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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성

삼태성

1. 삼태성

1.1. 삼태성의 개념

조선초기의 천문학자였던 이순지(李純之)는 그의 저서 『천문유초(天文類抄)』에서 삼태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삼태(三台)는 삼공(三公)의 지위이다. 주로 덕(德)을 베풀고 부(符, 즉 임금의 명령)를 널리 편다. 서쪽으로 문창(文昌)에 가까운 이성(二星)을 상태(上太)라 하니 사명(司命)이고 수(壽)를 주관한다. 다음 두 별을 중태(中台)라 하니 사중(司中)이고 종실(宗室)을 주관한다. 동쪽에 있는 두 별을 하태(下台)라 하니 사록(司祿)이고 병(兵)을 주관한다. 이들 별은 덕을 비추고 어그러짐을 막는 것이다. 일설에는 태계(泰階)라고 하니 상계(上階)의 윗별은 천자(天子)이고 아랫별은 여주(女主)이다. 중계(中階)의 윗별은 제후(諸侯)와 三公이 되고 아랫별은 경대부(卿大夫)이다. 하계(下階)의 윗 별은 선비(士)이고 아랫별은 서인(庶人)이다. 이들 별은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하고 만물(萬物)을 다스린다. 만약 각 별에 변화가 있으면 각각 주관하는 바로서 그것을 점친다.

별자리로서 삼태성은 흔히 서양 별자리로는 오리온 사냥꾼의 허리띠에 해당하는 세 별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잘못이다. 진짜 삼태성은 바로 태미원에 있는 삼태성이라고 한다. 즉, 삼태성은 북두칠성 아래에 마치 사슴이 뛰어간 발자국처럼 세 쌍의 별이 연이어 있는 별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삼태성은 서양 별자리로는 큰곰자리에서 큰곰의 발이며, 겨울과 봄에 북두칠성 바로 아래쪽에 나타나며, 우리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아주 뚜렷하고 멋진 별자리이다.

1.2. 점성술에서 중요한 삼태성

삼태성은 점성술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그 변화로써 세상의 변화를 예측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전쟁을 좋아하면 상계의 윗별이 멀어지고 색깔이 붉어진다. 임금이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면 상계의 두 별이 붙어 버리고, 임금이 연약하면 어두워진다. 중계의 윗별이 붉어지면 公과 제후가 반란을 일으켜 자기 나라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조짐이다. 외적이 침략해 들어와 국경이 소란스러워지면 중계의 아랫별이 성기고 가로놓이게 되며 별빛이 희게 변한다. 경과 대부가 정의를 저버리고 사악함을 좇으면 중계의 아랫별이 성기고 색깔이 붉게 변한다. 백성이 법령을 따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면 상계의 아랫별이 어두워진다. 백성이 사치를 일삼으면 하계의 윗별이 벌어지고 색깔이 희게 된다.

1.3. 삼태성과 우리 민족

고구려 약수리 고분 벽화의 한 벽에는 부부상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북두칠성이 떠 있으며 그 아래에 삼태성이 빛나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삼태성에 대한 고구려의 특별한 인식을 반영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각 방위의 신장(神將) 역할을 하는 별자리인 두성(斗星)이 사방에 있다고 생각했다.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 동쪽에는 동두오성, 서쪽에는 서두사성이 있고, 이 네 두성이 만나는 중앙에 삼태성이 있다고 여겼다. 이는 아마도 삼태성이 우리 정수리 위에 높이 떠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삼태성을 허정(虛靜), 곡생(曲生), 육순(六淳)이라는 신장으로 생각했다. 즉, 삼태성을 사람을 낳고 지켜 주는 신장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약수리 고분 벽화에서 북두칠성 아래에 삼태성이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듯 고려인들도 무덤 속에 북두칠성과 삼태성을 그려 넣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기도 파주 서곡리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무덤에 그려져 있는 북두칠성과 삼태성을 들 수 있다.
조선 시대 역시 삼태성은 매우 사랑받는 별자리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삼태성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며, 그 첫 별은 수명을 관리하고 가운데 별은 종실을 관리하며 세 번째 별은 병사를 관리한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의 조선왕조 기사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① 국가의 치란(治亂)은 정승의 도의 득실(得失)에 관계되는 것이니, 정승된 이는 마땅히 정도(正道)를 지키고 정론(正論)을 주장하여 높은 모습이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은하수를 가로지른 듯, 높은 산악이 하늘을 버틴 듯하여 조정의 의표(儀表)가 된 후에야 제왕의 덕화(德化)를 협찬(協贊)하여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② 삼공(三公)은 그 지위로 말하면 위로는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에 응하는 것이요, 그 직무로 논하면 도(道)를 의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을 섭리(燮理)하는 것이온데, 신과 같은 자는 본시 재주와 덕이 없으니 어찌 이 직책을 감당하오리까. 사면을 청합니다. ( 우의정 정괄이 사직을 첨하는 기사. 『연산군일기』)

③ 삼공(三公)은 위로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을 본받고 아래로 정족(鼎足)을 본뜬 것이니, 대개 삼태(三台)가 위치를 잃으면 천문(天文)이 어긋나고 정족이 하나만 부러지면 공속이 엎질러집니다. 이 삼태와 정족에서 따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오리까. (절에 소금 공급하는 일의 부당성과 김효강의 죄를 대간이 간하는 기사. 『연산군일기』)

그러나 삼태성이 반드시 이처럼 삼공(三公)에 비유되지만은 않았다. 조선시대 고소설을 보면, 본래 천상(天上)의 사람이었던 주인공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 위 세상으로 유배되어 내려올 때면 나라를 구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데, 그 표시로 가슴에 삼태성이 뚜렷하게 박혀 있다는 표현이 자주 있다. 이는 곧 삼태성이 삼공만이 아니라 매우 존귀한 사람을 상징하는 표지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삼태성에 다양한 신앙은 아래에서 소개할 설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2. 삼태성 설화

2.1. 삼태성 설화(1) - 해를 되찾은 삼형제 이야기

옛날 흑룡담이라는 큰 늪이 있는 마을이 있었는데 여기에 한 여인이 유복자로 세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 어머니는 아들 삼 형제가 여덟 살 되던 해 십 년을 기약하고 훌륭한 재주를 배워 오라고 집에서 내보냈다. 삼 형제는 각기 흩어져 신기한 재주를 배웠는데, 첫째는 하늘을 나는 방석을 타고 날아다니는 재주를 배웠고, 둘째는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구만리까지를 볼 수 있는 재능을 배웠으며, 셋째는 무예를 익혀 칼과 활의 명수가 되었다. 십 년 후에 삼 형제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하루는 풍폭우가 몰아치더니 해가 없어지고 말았다. 삼 형제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불러 놓고 해를 찾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삼 형제는 해를 찾아 몇 년을 헤매었으나 찾지 못하고 스승을 찾아가서 상의한 뒤 스승의 스승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흑룡담에 사는 한 쌍의 흑룡이 해를 삼켰기 때문임을 알아내었다. 삼 형제는 곧바로 방석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흑룡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흑룡은 매우 흉포하였으나 삼 형제와 그들 스승의 협력으로 해를 삼킨 흑룡을 활로 쏘아 해를 토해 내게 하였다. 두 마리의 흑룡은 삼 형제에게 패해 달아나다가 한 마리는 흑룡담으로 피하여 숨고 또 한 마리는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지상에서는 해를 되찾아 환희로 가득 찼다. 그러나 삼 형제의 어머니는 살아남은 흑룡이 언제 다시 해를 삼킬지 알 수 없다며 삼 형제에게 하늘에 올라가 영원히 해를 지키라고 하여 삼 형제는 하늘에 올라가 삼태성이 되었다.

이 설화는 신기한 재주를 익힌 세 쌍둥이가 해를 지키는 삼태성이 되었다는 설화로 중국 연변 일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 설화의 한 하나이다. 정리자의 문학적 가필이 이루어져 구연 그대로의 설화의 모습은 변모한 듯 보이며, 천체의 기원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신화적 성격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태양을 삼키는 흑룡은 재해의 상징이면서 암흑과 혹한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은 광명의 원천이고 생명체를 보호하는 신이다. 이 설화는 재해를 주는 악룡과 싸워 물리치고 빛과 생명을 주관하는 태양을 보호하는 영웅적 인간의 활약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백두산 주변에서 악천후를 극복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투쟁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영웅적 인간과 악독한 흑룡과의 싸움은 〈천지설화〉 및 〈백일홍설화〉 등에서도 나타나는 삽화로서 만주 지방에서 전승되는 우리 민족 설화의 한 특징이다.

2.2. 삼태성 설화(2) - 제갈 공명의 죽음을 예언한 삼태성

제갈 공명이 오장원(五丈原)에 진을 치고 위나라 군대와 맞설 때였다. 유비가 죽고 공명이 나라의 모든 일을 맡아 보았다. 촉나라는 오나라 손권과 힘을 합쳐서 강국 위나라와 맞서고 있었다. 공명은 돌보아야 할 군대 일이 많아 과로로 그만 병이 들고 말았다. 병이 깊어 가던 공명은 오나라 군대가 위나라에게 졌다는 보고를 듣고 기절했다가 서너 시간 뒤에 깨어났다. 공명은 부하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가 천문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삼태 별자리 가운데로 객성이 침범했는데, 객성(손님별)은 밝은 반면 준성(주인별)은 희미하고 광채가 없었다. 공명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늘에 기도를 올리리라 결심하고 강유 장군에게 명령했다. “그대는 갑옷을 입은 군사 마흔아홉 명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검은 깃발을 들게 하라. 단, 검은 깃발에는 28수 별자리를 그려 넣어야 하며 내가 있는 막사를 둘러싸야 한다. 나는 천막 안에서 북두칠성께 기도를 올릴 것이다. 만약 칠 일 안에 등불이 꺼진다면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천막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말고, 내가 쓸 물건은 어린아이를 시켜서 들이도록 하라”
때는 마침 8월 보름께였다. 이날 밤에는 미리내도 가물거리고 이슬은 소리없이 내려 방울방울 맑았다. 바람은 잔잔해서 깃발도 움직이지 않았고 군중에는 불침번의 딱딱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유는 마흔아홉 군사를 거느리고 공명의 막사 둘레를 지켰다. 공명은 천막 속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향을 피웠다. 공명의 생명을 상징하는 옥등잔등불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늘어놓고, 바깥에는 마흔아홉 등잔을 벌여 놓았다. 공명은 축문을 읽은 뒤에 엎드려서 새벽까지 빌었다. 피를 토하면서도 쉬지 않고 군무를 보고 밤에는 칠성께 빌기를 멈추지 않았다.
위나라 군사인 사마의도 천문을 보고 공명의 생명이 위태로움을 알았다. 사마의는 공명이 약해진 틈을 타 군대를 휘몰아 촉의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일이 지났을 때, 공명은 자신의 생명을 상징하는 등불이 밝고 맑은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더니 위연이란 장수가 뛰어들어 오면서 위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렸다. 덜렁대는 위연은 그만 공명의 생명을 상징하는 옥등잔을 발로 차서 꺼뜨리고 말았다. 공명은 어이없어하며 탄식했다. “삶과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니 빌어도 소용이 없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 공명은 병으로 죽었다.

2.3. 삼태성 설화 (3) - 암행어사 박문수와 삼태성

옛날 길고 깊은 산 속에 처녀 혼자서 주막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행색이 초라한 거지꼴을 한 사람이 주막을 찾았는데, 바로 암행어사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손발을 씻고 방에 들어가 저녁을 주문했다. 그 때 붉은 두루마기에 푸른 명주 바지를 입은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미소년 셋이 들어와서는 밥상 넷을 주문하였다. 박문수는 세 사람이 밥상을 넷이나 주문하니 이상하게 여겼는데, 세 소년이 한 상을 박문수에게 주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박문수는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밥상을 받아먹고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아침에도 세 소년은 박문수에게 밥상을 주었다. 박문수는 소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소년들은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도둑일 것이다.’ 박문수는 내막을 알아내려고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세 소년은 큰 부자가 새 집을 짓는 곳으로 들어갔다. 박문수도 따라 들어가서 보니 목수들이 막 대들보를 올리려는 찰나였다. 한 소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렸다. “그 대들보감을 당장 땅에 내려놓지 못할까!” 다짜고짜 대들보감을 내려놓으라고 소리치자 목수들이 화를 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부자는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년 말대로 대들보를 땅에 내려놓게 했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사연을 물었다. 소년은 부자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난데없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여기 기름이 좀 있습니까? 한 솥 정도 달인 만큼 있습니까?” 그러자 부자가 “있긴 한데, 무슨 일이오?”라고 말하였다. 소년은 바로 “그러면, 기름을 한 솥 끓이시오.”라고 답했다. 집주인은 하는 수 없이 소년 말을 따랐다. 기름이 설설 끓자, 소년은 대들보감을 가마솥 위에 걸쳐 놓고 가운데를 톱으로 썰라고 했다. “아이구, 저걸 톱으로 썰면 대들보감을 버릴 텐데?”라고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소년은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무시하고 대들보를 자르게 했다. 목수가 대들보를 자르자 놀랍게도 그 속에서 지네가 꿈틀거리며 나왔다. 지네는 나오다가 설설 끓는 뜨거운 기름솥에 빠졌고, 얼른 솥뚜껑을 덮자 솥뚜껑이 들썩이다가 잠시 후 조용해졌다. “이제 안심하고 집을 지으십시오. 저 대들보감은 원래 당신 선산에 있었던 것인데, 나무가 어렸을 때에 갈라진 틈새로 지네 한 마리가 들어갔습니다. 지네는 그 나무 속에서 양분을 빨아먹으am로 수십 년 동안 자라서 저렇게 요물이 된 것입니다.” 부자는 소년의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소년에게 매우 고마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네 독이 떨어져서 자기 식구가 전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수들은 곧 다른 대들보를 올렸고, 부자는 기뻐서 세 소년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부잣집에서 대접을 받고 나와 한참 길을 가던 소년들은 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박문수가 같이 앉으려 했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자리를 좀 만들어 달라 부탁하자, 소년들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박문수야! 네가 어찌 우리를 의심하여 여기까지 따라왔느냐? 우리는 저 하늘의 삼태성이다. 이제 우리 할 일을 끝냈으니 하늘로 올라가련다.” 그러고는 홀연히 빛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 자리를 감추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박문수는 겨우 놀란 정신을 수습하고 길을 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저물었다. 인가를 찾아 캄캄한 산 속을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했다. 불빛을 따라가 보니 외딴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박문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두드렸다. “주인 계시오?” 그러자 어여쁜 처녀가 문을 열어, “예, 뉘신지요?”라고 물었다. 박문수는 곧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갈 데가 없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하룻밤 묵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손히 답을 했다. 처녀는 흔쾌히 수락을 했는데,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니 그 처녀는 다름 아닌 주막집 처녀였다. 안면이 있는 터라 두 사람은 반가와 했고, 처녀는 곧 밥을 한 상 차려 주었다. 그런데, “어서 밥을 드시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전 목욕을 하고 돌아올 테니 다 드신 밥상은 저쪽으로 밀어 놓으시구요.”라고 말하고 사라지더니, 몇 시간이 지나도 그 처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루해진 박문수는 산책이나 하려고 마당으로 나왔는데, 마당에 내려서니 삼태성이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삼태성을 바라보던 박문수는 산책하다가 앞개울 쪽으로 가게 되었고, 처녀가 목욕하러 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몰래 다가가 훔쳐보았다. 그런데 처녀는 사람이 아니라 발이 숭숭 달린 커다란 지네였다. 너무나 놀란 박문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지네가 다시 사람으로 둔갑하여 박문수 쪽으로 다가왔다. 급히 처녀 집으로 되돌아온 박문수는 달아날 궁리를 하였으나, 이미 눈치를 챈 지네 처녀는 방문 앞에 딱 버티고 섰다. “달아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난 천년 묵은 지네인데, 오늘 당신과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이제 사람이 될 것이오.” 그러면서 지네는 박문수에게 달려들었다. 그 때 열린 방문으로 빛이 비추더니 아까 그 세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자 처녀는 지네로 변하면서 괴로워하다가 죽어 버렸다. 박문수가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 있자 한 소년이 설명해 주었다. “이 지네는 아까 낮에 대들보 속에 숨었던 지네의 여동생이다. 오빠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세 소년은 박문수가 고마워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빛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되었다.

3. 회화에 표현된 삼태성

3.1. 불화에 나타나는 삼태성

삼태성은 고구려 고분 벽화는 물론 고려 시대 고분에서도 뚜렷이 새겨졌다. 그러나 하나의 신앙적 존재로서 인격화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제작된 <치성광여래왕임도(熾盛光如來往臨圖)>가 가장 이른 예이다. 이 그림은 북극성을 불격화하여 표현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삼태육성, 이십팔수, 북두칠성 등 여러 별자리가 인격화된 모습으로 포진해 있는 불화이다. 이 불화에서 삼태성은 소가 끄는 수레를 탄 치성광여래 바로 좌우에 관복을 입고 합장하여 홀(笏)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치성광여래왕임도(熾盛光如來往臨圖)>와 형식이 거의 유사한 1569년작 <치성광불제성강임도(熾盛光佛諸星降臨圖)>에도 삼태성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은 고려 불화에 표현된 삼태성과 거의 유사하다. 18세기에 제작된 두 예의 칠성탱, 즉 1749년작 <천은사칠성탱(泉隱寺七星幀)>과 1739년작 <태안사기성암칠성탱(太安寺 聖祈庵七星幀)>에도 삼태성은 여전히 관복을 입고 홀을 든 관리의 모습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나타나 그 이전의 삼태성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칠성탱은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숱하게 제작되어 전국 각지의 모든 사찰에서 칠성각을 조성하여 따로 봉안할 만큼 인기 있는 불화 장르가 되었다. 이 때 삼태성 역시 계속 칠성탱 속에 나타났는데 그 표현은 불화마다 조금씩 달랐다. 두 명씩 짝을 지어 표현하던 이전과 달리 세 명씩 짝을 지어 삼태성이 표현되는가 하면 다른 별자리에 비해 매우 작게 화면 한쪽에 무늬를 마련하고 그 안에 집어넣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李純之, 『天文類抄』 (兪景老 編,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 天文學編 6』, 驪江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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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식,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한울, 1992)
최삼용, 「古小說에 나타난 星宿의 性格 考察」, 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한국도교사상연구총서Ⅲ(亞細亞文化社, 1989)
김태곤, 『한국무속사』, (열화당, 1993)
적송지성․추엽 륭 공저, 심우성 옮김, 『조선무속의 연구』상, 하(동문선, 1991)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