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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

온조
1. 온조 설화
온조는 주몽이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뒤 결혼한 소서노의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중 둘째이다.
주몽은 소서노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이 대표로 있는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 삼아 더욱 많은 문무 인재와 백성을 끌어모아 지지 세력을 키우는 한편, 비류곡 졸본천 서쪽에 성을 쌓고 집들을 세우고 야장(冶匠)을 지어 무기를 만드는 등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소서노는 남장을 하고 그림자처럼 주몽을 따라다니며 그의 사업을 도왔다. 그런 모습을 본 졸본부여 사람들이 하나같이 연타발의 과부 딸 소서노가 이젠 주몽의 여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결합을 했다. 주몽은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당시 소서노가 30세의 과부였고, 그녀가 16세 무렵에 시집갔다고 본다면 그때 비류는 많아야 12세, 온조는 10세 안팎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소서노는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서노는 대왕에게 좇아가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 주십사하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도 더욱 애가 타서 기를 쓰고 졸라댔다.
추모대왕이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데려온 것은 건국 18년이 지난 서기전 19년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옥지, 구추, 도조 등을 거느리고 졸본으로 찾아왔다고 했으나 아마도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는 것이 좀더 상식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고구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18년간이나 아무 소식도 없이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추모대왕이 그제야 유리를 부른 까닭은 소서노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하루바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대왕은 예씨와 유리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각각 책봉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겠는가. 배신의 아픔도 그렇지만 더욱 급한 것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은 대왕이 살아 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대왕이 돌아가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 모자의 하루하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가 아우 온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형제는 어찌하면 좋을꼬? 옛날 대왕께서 난을 피해 부여로부터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어머니께서 가산을 죄다 털어 왕업을 이루는 데 진력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도 덤받이 자식 신세가 되었으니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구나! 대왕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이렇거늘 하물며 뒷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몸이다. 이렇게 사마귀나 혹 같은 신세로 구차하게 붙어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천만번 낫지 않겠느냐?”
온조가 두말없이 좋다고 하여 두 형제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일을 상의했다. 눈물을 흘리며 듣고만 있던 소서노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에 찬성했다. 다만 몰래 떠나지 말고 떳떳하게 대왕께 아뢰고 떠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왕에게 찾아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고구려를 떠나겠다고 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재물을 여행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서기전 19년 9월. 그렇게 해서 소서노와 두 아들은 졸본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외에도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홀우 등 열 명의 심복과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이들의 뒤를 따랐다. 추측컨대 소서노의 나이가 그 해에 만 48세였고, 그녀가 추모대왕을 만난 30세 이전에 과부가 된 사실로 미루어 추산하면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각각 30~25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들은 한산(寒疝)의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이 어디인가 하고 지세를 살핀다. 부아악에서 지세를 살핀 뒤에 비류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바닷가로 가서 도읍지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 사람의 신하들은 다른 의견을 내었다.
그들은 이 강 남쪽 땅은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해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므로 하늘이 주신 요새지일 뿐 아니라 지세의 이로움이 커서 다른 곳에서는 이만한 땅을 쉽게 얻을 수 없는 형세이기 때문에 이 곳에 도읍을 정할 것을 간청하였다.
신하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간청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펼쳤지만, 비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의 뜻을 저버리고 바닷가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온조는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결국 비류와 온조는 백성을 둘로 나누어서 비류는 지금의 인천 땅인 미추홀로 가서 도읍지를 정하였고, 온조는 남아서 지금 경기도 광주의 옛 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에 도읍지를 정하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도읍지는 드러나 있으되, 나라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뒤에 곧 백제에 귀속된 까닭일 것이다. 온조의 십제와 구별하기 위해서 비류가 미추홀에 세운 나라를 이른바 ‘비류백제’ 또는 ‘비류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류백제의 땅은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었다. 예전에 비류가 살았던 곳과는 풍토가 맞지 않았다.
비류는 온조가 사는 위례성 곧 십제의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왕의 고민은 마침내 병으로 이어져 죽음에 이르고, 비류의 판단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와서 십제에 귀속되었다. 온 백성들이 기꺼이 온조를 따라 위례성으로 온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 백제의 국호는 이 때부터 시작되어 나당동맹군에게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7세기 동안 계속되다가, 다시 견훤의 후백제로 이어져 반 세기 정도 더 그 이름을 떨쳤다.
2. 백제의 시조
백제의 시조에 대한 학설로는 우태(구태)설, 비류설, 온조설 등이 있다. 온조설이란 말 그대로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보는 학설이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인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 둘째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다.…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열명의 신하로부터 보필을 받고(이로 인해)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다. …그 후 (위례성으로 돌아)올 때에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으로 부여를 성(姓)으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② 고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유(癸酉) (서기전 18)에 졸본부여에서 나와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③ 고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유 (서기전 18)에 졸본부여에서 나와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④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살펴보면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 4년 갑진(甲辰)(서기전 17)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혁거세, 동명왕의 시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그러나 당서(唐書)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위의 기사들은 온조를 시조로 하는 기록으로, 각각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다만 내용이 축약되었거나 때와 장소 및 혈연관계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그 중 ①의 내용은 온조를 시조로 하는 기록 중에서 가장 자세하다. 그리고 ②와 ③의 기록은 내용에 별다른 차이는 없으며 ①에 있는 사실을 요약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기록들은 역사성이 짙은 건국 기록이지 신화로 보기는 어렵다. 대개 한 나라의 건국 시조는 그 출생이 신이하고, 탁월한 능력이나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 나타난 온조는 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위의 내용은 온조와 비류는 주몽이 졸본부여 왕녀 사이에서 난 아들로 되어 있고, 그 후 유리가 북부여에서 오자 남하하였고,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위례에서 도읍하였다가 나중에 온조 세력이 통합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이고 백제의 시조라는 사실과 비류는 식견이 모자라고 고집만 있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졸본 지역에서 주몽, 유리와 온조, 비류의 신구세력간의 갈등과 경쟁이 일어났을 때 후자가 세력에 밀려서 남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하해서도 또다시 온조와 비류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는 온조와 비류를 부모가 같은 형제로 보고 있다. 하지만 온조의 혈연관계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정하여 볼 수 있다. 먼저 온조가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같은 주몽의 자식인 유리와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삼국사기』온조 즉위기사 협주(夾註)에서 보이는 대로 비류와 온조는 주몽과 혈연관계가 전혀 없고 어머니인 소서노와 구태 사이의 자식으로 주몽의 자식인 유리와 경쟁에서 밀려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온조와 비류가 후자의 의견대로 같은 부모의 형제가 아니라면 비류가 주몽과의 불하로 남하한 이후에 온조는 다시 유리의 알력으로 남하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래서 온조를 시조로 하는 기록을 다른 시조 기록과 선후 관계를 따져본다면 마지막으로 형성된 것으로 볼 근거가 되는 것이다.
3. 온조백제(溫祚百帝)
3.1. 건국지 및 수도
『삼국유사』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고, 수도는 위례성(慰禮城), 한산(漢山), 북한성(北漢城), 웅천(熊川) 순서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백제가 도읍을 옮긴 과정이 삼국유사보다 좀 더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온조왕(溫祚王) 13년 봄 2월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5마리가 성안에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 나라(樂浪)가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어제 내가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온조왕(溫祚王) 13년 가을 7월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한 사실을 알리고 경계를 정하여 북으로 패하, 남으로 웅천, 서로 대해, 동으로 주양을 한계로 하였다. 9월 성궐을 지었다.
온조왕(溫祚王)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문주왕(文周王) 원년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성왕(聖王) 16년 도읍을 사자(일명 소부리라 함)에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온조왕기 13년 2월과 5월조를 분석해 보면 온조가 초기수도로 사용한 위례성(慰禮城)은 한강 북쪽에 있었고, 5호(五虎)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점령당한 후 온조가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십제국(十濟國)의 임시 수도인 성궐(城闕)은 위치가 미상이나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삼국유사』 문구로 보아 홍성(洪城) 금마(金馬)와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온조왕 14년 정월부터 도읍지로 사용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광주 고읍(古邑) 터인 하남시 방면에 있었거나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초고왕 26년(A.D 371년)부터 도읍지로 사용한 한산(漢山)은 양주 또는 북한산 방면에 있었으며, 문무왕 원년(A.D 475년)부터 도읍지로 사용한 웅진(熊津)은 지금의 공주 방면에 있었고, 성왕 16년(A.D 538년)부터 도읍지로 사용한 사자(泗)는 부여 방면에 있었다
3.2. 건국경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溫祚百帝)의 건국경위는 아래와 같다.

백제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 한다.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서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적에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오간, 마려 등 열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떠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거처를 정하려고 하니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는 말이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 보기 어려운 천험, 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골(彌鄒忽)로 가서 사니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慰禮城)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온조(溫祚)가 한강 북쪽에 온조국(溫祚國)을 세웠다가 궤멸된 후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십제국(十濟國)을 세운 과정 중 일부가 생략되어 있다.
3.3. 온조백제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온조(溫祚)가 한반도로 온 경로가 적혀 있지 않으나,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배를 타고 마한(馬韓)으로 왔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기(溫祚紀) 1년 조부터 13년 7월조까지는 온조가 한강 북쪽에 터를 잡고 있을 때의 역사이다. 이때 비류(沸流)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이 시기 비류(沸流)는 패․대 지역에서 비류백제(沸流伯帝)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溫祚)가 한강 북쪽에 세운 온조국(溫祚國)의 역사, 그 뒤 온조가 홍성 금마 마한으로부터 제후로 봉 받은 후 한강 남쪽에 세운 십제국(十濟國)의 역사, 그 뒤 개명한 백제국(百帝國)의 역사, 그 뒤 위구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후 세운 구태백제(仇台百濟)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溫祚百帝)의 역사를 살펴본다.

온조왕(溫祚王) 원년(B.C 18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북)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로 보아 위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북부여) 4세 고두막(高豆莫 일명 東明) 단제(檀帝)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조는 한강 북쪽에 온조국(溫祚國)을 세운 후 바로 말갈(靺鞨)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로 보아 당시 한수 북쪽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 나오는 말갈(靺鞨)은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거주한 기마민족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이 말갈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강원도 지방 나라왕(樂浪王)에게 복속하였고,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가 멸망한 후에는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온조왕기(溫祚王紀) 2년 조, 3년 조에 나오는 말갈(靺鞨)은 온조국(溫祚國)의 북쪽에 있으므로, 지금의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한 기마민족이다.
말갈의 침범이 계속되자 온조국(溫祚國)은 온조왕(溫祚王) 4년에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았다. 이후 한동안 말갈이 온조국을 공격하지 않다가 온조왕 8년(B.C 11년)에 다시 말갈이 온조국을 공격하였다.
온조왕 8년 2월에 말갈(靺鞨)의 공격을 막아낸 온조국(溫祚國)은 그해 7월에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이때 온조국이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와의 접경지대에 성․책을 쌓은 것은, 말갈이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 지역에 거주한 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온조왕(溫祚王) 10년에 말갈(靺鞨)은 또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온조가 마한(馬韓)에게 사슴을 보내 준 것은 당시 한수(漢水) 이남 지방을 다스린 마한(馬韓)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온조왕(溫祚王) 11년 4월에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는 말갈을 시켜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말갈의 공격을 막아낸 온조국은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와의 통로에 독산(禿山), 구천(狗川) 두 책(柵)을 신설하여 나라(樂浪)의 통로를 막았다.
온조왕 8년 7월에 온조국은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와의 접경지대에 성책을 쌓았다. 이는 말갈이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 지역에 거주한 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온조왕(溫祚王) 13년 2월에 할멈으로 지칭된 여인이 임금 행세를 함으로써 온조국(溫祚國)이 시끄러워 졌을 때, 강원도 지방 나라왕(樂浪王)이 이를 틈타 맥족(貊族:사냥족. 호랑이나 살괭이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 무리) 5 무리를 보내어 위례성(慰禮城)을 점령하였다.
위례성(慰禮城)을 빼앗긴 온조(溫祚)는 무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 이남으로 이동하였다.
한수(漢水) 이남으로 이동한 온조(溫祚)는 당시 한수 이남 지방을 다스린 홍성 금마 마한(馬韓)에게 사신을 보내어 천도한 사실을 알리고 강역(疆域)을 정하였다.

온조왕(溫祚王) 13년 8월 사신(使臣)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천도(遷都)한 것을 알리고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註 예성강),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하였다.

위 문구에는 사신을 마한(馬韓)에 보냈다고 적혀 있으나, 온조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마한으로부터 마한의 동북 땅 100리를 할양 받아 마한의 제후국(諸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으므로, 사신 외에 온조 자신도 마한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온조기(溫祚紀) 13년 조에 적혀 있는 십제국의 영역은 마한(馬韓)이 온조에게 봉해 준 마한(馬韓)의 동북 땅 100리보다 훨씬 넓다. 이는 온조왕(溫祚王) 13년 8월경의 십제국(十濟國) 영역이 아니고 온조백제(溫祚百帝)가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의 영역을 꾸준히 점령하여 온조왕(溫祚王) 38년(A.D 20년) 2월경까지 동으로 주양(走壤), 북으로 패하(浿河)까지 진출하였을 때의 영역이다. 이 부분은 백제의 사가들이 백제국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하여 온조가 마한으로부터 동북 땅 100리를 봉받아 마한의 제후국인 십제국을 세운 사실을 감추고 온조가 처음부터 한강 남쪽에 위와 같은 영역의 독립국가인 백제국을 세운 것처럼 백제기를 고쳐 놓은 것을 삼국사기를 지을 때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온조왕(溫祚王) 13년 9월 성궐(城闕)을 지었다. 이 때는 온조(溫祚)가 금마산(홍성 금마)에서 마한(馬漢)의 제후국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운 후 아직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이므로, 성궐의 위치는 금마산과 가까운 곳일 것이다. 이 때 온조가 거처한 곳을 위례성(慰禮城)이라 부르지 못하고 성궐(城闕)이라 부른 것은, 당시 온조가 마한(馬韓)에게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위(慰)자가 들어간 칭호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십제국을 세운 온조는 다음해 한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긴 후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여 그해 7월에 한강의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하남위례성)의 백성들을 나눠 살게 하였다.
한강 남쪽에 터를 잡은 온조는 그 곳에 궁궐을 지었다.
십제국이 온조왕 14년부터 한강 북쪽으로 진출하여 영역을 계속 넓혀나가자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가 침략해 하남위례성을 불살랐다.
온조기(溫祚紀) 17년 조부터 다시 위례(慰禮)라는 칭호가 나온다. 이는 십제국이 한수 이북으로 진출하여 꾸준히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이 무렵 십제국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위례(慰禮)의 위(尉)는 해님과 달님을, 예(禮)는 부여 무리를 뜻한다. 고대에 복속국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옥(玉), 일(日), 백(白), 환(桓), 불(不.弗.火), 위(慰.尉.魏), 고(高.古), 해(解.奚), 웅(雄)자 등이 들어가는 칭호를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온조가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다시 사용한 것은 더 이상 마한(馬韓)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기에는 졸본부여왕의 딸이 예씨(禮氏)로 적혀 있다. 부여 왕들은 예(禮)씨 외에도 해(解)씨, 고(高)씨 불(弗)씨 등을 사용하였다.
십제국(十濟國)이 임진강, 평강 방면까지 영역을 확장하자 말갈(靺鞨)이 또 십제국을 공격하였다.
온조왕(溫祚王) 18년에 말갈(靺鞨)의 공격이 있은 후 그해 11월에 십제국(十濟國)이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를 공격한 것을 보면, 말갈의 공격은 강원도 지방 나라왕(樂浪王)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석두, 고목 등 성을 쌓아 말갈(靺鞨)의 공격에 대비한 십제국(十濟國)은 이번에는 마한(馬韓)에 대비하기 위하여 웅천에 책을 만들다가 마한이 책망하므로 그만 두었다. 이 무렵 십제국(十濟國)은 이미 마한(馬韓)을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고대 우리민족은 바다, 강, 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를 해님의 아들인 용왕(龍王)이나 하백신(河伯神)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앞에 나온 우물(井)은 수신(水神)이 관장하는 수군(水軍)을 의미하고,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는 것은 십제국의 수군이 갑자기 강해졌다는 뜻이다. 백제본기에는 이외에도 비류왕기(比流王紀) 13년 조에 수신(水神)을 상징하는 글자로 우물 정(井)자를 사용하였고, 신라본기에도 강이나 바다를 근거지로 한 세력을 표현함에 있어 우물 정(井)자를 사용하였다. 또 고구려도 수군을 이용한 상륙작전이 본격화된 광개토왕(廣開土王) 때부터 하백신(河伯神)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삼고 우물 정(井)자를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온조왕(溫祚王) 25년에 십제국(十濟國)은 갑자기 수군(水軍)을 강화하였다. 이는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공격하기 위하여 육로(陸路)로 홍성 금마까지 가려면 중간에 마한(馬韓)의 여러 후국(侯國)들을 거쳐야 되므로, 십제국의 수군이 한강과 서해(西海)를 통하여 아산만에 상륙하여 홍성 금마 마한(馬韓)을 기습하기 위한 것이다.
위 문구 중 말(馬)은 마한(馬韓)을 가리키고, 소(牛)는 소마리(소의 얼굴을 한 농사의 신을 숭배한 송화강유역 등 요하동쪽 농경지방)에서 한반도로 이동해 온 온조(溫祚)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말이 소를 낳았다는 것은 마한(馬韓) 지역에서 십제국(十濟國)이 건국되었다는 뜻이고, 소머리가 하나라는 것은 온조(溫祚)가 자신을 한수(漢水) 이남 지방의 유일한 통치자로 칭하였다는 뜻이며, 몸뚱이가 둘이라는 것은 당시 한수 이남 전 지역을 십제국과 십제국 이외 지역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수군(水軍)을 강화하여 마한(馬韓) 공격 준비를 마친 십제국(十濟國)은 온조왕(溫祚王) 26년 10월에 기마부대는 표면으로는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홍성 금마로 향하였고, 수군(水軍)은 한강과 서해(西海)를 통하여 아산만(牙山灣)으로 가서 홍성 금마를 기습하여 마한을 멸망시켰다.
십제국(十濟國)은 홍성 금마 마한을 멸망시키고도 홍성 금마 마한의 영역을 전부 십제국에 병합하지 못하였다. 이는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 금강(錦江) 이남 지방의 소국(小國)들이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었고, 또 보은, 청주 방면의 소국들도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 온조백제에 복속하지 아니하고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위 우곡성(牛谷城)은 다루왕(多婁王) 29년 조를 보면 동부(東部)에 속해 있었다.
온조왕(溫祚王) 36년에 십제국(十濟國)은 성을 새로 쌓거나 수리하였다. 이는 금강하류 이남 지방에 있는 익산 금마 마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溫祚王) 36년에 십제국(十濟國)이 성을 쌓은 지점은 금강하류(錦江下流)보다 북쪽이다. 이 무렵 금강하류 이남 지방에는 익산 금마를 수도로 한 마한(馬韓)이 있었다.
A.D 19년에 비류가 죽고 비류백제(沸流伯帝)가 멸망하자 온조는 나라 명칭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개명하였다.
영역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온조가 지방을 순무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니,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 등이 온조백제에 귀순하였다.
다루왕 36년부터 온조백제는 신라 방면으로 진출을 시작하여 보은에서 신라와 서로 싸웠다.
A.D 205년 7월에 온조백제는 구태백제(仇台百濟)에 정복되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위 "성우동정(星于東井)" 문구 중 "星"는 혜성이라는 뜻이나, 위 문구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 무리를 뜻한다. 그리고 "東"은 동쪽을, "井"은 역(易)에서 남쪽을 뜻한다. 또 "井"은 수군(水軍) 또는 해상(海上)을 통하여 이동해 온 세력이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위 "성우동정(星于東井)" 문구는 큰 무리가 해상을 통하여 동남쪽 방향에 있는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는 뜻이다. 이는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해상을 통하여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 "태백범월(太白犯月)" 문구 중 "태백(太白=太陽: 태백성은 금성을 가리키나 이 문구의 태백은 해를 가리킨다)"은 해가 하늘(위)에 있다고 하여 "위(尉)"자를 사용한 위구태(尉仇台)를 가리키고, "달(月)"은 월지(月支: 달님의 아들 또는 마한이 다스린 지역을 뜻하는 용어) 즉 전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 지역에 건국된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또 고대 우리민족은 태백(太白)이 범(犯)하는 곳에는 전란(戰亂)이 일어난다고 믿었는데, "태백범월(太白犯月)"은 태백으로 지칭된 위구태가 월지(月支)로 지칭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때부터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 되어 백제(百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본서는 이때부터 온조백제(溫祚百濟)로 적는다.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힘을 배경으로 A.D 371년에 치양에서 고국원왕이 거느린 보기병 2만을 물리치고 A.D 371년에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평양성을 점령한 후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었다. 한산을 일부 사학자들은 재령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위 한산이 지금의 양주라고 적혀 있다.
A.D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이 온조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진사왕이 있던 곳은 아리수(한강) 남쪽에 있는 남한성(南漢城)이었다. 이로 보아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이 있기 전 수도를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溫祚百濟)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기각숙니(紀角宿) 등을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A.D 396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다시 항복한 후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阿莘王)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태자 전지를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이는 A.D 396년 광개토왕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괴멸되지 않은 금강 이남 지방 구태백제 무리들의 압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인질을 왜(倭)에 보낸 것은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왕이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A.D 405년 3월에 온조백제 아신왕이 암살당하자.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은 인질로 와 있는 아신왕의 태자 전지(支)를 온조백제로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키고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A.D 407년에 전지왕(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앉힌 후 여신(餘信)에게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맡겼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여영(餘映)이 A.D 416년, 420년, 424년에 백제왕으로 나온다. 이를 보면 이 무렵 구태백제왕 여영이 대외적으로 백제왕 행세를 하였고 온조백제 전지왕(支王)이나 구이신왕(久辛王)은 대외적으로 전혀 백제왕 행세를 하지 못하였다.
A.D 419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온조백제 전지왕을 유폐(幽閉)시켰다. 이때 왕자 구이신도 함께 유폐되었을 것이다. 전지왕 15년(A.D 419년) 정월조에 "무술일에 혜성이 태미성의 위치에 나타났다"라고 적혀 있는데, 혜성(星)은 대무리를 뜻하고, 태미성(太微星)은 세력이 미미해져 있는 전지왕(支王)을 가리킨다. 이 문구는 정월 무술일에 대무리가 전지왕 앞에 나타나 전지왕을 유폐시킨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다음해 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전지왕(支王)과 구이신왕(久辛王)을 각 제거함으로써 온조백제는 대(代)가 끊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이 A.D 420년에 즉위하여 7년 후인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기(久辛王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즉위하여 곧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구이신왕의 사망시기가 실제보다 7년 정도 늦추어 적혀 있는 것은 여영이 죽은 후 비유왕이 즉위하였을 때 비유왕(毘有王)의 즉위년도에 맞추어 구이신왕의 사망년도를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백제 역사와 구태백제 역사가 모두 온조백제 역사인 것처럼 적혀 있고, 구태백제왕 여영(餘映), 여비(餘毗:비유왕)가 온조백제왕인 것처럼 적혀 있다. 그 때문에 구태백제왕 여영과 여비 사이에 온조백제 전지왕과 구이신왕이 끼워 넣어져 있고, 여영과 전지왕이 동일인물로, 구이신왕이 여영의 아들로,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로 각 적혀 있으며, 비유왕의 즉위년도에 맞추어 구이신왕의 사망년도가 늦추어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여영 다음 왕이 여비로 나오고 전지왕과 구이신왕은 백제왕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위와 같이 적혀 있는 것은 온조백제 역사와 구태백제 역사를 통합하여 하나의 백제사로 적었기 때문이다.
온조백제의 대(代)가 끊어진 시기를 살펴보면,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조(A.D 396년)에 백잔(百殘: 온조백제)은 북쪽에 이잔(伊殘: 구태백제)은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으므로, A.D 396년경은 아직 온조백제의 대가 끊어지지 않았다. 『진서(晋書)』에는 여영(餘映)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 비유왕)로 적혀 있고, 여비(餘毗) 다음 백제왕이 여경(餘慶: 개로왕)으로 적혀 있다. 즉 비유왕, 개로왕은 여영(餘映)의 뒤를 이은 구태백제왕이다. 따라서 온조백제는 구이신왕을 마지막으로 대(代)가 끊어졌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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