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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龍)은 용신(龍神)이나 용왕을 가리킨다. 용신앙의 시원은 인도의 나가(naga)신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나가는 독사(毒蛇)를 말하는데, 인도에서는 이것을 신성시하여 기원전 400년경부터 비아리안계 종족사이에서 신앙되었다. 이 나가가 불교에 받아들여져 용왕이 된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상상의 동물인 용이 경이와 신앙의 대상이었고 황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용왕신앙은 인도의 나가신앙과 중국의 용신앙이 결합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2. 불교의 용
용은 불교에서는 천룡부에 등장하는 천룡팔부중 중의 하나로 비사사와 함께 광목천의 부하이다. 천룡팔부 즉, 팔부중(八部衆)은 원래 인도 고대신화의 신들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된 신들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보면 이교의 신이어서 그 격은 한층 낮다. 그러나 필경은 부처의 권속으로서 불법수호의 신이 된 것이다.
옛날 인도에서 용은 매우 숭배를 받았는데 인도 사람들은 물 속의 생명체들 중에서 용의 능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덕이 높고 숭배할 만한 사람을 높여 부를 때 용상(龍象)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서래용상(西來龍象)이란 서쪽에서 온 고승(高僧)을 일컫는 말이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현상을 용이 바닷물을 끌어 올렸다가 인간 세상에 부어 주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중국인도 이런 전설을 받아들였고, 달력에 그려진 몇 마리의 용은 그 숫자의 과다에 따라 그 해의 강우량을 표시하기 위해 그려 놓았던 것이다.
용왕 가운데 사갈라용왕(沙竭羅龍王)이 있는데, 그의 딸은 8세 때영취산(靈鷲山) 아래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남자의 몸으로 변했고 부처의 상(相)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부처가 될 때 천룡팔부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천룡팔부(天龍八部)라는 말은 불경(佛經)에서 나온 용어이다. 많은 대승불교의 경전에는 부처님이 많은 보살과 비구니에게 설법을 하실 때에 언제나 천룡팔부가 함께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천룡팔부에 대해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중생이며, 모든 사람들은 용녀가 부처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함은, 모습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천룡팔부는 사람이 아닌 여덟 종류의 신통력이 있는 괴물(怪物)을 일컫는 말이다. 천(天)과 용(龍)을 우두머리로 하기 때문에 천룡팔부라고 한다. 팔부(八部)란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파(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호라가(摩呼羅迦)이다.
용은 부단나와 함께 비류박차천왕(毘留博叉天王)에 귀속된 것으로 그 무리가 57억이나 80억 용중(龍衆)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용중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 주처하면서 각기 맡은 바 역할을 한다. 한편 용중은 세계를 보호하는 법행용(法行龍)과 세간을 파괴하는 비법행용 (非法行龍)으로 나누어지는데, 불과 정법을 수호하고 인간계를 진호(鎭護)하는 용이 법행용중이다. 이러한 법행용중은 사천왕에 귀속되고 사천왕이 제석에 귀속되므로 결국 용은 제석의 한 사자권속으로 그 수호신의 임무와 성격을 지니게 된다.
용신은 신라시대부터 호법, 호국용으로서 신앙되어 왔고 고려시대에는 농경에 도움을 주고 비를 다스리는 힘을 가진 용왕을 섬기는 관례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천령, 오악명산과 함께 대천용신을 섬기는 팔관회와 용왕도량이나 운우도량, 지풍도량 등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경기도 해룡왕사(海龍王寺)에서 기우제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화룡, 사룡기우를 행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용신신앙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신중탱화에서 용왕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용왕에 대한 신앙이 조선후기까지 지속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용에 관한 신앙이 성행하였던 만큼, 용왕을 주존으로 한 천룡탱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신중탱화에서 용의 형상은 제왕의 복식에 얼굴은 용의 눈썹과 용수염으로 덮여 있다. 머리에는 불꽃이 올라오는 구슬이 1개 또는 2개가 얹혀 있는 관을 쓰고 있다. 손에는 용뿔을 들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용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경우도 있다.
3. 중국의 용
중국에서 용은 기린(麒麟), 봉황(鳳凰), 거북(龜)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적 동물이다. 용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등 이른바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
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동물이기 때문에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기능이 조금씩 달리 파악되어왔고, 따라서 그 조각이나 묘사의 표현 역시 차이를 보여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해온 용은 대개 일찍이 중국인들이 상상하였던 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廣雅)』익조(翼條)에는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長)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즉,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왔으며, 특히 물과 깊은 관계를 지닌 수신(水神)으로 신앙 되어왔다.
그래서 『관자(管子)』 수지편(水地篇)에서는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五色)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다. 용은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는 변화무일(變化無日)하고 상하무시(上下無時)한 신이다.”라고 설명되기도 하였다.
중국민족이 상상해온 이와 같은 용의 모습이나 능력은 그것이 거의 그대로 우리 민족에게 수용되었다. 그래서 각종 용의 조각품이나 그림에서 위와 같은 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용 가는 데 구름 간다’라든가,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한다’, ‘용이 물을 잃은 듯’이라는 등등의 격언에서 용의 기능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용은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도 하며, 용신이 사는 곳은 용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4. 용의 형상
상상적인 영물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용은 비록 그것이 동물세계에 실존한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생활에 5,000년 동안이나 지배해왔고, 조형적으로 표현된 지도 4,000년이나 되므로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용은 엄연한 실존물로 느끼게 된다.
용은 조물주의 단독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함으로써 태어난 환상적인 또 하나의 창조물로, 어느 특수한 종교의 독점물도 아니고 모든 종교적 신앙행위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같이 받아들인 영물이므로 위대한 존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용에 관한 수많은 신화, 설화, 전설들은 용에 대한 신앙, 학설, 문학 또는 미술의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문화적 소산물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용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용의 미술이다.
용이 올라간다는 자연현상이나 용꿈에서 용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형시키려는 과정에서 용의 형상을 나타낸다. 용의 조형물 덕분에 더욱 실감나는 용꿈을 꾸고 등천하는 용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환상과 조형물이 주고받는 동안에 용의 형상은 다듬어지게 된 것이다. 『전한서(前漢書)』교사지(郊祀志)에 황제(黃帝)를 영접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고 하였고, 『사기(史記)』에는 황제가 토덕(土德)을 얻어서 황룡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漢)나라 때 『논형(論衡)』에 용이 승천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당나라 때 『유양잡조(酉陽雜俎)』에도 승룡에 관한 이론이 나온다. 민간에 퍼진 승룡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으며, 현대인들도 고대인과 다름없이 우레 소리와 회오리바람에서 실감나게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현상을 경험해왔다.
용의 모습은 뇌성(雷聲), 괴운(怪雲), 선풍(旋風), 전화(電火), 폭우(暴雨)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탄생하였다. 은(殷)나라 때 뇌운문(雷雲文)에서 용 미술사가 실질적으로 출발하여 용이 동물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용의 탄생에서부터 비룡(飛龍)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론이 태어났고 이에 병행하여 용의 조형사가 뒤따르게 되었다.
대개 현대의 용 미술사는 중국의 유물과 문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 자료에는 소홀한 감이 든다. 깊이 따지고 보면 용 미술사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미술자료가 탁월한 것이 많고, 중국 자료에서 찾지 못하는 귀중한 민속자료가 많이 숨어 있으니, 여기서는 그 숨은 자료를 활성화시켜서 과거의 용 미술연구를 보완하고자 한다.
용의 조형사에 있어서는 용의 탄생론보다 화생론(化生論)이 중요시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화생론은 사룡(蛇龍)과 어룡(魚龍)의 화룡설이다. 용의 형상에 있어서 뱀과 잉어의 요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으니 이러한 화생론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뱀의 화룡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록과 같이 석척(流狩: 도마뱀, 도롱뇽)이 용이 된다는 설과 『시경(詩經)』의 훼사(懊蛇), 훼훼(懊懊 其電)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독사뱀(落)의 화룡설이다. 어룡설에 있어서도 잉어의 화룡설과 문어(林)의 화룡설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실존동물의 화룡설을 떠나서 용을 선행하는 기(具)라는 괴물이 용이 된다는 기룡설(具龍說)도 나타났다. 기의 모습은 도깨비얼굴을 가지고 올챙이같이 생긴 외다리 괴물이라는데, 그것이 자라서 기룡이 된다는 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무기라는 특이한 이름이 있으며, 이것은 용의 새끼를 뜻한다.
그래서 훼룡이나 어룡이 다 이무기로 해석되고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만한 조형물도 풍부하게 남아 있다. 훼는 은나라 때 동기문에 많이 나타나며, 두개의 훼룡 측면도를 합쳐서 하나의 도철문(瑾隨文)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훼룡이 자라서 500년이 지나면 교룡(蛟龍)이 된다 하고, 용의 조형도 이 과정을 따르고 있다.
『대자전(大字典)』에 교룡은 용의 새끼이며, 모양이 뱀같이 생기고 길이가 열 자나 되며 네 개의 넓고 짧은 발이 있다고 하였다. 이십팔방각명신도(二十八方各名神圖, 에밀레박물관 소장)에 교룡과 용의 비교도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한눈에 이무기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교룡은 다람쥐 같은 귀여운 얼굴에 귀가 달리고 잉어꼬리와 네 발을 갖춘 뱀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광아(廣雅)』에 비늘 달린 용(有鱗, 蛟龍)을 교룡이라 하였으나 실증자료가 없다. 또 『사기』고조본기(高祖本紀)에 한나라 고조의 어머니 머리 위에 교룡이 나타난 뒤 고조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훼룡이 자라서 교룡이 되어 승천한다고 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도상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자료로 보완하여 판단하면 훼룡은 올챙이 꼴에 귀가 달린 이무기며, 교룡은 귀 달린 올챙이에 네 발이 달린 과정의 이무기로 보인다. 다음에 이룡(賂龍)이라는 것이 있다. 『광아』에 뿔 없는 용을 이룡이라고 하였으나 고증자료가 확실하지 않다. 『대자원(大字源)』에는 이무기라 하였고, 『한서(漢書)』에 붉은 교룡이 이룡이라 하였고,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이룡 형상이 교룡과 비슷한데다 발가락이 독수리 같은 꼴로 보아 교룡이 한 단계 더 자라서 용에 가까운 형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룡의 가장 좋은 자료는 신라시대의 석비이수(石碑賂首)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돌계단에 설치하였던 계호석(階護石)으로 보이는 단독 이룡의 돌조각의 걸작이 발견되어 그 자상하고 세밀함이 분명해졌다. 에밀레박물관 소장의 작품은 한눈에 이무기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 귀여운 새끼용으로, 얼굴은 토끼같이 부드러운데 뿔이 약간 자라고 있는 상태이며, 몸에 비늘이 있고 꼬리가 유난히 길게 생겼다.
다음의 규룡(适龍)은 『광아』에 뿔이 달린 용으로 되어 있고, 사전에는 뿔이 없는 용으로 되어 있어서 혼동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적당한 고증자료도 없다.
다음의 반룡(蟠龍)은 『광아』에 의하면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고 하였다. 이 과정의 용을 형태로 표현할 때는 엄밀히 따져서 구름의 배경 없이 몸을 구부린 자세로 나타내어야 옳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나는 완성된 용을 응룡(應龍)이라고 하는데, 문헌상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고대의 유물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나 한나라 이후의 것은 불꽃무늬 화염문(火焰文)으로 바뀌어 동양 특유의 비룡상을 창작해내었다. 그러나 화염문은 사자, 해태, 기린 등의 영수에도 달았으니 그것은 상징적인 성화문(聖火文)이며 날개 대신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불꽃무늬를 나는 장치로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다.
동양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을 지녀야만 한다. 원래는 척목(尺木)이라는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보물로 되어 있었다.
『유양잡조』에 말하기를 용머리에 박산(博山: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집)과 같이 생긴 척목이 있어야 승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동안 용의 형상을 연구한 사람들은 중국 육조시대 석각에 어렴풋이 보이는 척목 자료를 억지로 제시하면서 그 기록에 부합시켜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우리나라의 용 미술 유물에는 상세하게 나타난 박산의 자료가 풍부하게 보전되어 있다. 박산이라는 특이한 용의 보물은 보주로 변하고, 불교의 참여로 인하여 여의주로 발전하여 용 몸에서 분리된다.
또, 용의 턱밑에 보주가 감추어졌다는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얻었다는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이야기로 발전된다.
5. 미술 속의 용
동양 고유의 용은 당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광범위하게 그 조형미술이 발달되어 회화부문에 있어서나 조각, 공예부문에 있어서 동양 최고의 걸작들이 창작되었다.
완성된 용의 형상은 『회편세전(會編世傳)』의 구이삼정지설(九以三停之說)에 의하면 용의 뿔은 사슴뿔을 닮았고, 머리는 낙타머리를 닮았으며, 눈은 도깨비의 눈을 닮았고, 이마는 뱀의 머리를 닮았으며, 배는 지렁이의 배를 닮았고, 비늘은 잉어비늘을 닮았으며, 발가락은 독수리발가락을 닮았고, 발바닥은 호랑이발바닥을 닮았으며, 귀는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면 용의 코밑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간 촉각과 얼굴 사면에 달린 털이다. 턱수염이나 구연(口緣: 입의 가장지리)의 수염이나 이마의 털은 여러 가지 형태로 도안화되고, 촉각은 일반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지표가 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후의 그림과 조각을 중심으로 용의 형상을 상징성과 조형물의 용도를 대조해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나라의 용 미술은 용이 승천하여 하늘을 상징하는 최고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용의 성격은 주로 궁중미술에 적용되어 임금의 자리(龍座), 수레(龍駕), 배(龍架), 복장(龍袍) 등의 조형물이 생기고, 용좌(임금이 앉는 자리) 천장을 장식하는 ‘쌍룡도’나 용좌의 배경으로 ‘용병(龍屛)’이 꾸며졌다. 궁중용으로 사치스럽게 마련된 이러한 미술품에서는 별로 주목을 끌만한 작품이 없다. 다만 ‘일룡병(一龍屛)’의 거작이 옛날 사생물에 나타나 있으나 보존되지 못하였다.
천룡사상은 불교 속으로도 침투하여 천룡호법의 탈을 쓰고 사찰건축의 천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통도사 대들보에 그려진 백룡의 단청화는 우리나라 용그림을 대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걸작이다.
둘째로 용은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 속의 용왕으로서, 용신각 속의 용신으로서, 기우제의 우신(雨神)으로서, 지붕 위의 방와신으로서 용의 존재는 폭넓은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이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살아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조형물도 전해지고 있다. 용신신앙은 민간신앙이라고 하지만 임금까지 깊숙이 참여한 ‘민’의 신앙이었다.
옛날에는 기우제를 토룡제(土龍祭) 또는 화룡제(怜龍祭)라고 불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진평왕 50년에 화룡제를 지냈다고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용의 그림을 단상에 걸고 화룡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도처에 화룡을 임금께 바친 기록이 보인다.
『용재총화(弁齋叢話)』에는 오룡제를 지냈다 하였으니 오색화룡을 썼던 사실이 짐작된다. 이러한 화룡의 자료는 정통화 위주의 미술사에서는 도외시되어왔으나 민화의 재발견운동에 따라서 귀중한 자료가 다소 보존되어 있다.
용신신앙 역시 불교와 융화되어 다듬어지고 『용왕경(龍王經)』을 탄생시키고 불화사(佛畵師)들에 의하여 격조 높은 단청화나 탱화양식의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용신신앙의 소산물로서 또 하나 주목되는 자료는 ‘용신탱화(龍神幀怜)’이다. 이것은 용궁에 있는 용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용이 인격과 신격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산신탱화(山神幀怜)와 병행하는 귀중한 종교화이다. 산신과 같이 용신도 백발의 노인 상으로 나타나는데 수염이 용의 수염을 닮은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용궁부인으로 여신상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용신탱화는 무당들도 모셨고, 사찰에서도 모셨고, 도관(道觀)에서도 모셨다.
셋째로 용은 귀신을 쫓는 벽사신(陽邪神)으로서도 큰 일을 담당해왔다. 수신으로서 불을 막는 구실을 한 것은 물론이고, 사신(四神: 靑龍, 白虎, 朱雀, 玄武)의 하나로서 동방의 수호신이 되고,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하나로서 진시(辰時)의 시직신장(時直神將)의 임무를 차지하였다. 천룡으로서 만복을 베풀고, 수신으로서 온 천지의 물을 지배한 용이 수호신으로서는 전문분야에 국한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신, 그 중에서도 좌청룡, 우백호의 신앙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쉴 새 없이 지키고 있다. 양택(陽宅)을 정할 때나 음택(陰宅)을 정할 때나 청룡백호의 명당자리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어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여왔으며, 이러한 민간신앙에서 용호도가 자라날 수 있었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풍호석으로서 석조각 형태로 드러났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懸怜)로서 인신용면(人身龍面)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도의 최고의 작품으로서 정통미술사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왔다. 고려시대의 유물로서 석관(石棺)에 새겨진 음각문이 남아 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대문에 붙이는 호축삼재(虎逐三災), 용수오복(龍輸五福)을 뜻하는 용호도로서 민예적(民藝的)인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방화신(防火神)으로서는 삼국시대부터 와당무늬나 용마루의 용두(龍頭) 형식으로 조각품을 풍부하게 남겼다.
넷째로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시복신(施福神)으로서 서수(瑞獸: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짐승)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즉, 용은 사령(四靈: 龍, 鳳, 龜, 麟)의 첫머리 위치를 차지하면서 길상(吉祥: 좋은 조짐)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사람들은 용꿈을 좋아하였고, 그러한 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그림(夢龍圖)까지 그렸다.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세계에서도 한결같이 용꿈이 숭상되었던 사실은 오죽헌(烏竹軒)의 몽룡실(夢龍室) 현판이 실증하여주고 있다. 이밖에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에 따라 등용출세와 득남을 상징하는 어룡의 약리도(躍鯉圖)가 민화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림뿐 아니라 공예분야에 있어서도 잉어연적이 정형화되었고, 용 항아리가 상식화되고, 잉어자물쇠나 목기장식으로도 광범위하게 애용되었다. 사령미술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거북의 머리조각이다.
고려시대의 귀부(龜趺: 거북모양의 빗돌 받침)에 있어서 거북머리를 용두로 조각한 것은 확실히 그 시대의 뚜렷한 경향이라고 보인다. 금산사혜덕왕사탑비, 법천사지광국사탑비, 고달사원종대사탑비, 쌍봉사철감선사탑비, 봉림사진경대사탑비 등의 귀부는 모두가 다 용두구신(龍頭龜身)으로 조형된 고려유물의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다섯째로 용은 음악신(音樂神)으로서의 지위가 특이하다. 『시경(詩經)』에 훼훼는 뇌성이라 하였듯이 이무기는 우레소리와 함께 움직인다.
병장도(兵將圖)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대적인 치우족(蚩尤族)은 용의 울음소리를 제일 싫어하였다 하여 탁록대전(鴉鹿大戰)에서 황제군은 소각(小角), 대각(大角)의 악기를 만들어 용소리를 내면서 응룡으로 하여금 치우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잡조(五雜俎)』나 『잠확류서(潛確類書)』에 기록된 구룡자(九龍子)의 제1자 포뢰(蒲牢)는 울기를 좋아하였고, 제2자 수우(囚牛)는 소리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범종 천장에 음통을 뚫고 용뉴(종의 꼭대기 부문의 장식)를 설치하였으며, 북통(鼓筒)에 용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구룡자(蒲牢, 囚牛, 蚩吻, 嘲風, 苗櫓, 眉洌, 葯摹, 壟猊, 覇下)의 모습은 현존하는 궁궐건축 지붕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고 『삼재도회』에도 나타나 있다. 그 형상은 용의 모습과는 다른 괴수의 꼴로 나타나 있어서 용의 형상을 추구하는 데 다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섯째로 용은 학문의 세계에서도 숭상되었으며, 철학적으로 『역경(易經)』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문학, 동양 서예, 정통회화사 등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용(龍)자의 대자글씨는 예로부터 서예가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고 때로는 용 그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통 회화 계통의 용그림은 대작이 보존되지 못하여 유감스러운 일이나 석경(石敬)의 〈운룡도〉, 현재(玄齋)의 〈승룡도 昇龍圖〉, 최북(崔北)의 〈의룡도 醫龍圖〉, 정수영(鄭遂榮)의 〈등룡도 登龍圖〉 등 몇몇 작품들이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중국 진용화(陳容華)의 〈구룡도 九龍圖〉같은 대작에 비하면 왜소한 자료들이다.
정통화 화제에 있어서 비룡재천(飛龍在天), 용반호거(龍盤虎踞), 용비봉무(龍飛鳳舞), 용호상박(龍虎相搏), 어변성룡, 용문소미(龍門燒尾)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통화 속에도 다분히 민속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용 미술자료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여 보면, 고구려의 벽화, 신라의 용뉴와 이수, 백제의 용문전, 고려의 귀부, 조선조의 용민화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하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자료는 고대 용신앙이 불교와 습합되어 불교식 신앙행위와 불화 공들의 탁월한 솜씨로 완숙되었다.
미술사자료로는 종뉴, 이수, 귀부, 치문, 당간용두, 용문단청, 벽화, 용신탱화, 용문부도, 용고, 목어(木魚), 용문와전 등 용의 그림과 조각의 걸작들이 거의 불교미술에서 나왔다. 용의 전체적 형상을 정리해보면, 사형(蛇形), 사족수형(四足獸形), 그 중간형, 그리고 어룡형(魚龍形)으로 크게 분류해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창룡(蒼龍: 별이름)은 사족수형의 대표적 작품이고, 조선조의 운룡도는 모두가 다 사형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하여 신라시대 와당(瓦當기와 마구리)에 나오는 용은 그 중간형으로 보이고, 절간 누각에 모셔진 목어는 어룡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색채를 중심으로 나누어보면 청(靑), 백(白), 주(朱), 현(玄), 황(黃)의 오방색으로 나타나서 『용왕경』이나 오행설 기록상의 용과 일치된다.
용 그림의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구름을 배경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무 배경 없이 나오는 반룡도, 한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와 힘 다툼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으로 나누어진다. 용의 조형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귀두(鬼頭), 뿔, 촉각, 앞배, 수염, 뒷등, 영치(靈齒), 비늘, 발가락, 꼬리, 여의주 등으로 구성된다.
용의 모습은 이러한 구성의 표현 여하에 따라서 용격이 이루어지고, 미술적인 화격이 정해진다. 특히,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 코, 입, 이, 뿔, 눈썹, 촉각, 수염의 표현이 용의 관상을 결정짓는다.
용의 발가락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나라 고조(高祖) 때는 제왕과 제1, 2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제3, 4왕자는 네 발가락의 용을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 규정이 후세에 와서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한국의 왕은 네 발가락의 용을, 일본의 왕은 세 발가락의 용으로 규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통 회화에서는 이러한 규정을 온순하게 지킨 것 같고, 민화의 세계에서는 다섯 발가락의 용 그림이 자유롭게 나타나 있다. 용의 몸집은 뱀을 닮은 탓으로 그 자세가 자유로워서 천변만화의 가지가지 자세를 취하면서 나타난다.
하늘을 나는 비룡상은 운룡으로서 표현되는데, 그림의 운룡도뿐 아니라 조각에 있어서도 환상적인 대작은 운룡으로서 용 미술의 멋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용 미술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민족적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민속적인 상징미술로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여한 가운데 일상생활에서 같이 살고, 초복벽사의 뜻을 품고, 한국미술의 멋을 여지없이 발휘한 특이한 창작으로서 미술사에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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