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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산신

1. 개요

산신은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精靈)이 있고 그 정령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원시신앙인 애니미즘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몸을 대개 호랑이의 모습이나 신선의 모습으로 나타낸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신제 또는 산제(山祭)라 하며, 우리 민족이 이 산신제를 지낸 것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는 “먼저 천신과 지신을 제사지내고 산곡신에게까지 미쳤다(先祠神祗及山谷之神).”고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오악의 세 산신(五岳三山神)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산신은 중국식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으로 정하고, 오악(五岳)은 동은 토함산(吐含山), 남은 지리산(智異山),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太白山), 중은 부악(父岳: 大丘)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주관하여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행운을 빌었다.

2. 왕조와 관련된 산신신앙과 산악숭배

상고대 왕조의 시조와 왕조 초기의 왕들 가운데는 산신으로 관념된 존재들이 있다. 가락의 시조모로 전해져 있는 정현모주(正見母主)와 토함산신(吐含山神)으로 신봉된 탈해왕이 그 좋은 보기이다.
이러한 관념은 고려시대의 전설에까지 이어진다. 정현모주는 왕조의 시조인 여산신(女山神)인 데 비해 탈해왕은 왕성의 시조인 남산신(男山神)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이 경우 단군이 사후에 산신이 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여야 이해가 쉽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같이 왕권산신(王權山神)이라 부를만한 공통성을 지니고 세계산과 나란히 상고대 산악숭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여산신인 정현모주가 동시에 왕족의 시조모이기도 하다는 점은 신라의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와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권5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도 선도산성모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불전(佛殿)을 지으려 하자, 그의 꿈에 선도산성모가 스스로 현신하여 불전 짓기를 돕는다는 이 부분 기록에 의하면,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여인인 바, 신선의 술책을 얻어 해동(海東)에 와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에서는 혁거세와 알영이 이 신모에서 유래됨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김부식(金富軾)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 왕보가 “옛날 중국 황제의 딸로서 바다에 떠 진한에 가서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고, 자신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게 되었다는데, 이는 그의 상이다.”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선녀상을 목격하게 된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신빙성이 적기는 하나, 이들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선도산신모가 신라왕조의 시조모신으로 관념된 믿음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단군과 탈해가 산신이고 선도산신모나 정현모는 각기 여산신이다. 그런 뜻에서 왕조(王祖)와 관련된 남녀산신이 존재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녀시조 산신 사이에 대조적인 차이가 있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즉, 여신들은 사후에 산신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산신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남산신들은 사후에 비로소 그 신격을 얻은 것이다. 탈해는 바다 출신이고 단군은 천신의 후예이며, 이들에게 있어 산신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신격이다.
왕조의 시조가 산신으로 관념된 만큼 신라의 왕들 가운데는 경덕왕이나 헌강왕과 같이 산신의 친현을 보거나 산신에 빙의(憑依)되는 경험을 가진 왕이 존재하고 있다.
경덕왕은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대대로 대전 뜰에 나타나거나 시립하는 것을 보았고, 헌강왕은 포석정에서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추는 것을 혼자 보았는가 하면, 금강령(金剛嶺)에서는 북악(北岳)의 신이 역시 춤추는 것을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춤을 본떠 춤추었다고 전해져 있다. 이 경우 산신에 접신된 상태로 춤춘 것이라 하겠다.
또한, 정현모주, 선도산성모, 성거산성모(고려왕조의 시조여신) 등으로 일컬어진 여산신인 것과 같이, 왕족이 아니면서도 치술령신모로 일컬어진 산여신이 존재하고 있어, 이 방면에서도 민속신앙과 왕조의 산악숭배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한다.
남해왕의 부인인 운제(雲梯山聖母)와 오늘날에도 전하고 있는 지리산성모천왕 등과 함께 이들 여산신들은 모두 산모신(山母神)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각지에 노적봉전설을 남기고 있는 ‘미륵할미’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경우 산모신은 당연히 ‘산할미(山姑)’나 산노고(山老姑)라는 관념과 맺어지는데, 물할미와 지모신(地母神)과 더불어 산모신은 자연모신(自然母神) 신앙의 3위를 이루게 된다.
산악을 인간화시켜 숭배한 것이 산신숭배 외에도 역대 왕조에서 산악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신앙의례를 행하였다.
신라의 경우,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 메뚜기들로 말미암은 농사피해를 이기기 위해 두루 산천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외에 제7대 왕인 일성이사금 역시 북순(北巡)하여 태백산에 친히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도 비교적 초기인 제5대 왕인 초고왕시대 큰 단(壇)을 모아서 천지산천에 제사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평원왕이 여름 가뭄을 당하여 끼니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부여에서는 왕이 자식을 구하여 산천에 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이, 앞에서 이야기한 왕들만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산천에 제사지낸 것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항상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되,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냈다.”라고 한 고구려의 기록이나, 신라가 삼산오악에 각기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산악숭배는 신라, 고구려, 백제 및 부여 등 상고대 왕국의 국가적인 규모의 관례적인 종교행사였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왕조에까지 이어져 천신 및 지신숭앙과 함께 가장 전통성 깊은 자연 숭앙을 이루고 있었다.
신라에는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 등 대사를 바친 삼산(三山)과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부악(父岳) 등 중사를 드린 오악이 왕가의 산악숭배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거니와, 이 밖에 소사를 바친 상악(霜岳), 설악(雪岳), 감악(감岳), 서술(西述) 등 전국에 걸쳐 무려 스물넷의 산들이 있었다. 국가수호와 재해방지를 위한 기도와 기우 등이 이 산들을 대상으로 하여 치러졌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산천의 음우(陰祐)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 유훈(遺訓)을 따라 신라처럼 국가수호와 왕실보존의 진산(鎭山)으로 산악을 숭앙하였다. 태종은 불타(佛陀)의 호위, 산천의 음우 등에 힘입어 창업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부처를 섬기기 위해서는 팔관회를 존중하기를, 그리고 천령(天靈)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용신·대천(大川)과 함께 오악과 명산을 받들도록 하라고 교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이 창업에 앞선 선대에 이미 부소산(扶蘇山),송악(松嶽), 그리고 곡령(穀嶺) 등이 풍수설과 관련되어 왕조의 텃밭이 되었음을 여러 기록들은 보여주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산악숭배의 고려왕조적인 변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사에 전하는 도선과 용건(龍建)의 일화는 고려왕조 창업의 기틀이 풍수지리설과 맺어진 산악숭배에 의해 잡혀졌음을 일러주고 있다. 왕조 창건이 산악에 힘입어 이루어졌다는 믿음 때문에 고려왕조는 재변이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오악명산에 빈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가적인 중요 행사가 있을 적마다 이른바 산에 대한 가호(加號)를 시행하였다.
가호란 신호(神號), 덕호(德號), 훈호(勳號), 존호(尊號), 작호(爵號) 등을 산에다 붙여주는 것을 뜻한다. 산의 자체를 높임으로써 그 이름을 영예롭게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그 밖에 총정(總正)이나 지기(知幾) 같은 상자(上字)를 산에다 붙여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산에 대한 가호는 가령, 태자책봉이나 선왕선후(先王先后)에 대한 가상존호(加上尊號), 대묘친제(大廟親祭), 왕의 순행과 귀환 등과 같은 국가의 중요 행사에 즈음하여 베풀어졌다. 그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산들의 음우가호(陰祐加護)로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삼별초(三別抄)가 진압되었을 때, 무등산, 금성산, 감악산 등의 음우가 있었다고 믿고, 치제(致祭)하게 한 사례들도 산 가호에 준하는 산악숭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산천에 묘사를 짓고 신병(神兵)이 전쟁에 이기게 도와주도록 빈 경우도 앞에서 말한 사례들과 더불어 그 기능이며 뜻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 대궐 뜰 안에 산천의 신들을 모셔다가 왕이 친제하는 것을 초(醮)라고 하였다.
고려왕조의 산악숭배는 대체로 조선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동(東)금강산, 남(南)지리산, 중(中)삼각산, 서(西)묘향산, 북(北)오대산 등의 5악과, 동오대산, 남속리산, 중백악산, 서구월산, 북장백산 등의 5진이 태조 때 이미 제사지내는 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왕조의 산악숭배는 국가수호, 왕조보존 및 천재지변의 극복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진산이라는 개념 속에 이와 같은 산악의 성격이 포괄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민속신앙의 산신신앙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산신은 산신령, 신령 등으로 불리고, 때로 노인으로 관념되거나 아니면 호랑이로 관념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는 단순히 산신의 말 정도로 관념되는 경우도 있다.
산신령이 노인, 그것도 흰 수염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관념될 때, 산신숭배는 신선사상과 같은 유대를 가지게 된다. 가령, 선산(仙山)이라는 개념이 전해진 것과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입산화선(入山化仙)하였다든가 하는 믿음이 이 경우에 속한다.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산신은 서낭신과 겹쳐서 동신, 곧 마을신으로 섬겨지면서 동신제(洞神祭), 서낭굿, 별신굿, 당산굿 등의 주신(主神)이 되어 민간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부상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신제가 아예 산신제로 관념될 정도이다.

3.1. 무속의 산신

무속신앙에서 산신은 산왕대신, 산신령님, 산왕대성존 등의 칭호로 불리는 지상의 최고 신령이시다. 산신은 각 산마다 있으며 많은 권속들을 거느리는데, 이들이 바로 군웅신장 오방신장이다. 산신은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신은 인간의 수복을 주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한다. 만신들에게는 영을 주고 말문과 글문의 통신을 주는 신령인데, 이 때에는 산신을 가리켜 말문을 주는 대감이라는 뜻으로 공수대감이라고 한다. 남자 산신과 여자 산신이 있는데 보통 남자 산신이 거주하는 산은 그 형태가 크고 우람차며 여자 산신이 머무른다는 산은 아담하며 차분한 모양이다. 그러나 남자 산신령과 여자 산신령이 함께 있는 산도 많다.
또 제상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 육산과 소산으로 나뉘어 지는데, 고기를 받는 산을 육산이라고 하며 고기를 받지 않고 나물종류의 소찬만 제물로 받는 산을 소산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기본적으로 여러 신령들을 좌정(坐定)시킴으로써, 마을을 안정되게 하려고 애쓴다. 마을의 주산(主山)에 마을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 입구에 여러 거리신들을 위함으로써, 마을은 사람만이 아니라 신령들도 함께 사는 공간이 된다. 이른바 상, 하당신을 말한다. 여기서 상당신이란 마을의 주산 내지는 진산(鎭山)에 모셔진 산신을 가리키고, 하당신이란 마을 입구의 여러 거리신들을 일컫는다.
상당(上堂)을 구성하는 산신은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주관하는 최고의 신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은 하나 어렵게 생각한다. 그는 마을의 최고신답게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을 뒷산 중턱쯤에 자리한다. 그는 이곳에서 언제나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마을에서는 그를 그리 쉽게 볼 수 없다. 기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장소에 산신은 자리한다.
마을 사람들은 일년에 한두 번씩 약속된 날짜와 시간에만 산신을 뵐 수가 있다. 물론 이런 정기적인 만남 외에도 느닷없이 일어난 마을의 긴급한 문제를 고하고 해결을 요청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산신을 만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래서 마을을 대표하여 그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뽑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몸과 마음이 정갈해야 하고, 그해의 우주적인 기운과도 합치되어야 한다. 이른바 제관, 축사, 유사 등 남성들로 구성된 제의 집행자만이 산제를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에 다른 사람들은 일절 접근하지 못하고, 특히 여성들은 부정하다 하여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산제 자체도 아주 정중하며 조용한 가운데 모신다. 닭소리, 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서 모시는 '정숙형(靜肅形) 제의'인 것이다. 산제가 치러지는 동안에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불을 환히 밝히고, 제관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을 자체가 종교적 상징성을 뚜렷이 지니게 되는 이유는 사실상 이 산신에게 있다. 하나의 마을은 하나의 산신에 의하여 보호와 축복을 받는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신성 구역이다. 몇 개의 마을이 하나의 산신을 모시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는 하나의 마을은 하나의 산신을 모신다. 그리고 각 마을의 산신은 다른 마을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하나의 마을과만 종교적 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하나의 산신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인 결속을 다지게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그런데 산신은 사실상 천신의 성격을 지닌다. 지고(至高)천신이 관장하는 대우주를, 산신이 담당하는 소우주인 마을로 옮긴 것이다. 천신과 산신은 본질상 동일 선상에 있고, 구태여 구별하자면 산신은 천신의 소우주화된 신격이다.
그 밖에 하당(下堂)을 구성하는 장승, 솟대, 탑, 선돌 등에 대한 제의는 일반적으로 거리제라 지칭된다. 아무 신체(神體)없이 마을 입구에서 치러지는 제의도 역시 거리제라 부른다. 또한 마을 입구에 탑을 모시면 탑제라 하고, 장승을 위하면 장승제, 솟대를 모시면 짐대제, 그리고 수구맥이 선돌을 위하면 수구맥이제 등으로 부른다. 여하튼 여러 다양한 하당제는 기본적으로 거리제라는 공통된 성격을 지니면서, 어떤 거리신을 더욱 비중 있게 섬기는가에 따라서 그 신앙의 형태와 의미가 조금씩 다른 것이다.
거리제에서 거리란 마을 입구를 뜻한다. 마을 입구는 마을 안의 '신성과 질서의 세계'와 마을 밖의 '부정과 무질서의 세계'가 경계 지어지며 동시에 접촉되는 공간이기에, 이러한 곳에 여러 신앙대상물들을 건립하여 마을 밖의 부정을 막으며 마을 안의 재복(財福)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것도 막는다. 하당의 신들은 그것이 장승이든 솟대이든, 또는 탑이나 선돌이든 모두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실질적인 하위(下位)의 신이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들 하당신들이 마을 최고신인 산신보다도 더욱 친근하며 밀접한 신앙대상이 된다.
무속신앙에서 산왕대신은 우리나라 각지의 명산에 살고 있다는 무속신앙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령이다. 굿에서도 산왕대신이 노는 거리를 큰거리라고 부를 정도로 모든 만신들의 주장이며, 모든 신들의 귀의처로 생각된다.
무속 신앙에서는 산마다 그 산을 지키는 신령이 있으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태어나는 지점의 산줄기의 영기를 받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를 본산이라고 하며 본산의 벌전이 비치면 가문이 망하고, 인구가 줄어들 정도로 그 화가 심하다고 한다. 산신령의 대표적인 신명으로는 덕물산의 최영 장군과 태백산의 단군 할아버지를 들 수 있어서, 한국의 건국설화와 습합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4. 불교 속의 산신신앙

4.1. 산신각과 산령각

앞서 살펴본 산신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이 불교와 접합하여 점차 불교에 흡수되면서 절의 법당에까지 봉안되어 신앙을 받고 있는 대상이 된 것으로 '산신(山神), 독성(獨聖), 칠성(七星), 용왕(龍王)' 등이 있다. 그 중 특히 발달하여 폭넓게 드러나는 것이 산신 신앙이다. 사찰의 산신각은 고유 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七星)도 함께 모셔졌다. 명칭은 산신각, 칠성각(七星閣), 삼성각(三聖閣) 등 일정하지 않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산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고 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지형 조건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은 아득한 옛적부터 산악, 산신에 관한 숭배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태초의 산들은 그 돌올(突兀) 유장(悠長)한 모습이 우선 우러러 보는 이를 압도하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통로가 없어, 또는 맹수의 출몰 때문에 가까이 범접하기가 어려워 신성시될 수 있었고, 철이 늦도록 머리에 흰 눈을 이고 광채를 발하면서 또 그 위로 솟아 오른 태양이 광명을 비롯하므로 신령스러운, 신이 머물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적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대 신화는 하늘 임금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단군(檀君)이 내려와 나라를 처음 연 것으로 말하였는데, 태백산의 '백(白)', 신단수, 단군의 '단(檀, 밝달)'은 높은 산 정상에서 연원하는 맑고 밝음과 관련을 맺고 있고, 국호이던 '조선(朝鮮), 숙신(肅愼), 예맥(濊貊)' 등에 나타나는 '선(鮮), 숙(肅), 맥(貊)' 등도 그러한 맑고 밝음과 인연이 닿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예나 다름없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거 가까운 산을 신격인 당산(堂山)으로 삼아 제사를 받드는 등의 민간 신앙이 이어지고 있으며, 동리마다 산신당이 모셔지며, 유가(儒家)의 치상이나 묘제에서는 조상 유택을 호위해 줄 산신을 위한 제사를 어김없이 받들고 있다.
이 '산신'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 고유의 토속신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어느 민족에게서나 보편적으로 이어졌을 법한 토속 신앙이 곧 '산신' 신앙이었던 터라, 그 '산신'은 금방 불교에 접목되어 나타났다. 곧 불교가 재래의 신앙을 수용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도와 사찰을 호위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맡기게 되었는데, 화엄신중(華嚴神衆) 속에 '산신'이 이미 들어있고, 사찰의 신중탱화(神衆幀畵) 속에도 '산신' 그림이 흔하게 나타나는 것 등이 모두 그 증거가 된다. 20세기 초반 안진호 스님이 전통적인 불교 의례를 총정리하여 펴낸 책인『석문의범(釋門儀範)』에서 산신을 청하는 산신청(山神請) '가영(歌詠)' 부분에서는 산신은 "옛날 옛적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고, 강산을 위진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푸른하늘 청산에 사시며, 구름을 타고 학처럼 걸림 없이 날아다니시는 분(靈山昔日如來囑 威鎭江山度衆生 萬里白雲靑障裸 雲車鶴駕任閑情)” 이라고 찬탄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을 그리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은 살펴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사찰은 그 대부분이 산지가람(山地伽藍)인지라 실화나 산불 기타의 재해를 입기 쉬웠고, '불, 승, 보살, 대중'이 왕래하는 길에 맹수의 피해가 적잖이 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그러한 재앙을 막아 주는, 당지(當地)와 인연 있는 '신중(神衆)을 특별히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민간에서 '산신령'으로 터부(Taboo)의 대상이 되는 호랑이는 당연히 불교의 '산신'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산신'이 불교와 일찍이 접합되었음을 이미 고사서에서 보게 되는데, 안흥사(安興寺)의 비구니 지혜(智惠)가 경주 서쪽 선도산(仙桃山)의 여자 산신격이었던 선도성모(仙桃聖母)에게 도움을 얻어 불전을 수리하였다는 이야기와 심지왕사(心地王師)는 팔공산(八公山) 산신에게 계(戒)를 주고 그 대가로 산신으로부터 동화사(桐華寺) 지을 절터를 안내 받았다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그래서 흔하지는 않으나 절 이름을 아예 재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여 소재사(消災寺)라 한 예를 경북 달성군의 비슬산(琵瑟山)에서 볼 수 있고, 신중들을 주로 모시고자 한 절 이름으로 신중사(神衆寺)와 신중암(神衆庵)이라 한 것도 있었다.
지금 절 가운데서 산신을 모시는 당우의 이름이 산신각(山神閣) 혹은 산령각(山靈閣)인데, 그 산신은 가람의 수호신으로 요마를 물리치고 산중 생활을 안온토록 호위하는 신중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나 혹은 부녀자들에게서 복록이 많아지고 가족이 무병장수하기를 비는 이른바 소재강복(消災降福)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양산 통도사 '산령각' 주련에는 “지위가 산천을 위압하여 부처님 호위하니 그 영험 넓고 커서 태산의 신령일세(位鎭山川護法身 靈通廣大泰山神)”라고 쓰여 있다.

4.2. 산신도

'산신각' 안에는 드물게 호랑이를 타거나 호랑이에 기대앉은 '산신상'을 봉안하기도 하나 대개는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 탱화를 봉안한다. 산신각은 사찰 내에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산신은 지역수호신으로서 산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일반적으로 신성한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산신신앙이 신선사상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신상이나 탱화를 보면 산신이 남자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여자인 경우도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 산신이 관장하는 것으로 믿는 산들인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등의 절에는 노파의 모습을 한 여산신탱화나 소상(塑像)을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다. 이 여성 산신은 트레머리를 댕기를 둘렀으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타거나 기대어 있고, 손에는 불로초를 들고 있다. 남자인 산신의 탱화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 첫째의 도교적 산신 탱화는 대머리에 백발 수염을 늘어뜨린 채 긴 눈썹인 신선의 모습이며,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신 그림의 배경에는 신선 세계의 산이라 하는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 등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하나는 유교적 산신 탱화인데, 머리에 복건(福巾), 유건(儒巾), 정자관(程子冠) 등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신령스러운 노인으로 묘사되며, 노인 신선의 주위에는 책거리나 대나무, 차를 달이는 도구 등이 배경 그림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한 가지는 불교적 산신 탱화로 삭발한 스님의 모습이며 손에는 『법화경(法華經)』등 불경이나 단주를 들고 있는 경우가 흔하며, 옷은 대개 적록색에 금박이나 노란 색깔로 그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변형된 가사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들 탱화에는 산신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여 나타나는 그림이 호랑이인데, 백호(白虎), 흑호(黑虎), 갈범, 표범, 줄범 등이 흔하고, 때로는 산신이 탈 수레를 끄는 호랑이로 묘사되는 등 다양하며, 또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산신령 그 자체이거나 혹은 신령의 인도자로 일컬어지는 그 영험스러운 호랑이가 항상 무섭고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조금은 장난스럽고 애교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아주 친밀감을 주는 것이 특이하다. 산신도 속에 함께 많이 그려지는 호랑이는 맹수로서의 본성과는 달리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큰 특징이다. 영수, 또는 신수로도 불리는 호랑이는 산신령의 사자로 상징되나, 호랑이 자체를 산신, 산군으로 불러 신성시하기도 한다. 산신령의 사자답게 위엄이 있는 호랑이도 있는데, 평온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 산신 탱화에 나오는 호랑이 모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산신령의 동자가 호랑이에게 감로수 먹이는 장면이나 좌우에 쌍호랑이가 있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계룡산, 속리산 부근에서 나온 그림으로 여자 산신이나 부부 산신이 모셔진 경우도 있다. 무당 산신도에서는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거나 호랑이만을 그려 산신령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마치 호랑이가 소나 말처럼 산신령을 태우고 다니는 동물로 보이며, 나무 조각으로 된 산신당 호랑이도 마치 말의 형상같이 보인다.
호랑이 외에도 그림 속에는 꽃이나 차, 천도(天桃)의 상징일 것으로 보이는 과일 등을 산신에게 공양하는 동자가 함께 나타나는 것을 흔하게 보게 된다.
산신도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산신’주변에 늘 소나무가 그려지는데, 분위기가 유사한 독성도(獨聖圖)에 소나무가 등장하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독성은 불도(佛道)를 스스로 깨우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찰의 독성각에 단독으로 모셔지거나 삼성각(三聖閣)에 산신도와 함께 봉안되기도 한다.
독성도를 보면 독성이 깊고 그윽한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혼자 앉아 있다. 분위기는 산신도와 비슷하지만, 소나무가 없다. 이것은 산신도의 소나무가 특별한 의미 상징물로 그려진 것임을 알려준다. 산신도의 소나무는 우주목의 성격을 지닌 신수다. 네팔에서는 9월에 인드라 축제라는 것이 있다. 첫날에 카트만두 ‘다르바르’ 광장에 큰 소나무 기둥을 세우는데 소나무를 세우는 의미는 축제의 시작을 뜻한다. 이 소나무 기둥을 ‘인드라 도즈’라고 부르며, 축제 기간(1주일)동안 소나무 기둥을 카트만두 광장에 세워 둔다. 네팔인들은 소나무에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러한 사고는 산신도에 등장하는 소나무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산신도의 화기를 분석해 보면 대부분 화승(畵僧)들이 주도적으로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산신은 우리 민족 정서에 누누이 이어져 내려온 민족 신앙이며, 스님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그릴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화승에 의한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5. 산신 전설

5.1. 봉정암전설 - 산신의 노여움

설악산의 봉정암은 무속신앙에서 우리나라 안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량의 한 곳이라고 하며, 따라서 이곳을 지키는 산신령 또한 여느 산신과는 다르게 생각된다. 이 이야기는 약 70년 전에 있었던 실화라고 하며, 설악산 산신령의 힘과 봉정암을 찾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다.
동냥을 해서 술과 고기를 먹고 바람을 피우는 땡추중들이 많았던 그 당시, 설악산 봉정암에도 한 땡추가 와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믿음이 깊은 거사가 백일기도를 하고자 봉정암을 찾아왔다. 거사는 자리에 눕지 않고 아랫목에서 기도를 하되, 아주 고단하면 앉은 자세로 잠깐 졸면서 백일기도를 계속하였다.
어느 날, 봉정암의 땡추는 출타 하였다가, 보름 만에 돌아와서는 이내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중얼거리는 말이 "에이, 꿈도 고약하다, 고약해." 거사는 물었다.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아,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나를 단단히 나무라면서 '네가 계속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 집 개를 보내겠다'고 하지 않겠소?"
거사는 이 땡추가 나쁜 짓을 하고 온 것임을 확신하고 이튿날 아침 그에게 아무래도 좋지 못한 일을 하여 그와 같은 꿈을 꾼 모양이니, 이제라도 아주 끊으라고 충고하며 설악산을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 다음에 또 막행(莫行)을 하면 정말 개를 보낼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땡추는 꿈은 본래 헛것이라고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땡추중은 듣지 않고, 며칠 후 또다시 나가 보름가량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날 밤 자정이 되었을 무렵, 거사는 아랫목에 앉아 기도를 하고 땡추중은 옆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와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무엇인가가 그 땡추중을 덜컥 집어내어 버리는 것이었다. 순간적인 일에 넋을 빼앗긴 거사는 기도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밝혀 봉정암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 거사는 절마당과 사리탑 중간 지점에 있는 큰 바위 위에 피와 오줌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거사는 깜짝 놀라 손발을 덜덜 떨면서, 오세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15리 쯤 내려가 수석이 아주 좋은 곳에 이르자 땡추중의 시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목은 목대로 떼어 바윗돌 위에 조각품처럼 얹어 놓았고, 사지를 찢어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여기저기 나무에 걸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땡추중을 먹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거사는 오세암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땡추중의 시신을 거둬 정성껏 화장을 해주었다고 한다.

5.2. 마이산(馬耳山)

진안고원을 용머리로 하여 두 마이봉은 용의 뿔처럼 솟아 있다. 뾰족하게 우뚝 솟은 봉우리가 숫마이봉인데 높이는 667m, 사면의 경사가 급하여 등산은 할 수 없다. 암마이봉은 높이 673m로 남쪽 면은 절벽이지만, 북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고 나무가 자생하여 등산이 가능하다.
말(馬)에 얽힌 유래는 마령면(馬靈)의 지명에서 알듯 말의 영혼이 깃든 고장에 전설로 남아있다. 아득한 옛날에 산신(山神) 부부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가 다가오자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없는 한밤중에 등천하자고 했다. 아내 산신은 밤에는 무섭고 또한 피곤하다며 한잠 푹 자고난 뒤 이른 새벽에 등천하자고 하여 남편 산신은 그 고집을 꺾지 못해 이튿날 새벽에 오르게 되었다. 어떤 부지런한 아낙네가 우물에 나갔다가 산이 둥둥 떠올라 등천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산신 부부는 그만 등천하다 그 자리에 굳어져 바위산이 되었다. 화가 난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 데리고 있던 두 아이까지 빼앗았다. 그래서 지금도 암마이봉은 숫마이봉과는 돌아앉은 자세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후회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진안쪽에서 바라보면 왼쪽이 숫마이봉, 오른쪽이 암마이봉이다.


5.3. 과부 산신(寡婦山神)의 혼인

옛날에 호경(好景)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성골 장군이라고 일컫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왔다고 하며,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고 하였다.
그는 송악 부소산(扶蘇山) 왼쪽 골짜기에 머물러, 아내를 얻어 집안을 이루고 있었다. 집안이 넉넉하였으나 슬하에 아기가 없었다.
성골 장군은 활을 잘 쏘아서 사냥하는 것으로써 생활을 삼았다. 하루는 동네 사람 아홉 명과 함께 평나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밤이 늦었으니 밤을 지낼 만한 곳을 찾아 모두들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큼직한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밤을 지새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굴속을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제법 널찍하였다. 일행은 마른 잎을 얻어다 깔고 곤한 몸을 눕혔다. 하룻밤을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굴 밖에서 사나운 호랑이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놀라서 여기가 호랑이의 굴이었나 보다고 수군거렸고, 자신들을 잡아먹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동안 밖에서는 연방 호랑이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일행은 누가 나가서 싸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쓰고 있던 벙거지를 벗어서 호랑이에게 집어 던지고, 호랑이가 무는 벙거지의 임자가 나가서 싸우기로 하였다. 모두들 일제히 벙거지를 벗어서 호랑이에게 던지자, 호랑이는 서슴지 않고 성골 장군의 벙거지를 덥석 물었다. 성골 장군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활을 집어 들었다. 성골 장군으로서는 호랑이와 싸우는 것쯤 두려울 것이 없었고, 또 모두들 믿음직하게 바라보았다.
성골 장군은 호랑이를 노려보면서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활시위를 당기려고 보니 여태껏 으르렁대던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굴속에 있는 일행들에게 말하려는 찰라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성골 장군은 아찔하여져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정신을 수습하고 좌우를 살펴보니 방금 자기가 걸어 나온 굴이 있던 산기슭 전체가 허물어지는 소리였고, 그 굴은 온데 간데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참으로 허무하면서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기는 호랑이와 싸우고자 굴에서 나왔었기에 화를 면한 것이다. 서로 호랑이와 싸우기를 꺼려하였거늘 호랑이와 싸우고자 굴 밖에 나온 사람만이 살았고, 또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성골 장군은 급히 마을로 내려가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죽은 아홉 사람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이튿날 다같이 굴이 있던 곳으로 갔다. 성골 장군이 굴이 있던 곳을 가리키자 슬퍼하기보다도 먼저 놀라 와서 혀를 둘렀다.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일에 놀라워하며 장사를 지내는 것 보다 먼저 산신께 제사 지내고, 산신의 노여움을 풀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의논이 되어서 산신을 제사지내기로 하고, 약간의 주효를 벌여 놓고 절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안개가 끼며 향기가 진동하더니 위엄 있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산신이라고 말하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엉겁결에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를 못하였다. 이에 산신은 자신은 과부로서 이제까지 이 산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성골 장군과 만나게 되었으니 장차 성골 장군과 부부가 되어 이 산을 다스리겠다고 말하였다. 모두들 엎드리고 있는 가운데 성골 장군이 고개를 들어 산신을 바라보니, 분명 여인의 모습이었다. 산신은 계속해서 말하길, "내 성골 장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일행이 굴속에 들어갔을 때 호랑이로 몸을 변하여 나타났었노라. 그리고 벙거지를 던져서 그것을 호랑이가 문 사람이 나가 싸우기로 하고 벙거지를 던지기에 성골 장군의 것을 물었노라. 이리하여 성골 장군은 굴 밖으로 나오고 굴은 허물어졌으니 그리 알라."고 하였고 사람들에게 성골 장군을 이 산의 대왕으로 알고 받들라고 명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예라고 대답하니, 회오리바람이 불고 지나가더니 이제까지 보이던 산신의 모습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성골 장군도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 놀라워하던 마을 사람들은 곧 성골 장군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封)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원래 평나산 또는 성거산이라고 불리던 이 산을 아홉 사람이 굴속에서 죽었다는 인연으로 구룡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성골 장군은 뜻하지 않게 산신의 남편이 되어서 산을 다스리게 된 데 대하여 조금도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이에 예전 아내의 꿈에 나타나, 평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내를 위로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고 돌아갔다. 놀라 깨니 꿈이었으나 성골 장군의 아내는 이날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강충이라고 하였다 한다.

5.4. 가야산신의 소원

옛 가야산에는 가야산의 모습과 같이 높고 성스런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가야연맹 내에 있는 많은 산신들이 주인처럼 높이 받들 뿐 아니라 이 지역 내에 사는 백성들이 또한 가장 우러러 믿는 신이었다. 그 모습과 같이 곱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신은 백성들의 갸륵한 소망을 들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가야산 큰 바위 아래에 제단을 차려놓고 옥같이 맑은 물에 멱을 감아 몸을 깨끗이 한 후 하늘신인 '이비하'의 짝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빌기를 얼마나 하였는지 하늘신께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소망을 이루어 주겠다는 계시가 내리었다.
그리하여 하늘신 '이비하'는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상공에 나타났고 여신은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깃을 아지랑이처럼 나부끼며 맞이하였다. 뭉게구름 속에 방을 꾸미고 실구름으로 얽어서 가야산 높은 봉우리 상공에서 만난 하늘신 '이비하'와 가야산 처녀 산신은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되었다. 꿈같은 세월이 흐른 후 옥동자를 둘 낳았다. 형은 얼굴이 '이비하'를 닮아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하였다. 아우는 어머니인 여신을 많이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의 이름은 '주일'이라 하였다 아우는 '청예'라고 불렀다. 형 '내질주일'은 자라나서 대가야국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 '뇌질청예'는 자라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사람들은 가야산 여신을 높여 '정견모주'라 우러르게 되었다 한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호근 외 엮음, 『한국호랑이』, 열화당, 1991.
문경현,「신라인의 산악숭배와 사상」,『신람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2, 1991.
윤열수,『산신도』, 대원사, 1998.
장태철,「조선후기 산신도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1987.
최광식,「무속신앙이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 『백산학보』제26호, 1981

▒ 참고 도판
김태곤 (편), 韓國巫神圖, 열화당, 1993, 91~95면(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