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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신

서낭신
1. 서낭신 개요
서낭신은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신이다.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형태의 서낭당에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지는 신격으로 성황(城隍), 성왕 등으로도 불린다. 마을 수호신적 성격이 강하지만 경계신적 성격도 지니며 성황제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전쟁 수호신으로도 믿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2 서낭신의 유래
서낭신의 내력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 신사를 설치하여 위엄있게 숭배하였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도 조선시대에 서낭신을 섬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면,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을 신봉하기 좋아하여 혹은 화간(禾竿 : 낟가릿대)를 만들고 지전(紙錢)을 달아 촌무(村巫)들이 서낭신이라 칭하여 섬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서낭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읍지(邑誌)등에도 보인다.
서낭신앙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 고유의 신앙 형태라는 주장과 중국의 성황이 이입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전자는 손진태(孫晉泰)와 조지훈(趙芝薰)등의 주장으로, 서낭이 고대의 경계표 돌무더기에서 점차 경계신의 처소, 제단 등으로 인식된 것이라 보며, 단군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후자는 이능화가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주장한 것으로, 성황은 성지(城池), 곧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우는 것으로 천자가(天子)가 8가지 대제(大祭) 중 하나로 올리는 수용(水庸)이 북제시대에 성읍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며 송대에는 천하에 두루 퍼졌는데, 이러한 성황신앙이 전래되어 우리나라 곳곳의 서낭신앙을 있게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 몽고의 ‘오보’로부터 전래되어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보란 흙이나 돌을 원추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상부에 버드나무 한 묶음을 꽂아두거나 목간을 세워놓은 몽고의 신앙 형태로 여행의 안전을 위해 돌을 던진다거나 오보의 나뭇가지에 포백편(布帛片), 오색천을 묶는 헌납속, 돌무더기를 신의 거처로 인식하여 제를 올리는 점이 흡사하다. 때문에 13,14세기 몽고와 문화적, 정치적 관계가 깊었던 시대에 오보신앙이 전래되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 중 어떤 것이 타당한지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외부에 유입된 것과는 다른 우리 고유의 서낭신앙이 있었는데 외부에서 성황 또는 오보신앙이 유입되면서 그 신앙의 성격이나 기능이 유사하여 서로 습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1.3 서낭신 관련 설화
옛날 강릉의 어느 마을에 한 처녀가 우물에 가서 해가 뜬 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다. 처녀는 애비 없는 자식을 산에 내다버렸더니 뭇짐승들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보듬어 키웠다. 나중에 큰 스님이 된 아이는 죽어서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 서낭은 대관령 아랫마을의 정씨 처녀를 사모하여 청혼했으나, 처녀의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 처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처녀 아버지가 사람들을 데리고 딸을 찾아나섰다. 대관령 서낭당으로 가보니 딸은 서낭신과 함께 있었으나, 이미 죽어서 혼은 없고 몸만 남아 있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하는 수없이 딸을 서낭신에게 주고 화공을 불러 딸을 그리게 해 그 화상만을 안고 내려왔다. 이는 대관령 서낭설화다. 강릉 단오굿은 대관령의 남녀 서낭을 제사하는 굿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의 강태공 부인의 성은 마씨였다. 마씨는 매일 놀고 먹는 강태공을 버리고 재가하였다. 나중에 강태공이 때를 만나 높은 벼슬을 했는데, 이 사실을 안 마씨가 다시 합치자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나 강태공이 차갑게 거절하였으므로 마씨는 홧병으로 죽었다.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시신을 돌로 덮어 서낭당을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돌무더기 앞을 지날 때마다 침을 뱉거나 돌을 주워 던졌다.
위의 두 설화에서 보듯이 범일 국사, 최영장군, 마씨 부인처럼 구체적인 인물이 서낭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또 고려초 지방 호족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조상을 성황으로 신격화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경북 울진에서는 ‘무진생 서낭신’이라 하여 그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마을을 일군 사람을 서낭으로 받들고 있다.
1.4 서낭신의 형태
현재 서낭의 형태는 다양하여 서낭나무인 신수(神樹)와 돌무더기가 복합된 경우, 돌무더기 ․ 서낭나무에 천조각을 늘인 경우, 서낭나무와 당집의 복합 경우, 입석(立石)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밖에도 신격의 인격적 형태로 구체화된 것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골매기서낭으로 남서낭과 여서낭의 짝으로 설정된 경우, 여서낭으로 설정된 경우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여서낭으로 설정된 경우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남서낭과 여서낭으로 설정된 경우는 풍요를 기원하는 결합의례가 있다. 이러한 사례로 서낭은 마을 수호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풍요신의 성격도 아울러 지닌다.
또한 골매기서낭은 입향시조(入鄕始祖)와도 결합되어 있어 조상숭배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으로 추측된다. 서낭은 본디의 마을 수호신 신격이 여타의 신격과 결합되어 복합적 신앙대상으로 변화된 신격이다. 이러한 신격이 탈춤에도 흔적을 보이고 있어서 민간 연희의 생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이러한 내륙지방의 서낭신앙과는 달리 바닷가에서나 도서지역에서는 배서낭을 섬기는 습속이 있다. 배서낭은 항해의 안전과 풍어를 보장해주는 신격으로, 배와 서낭이 복합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서낭을 선왕(船王)으로 표기하여 배서낭의 신체로 삼는 경우가 많아 서낭과는 별개의 어원을 지닌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배의 안녕과 풍요를 관장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은 대체로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배서낭의 신체는 특별한 신체 없이 숭앙관념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길지(吉紙)나 지방(紙榜), 뱃기, 서낭단지, 서낭함을 모시는 형태로 나타난다. 서낭은 마을 수호신, 풍요신, 조상숭배신앙을 함께 다루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신앙형태이다.
2. 서낭당
2.1 서낭당 개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을 모셔놓은 신당이다.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 나무, 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2.2 서낭당 역사
우리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때 신성진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付縣)마다 서낭당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신앙되어서 이성계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 괴산, 현풍, 양산, 신성, 밀양, 전주, 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다.
2.3 서낭당의 형태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서낭나무에 잡석을 쌓아놓은 누석단이 있고, 이 신수에 백지나 청,홍,백,황,녹색 등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② 잡석을 난적한 누석단 형태, ③ 서낭나무에 백지나 5색 비단 헝겊 조각을 잡아맨 형태, ④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⑤ 입석형태 등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①의 형태이며, ②의 형태는 ① 형태의 서낭나무가 퇴화하거나 길 옆에 누석단이 먼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③의 형태는 수목신앙(樹木信仰)에 후기적으로 서낭나무에 오색비단 헝겊을 잡아매는 헌납속(獻納俗)이 복합되거나 또는 처음부터 서낭당의 신수 헌납속만 강조된 형태로 볼 수 있다. ⑤의 형태는 높이 120~200m 안팎, 폭 90~120cm 가량의 자연석을 세워놓고, ‘수구매기’(水口막이), ‘돌서낭’, ‘선돌’ 등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중부, 남부 지역에서 간간이 발견된다.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④의 형태는 중부 내륙 산간지역과 태백산맥 동쪽의 영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3. 서낭제
서낭신을 모시는 의례이다. ‘성황제(城隍祭)’라고도 한다. 서낭신의 신체는 흔히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신목(神木)과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이를 서낭이라 하는 경우과, 이와는 달리 신목과 함께 신체(神體)나 신위(神位)가 있어서 신당을 따로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두가지 신체에 따라 서낭신을 모시는 제차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의례를 행한다. 길가는 사람은 이 앞을 지나면서 돌을 하나 던지고 침을 뱉는 행위와, 정월에 여인들이 횡수막이를 한다고 가족의 옷 가운데서 동정을 뜯어 제물을 차여 신목 아래서 정성을 드리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동제 또는 부락제의 한 제차로 삼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겨우도 있다. 이러한 서낭당 신앙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으니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경상도 산간지방의 서낭당에는 대개 신목과 함께 신체나 신위를 모신 신당이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신목이 있거나 자연석이 있지만 돌무더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당이다. 이러한 서낭당은 신당이 중심이고 호남지방에서도 신당 중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신당 안에 모셔진 신위나 신체가 마을 수호신이기 때문에 동제의 중심이 되는 신이다.
이런 점에서 중부이북지방에서는 서낭당이 마을신이기 때문에 모시기 하지만, 마을의 주신은 아니고 주신인 산신을 모시고 나서 모시는 부수신적인 성격이 있는 것 같다. 강원도, 경상도 산간지방에서는 서낭신을 강신시키는 신간이 서낭대를 세우고 신을 강신시켜 모셔놓고 굿을 하는데, 이를 서낭굿 또는 별신굿이라 한다.
이 서낭의 주신을 ‘골매기서낭’이라 하여 남신 또는 여신으로 인격화하는 경우도 있으니, 대관령서낭에는 남녀 신당이 있고, 또 전설이 있어서 확실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 자체가 중국에서의 성지신(城地神)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성지신앙이 있었으니 육조시대 이래 성황(城隍)이라 하여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가 송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기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에서는 사신성황(使臣城隍)등의 신당을 두고 기도를 한 점으로 보아, 중국의 성황제도를 모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신앙하고 있는 서낭이 이러한 중국 신앙의 영향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간에서 전통적으로 강하게 내려오는 마을신앙이 중국적인 성황의 영향으로 형식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태곤,『동신당』, 대원사, 1992
이능화,『조선무속고』, 한국학연구소, 1977
이필영,『마을신앙의 사회사』, 웅진출판주식회사, 1994
손진태,『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조지훈,「서낭당고」, 『문학부편 제7집』, 1963
최길성,『한국무속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9

▒ 참고 도판
김태곤 (편), 韓國巫神圖, 열화당, 1993, 72~73면(도판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