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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오누이 오빠

살아남은 오누이 오빠

1. 대홍수와 인류의 시조

창조주에 의하여 천지가 개벽되고, 사람이 창조되어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어느 때인가 대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때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대홍수 설화 중에는 살아남은 유일한 남녀가 남매인 것이 있다. 이들은 남매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는 사이이지만, 이들이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은 멸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며, 그 전에 맷돌을 굴리거나 솔가지에 불을 붙여 하느님의 뜻을 알아본 후에 결혼한다.
이런 홍수 신화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널리 전파, 전승되어 왔는데, 한국에도 몇 가지 유형의 홍수 신화가 전해 오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이 남매인 것을 먼저 소개한 다음 그 외의 것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2. 한국의 홍수신화

2.1. 대홍수와 남매

옛날 이 세상에는 큰 물이 넘쳐 세계는 모두 바다로 화하고 한 사람의 생존한 자도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어떤 남매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백두산 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남매간에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남매가 각각 마주 서 있는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맷돌(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러 내리고, 사나이는 수맷돌을 굴러 내렸다.(혹은 맷돌 대신 청솔개비에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다. 암맷돌과 수맷돌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 같이 합하였다. (혹은 청솔가지에서 일어나는 연기가 공중에서 이상하게도 합하였다고 한다.) 남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결혼하기로 서로 결심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선조는 실로 옛날의 그 두 남매라고 한다.

이 설화에서는, 옛날에 대홍수가 일어나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그때 어떻게 살아남은 남매가 결혼하여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두 남녀는 남매이기 때문에, 인륜상 결혼할 수 없는 사이이다. 그러나 이들이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의 씨가 마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하는데, 남매가 맷돌을 굴리거나 솔가지에 불을 붙여 하느님의 뜻을 알아본 다음에 결혼했다.

2.2. 대홍수와 목도령

아득한 옛날이었다. 커다란 계수나무 한 그루가 땅 위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하늘로부터 선녀 하나가 그 나무 밑에 내려와서 쉬었다가 가곤 하였다.
나무의 나이를 아는 이는 없었다.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무한한 힘을 빨아 올린 듯 줄기는 억세고 단단했다. 역사(力士)의 근육을 연상하게 하는 굵고 마디진 나뭇가지는 모진 풍상에도 굽힐 줄 모르고 씩씩하게 자라 온 나무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땅 위에서 유독히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 있는 짐승인 양 꿈틀거리고, 바람이 불 때면 거세게 소리를 질렀다.
선녀는 나무의 몸짓과 손짓을 느끼고 소리에 응답하여 나무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무의 억센 품 속에 포근히 안기는 순간, 선녀의 몸은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잉태하였다. 달이 차서 예쁘게 생긴 아들을 낳았다. 영리하게 생긴 그 아이가 일곱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선녀는 아이를 나무의 품에 안겨 주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아버지 계수나무의 품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던 어떤 날, 갑자기 폭풍우가 밀어 닥쳤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몇 달을 두고 그칠 줄 모르고 내려 퍼부었다. 시냇물은 넘치고, 들판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계속 비는 내렸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비는 여전히 내렸다. 홍수는 드디어 계수나무에까지 와 닿았다. 물은 사정없이 나무 밑동을 후비고 들어왔다. 이제 나무도 쓰러질 때가 되었다. 그 때 계수나무는 자기 아들 목도령(木道令)에게 말했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나는 오래 이 세상에 뻗치고 서서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아마 뿌리가 뽑히나보다.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 같은 자식을 두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너는 내 이야기를 잘 듣고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라. 내가 이제 넘어지거들랑 너는 재빨리 내 잔등에 올라타거라. 그렇게만 한다면 네 한 목숨은 살 수 있다. 알겠느냐?”
아버지 계수나무의 당부를 받고 목도령은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너는 딴 생각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이번 홍수에서 다시 살아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 살았다. 이제 죽어도 한 될 것은 없다. 다만 네가 걱정이다. 내가 죽고 네가 살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너는 딴 생각 말고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한다. 약속해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도 없게 되었다.
“예, 아버지, 그렇게 하겠어요.”
“암, 그래야지. 지금 이 홍수는 세상을 다시 시작하려는 하느님의 뜻이다. 너만은 살아 남아서 새 세상에 새로 태어날 사람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폭풍이 힘차게 한 바탕 휘몰아쳤다. 산더미 같은 물살이 밀려와 덮쳤다. 드디어 계수나무는 뿌리가 뽑혀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목도령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나무 위에 올라 탔다. 나무는 넘실거리는 물바다 위를 며칠이고 며칠이고 정처없이 떠서 헤매었다. 세상은 하늘과 물뿐이었다. 만물이 물 안에 잠긴 것이다. 물이 완전히 땅을 덮었다.
어느 날, 물 위에 수많은 개미들이 떠내려 오면서 아우성치는 것이었다.
“살려 주셔요! 살려 주셔요!”
목도령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아버지 나무에게 물어 보았다.
“아버지, 저 개미들을 살려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라.”
아버지의 승낙을 받자 목도령은 소리쳤다.
“나무에 올라 오너라.”
개미들은 기뻐하며 꼬리를 물고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에 기어 올라 왔다. 또 한참을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까 뽀얗게 모기 떼가 날아와 소리쳤다.
“제발 살려 주셔요! 살려 주셔요!”
목도령은 다시 아버지 나무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불쌍한 모기들을 살려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라.”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목도령은 소리쳤다.
“좋다! 나무에 내려 앉아라.”
모기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계수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에 내려 앉았다. 또 얼마 동안을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까 이번에는 어떤 소년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목도령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다. 목도령은 다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불쌍한 아이를 살려 주어야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 나무는 뜻밖에도,
“안 된다!”
하는 것이었다.
나무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소년은 목도령을 보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제발 좀 살려 주세요!”
목도령은 다시 아버지 나무에게 간청하였다.
“아버지, 저 아이를 살려 줍시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안 돼!”
나무는 다시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는 물 속에서 계속 따라오며 소리질러 애원했다.
“제발 저를 살려 주셔요!”
목도령에게는 그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아버지 나무에게 청했다.
“아버지, 저 불쌍한 아이를 살려 줍시다.”
목도령의 세 번째 간청에 아버지는 할 수 없었던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하렴!”
목도령은 아이에게 소리쳤다.
“나무에 올라 오너라.”
아이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손을 비비며 나무 위에 기어 올라왔다.
두 사람의 아이와 수 많은 개미들과 모기들을 태운 계수나무는 흐르고 흐른 끝에 어떤 섬에 가 닿았다. 세상은 아직 어두웠다. 아마도 그것은 백두산 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上上峰)이었던 모양이다. 개미와 모기는 목도령에게,
“도련님 덕택에 목숨을 건졌으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제 각기 살 곳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 갔다. 두 소년은 오랫 동안 먹지 못한 탓으로 시장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나마 산 위에 실낱 같은 엷은 불빛이 보였다. 이들은 그리로 찾아 갔다. 자그마한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집 안에서 할머니가 나와 두 소년을 맞아 들였다. 그 날부터 두 소년은 할머니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하나는 친딸이었고, 다른 하나는 양딸이었다.
얼마 뒤 비도 그치고 장마도 물러갔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지상에서는 사람의 종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만 이 곳에 있는 할머니와 두 소년과 두 딸, 모두 다섯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물이 지나간 땅을 갈고 거기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할머니는 소년들이 성년이 되는 대로 두 딸과 짝을 지어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리한 소년에게는 친딸을, 다른 소년에게는 양딸을 짝지어 줄 셈으로 있었다. 할머니의 속셈을 짐작한 소년은 목도령을 골탕먹일 양으로 할머니에게 거짓말로 속여서 말했다.
“저 목도령은 이상한 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섬의 좁쌀을 모래에 뿌려 놓아도 반 나절이 못 돼서 모래 한 알 섞이지 않은 본 모양대로 좁쌀을 가려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재간을 가지고서도 좀처럼 그 재간을 해 보이려고 하지 않으니 할머님께서 한 번 시켜 보셔요.”
할머니는 소년의 말을 곧이 듣고 목도령을 불러 그런 일을 시켰다. 목도령은 자기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거듭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자기의 부탁을 끝내 거역하는 목도령을 괘씸하게 여기는 눈치가 보였다.
“너는 어째서 모처럼의 내 부탁을 거절하느냐? 나를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정 그렇다면 내 친딸을 너에게 줄 수는 없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할머니의 청을 끝까지 거역할 수는 없었다. 목도령은 하는 수 없이 할머니가 모래밭에 뿌려놓은 좁쌀을 일일이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한 알 한 알 주워 보니, 반나절은 고사하고 반 년을 주워도 될 것 같지 않았다. 목도령은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별달리 좋은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한숨을 지었다. 그 때 마침 무엇인가 발 뒤꿈치를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눈여겨 내려다 보니 그것은 한 마리의 커다란 개미였다.
“도련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셔요? 당신이 목숨을 건져 준 개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어요. 제발 말씀해 주셔요.”
그제서야 목도령은 할머니가 시켜서 자기가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개미에게 말했다. 다 듣고 난 개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도령님, 그까짓 일쯤 아무 것도 아니어요. 우리 친구들을 다 불러서 해치울 테니 걱정하지 마셔요. 도령님은 그저 보고만 계셔요.”
이렇게 말하고 개미는 어디론지 가더니 잠시 후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수천 수만의 개미떼를 이끌고 돌아왔다. 개미들은 제각기 좁쌀 한 알씩을 물고 섬거적을 드나들며 날랐다. 개미들의 역사(役事)는 잠시도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 그렇게도 어지럽던 모래 위의 좁쌀 알이 순식간에 깨끗이 처리가 되었다. 쏟아 놓은 좁쌀 한 섬이 고스란히 제 자리에 돌아왔다.
“도령님, 안녕히 계셔요.”
일을 마치고, 개미들은 목도령에게 인사를 하고 뿔뿔히 흩어져 가버렸다. 이윽고 현장에 나와 본 할머니는 목도령의 신기한 재간에 탄복하고 반가와 했다. 그러나, 다른 소년은 좀 의외였다. 그는 목도령을 궁지에 몰아 넣어 할머니와의 사이를 벌어지도록 일을 꾸며 할머니의 친딸을 아내로 맞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버린 셈이었다. 그는 그래도 할머니의 친딸을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두 소년을 앞에 앉히고 말했다.
“나로서는 너희들 두 사람이 다 똑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니 누구에게 친딸을 주고, 또 누구에게 양딸을 주느니 해서 차별대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생각한 일인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오늘 밤은 마침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 밤이다. 오늘 밤 내가 두 딸 자식을 동쪽과 서쪽 두 방에 나누어 서 있게 할 터이다. 어느 방에 딸자식을 넣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내 생각에 달렸다. 그동안 너희 두 사람은 잠시 바깥에 나가 기디리고 있다가 들어오라고 신호할 때 들어와서 각기 가고 싶은 방으로 찾아 들어가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만나는 사람이 너희들의 짝이다. 어떠냐? 불만이 없겠지?”
할머니의 제의에 두 소년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저녁을 마치고 각기 바깥에 나가 기다렸다. 때마침 여름철이라 모기들이 날아들었다.
‘자, 어느 방으로 들어간다?’
두 소년은 각기 어지할 것인지 골몰하고 있었다. 인물 예쁘고 마음씨 착한 친딸을 얻는 것이 두 소년의 한결같은 소원이었다. 바로 그 때, 목도령의 귓전에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도령님, 동쪽 방으로 가셔요. 서쪽 방엔 가지 마셔요.”
한 마리의 커다란 모기였다. 물 난리 때 목숨을 구해 준 모기다. 이 말을 듣고, 목도령은 주저할 것 없이 동쪽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 방에는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편 서쪽 방으로 들어간 소년도 거기서 할머니의 양딸을 만나 짝을 지었다. 이리하여, 지상에는 두 쌍의 부부가 생겨났다. 이 두 쌍의 부부에게서 사람의 손(孫)이 대대로 퍼져나와 지금과 같이 많은 인종으로 불어난 것이다.
목도령의 후손들은 지금도 착한 일을 하여 남을 돕고 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또 한쪽 소년의 후손들은 지금도 악한 일을 하여 남을 속이고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2.3. 백두산 홍수신화

먼 옛적 어느 한 해에 백두산에 비가 석달 열흘이나 내렸다. 그래도 하늘은 그냥 새까맣게 흐려 있었고 우레는 울부짖고 소나기는 퍼부었다. 산골짜기마다 산홍수가 터졌다. 산홍수는 검은 용마냥 꿈틀거리면서 푸른 숲을 냉큼냉큼 삼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백두산 천지의 물도 벌창하였다. 하늘을 메우며 그냥 쏟아지는 폭우는 홍수를 일으켜 집을 삼켜 버리고 사람과 짐승들을 삼켜서 고기밥으로 만들었다. 살기 좋던 백두산 천리 수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가 되었다. 어디로 가나 물천지여서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아주 높은 한 산마루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 산꼭대기에선 어머니와 유복자가 살고 있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졌건만 물은 그냥 줄어들지 않아서 모자는 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온통 물천지라 식량이 떨어져가도 쌀 한톨 얻어올 곳이라곤 없었다. 쌀독은 밑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하루라도 살리기 위하여 멀건 죽을 쑤어서는 아들만 먹이고 자기는 먹네마네하였다. 철부지인 아들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울며불며 야단을 치다가도 맥이 다하면 널브러지곤 하였다. 어머니는 생각다 못하여 옛날에 하늘을 기웠다는 여와씨에게 빌고 빌었다.
"하늘을 기워 인간의 운명을 구해주신 거룩한 여와씨여! 지금 천지물이 벌창하여 백두산 일대의 인종이 멸종되고 있사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모자만 남았으나 살아갈 길이 없사옵니다. 내 같은 것이 죽는 것은 한이 없사오나 귀한 유복자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오리까! 전지전능한 여와씨여, 백두산에 남아있는 이 유일한 유복자를 가긍히 여기시고 구하여 주신다면 구천에 가서라도 그 은혜를 꼭 갚겠사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는 더 지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저승에 간 어머니는 여와씨에게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 소식은 마침내 구중천에 계시는 여와씨에게 전해졌다. 여와씨는 일가 식솔들을 모아놓고 한탄하였다.
"지금 백두산에 홍수가 터져서 짐승들은 물론 사람들까지 몰살되었다 한다. 한 산마루에 철부지 유복자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한다. 오, 내 늙은 것이 한이로구나! 백두산에 이런 참혹한 일이 생긴 줄 어찌하여 이제야 알았던고!"
여와씨가 한참 눈물을 흘릴 때에 한 나이 어린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할머니, 염려하지 마옵소서, 이 소녀가 한번 다녀오겠나이다."
여와씨가 눈물을 씻고 보니 귀여운 증손녀였다.
"네 어린 나이에 해낼 만하겠느냐?"
"할머니께선 지상에 계실 때 하늘도 기우셔서 인간 세상의 재앙을 물리쳤사온데 이 손녀가 백두산의 홍수쯤이야 다스리지 못하겠나이까!"
'음'하고 여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떠나라고 분부하였다. 증손녀는 백두산으로 내려왔다. 천지가 사면팔방으로 넘쳐나서 망망한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유복자를 구하러 갔다. 팔다리가 마른 나무처러 앙상해진 유복자는 숨이 거의 지고 있었다. 증손녀는 궁궐에서 가져온 감로수를 유복자의 입에다 떨구어 넣었다. 유복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증손녀는 또 죽는 사람을 구하는 약을 넣은 약병을 유복자에게 주었다.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친 유복자는 병속의 약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 증손녀가 두 손바닥을 맞비비니 입쌀이 주르르 떨어졌고 두 손등을 맞비비니 기장쌀이 주르르 떨어졌다. 먹을 것을 장만해 놓은 증손녀는 백두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증손녀는 백두산의 바윗돌을 쑥 뽑아내어 3일동안 밤낮으로 갈고 갈아서 바늘을 만들었다. 그는 산더미 같은 바윗돌을 날라다가 바느질로 한데 기워 물이 넘쳐나는 곳을 한 곳 한 곳 막아놓고 한 골로만 물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백두산의 홍수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그때 여와씨의 증손녀가 기워놓은 바윗돌이 16개였는데 지금의 천지주변의 16기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틔워놓은 물길을 지금의 승차하로 되었고 그가 쓰던 돌바늘은 승차하가 흘러나오는 어구에 널려 있는 바위무지라 한다. 천지를 기워서 홍수를 제거한 여와씨의 증손녀는 구중천으로 돌아가서 희소식을 전하였다.
"너야말로 나의 후손답구나!"
여와씨는 증손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해주고,
"그래 유복자는 구했느냐?"
"예 분부대로 하였나이다."
"백두산에 유복자만 남았으니 얼마나 외롭겠느냐? 내가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줄테니 다시 가서 유복자를 잘 길러라. 그가 크거들랑 그와 배필을 맺고 백두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거라"
증손녀는 할머니 말씀을 한마디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되어 백두산에 다시 내려와서 유복자를 알뜰히 키웠다. 그 후 유복자는 억센 젊은이로 자라나서 여와씨의 증손녀와 혼례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백두산 일대에는 또다시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헌선, 『한국의 창세신화』, 길벗, 1994.
주현화, 「한국 홍수설화 연구」,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최내옥, 「한국홍수설화에 대하여」,『한국민속학』9, 1976.
최내옥, 「한국홍수설화의 변이양상」,『한국민속학』12, 1980.
최운식, 『옛이야기에 나타난 한국인의 삶과 죽음』, 한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