에 앉히고 여럿이 절하고 경하하여 극진히 위하였다. 나날이 자라 10여일을 지나매 신장이 9척이나 되었으니 이는 은나라의 천을과 같고 그 얼굴이 용과 같았음은 한나라의 고조와 같고 눈썹의 팔채(八彩)는 요임금과 같고 눈에 동자가 둘씩 있음은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라 하고 혹은 수릉이라 하며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도 일컬으니 곧 육가야의 하나요 나머지 5인은 각각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은 황산강, 서남은 창해,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으로써 경계하고 남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임시 궁전을 짓게 하여 살았으나 질박하고 검소하여 풀을 자르지 않고 토계(土階)는 겨우 삼척이었다. 즉위 2년(43년) 계묘 춘정월(春正月)에 왕이 가로되 “내가 서울을 정하고자 한다” 하고, 이어 임시 궁전의 남쪽 신답평에 가서 사방으로 산악을 바라보고 좌우 여러 신하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이 매우 협소하나 산천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가히 16나한이 주거할 만한 곳이다. 하물며 일에서 삼을 이루고 삼에서 칠을 이루는 칠성(七聖)의 거주지로도 여기가 합당하다. 이 땅에서 강토를 넓히는 것이 좋겠다”하고, 1,500보 둘레의 나성을 대궐과 전각과 여러 관아와 무기고와 창고를 지을 땅으로 마련하였다. 일이 끝나자 환궁하여 국내의 장정․인부․공장들을 두루 징용하여 그 달 20일에 금양에서 시작하여 3월 10일에 역사를 마쳤다. 역사는 마쳤으나 궁궐과 옥사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건축하니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갑진 2월에 낙성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새 궁전에 들어가 모든 국정을 다스리고 일반 업무에 힘썼다.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홀연히 아이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사람으로 변하였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이때 바다로부터 가락에 오니 신장이 3척이요 머리의 둘레가 1척이었다. 흔연히 대궐에 들어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뺏으려고 왔다”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에 명하여 즉위케 하여 장차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려 하는데, 감히 천명을 어기어 왕의 지위를 주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하였다. 탈해가 “그러면 기술로 다투어 보겠느냐” 하니 왕이 좋다 하였다. 삽시간에 탈해가 변화더니 매가 되었고 왕이 화하더니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화하여 참새가 되니 왕은 매로 화하였는데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 있다가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왕도 또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이에 항복해 가로되 “조금 전에 술법을 겨룰 때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매에게 죽을 것을 면했으니 이것은 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이니 내가 왕과 더불어 지위를 다툼이 실로 어렵겠습니다” 하고 절하여 하직하고 나갔다. 인교 밖의 나루터로 가서 장차 중국 배가 오가는 수로로 가려 하였는데, 왕은 그가 머물러 있어 난을 꾸미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급히 병선 500쳑을 동원해서 뒤쫓았더니, 탈해는 계림의 경계로 들어가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 기록에 실려 있는 것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건무 24년(48년) 무신 7월 27일에 9간 등이 조알할 때에 아뢰기를 “대왕이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신들에게 있는 처녀 중에서 좋은 자를 가려서 궁중으로 데려와 배필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가로되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므로, 나의 배필로 왕비가 되는 사람도 또한 하늘에서 명할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치 말라”하였다.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령하되 “빠른 배와 날랜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라” 하고, 또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으로 가게 하였는데, 홀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과 기를 단 배가 북쪽을 향해 왔다. 이에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드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앞을 다루어 상륙해서 분주히 달려 왔다. 신귀간 등이 바라보고 곧 대궐로 달려가 아뢰니 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어 9간 등을 보내어 좋은 배로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궁중으로 모시려고 하니, 왕후가 “나와 너희들은 본래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 가겠는냐”라고 말했다. 유천간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그대로 아뢰니 왕도 그렇게 여겨 유사를 데리고 나가 대궐 밖 서남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진포에 배를 대고 상륙하여 고교에서 쉬면서 입었던 비단옷을 벗어 그것을 폐백으로 산령(山靈)에게 보냈다. 그 때, 왕후를 보좌했던 가까운 신하로는 신보, 조광 두 사람이 있었고, 그 두 사람의 아내 모정, 모량이 있었다. 그 외에 비복까지 20여명이 있었다. 또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옷감․금은․주옥․진기한 그릇 등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왕후가 차차 임금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니 왕이 나아가 영접하여, 함께 궁전으로 들어가고 신하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이 유사에 명하여 모시고 온 신하 부부들은 각기 한 방에서 편히 쉬게 하고, 노비들은 각각 한 방에 오륙 명씩 있게 했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 아름다운 잠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이나 비단 보화 등을 주었으며, 많은 군인들을 시켜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으로 들었다. 왕후가 조용히 말하되 “신첩은 아유타국 공주인데 성은 허요, 이름은 황욱이요,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첩에게 이르시기를 우리가 엊그제 꿈에 함께 하느님을 뵈오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앉았는데 그는 신이요 성인이다. 그는 새로 나라를 세우고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 등이 공주를 보내서 그의 배필로 삼아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너는 지금 곧 부모를 하직하고 그리로 가라 하시기에 신첩이 바다에서 증조(蒸棗)를 구하고 하늘에서 반도(蟠桃)를 얻어 매미 같은 이 얼굴로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하였다. 왕이 대답하되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머리서 올 것을 미리 알았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이 있었지만 좇지 않았는데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용렬한 이 몸에게 다행이오”하고는 곧 자리를 함께 하여 이틀밤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데, 뱃사공 등 15명에게 각각 쌀 열 섬,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8월 1일 본궁으로 돌아갈 때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신하 부부 역시 한 수레를 타고 따라오게 하였다. 잡물들도 함께 싣고 천천히 대궐로 돌아오니 벌써 정오가 되었다. 왕후는 중궁에 들고 칙령으로 그 신하 부부 그리고 그들에 딸린 하인들에게는 20여간 되는 객사 한 채를 주어 인원을 안배하여 살게 하고, 날마다 음식을 풍성하게 공급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보물은 내부 창고에 보관하여 왕후의 비용으로 삼았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되 “9간들이 모두 여러 관원의 우두머리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이나 야인들의 호요, 도시 재상의 지위로서의 명칭이 아니다. 만일 외국에서 들으면 반드시 비웃는 수치를 받을 것이다.”하였다. 이에 곧 아도는 아궁으로 여도는 여해로 피도는 피장으로 오도는 오상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은 윗자는 그대로 두고 아랫자를 고쳐 유공, 유덕이라 하고, 신천은 신도로 오천은 오능으로 고치고, 신귀는 음은 그대로 두고 뜻만 고쳐 신귀(臣貴)라 하였다. 계림의 직제를 채택하여 각간․앗간․급간 등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나라의 관례와 한나라의 의제로 나누어 정했다. 이것이 옛 것을 새것으로 고치고 관제를 두어 직분을 나누어 맡기는 도리였다. 이에 나라와 집안이 질서있게 되고 인민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아니하여도 다스려졌다. 왕이 왕후와 더불어 거처하는 것은 비유컨대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고,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다. 그 공은 도산씨가 하나라를 돕고 당원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다. 해마다 꿈에 웅비의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 6년(172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니 수는 157세였다. 백성들이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백성들은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음 배를 대었던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능라의 옷을 벗던 높은 얻덕을 능현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들어온 해변을 기출변이라 하였다. 근신 천부경 신보와 종정감 조광 등은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고, 부부가 모두 일이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밖의 노비들은 칠팔년 사이에 소생도 없이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죽어 거처하던 객사는 텅 비었다. 왕후를 잃은 임금은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피 탄식하면서 19년을 지내다가 헌제 건안 4년(191년) 기묘 3월 23일에 돌아가니 수가 156세였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잃은 듯 비통해함이 왕후 때보다 심했다. 곧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높이 한 발, 둘레 300보의 빈궁을 지어 장례하고 수로왕묘라 하였다. 아들 거등왕에서 9대손 구형왕에 이르도록 이 묘에 제사를 지냈으니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단오날, 8월 초 닷새와 보름에 깨끗한 제사가 끊기지 않았다.
1.2.김수로왕과 금관가야의 건설
김수로왕은 가락국(또는 금관가야) 그리고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그의 탄생과 치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데 윗 글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가락국기」의 김수로왕의 건국 설화는 신화적 내용이어서 설화의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이 신화는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天降卵生) 신화로서 한국 고대 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 시조 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김수로왕 세력에 대해 학자들은 6개의 황금빛 알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설화가 암시하듯이 가락국기 설화속의 김수로왕 세력은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발달된 문명을 가진 이주민 집단이 신화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금관가야의 건국 세력이 북방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집단임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사가 그 정보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설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하고 성장하기까지 9간 등의 세력이 극진히 섬기며 보살피는 행위는, 김수로왕 세력이 김해 지역에 들어왔을 때 토착 주민들이 선진문명을 가진 김수로왕 세력에 대해 별 저항 없이 그들의 지배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결국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건국 설화는 김수로왕으로 대표되는 북방의 유이민 집단이 9간으로 대표되는 낙동강 하구 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해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풀이될 수 있다. 한편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 재계하고 잡스러움을 떨쳐 버리는 발계(量擧)의식을 거행한 뒤, 구지봉과 같은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의식을 베풀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그 곳에서 집단의 수장(首長)을 선출하고 이 때 뽑힌 수장을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인물로 여기는 모습들은 국가 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 풍속과 정치 운영의 일면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 신화에 나타난 상징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수로가 6개의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표현은 가락국(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제국이 통합되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기술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학자들의 논란이 많은데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탈해왕이 신라왕이 되기 전에 가락국에서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와 겨룸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패하여 가락국을 떠나는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할까? 실제 탈해왕집단이 금관국을 경유하여 신라를 이동하였다는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에도 보인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 두었다. 처음에 금관국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 어구에 다다랐다. 이 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 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해안에 매어 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이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탈해가 금관국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직 알 속에 있거나 겨우 어린 아이였을 때이므로, 김수로왕과 싸움을 벌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탈해가 금관가야를 거쳐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 역사서가 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바로 석탈해의 세력이 신라에 이르기 이전에 금관가야를 거쳐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좀 더 부언하자면, 김수로왕 세력은 탈해의 세력을 물리쳤으므로 그들보다 더 우세한 무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싸움에 져서 떠나가는 탈해를 수로왕이 수군 500척을 보내서 쫓고 있는 점은 김수로왕의 가락국이 이미 거대한 군대를 거느린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멀리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는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어떤 세력집단을 의미할까? 허황후의 세력은 김수로가 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혼인을 통해 연합한 제 3의 집단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제 3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허황후 세력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허황후의 출신 지역을 알려주는 기사가 『삼국유사』, ‘제 4권 탑상조’에 또한 실려 있다.
금관성(金官城)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가 동한 건무 24년(서기 48년) 갑신에 서역(西域)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
이 기사에는 허황후가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왔음이 분명히 밝혀져 있는데, 이를 통해 아유타국이 한반도 근처의 왕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왕국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선 이 아유타국이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존재했었던 ‘아요디아’읍이라는 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는 16개의 도시국가가 번성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꼬살라(Kosala)였는데, 그 나라의 수도가 아요디아였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한반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에서 어떻게 자기 나라의 공주를 금관국에 보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허황후를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 출신의 왕녀라는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 최근 아요디아 왕가가 왕후가 출발하기 전인 서기 20년경 쿠샨 왕조에 의해서 왕도를 잃고 그 왕족들이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이 가설은 좀 더 신빙성을 얻고 있다. 또한 김해에 남아 있는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 좌우의 장식판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雙魚文)이 바로 아요디아국의 문장이라는 사실 역시 이 가설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김병모 교수는 이 설을 더욱 심화시켜 새로운 가설을 내 놓았는데 그의 가설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허황후 일행은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 : 현 四川城 安岳縣) 일대로 와서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기 47년 한나라 조정에 저항하다가 실패하여 강제로 추방당하자,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오늘날의 상해에 이르렀으며 서기 48년경에 상해에서 해류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설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상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쌍어문과 관련해서 이 가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현재 쌍어문이 그려져 있는 수로왕릉 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이므로 그 쌍어문이 허황후시대의 쌍어문과 일치하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이상 이 가설은 널리 인정받을 수 없다. 더욱이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경상남도에 위치한 여러 절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허황후가 어디서 왔고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지 그간 많은 추정은 있어왔지만 현재로선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2. 1. 삼국유사의 기록의 면밀한 검토
2. 1. 1. 『삼국유사』,「가락국기조」의 허구설
김태식 교수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에 수록된 금관가야에 대한 설화 중 상당수는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기에 윤색된 내용을 실었기 때문에 가야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가야사에 대해선 아직 학자들간 이견이 많고 그 자료가 매우 한정되어 그 구명에도 어려움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은 매우 경청할만하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의 내용을 일부 부정하는 김태식 교수의 학설을 인용하여 가야의 건국과 관련된 문제 해결에 좀 더 가까이 가보고자 한다.
현재 가락국 설화에 보이는 6개의 황금빛 알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여섯 가야의 수장이 되었다는 설은 가야의 성립에 중요한 단서를 주는 기록으로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국유사』제 1권 기이편 오가야조에는 다음의 기사가 실려 있다.
가락기찬을 살펴보면, 드리워진 자줏빛 끈 하나에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달려 내려와 다섯 개는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아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금관국은 이 다섯 속에 들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본조사략(本朝史略)』에 금관까지 넣고 창녕을 더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본조사략』에 따르면, 태조 천복 5년 경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으니 금관, 고령, 비화이고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가 6가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인식은 위에 인용된 책 『삼국유사』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그 이후 여러 역사서에서 별 실증 없이 그대로 인용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가야사 연구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야의 실제 지역이 어디이며 변한의 소국들이 어떻게 6가야로 통합되어 갔는지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가야 지역이 3세기 이전에는 삼한의 하나인 변진 12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사이의 통합이 좀 더 진전되어 4세기 이후에는 6가야만 남게 되었다는 식의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예를 들면 3세기 후반 이후 김해 세력이 구야국에서 금관가야로 발전했다고 하거나, 4세기 후반이후 함안 세력이 안야국에서 아라가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그러한 인식의 대표적 예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6가야 기록은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오가야조의 기사에서 보듯이 6가야의 명칭을 고려 태조가 어떻게 자의적으로 옛날 5가야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천강설화, 즉 하늘에서 천신의 후손이 내려와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줄거리를 가진 신화들은, 모두 한 명의 천손이 알 또는 어린이의 상태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여섯명이 한꺼번에 내려오는 예는 없는 것이다. 또한 하늘에서 김해에 내려온 나머지 다섯 개의 알에서 나온 사람들이, 김해 이외의 다른 지방에 가서 어떻게 통치에 필요한 신성성(神聖性)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이렇게 볼 때 가락국 수로왕 건국신화에 덧붙여진 6란 설화 및 5가야의 개념은 신라말 고려초의 혼란기에 생겨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가야 지역의 호족들이 옛 가야 연맹의 전설을 되살려 가야 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아 자신의 본관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고려왕조에 가야국의 명칭을 요청했고, 그런 결과 태조 23년 지방제도 개편 당시에 고려 왕조는 지방호족들의 현실 세력관계에 맞추어 5가야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등 ‘某 가야’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 가야 연맹 가운데 하나인 금관국 또는 아라국․고령국․성산국․비화국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인 것이다.(즉, 훨씬 많은 가야국이 존재했었다는 얘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고대사 연구에 큰 공헌을 한 고(故) 이병도 박사가 『삼국유사』5가야조의 5가야는 금관가야를 맹주국으로 하는 6가야 연맹 당시의 국가 구성을 가리키고, 『본조사략』인용문의 5가야는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하는 6가야 연맹 당시의 국가 구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이래 그 설은 널이 널리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6가야 연맹은 실재한 것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관념 속에 존재하던 허구의 전설이었다. 이 전설이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사실처럼 굳어진 것이다. 6가야의 개념은 단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고려 초기까지도 스스로를 옛날에 존재했던 가야 연맹체 소속국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지 알려 줄 뿐이다. 분명 가야는 초기에는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대가야가 그 연맹체를 주도하여 맹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금관가야 그리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이루었던 가야국은 단순히 다섯 나라에 한정되지 않았다. 실제는 더 많은 가야국이 이 연맹체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이며, 여섯 가야로 한정되는 앞서 언급했듯이 나말여초기의 특수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2.2. 금관가야가 부각된 이유
금관가야는 현재 많은 가야국 중 하나로 초기 가야 연맹을 주도했던 가야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많은 가야국 중에서 특히 금관가야에 대한 건국 기록만이 하나의 조항이 마련되어 쓰여질 만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걸까?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신라 제 30대 법민왕 용삭 원년 신유 3월에 영(令)을 내리되, “가야국 원군의 9대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이 세종이시고, 세종의 아들이 솔우공이시고, 솔우공의 아들이 서운잡간이시고, 또 그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원군은 나에게 15대조가 되신다. 원군이 다스리던 나라는 망했으나 사당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하고, 곧 황폐해진 옛 종묘 터에 사신을 보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좋은 밭 30경으로 공양할 거리를 만들어 왕위전이라 하고, 본토에 붙이게 하였다. 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관장하여, 매년 술을 빚고 떡․밥․과일 등의 제사 물건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어 길이 끊기지 않았다. 그 제사 날짜는 거등왕이 정하여 1년에 닷새를 지내던 것을 어기지 않게 하니, 그 아름다운 제사가 이제 왕에게까지 왔다. 거등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으로부터 편방을 두어 구형왕의 말년까지 330년 동안은 이 종묘의 제사가 어김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661년) 신유까지 60년 동안은 이 종묘의 제사가 혹 빠지기도 하였다.
위의 기록대로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봉사(奉祀)되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위전(位田)을 설치해 후손에게 능묘의 제례를 계속하게 했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법민왕 즉 문무왕은 김유신의 누이의 소생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금관가야국 왕족의 후예이다. 문무왕의 후손은 적어도 혜공왕대에까지 왕위를 차지했으며, 삼국통일에 절대적 공헌을 했던 김유신의 후손은 통일 신라말까지 지속적으로 정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금관가야는 비록 신라에 멸망했지만, 금관가야의 후손들이 여전히 신라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의 기록대로 금관가야국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속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창건 역사가 후대에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것이다.
2.3. 수로신화의 신모
김수로왕 신화에는 다른 신화와 달리 신모(神母)가 보이지 않는다. 단군신화에서는 웅녀가 단군을 낳고 주몽신화에서는 유화가 주몽을 출산한다. 그런데 김수로왕 신화에는 신모가 나타나지 않는 대신에 신화의 구조로 보아 수로의 모성과 부성이 등장해야 할 자리에 구간(九干)의 이야기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가락국기의 내용이 원편찬자인 금관국 문인의 기록이었는지 아니면 일연이 개작해서 기록한 것인지는 현재 단정할 수 없지만, 수로신화의 구성에서 신모의 신혼(神婚)을 제외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김수로왕 신화의 원래 모습이 신모의 신혼과정을 결여하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로의 모성과 부성에 대한 이야기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석이정전』에 적혀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夷毗)와 함께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는다. 곧 뇌질주일은 이진아고왕의 별칭이 되고 뇌질청에는 수로왕의 별칭이 된다. 또 『석순응전』에 적혀 있다. 대가야국 월광태자는 정견모주의 십세손이다. 부왕은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월광태자를 낳았다. 곧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이다.
가락국기의 기록은 ‘육란지설(六卵之說)’이지만, 대가야측의 시각은 천신에 감응한 감생(感生)인 것이다. 감생도 신화상징의 표현이지만, 육란지설의 제의보다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가락국기의 시조 수로도 신모의 소생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 때 찬술된 앞서의 자료들에 분명히 수로왕의 모성인 신모의 이야기가 있는데도, 가락국기에서 이것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여기에서도 일연이 가락국기의 내용을 적을 때, 후대에 약간 윤색되어 변형이 가해진 가락국기의 내용을 참고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일연, 삼국유사 1, 이재호 (옮김), 솔, 2002.
김부식, 譯註 三國史記 2, 연구부 (편), 정신문화연구원, 2003.
김부식, 정구복 외 4명 번역, 『역주 삼국사기』2, 4 (정신문화연구원, 2003)
일연, 이재호 번역, 『삼국유사』1, 2, (솔, 2002)
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김경복․이희근, 『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청아출판사, 2001)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 (푸른역사 2002)
윤철중, 『한국의 시조신화』(보고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