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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문

비사문
1. 개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 중 북쪽을 지키는 천왕으로 다문천왕(多聞天王)이라고도 한다.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사천왕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차트루마하라베라(Caturmaharajakayikas)이며, 제석천의 외장(帝釋之外將)으로 4대금강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인 쿠베라로 인도에서 태어난 4형제였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또, 사천왕과 그 부하 권속들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간의 선악을 늘 살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사자(使者)들이, 14일 태자(太子)가, 15일 사천왕 자신이 제석천(帝釋天)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대한 임무의 하나가 되고 있다.
사천왕 중 동쪽을 수호하는 이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그는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狎)에 있는 천궁(天宮)에서 살고 있다. 16선신(善神)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서쪽을 방어하는 신은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狎)에 살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그는 흔히 잡어(雜語), 비호보(非好報), 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斤) 등이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狎)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달리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狎)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현재 이 사천왕은 천왕문에 많이 봉안되지만, 달리 불보살의 후불탱화에도 외호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2. 한국의 사천왕상
사천왕상은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상(像)이다. 이들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도상화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천왕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아서 귀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으나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때는 사천왕 신앙이 수용된 600년경을 전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성행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당시의 명장(名匠)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하였고, 이어 사천왕사도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82년에 세워진 감은사(感恩寺) 삼층석탑의 사리기(舍利器)에는 금동사천왕입상을 조성하여 장엄하고 있다. 이 상은 대단히 정교하고 매우 세련된 사실적인 수법으로 조성되고 있어서 이 당시 사천왕상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천왕상은 토함산 석굴 연도 입구에 부조된 조각상들이다. 이 석굴 사천왕상들은 연도 좌우로 사상을 배치하여야 하므로 왼쪽(向右)에 동, 북 천왕이, 오른쪽에 남, 서 천왕이 새겨져 있다.
토함산 석굴 사천왕상이 조성되던 전·후기에 신라 석탑 탑신부에 사천왕상을 활발히 새기기 시작하였다. 승효곡사지 삼층석탑, 황룡사 서사지(西寺址) 탑부조 사천왕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9세기부터는 고승들의 묘탑에도 사천왕상을 흔히 새기고 있다. 전 흥법사 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844년), 쌍봉사 철감선사탑(雙峰寺澈鑑禪師塔, 868년), 봉암사 지증대사탑(鳳巖寺智證大師塔, 884년), 실상사 수철화상탑(實相寺秀澈和尙塔, 894년) 등에 부조된 사천왕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가 좀더 확대되어 부처나 불사리(佛舍利), 불국토(佛國土)나 국가를 악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장상(神將像)으로 신앙되어 계속 조성되었던 것이다. 통일 신라 시기를 전후해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사천왕상 유물은 비교적 적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은 석등, 부도, 탑, 사리기, 불감, 금강령 등에 부조된 몇 점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그중에서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사천왕 벽화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 벽화는 대체적으로 그 기본형을 통일신라 시기의 감은사 사리기 또는 도리사 사리기 등에서 나타나는 사천왕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불화에서는 사천왕상이 지장시왕도의 협시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특징을 보인다.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년)에 양산 통도사의 천왕문이 초창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가람의 형태가 평지 가람에서 산지 가람으로 변화하면서 천왕문이 독자적으로 배치되고 그 안에 사천왕상이 안치되기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보여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롭게 제작되는 석가모니불회도나 아미타불회도에서는 외호중의 일부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아미타구존도의 군도(群圖) 형식의 불화가 유행하면서부터 불화에서 사천왕상을 빈번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군도 형식의 하나인 목탱화(木幀畵)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거대한 사천왕상에서 가장 큰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3∼4m의 거대상인 천왕문 안의 사천왕상들은 목조 또는 소조의 조각상이거나 단독상의 불화로 안치되어 있다.
목조 사천왕상은 보림사(전라남도 장흥, 1539년), 적천사(경상북도 청도, 1690년), 용문사(경상남도 남해, 1702년), 쌍계사(경상남도 하동, 1704년), 봉은사(서울시 강남, 1901년), 통도사(경상남도 양산, 조선 후기 추정), 능가사(전라남도 고흥, 조선 후기 추정), 불갑사(전라남도 영광, 조선 후기 추정)에서 볼 수 있다.
소조사천왕상은 직지사(경상북도 김천, 임진왜란 이전), 법주사(충청북도 보은, 1624년), 송광사(전라남도 순천, 1628년), 화엄사(전라남도 구례, 1632년), 송광사(전라북도 완주, 1649년), 수타사(강원도 홍천, 1676년), 칠장사(경기도 안성, 조선 후기 추정), 흥국사(전라남도 여수, 조선 후기 추정)에서 볼 수 있다.
또 단독 탱화로는 홍익대학교박물관(1758년), 대둔사 침계루(전라남도 해남, 1794년), 대둔사 천불전(1794년), 대영박물관(1796∼1820년 연간), 범어사(부산광역시, 1869년), 동화사(대구광역시, 1896년), 불갑사(전라남도 영광, 1904년)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조사천왕상은 주로 임진왜란 후의 인조시기에, 목조는 숙종시기에, 탱화는 영조시기에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울러 천왕문 안에 사천왕상이 만들어지는 사찰 대부분이 임란 시기에 의승군의 집합처였다는 사실 또한 호국의 개념에 입각하여 사천왕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전형을 이룬 인조 시기의 사천왕상 제작을 주도한 벽암각성 대사가 서산, 사명 대사의 뒤를 이은 팔도 도총섭으로서 의승군을 이끌었다는 사실로서도 입증된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사천왕상은, 조각상의 경우 사천왕상은 보편적으로 의좌상(依座像)을 하고 있다. 탱화의 경우에는 입상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중국의 원(元), 명(明)대식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 명13릉의 갑옷과 거의 흡사하다. 갑옷 속에는 평상복을 입었고 갑옷 위에는 천계(天界)의 존재임을 나타내는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를 걸친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무장상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보살의 상징인 화려한 보관, 휘날리는 천의, 귀를 감싸고돌아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등을 첨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위협적인 사천왕의 형상 위에 자비의 모습을 담아 보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얼굴은 분노상으로 특징 지워진다.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든지 입을 악다물거나 포효하는 듯이 벌리고 있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에 위협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의 경우는 반쯤 내려감은 눈과 노래하는 듯한 입모습으로 인자한 인상을 준다.
사천왕의 손에는 각각 다른 지물을 잡는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화살, 창,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자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배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점은 사천왕상의 지물과 그에 따른 배치와 명칭의 문제라고 하겠다. 천왕문에 배치되는 사천왕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천왕문 입구에서 보아 오른편의 대웅전을 향한 쪽에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칼을 든 사천왕상을 배치하며, 왼편의 대웅전 쪽에 당과 탑을 든 사천왕상을, 입구 쪽에 용과 여의주를 든 사천왕상을 배치한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사천왕상의 명칭을 지물에 따라 각각 달리 부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지국천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북방다문천왕이라고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 후기 사천왕 조각상과 중국 원, 명, 청대의 사천왕 조각상들에서는 비파를 든 사천왕상을 동방지국천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조선 후기 사천왕 탱화에서는 칼을 든 사천왕상에게 동방지국천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천왕상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서까지도 사천왕상의 지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북방다문천왕이 보탑을 받든다는 원칙에서 보자면 비파를 든 사천왕을 동방지국천왕으로 보는 사천왕 조각상의 명칭 방법이 옳다고 판단된다.
3. 한국의 사천왕문
보통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천왕문(天王門)에 사천왕상을 봉안한다. 사천왕문은 절로 들어서는 3문(門) 중 일주문 다음에 위치하는 대문(大門)이며, 줄여서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이 문 안에는 그림 또는 조상(彫像)한 사천왕을 봉안하게 된다.
대개 여기에 모셔진 천왕상들은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 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 등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때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상을 하고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고대 인도의 신이었던 그들은 불교에 채택되면서부터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護法天王)의 구실을 맡도록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천왕문내에는 동방 지국천(持國天)이 검(劍)을, 북방 다문천(多聞天)이 비파(琵琶)를, 서방 광목천(廣目天)이 탑을, 남방 증장천(增長天)이 용을 쥐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절에 이러한 천왕상을 봉안한 천왕문을 건립하는 까닭은 절을 외호한다는 뜻도 있지만,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가지게 하려는 데도 뜻이 있다.
또한, 수행과정상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일심(一心)의 일주문을 거쳐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따로 금강문(金剛門)을 세우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천왕문의 입구 문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모습을 그리거나 따로 금강역사상을 봉안하여 금강문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왕역사(仁王力士)를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가람수호를 위한 제일 관문의 신이다.
4. 사천왕 도량
사천왕 도량은 불교에서 사천왕을 본존(本尊)으로 하여 개최하는 기원법회이다. 사천왕도량은 사천왕의 보호를 받아 적병을 물리친다는 진병도량(鎭兵道場)의 목적에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자주 열렸다. 밀교(密敎)의 문두루비법(文豆婁煉法)을 처음으로 신라에 전한 명랑법사(明朗法師)는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 하자 사천왕사에서 이 비법을 행하여 그들을 물리쳤으며, 사천왕사는 사천왕도량의 본산이 되었다.
이 도량의 의식절차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천왕품(四天王品)에 의한 것과 명랑(明朗)이 전한 문두루비법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이 두 가지 사천왕도량의 전통적 의식은 행하여지지 않지만, ‘외현천신지위맹 내비보살지자비(外現天神之威猛內煉菩薩之慈悲)’라 하여, 사천왕은 밖으로는 천신으로서의 위용과 용맹을 나타내고 안으로는 보살의 자비를 감추고 있어 능히 악마의 항복을 받고 사방을 지켜 부처와 법을 보호한다(鎭四方而護佛衛法)는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천왕을 의식도량에 봉청(奉請)하여 그 옹호를 받기를 바라는 기원법회를 열고 있다. 그 의식절차는 ①거불(擧佛), ②유치청사(由致請詞), ③향화청(香花請), ④가영(歌詠), ⑤정례(頂禮) 등의 순서에 따라 행한다. 즉, 사천왕에 귀의하여 법회를 열게 된 사유를 밝혀 사천왕을 의식도량에 봉청하고 향화(香花)로 공양드린 뒤 찬불하고 다시 정례를 하는 것이다.
특히 각 사찰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고, 이 문 안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여 사천왕신앙이 오늘날의 사찰에서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천왕문은 청정도량(淸淨道場)으로서의 사찰을 옹호한다는 신앙을 나타내며, 이를 확대하여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에 따라 사천왕도량에 버금가는 의미를 갖게 된다.
5. 수미산과 사천왕천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세계에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승신주(勝身洲), 섬부주(贍部洲), 우화주(牛貨洲), 구로주(俱盧洲)의 4대 주가 동남서북에 있고, 그것을 둘러싼 구산(九山)과 팔해(八海)가 있다고 한다. 이 수미산의 하계(下界)에는 지옥이 있고, 수미산의 가장 낮은 곳에는 인간계가 있다. 또 수미산 중턱의 사방으로 동방에는 지국천(持國天), 남쪽에는 증장천(增長天), 서쪽에는 광목천(廣目天), 북쪽에는 다문천(多聞天)이 거주하며 지키는 사왕천(四王天)이 있다.
또한 수미산의 정상은 정입방체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선견천(善見天)이 있고 주위의 사방에는 32개의 궁전이 있으므로 삼십삼천(三十三天)이라고 한다. 이 수미산 위의 공중에는 욕계(欲界) 6,000 가운데 네 개의 하늘과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들이 차례대로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을 건립할 때 그 가람배치를 수미산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찰에 들어서는 문인 일주문(一柱門)은 천상계를 넘어선 불지(佛地)를 향해 나아가는 자의 일심(一心)을 상징하고, 사천왕문은 수미산 중턱까지 올라왔음을, 불이문(不二門)에 도달하는 것은 수미산 꼭대기에 이르렀음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부처는 그 위에 있다고 하여 법당 안의 불단을 수미단(須彌壇)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범종각(梵鐘閣)을 사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 세우거나 불이문 옆에 건립하는 까닭도 범종, 운판, 목어, 법고의 4가지 불구인 불전사물(佛殿四物)을 울려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모든 중생에게 불음(佛音)을 전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 수미산의 남쪽 칠금산(七金山)과 대철위산(大鐵圍山)의 짠물 바다에 있는 염부제(閻浮提)에 위치한다고 한다.
6. 사천왕사
사천왕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狼山)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천왕신앙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문무왕 19년인 679년에 창건하였으며 신문왕릉 옆에 있었다. 당나라는 674년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都督府) 군사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병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신라는 부처님의 힘으로 그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
674년 2월 김인문(金仁問)으로부터 당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의상(義湘)은 즉시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문무왕은 명랑법사(明朗法師)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열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되자, 명랑은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든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煉法)을 썼다.
그러자 당군과 신라군이 접전하기도 전에 풍랑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뒤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고려 때까지는 문두루비법을 행한 단석(壇席)이 남아 있었다 하나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이 절을 지은 곳인 신유림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의 하나로서 선덕여왕이 그곳을 도리천(克利天)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곳이 낭산의 남쪽이라 하였다. 선덕여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왕릉 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자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四王天)은 불교에서 사바세계의 중심지로 보고 있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위치하는 곳으로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다.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의 설화에서 서라벌의 가운데 산인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하려 하였던 신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사천왕사는 가람배치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찰이다. 통일 전의 신라 사찰들은 모두 금당(金堂: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 앞에 1기의 3층탑 또는 5층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一塔一伽藍制)를 따랐다.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로 변모되었다. 이 절은 통일 이후에 발전된 형식을 갖춘 쌍탑가람제에 의한 최초의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있고, 북방으로는 좌경루(左經樓), 우경루(右經樓)가 있어서 마치 본존불(本尊佛)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사천왕이 배치된 것과 같은 특이한 가람형태를 이루었다. 유지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머리가 잘린 귀부(龜趺) 2기와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뿐이다.
당간지주는 망덕사지(望德寺址)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전체 높이 2.4m이다. 이 절 동편에 비신(碑身)과 거북의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가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걸작이다.
사실적인 표현수법,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음각(陰刻)은 신라시대 귀부 중 손꼽히는 작품의 하나이다. 현재 이 절에는 없지만 1922년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우수한 당초문(唐草文)의 와당(瓦當)과 사천왕부조(四天王浮彫)의 전(塼: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중 사천왕부조 전은 선덕왕대에 사적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양지(良志)의 걸작품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사천왕사의 천왕상(天王像),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은 대표작으로 전해져 오지만, 지금은 허리 윗부분이 잘린 천왕상만 전해져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사천왕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명랑과 양지 외에, 경덕왕 때에 도솔가(兜率歌), 산화가(散花歌), 제망매가(祭亡妹歌) 등의 향가를 지었고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月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月明里)라 불렀을 만큼 그와 사천왕사와는 인연이 깊었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三國遺事』
『釋門儀範』
강우방,「四天王寺址出土彩釉四天王浮彫像의 復原的考察」,『美術資料』25,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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