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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소서노(召西奴)

1. 소서노에 관한 설화

소서노(召西奴)는 백제 건국설화 중 비류 중심 설화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 그 아버지는 연타발로서, 졸본부여의 왕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 집안 재물을 동원하여 도왔던 것으로 보아,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해상 중계무역을 통해 재물을 모은 연타발이 중앙권력자인 북부여 왕자 우태에게 딸 소서노를 시집보내었으나, 우태가 일찍 죽자 소서노와 두 아들은 졸본부여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나타난 주몽과 재혼한 후,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나 주몽의 친아들인 유리가 다음의 왕권을 잇자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이 때 나이 48세였다.
대대로 해상중계무역을 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므로 그녀 역시 무역선단을 거느리고 압록강 수계를 거치며 주변의 낙랑이나 옥저 등과 무역을 하여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 일행이 남하를 결심한 시기에 중국은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소서노 일행은 패수와 대수를 드나들며 중계무역을 하고 낙랑군과 마한의 절충지대인 황해도 남단에 터전을 잡았다. 또한 이 곳을 근거로 하여 서해연안과 그에 연결된 내륙수로를 오가며 한반도 중남부로 무역범위를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다고 보인다.

1.1. 주몽의 아내

일세의 영걸 주몽이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 형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졸본 부여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머니 유화부인과 임신 중인 아내 예씨 두 여인은 함께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따른 사람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심복 세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모둔곡을 지나다가 무골, 재사, 묵거 등 세 사람을 거두어 졸본부여로 들어섰다.
일단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주몽은 이들 여섯 명의 심복을 비롯한 수개 부족을 거느리고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라, 단군왕검의 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원대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천손국을 세운 뒤 옛 조선의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에 세운 나라들을 모두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주몽의 필생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예나 이제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이었다. 소수의 심복과 불과 수백의 추종세력으로는 어림없었다.
그 때 만난 여인이 바로 소서노였다. 나이는 비록 8세 연상이요, 게다가 이미 두 아들을 둔 과부였지만 주몽이 소서노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가 졸본부여에서는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인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이기 때문이었다. 연타발은 계루부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장사 수완이 비상하게 뛰어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남북 갈사(曷思)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사업을 벌여 수많은 재물을 모은 거부였다. 자연히 주몽으로서는 연타발의 재산과 명성, 계루부의 세력에 의지하여 지지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활 잘 쏘고, 말 잘 타고, 용모도 매우 준수한 젊은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이미 비류수와 졸본천 주변 사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연타발도 자신에게 찾아와 잘 부탁한다고 깍듯이 인사하는 주몽을 대하자 첫눈에 그가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영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몽의 사람됨이 영특하고 무술 또한 비상하게 뛰어나니 한 부족은 물론이요,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몽의 인품과 재능에 반한 연타발은 그 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재물을 기울여 주몽의 건국사업을 돕기로 작정했다.
물론 그것은 상술이 뛰어난 사업가의 안목으로나 계루부 지도자의 입장으로나 먼 앞날을 내다본 대담한 투자였다. 또한 그러한 적극적 지원과 협력의 밑바닥에는 과부가 된 외동딸 소서노의 장래를 맡겨야겠다는 속셈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 번 시집갔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소서노는 어느덧 30 고개에 이르렀으나 웬만한 사내들은 눈에 차지 않아 재혼을 마다한 채 홀몸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어느 날 갑자기 천왕랑 해모수의 아들을 자처하는 젊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첫눈에 홀랑 반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1.2. 주몽의 건국사업을 돕는 소서노

주몽은 연타발 부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 삼아 더욱 많은 문무 인재와 백성을 끌어 모아 지지 세력을 키우는 한편, 비류곡 졸본천 서쪽에 성을 쌓고 집들을 세우고 야장(冶匠)을 지어 무기를 만드는 등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소서노는 남장을 하고 그림자처럼 주몽을 따라다니며 그의 사업을 도왔다. 그런 모습을 본 졸본부여 사람들이 하나같이 연타발의 과부 딸 소서노가 이젠 주몽의 여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결합을 했다. 주몽에게는 이미 동부여에서 결혼하여 자신이 도망쳐 나올 때에 임신한 본부인 예씨가 있었지만 연씨 부녀의 재산과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기꺼이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으니 연타발과 소서노의 기분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소서노가 30세의 과부였고, 그녀가 16세 무렵에 시집갔다고 본다면 그때 비류는 많아야 12세, 온조는 10세 안팎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귀신같은 활솜씨를 지닌 주몽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바람처럼 퍼져나가 원근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신민(臣民) 되기를 자청하며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37년 10월, 만 22세의 주몽은 마침내 대가(大加)들의 추대를 받아 대왕위에 올라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추모대왕은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했으므로 본성이 해씨였겠지만 새로이 나라를 열었으므로 높고 넓고 크다는 뜻에서 고씨(高氏)로 창씨하고 이를 왕성으로 삼았다.

1.3. 후계자 문제로 추모성왕과 갈등하는 소서노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구려의 황후가 된 소서노도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갔다. 소서노의 나이 벌써 44세였다. 대왕은 이제 36세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소서노는 점점 걱정이 많아지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국력이 강해지고 대왕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자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4년이 또 지났다. 대왕은 아직도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소서노는 대왕에게 쫓아가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 주십사하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애정이 식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도 더욱 애가 타서 기를 쓰고 졸라댔다. 나중에는 나라를 세울 때에 재산을 기울여 조력했던 일까지 상기시켜가며 성화를 부리니 대왕은 아픈 옛 상처를 건드리기나 한 듯 불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랑에 속아 모든 것을 주었지만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추모대왕이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데려온 것은 건국 18년이 지난 서기전 19년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옥지, 구추, 도조 등을 거느리고 졸본으로 찾아왔다고 했으나 아마도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는 것이 좀더 상식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고구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18년간이나 아무 소식도 없이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추모대왕이 그제야 유리를 부른 까닭은 소서노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하루바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또 어쩌면 그 이듬해에 대왕이 만 40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고 유리가 왕위를 이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무렵 대왕은 무슨 중병에 걸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4. 세 모자의 망명

대왕은 예씨와 유리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각각 책봉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겠는가. 배신의 아픔도 그렇지만 더욱 급한 것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은 대왕이 살아 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대왕이 돌아가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 모자의 하루하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가 아우 온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형제는 어찌하면 좋을꼬? 옛날 대왕께서 난을 피해 부여로부터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어머니께서 가산을 죄다 털어 왕업을 이루는 데 진력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도 덤받이 자식 신세가 되었으니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구나! 대왕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이렇거늘 하물며 뒷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몸이다. 이렇게 사마귀나 혹 같은 신세로 구차하게 붙어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천만번 낫지 않겠느냐?”
온조가 두말없이 좋다고 하여 두 형제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일을 상의했다. 눈물을 흘리며 듣고만 있던 소서노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에 찬성했다. 다만 몰래 떠나지 말고 떳떳하게 대왕께 아뢰고 떠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왕에게 찾아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고구려를 떠나겠다고 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재물을 여행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서기전 19년 9월. 그렇게 해서 소서노는 마침내 회한만 남긴 채 졸본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홀우 등 열 명의 심복과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소서노의 뒤를 따랐다. 추측컨대 소서노의 나이가 그 해에 만 48세였고, 그녀가 추모대왕을 만난 30세 이전에 과부가 된 사실로 미루어 추산하면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각각30~25세 전후였을 것이다.

1.5. ‘십제’ 건국

그렇게 도성 졸본을 떠나 고구려 국경을 지난 소서노 일족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사서에서는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은 그들이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처음에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했고,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나라를 세웠기에 국호를 백제라 했다고도 한다. 그 때가 서기전 18년 10월이라고 하니 이는 망명길에 오른 지 13개월만의 일이었다.
국모 소서노가 처음으로 근거지를 삼은 곳은 그 예날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로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마한 땅이었다. 마한 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땅을 얻어 변방의 소국을 자처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말갈과 낙랑과 동예 등 주변의 강적들이 신생 약소국 십제를 얕잡아보고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십제의 군사력이라고 해봐야 기껏 1천명 안팎이었을 것이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강적들이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소서노는 비류왕과 온조, 그리고 오간, 마려, 을음, 해루 등 열 명의 대신과 의논 끝에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도읍을 옯기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십제는 건국하자마자 다시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황해를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대방의 옛 땅을 떠나 바다를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에 상륙한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비류왕은 온조와 신하들을 데리고 안성천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상류의 용인 부아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이 때 비류와 온조가 도읍지를 정하는 데 의견이 달라 언쟁을 한 뒤 부아산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는데 대부분 온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소장 강경파였으므로 비류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싸움은 미추홀로 돌아간 다음에도 전개되었다. 어머니 소서노는 비록 예전의 패기를 잃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소서노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삼은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 갔고, 마침내 태어난 지 10년밖에 안 되는 나라, 그나마 작고 힘 약한 십제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1.6. 위례산성에서의 전투

우태와 주몽에게 두 차례 시집갔다가 두 번 모두 실패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오랜 옛적에 자신의 자궁에서 배태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불화와 반목, 대립이었다. 비류도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 온조도 내 배를 아프게 하고 태어난 아들이니 그 누구도 파명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국모 소서노는 바닷가 미추홀과 내륙의 위례성을 오가며 꾸짖고 타이르고 눈물로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틈새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어느 쪽도 고집을 꺾기는커녕 나중에는 타협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한 온조는 다시는 어머니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소서노는 최후의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은 아들 온조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미추홀로 데려와 두 형제를 화해시켜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싸울아비들을 이끌고 위례성으로 쳐들어갈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정면대결을 벌인다면 양쪽에서 너무 많은 희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습을 하기로 하였다. 소서노는 야음을 틈타 소리 없이 재빨리 침입하여 온조를 감싸고도는 강경파 가운데 심복 몇 놈만 죽여 없앤다면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하고 온조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동안 몇 차례 왕래하며 위례성 안팎의 지형은 눈에 익혀두었으니 소서노는 직접 장수들을 뽑아서 이끌고 가기로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정확히는 서기 6년 음력 2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남장을 한 60대 여인이 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억센 다섯 명의 장수를 이끌고 미추홀을 떠나 들판을 가로질러 이 위례산 밑에 다다랐다. 그들은 골짜기 들머리의 경계초소를 번개처럼 기습하여 순식간에 초병들을 해치우고 어두운 산길을 마치 평지를 가듯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여섯 명의 정체는 국모 소서노와 그녀가 이끄는 다섯 명의 특공 결사대였다.
소서노는 다섯 명의 장수에게 절대로 온조는 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마침내 성 밑에 다다른 소수 정예의 특공 결사대는 성벽을 타넘어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소서노의 지휘에 따라 온조의 심복들을 찾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좁은 성안은 이내 비명과 절규, 경고의 외침과 신음이 울려 퍼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머리와 팔 다리가 떨어지고 살이 갈라질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소서노 일행은 무서운 투지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역시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예상보다도 위례성의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서노의 기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어둠 속의 난전이 끝났을 때 여섯 명의 결사대는 모두 어육이 되어버렸다.
온조왕은 어서 횃불을 밝히라고 소리쳤다. 불을 밝힌 뒤 침입자들의 시체를 살펴보던 온조는 그만 비명을 질렀다. 그 가운데에는 남장을 한 채 죽은 자신의 어머니 소서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최후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13년조의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은 국모를 시해한 이 참극을 은폐한 기록이라는 것이 김성호 씨 등의 주장이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비극의 해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오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했다.

2. 백제의 시조 소서노

백제의 시조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온조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첫머리도 시조 온조왕조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 아니라는 이설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중국의 사서들은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이설에 따르면 온조의 형인 비류가 사실은 백제의 시조라고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으니, 이는 단재 신채호 등이 주장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백제 시조설이다. 단재의 주장 역시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이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소서노를 가리켜, ‘조선사상 유일의 여제왕(女帝王)의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건설한자’라고 했다. 소서노가 백제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서 고구려의 건국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설, 비류설, 소서노설 등 세 가지가 전부냐 하면 그게 아니다. 여기에 우태설(優台設)과 구태설(仇台設)을 더하면 다섯 가지나 되는 셈이다.
이처럼 논쟁의 여지가 많은 전문적이며 학술적인 문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비류와 온조 형제의 어머니로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소서노, 따라서 우리 고대사 최초의 여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의 존재를 전해주고 있는 기본 사료인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제1 시조 온조왕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추모(雛牟)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 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했다. (중략)
그러더니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태자로 삼으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을음, 해루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로 가서 살려고 하니 열 명의 신하가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기 때문에 이 천혜의 땅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위례성으로 돌아와보니 온조는 도읍을 막 정했으며, 백성이 편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 뉘우치며 죽었다. 그러자 그의 백성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계속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서 백제(百濟)라고 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건국 초기의 백제는 처음 국호가 십제였으며,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 어머니는 추모의 두 번째 부인인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요, 백제는 처음에 비류왕과 온조왕의 두 나라로 잠시 분립했다가 비류왕이 자살함으로써 다시 합쳐졌다는 것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기록 다음에 덧붙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또는 말하기를 시조는 비류왕이고 그 부친은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며, 모친은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비류요 다음이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그는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 용납되지 못해 전한 건소(健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는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라를 세우고 왕업을 여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매우 총애했고, 또한 비류와 온조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예씨의 아들 유류(儒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이제 대왕이 유류에게 나라를 넘기려 하므로 여기서 헛되기 불안하게 살지 말고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비류는 모친과 아우와 더불어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게 되었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인애와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帶方)의 옛 땅에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그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으므로 마침내 동이(同異)의 강국이 되었다.’ 이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기흥,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사, 2002
이복규, 「‘주몽신화’의 문헌기록 검토」,『국제어문』1, 1979
임재해,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 천재교육,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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