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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만파식적

1. 만파식적과 그 설화

1.1 만파식적의 설화

『삼국유사(三國遺事)』 ‘제 2권 기이편 만파식적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제 31대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 성은 김씨이다. 개요 원년 신사 7월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란 절을 세웠다. 이듬해 임오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 중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물결을 따라 감은사를 왕래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쳐보라고 명령하니, 김춘질이 대답하기를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보호하십니다.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치를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사자가 아뢰기를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감은사에 들려 밤을 지내고, 이튿날 정오에 동해변으로 향하였다. 이 때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7일 동안이나 어두운 날이 지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날이 개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를 받들어 바치니, 왕이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용이,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께서 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왕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치를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는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효소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 옥대에 박은 모든 장식은 하나 하나가 다 산 용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고 하니, 다시 태자가 답하기를 “장식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장식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그 장식이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다.(그 못은 용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인 천수 4년(693년) 계사에 부례랑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1.1.1. 만파식적 설화의 등장배경

신문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뒤를 이어 통일신라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통일은 이룩되었으나, 아직 통일신라는 안과 밖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오랜 통일 전쟁의 후유증이 지속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이 자기 왕국의 부흥을 꾀하며 신라 정부에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고, 몇 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였다. 또한 통일 후 강력한 전제왕권을 이루려는 신문왕의 정책에 대해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문왕이 즉위하던 해인 681년 그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흥원, 진공 등이 주도하고 많은 귀족들이 가담한 김흠돌의 반란이다. 신문왕은 문무왕 때 상대등이었던 이찬 군관을 불고지죄로 살해할 정도로 이 모반을 철저히 분쇄하였다. 게다가 대외적 정세도 그렇게 낙관할 상황이 아니었다. 만파식적이 제작된 682년은 당군을 물리친지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였고, 당은 계속해서 신라에게 위협의 대상이었다. 북쪽 국경의 정세도 여전히 불안하여, 고구려 유민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신라의 안정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는 문무왕의 유언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장례도 치르기 전에 왕위를 계승할 것을 태자에게 명령하였다. 이처럼 문무왕은 어지러운 국내외의 상황을 극복하여 평화와 안정을 서둘러 이루려는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현재 경상북도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대왕암의 존재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문무왕은 살아생전에 늘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하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소원이오.”라고 하였다. 지의법사가 “용이란 축생보로 되는 것인데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묻자, 왕은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니 비록 추한 갚음을 받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나의 뜻에 맞는 것이오.”라고 답하였다. 문무왕의 이러한 염원은 실제로 실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에 전하는 사찰기록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절의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했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해룡이 되었으므로,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82년에 사찰의 공사를 끝마쳤는데, 금당의 층계 밑에는 동쪽을 향한 구멍이 뚫려 있다고 전하고 있다. 대개 유서에 따라 뼈를 간직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의 이름은 감은사라 했다.

즉 문무왕은 그의 소원대로 그가 죽은 후 그의 몸은 화장되었고, 그 유골은 대왕암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능으로서의 대왕암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먼저 당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문무왕릉비문에는 문무왕을 화장하여 동해변에 묻었다는 기사가 전혀 나오지 않고, 문무왕릉비가 문무왕이 생전에 창건했던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왕암에 대한 설화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에 반해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대왕암의 바위에는 인위적인 손질이 가해졌고, 이것은 이 바위가 바로 수중릉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물론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한 현재의 상황에선 어느 주장이 더 타당한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모두 수중릉에 관한 기사가 보이기 때문에 이 바위를 문무왕을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 정도로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과 관련된 앞서의 기록들은 통일기의 어지러운 정국을 돌파하여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려는 문무왕의 의지와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문무왕이 그토록 갈구했던 왕국의 평화와 안정은 문무왕 생전에 이룩되지 못했다. 다음 왕인 신문왕대에 이르러서야 왕권이 강화되고 새로운 문물과 체제가 정비된다. 신문왕은 682년 국학을 설립하고, 685년에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성하여 지방조직을 정비함은 물론 9서당으로 군사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689년에는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런 체제정비와 일련의 개혁조치를 통해 신라는 통일기의 과도기를 지나 안정과 평화를 찾게 되었다. 만파식적의 설화는 바로 통일을 이룩한 왕과 그 통일의 과업을 계승해가야 하는 후계자의 왕위 교체시기에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왕족은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가 그대로 표출되어 나타난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좁게 만파식적 설화는,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이 자신의 정치적 힘의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神物)이 필요했고, 만파식적은 그 신물로서 고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즉위 초기에 발생한 김흠돌의 반란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을 만파식적의 설화 속에 담아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파식적은 삼국 통일전쟁의 대참화와 권력투쟁의 크고 작은 피부림을 위로하려는 진혹미사곡이라 볼 수도 있다.

1.2. 만파식적 설화의 재등장(1)

『삼국유사』 ‘제 4권 탑상편 백률사조’에 만파식적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

계림의 북악은 금강령인데, 그 산 남쪽에 백률사가 있고 백률사에는 대비상 한 분이 있다. 언제 조성했는지는 모르나 영검이 많은데, 혹은 중국의 뛰어난 장인이 중생사 대비상을 조성할 때에 같이 만든 것이라 한다. 전설에는 대성상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으로 들어갈 때에 밟은 돌 위에 난 발자국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하며, 혹은 부례랑을 구해 가지고 돌아올 때에 나타난 자국이라고도 한다. 692년 9월 7일에 효소왕이 대현아찬의 아들 부례랑으로 국선을 삼으니, 그는 낭도 천여 명 중에서 안상과 더욱 친하였다. 693년 계사 3월에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에 유람갔다가 북해의 국경근처에 이르러 여진 도둑들에게 부례랑이 납치되어 가서, 그의 문객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오는데, 홀로 안상만이 부례랑을 뒤쫓았다. 이것이 3월 11일이었다. 대왕이 듣고 몹시 놀라 “아버님께서 신기한 피리를 얻으시고 짐에게 전하시어 이제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국선이 도둑에게 납치되었는가”라 하는데, 때마침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는지라 대왕이 또 놀라서 창고 안을 검사해 보게 하였더니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 왕은 “내 어찌 이다지도 덕이 없더란 말이냐. 어제는 국선을 잃고 오늘은 또 거문고와 피리를 잃었구나” 하고 창고지기 김정고 등의 다섯 사람을 옥에 가두고 4월에는 국내에 “만일 거문고와 피리를 찾는 자에게는 1년의 조세에 해당하는 상을 주겠다”라 하였다. 5월 15일 부례랑의 양친이 백률사 대비상 앞에 가서 여러 날 기도 드렸더니 홀연 향안(香案)위에서 거문고와 피리가 나오고, 또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존상 뒤에 와 있었다. 양친은 미칠 듯이 기뻐 그 까닭을 물으니 낭이 대답하되 “제가 납치되면서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의 집의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야에서 소를 치고 있었는데 홀연 거동이 단정한 중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고 고향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앞에 꿇어앉아, 임금님이나 어버이가 그리운 것이야 어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중이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 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안상을 만났습니다. 이에 피리를 두 쪽으로 나누어 저희에게 주면서 각기 한 쪽씩 타라 하고, 자기도 거문고를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왔는데 어느새 여기에 왔습니다.”하였다. 이에 그대로 왕에게 급히 아뢰니 대왕이 크게 놀라 사신을 보내 낭을 맞아 거문고와 피리도 함께 궐내로 들여왔다. 금․은 50냥으로 만든 다섯 가지 그릇 두 벌과 가사 다섯 벌과 비단 3,000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헌납하여 자비한 은덕을 보답하고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고 사람마다 작위를 3급씩 높이고 백성에게는 3년의 조세를 면제하여 주었으며, 주지승은 봉성사로 옮겨 있게 하고, 부례랑은 대각간으로 삼고,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고, 안상으로는 대통을 삼고 창고지기 5명은 사면해주고 각각 작위를 5급씩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17일에 또 서쪽에 나타나니 일관이 이르기를 “거문고와 피리에 작을 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므로 이에 신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 책봉하니 혜성이 없어졌다. 그 후에도 영이로운 일이 많았으나 너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 안상을 준영랑의 무리라 한 것은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준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 번완 등이 알려져 있고,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1.2.1. 만파식적설화의 재등장과 그 배경

국선 부례랑이 국경 부근에서 말갈족에게 사로잡혔을 때, 부례랑을 따르던 낭도들은 안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망쳤다. 목숨보다 신의를 더 중요시하고 적 앞에서 후퇴가 없던 화랑이 자기들의 최고 지도자가 잡혀가는데도 살겠다고 뿔뿔히 도망친 것이다. 부례랑과 그의 낭도들은 통일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른바 신세대 화랑이라 부를 수 있다. 임전무퇴를 신념으로 전장에서 싸웠던 구세대에게 국선을 두고 달아난 이들 신세대 화랑들의 모습은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가 지속되면서 신세대 화랑이 구세대 화랑이 지녔던 신념과 행동철학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세대 화랑에게는 자신의 의미를 죽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전쟁터와 같은 성지가 있었지만 평화시대에 화랑에게 이 성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선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잡히고 그의 낭도들이 모두 도망간 사건은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한 만파식적이 평화의 음악이 군대를 화랑을 무의미하고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례랑이 다시 경주로 돌아오는 것은 곧 신세대 화랑의 참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끈 것은 부례랑과 안상이 타고온 만파식적이다. 즉 국선 부례랑과 안상이 무사히 귀환하고 만파식적을 다시 찾는 이 이야기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화랑이 자신의 원모습을 찾아가는 것, 화랑이 평화와 화해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화랑을 참회하도록 이끌고 평화와 화해하도록 했을까? 698년 발해가 건국된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고구려 유민들은 끊임없이 말갈족과 함께 때로는 티베트와 연합하여 당에 공격을 가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준비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북쪽의 상황은 신라를 압박하기에 충분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유민들의 압박을 감지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 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 앞선 모든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나섰던 구세대 화랑들처럼 당시의 화랑들이 화랑의 본정신을 되찾는 일이었다. 부례랑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나온 설화인 것이다.
그런데 만파식적 곧 예술에 벼슬을 내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술은 정치와 다르게 정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도움을 줄 뿐 그렇게 정치를 정치의 세속, 저질화 운명으로부터 구원해줄 뿐 정치 자체가 되거나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7세기 말 통일신라의 예술은 절정기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예술에 대한 의존도는 그만큼 높아갔다. 당시 신라인들은 예술이 종교가 그들의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는 이성적 눈은 점차 사라지고 예술에 현실을 떠맡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파식적에 만만파파식적이란 벼슬을 내린 것은 바로 예술에 현실을 전적으로 떠맡기는 신라인의 유약한 모습에 다름아닌 것이다.

1.3. 만파식적 설화의 재등장(2)

삼국유사 제 2권 기이편 원성대왕조에 만파식적 설화가 다시 등장한다.

원성왕(785~798)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조상으로부터 전해 가졌던 만파식적을 왕에게 전하여 얻었기 때문에 천은을 후히 입어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786년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이 (일본제기를 보면 55대 임금이 문덕왕이니 그가 아닌가 싶고, 달리는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 하였다.)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치려하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퇴군하고, 사신을 보내 금 50냥으로 그 피리를 청하니 왕이 사신에게 이르되 “내가 듣기로는 선대의 진평대왕 때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하였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신을 보내 금 1천냥으로 청하기를 “과인이 귀국의 신령한 물건을 한 번 보고 돌려드리고자 합니다”하나 왕은 여전히 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천냥을 사신에게 주고 금은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8월에 일본 사신은 되돌아가고 만파식적은 내황전에 간직되었다.

1.4. 만파식적 설화와 일본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묻으라고 내린 유언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 때문에 일각에서는 만파식적 설화가 일본의 침략을 염두에 두고 창작된 것이란 설도 내놓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또한 원성왕대에 일본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만파식적 때문에 퇴군을 했고, 일본왕이 거금을 들여서 만파식적을 사기를 원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만파식적의 설화에는 일본의 침입을 크게 염려한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던 것일까?
먼저 문무왕대 일본의 사정을 살펴보면, 일본은 결코 신라를 침략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니지 못했다. 문무왕대 이전까지 일본인이 신라를 침략한 일은 자주 있었지만 모두 소지왕(479~500재위) 이전의 일이었으며, 그것도 모두 3, 4, 5월의 춘궁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단순히 식량을 얻기 위한 구걸이나 노략질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문무왕 때에도 물론 일본이 단독으로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 시기 일본은 신라를 침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663년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 유민과 연합하여 백촌강(현 금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네 번의 전투에서 400여 척의 전선이 불타는 참패를 당한다. 그 후 일본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멸망이후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라에 침입로가 될 만한 곳에 산성을 쌓았는데 10개성에 달했다. 일본 후쿠오카시에 있는 오노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당시 일본은 신라를 군사적으로 위협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일본은 오히려 백촌강(현 금강 유역) 전쟁이 끝난 66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서 배를 비롯한 각종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1년 뒤인 669년에는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음을 신라에 전한다. 그렇다면 문무왕이 동해에 묻히고자 했던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문무왕은 살아생전에도 용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바램을 곧잘 피력하였다. 용은 깊은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다. 그리고 대왕암이 위치한 곳은 월성 동쪽에 위치한 토함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바닷가 앞이다. 결국 문무왕이 동해 대왕암에 묻히고자 했던 것은 바다용이 되어 자신이 통일을 이룩해 낸 새로운 왕국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성왕대인 786년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려 했지만 만파식적 때문에 퇴군해야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일본은 762년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현해탄에 근접한 요새에는 성을 쌓고 대규모 무기를 제조하기 위한 제철공장을 세웠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역사서인 『속일본기』에 따르면 759년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배 500여척을 만들도록 했고, 761년에는 두 지역에서 각각 20명씩의 소년을 선발하여 신라어를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은 이 시기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공 계획은 대외적으로는 먼저 신라와의 끊임없는 마찰에 의한 것이었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신라에게 완패한 일본은 신라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표명하지만, 통일 후 신라가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을 굳혀 가게 되자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8세기 초 신라와 일본 양 정부가 상대방 정부에서 파견한 사신을 서로 돌려보내는 등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는 일본이 신라에게 번국 즉 조공국으로서의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마찰이었다. 일본이 762년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던 대내적 이유는 당시의 실권자인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야심 때문이었다. 당시 내상 자리에 있었던 나카마로는 어린 쥰닝 천황을 대신하여 내외제병사를 장악하고 천황과의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다른 씨족들이나 후지와라 가문 내의 다른 파벌의 반발은 그에게 큰 잠재적 위험요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카마로는 자신의 권세를 위협하는 여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신라 침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전력으로는 신라침공의 승산은 없었다. 당 고종이 신라의 비밀 병기인 ‘노’를 제작하고자 신라의 장인 구진천을 초빙하였으나 구진천은 그 제작기법 모두를 내놓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이는 바로 당시 신라가 가졌던 뛰어난 무기제작기술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신라는 이미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고 울산에 모벌성을 쌓는 등 국경수비를 강화함은 물론 경덕왕대에 중앙군을 육기정으로 개편하여 왕경 방어 체제를 완비하고 지방에는 9주정을 설치하여 대규모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 더군다나 8세기 초․중엽은 통일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안정된 국력을 이루고 있었던 시기였다. 실제로 일본의 군사전문가들도 당시 일본의 신라침공의 승산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전쟁을 위해 마련한 군사력은 배 394척, 군사 약 4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실권자인 나카마로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당시 동북아에서 큰 세력으로 등장한 발해와 연합하여 전쟁을 치를 계획을 세우고 발해에게 신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한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관계는 727년 발해가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발해는 남으로는 신라, 동북으로는 당과 흑수말갈과 대립하고 있었고, 그래서 후방에 위치한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일본 또한 발해와의 우호관계는 매우 절실한 외교적 과제였다. 8세기 접어들어 신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신라를 거쳐 진행되었던 견당사의 파견은 난간에 봉착했고 당으로부터의 새로운 문물의 수입은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입장에서, 발해는 신라를 견제하고 당으로 이를 수 있는 새로운 교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758년 일본은 오노 타모리를 대표로 삼아 발해에 이례적인 큰 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오노 타모리는 753년 신라에 파견된 사신으로 무례하다는 이유로 신라왕을 알현하지도 못하고 쫓겨났던 인물이다. 이어 발해가 양승경을 대표로 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는데, 일본은 이 사절단을 이례적으로 융숭하게 대접한다. 이후 일본은 762년 다시 고구려의 후손인 고려대산이란 인물을 발해에 파견한다. 일본의 이러한 협공 제안에 대해 당시 발해왕이었던 문왕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현재로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발해는 일본의 제안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62년 일본의 사절단 파견에 이어 발해는 같은 해 왕신복이란 인물을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한다. 그런데 왕신복이란 인물은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최초의 문관 출신의 관리였다. 그 이전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이 모두 무관출신이었던 사실에 비춘다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발해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표명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당시 신라와 발해가 일반적인 인식처럼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고 본다. 그것은 발해에 신라도라는 상설 교통로가 있을 정도로 발해와 신라간에는 매우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 시기 국경선 부근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발해와 신라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경덕왕대에 발해와 신라의 국경선에 위치한 장성에 세워졌다는 ‘탄항관문’의 존재는 두 나라가 상호 통로를 개설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당시 일본과 불편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신라는 발해와의 협력이 절실했고, 고구려 계승의식이 분명했던 발해로서도 신라와 동일민족임을 의식했기 때문에 신라를 적대시할 수만은 없던 형편이었다. 결국 신라와의 외교관계의 마찰에서 비롯된 일본의 신라 침공계획은 일본의 미약한 정치, 군사 기반과 일본의 협공 제안에 대한 발해의 거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764년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반란을 도모하다 사살되고 후지와라 집안이 몰락하게 되면서 신라 침공 계획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786년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단순히 당시 일본과의 불편한 외교관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780년 내물왕의 후손인 선덕왕이 무열계를 대신하여 왕위를 찬탈하면서 중대 신라는 마감하고 하대 신라가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왕권은 매우 취약해졌고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는 매우 느슨해지며 신라의 국내 정세는 매우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는 신라에 대한 잠재적 불안요소였으며, 그것이 다시 만파식적을 뺏으려는 일본과 그것을 지켜낸 신라인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1.5. 만파식적과 에밀레종

에밀레종과 상원사 동종을 비롯한 신라시대 범종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종 상단부에 용이 피리모양의 음통을 짊어진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통일 신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를 두고 용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음통은 왕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만파식적을 상징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이 학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부식, 정구복 외 4명 번역, 『역주 삼국사기』2, 4 (정신문화연구원, 2003)
일연, 이재호 번역, 『삼국유사』1, 2, (솔, 2002)
김기홍, 『천녀의 왕국 신라』(창작과 비평사, 2000)
윤철중, 『한국의 시조신화』(보고사, 1996)
김정환, 『상상하는 한국사』1~3 (푸른숲, 1996)
이도흠,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푸른 역사, 20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