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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

용왕
1.개요
용신은 재래의 수신과 불교와 도교의 용신이 습합되어 형성된 국가수호신으로서, 그리고 왕실의 조상신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제향의 대상이 되었고, 농경을 보호하는 강우의 신으로서, 풍파를 주재하는 바다의 신으로서 수천 년간 농어민의 폭넓은 숭앙을 받아 왔다. 용신은 본래 물을 관장하는 수신으로서 비 오는 것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숭앙되었다. 강우(降雨)를 주관하는 용의 이야기는『삼국유사(三國遺事)』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도 실려 있다. 보양스님을 따라서 신라로 들어온 용자(龍子) 이목(離目)은 날이 가물자 보양스님의 지시를 받고 천신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농민을 위하여 비를 내려 주었고 보양스님은 이목을 징벌하러 온 천신의 사자에게 배나무를 이목이라고 하여 벼락 치게 하였다. 이는 불교와 습합된 농경의 신으로서 용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에 우물이나 샘은 용왕굿이나 용신제를 받는 용신의 거주처로 알려져 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하는 ‘용알뜨기’라는 습속은 임신을 하기 위해서 새벽 일찍 남보다 먼저 우물의 물을 떠다 먹는 것이다. 여기서 샘이나 우물의 용신은 생명의 신으로서 성격을 가진다.
전국에서 전승되는 용못(龍沼)이나 용우물(龍井)에는 용이 은혜를 갚으려고 비를 내리어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농경의 신으로서 용신이 숭앙되었음을 말해 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강이나 바다에는 용신이 있고 용이 있는 용궁은 보배가 많은 곳이라는 설화가 많다. 『삼국유사(三國遺事)』수로부인(水路夫人)조에 해룡(海龍)이 수로부인을 납치하였다가 여러 사람이 모여 해가(海歌)를 부르자 돌려보냈는데 수로부인은 바다 가운데 칠보궁전(七寶宮殿)이 있다고 했다. 거타지설화(居陀知說話)나 작제건설화에서도 서해 용왕이 사는 용궁에는 많은 진기한 보물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같은 용왕신앙은 불교나 도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바다에는 물고기를 다스리고 파도를 주관하는 용왕이 권역별로 존재하는데, 사해용왕(四海龍王)이라고 하는 용신은 도교의 신의 위계와 직능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관념이라고 보인다. 바다의 용왕은 배를 부리며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신으로 숭앙되었다. 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어민들이나 무역을 위해 항해하는 사람들은 모진 파도와 싸워야 했고 파도를 일으키고 잠재우는 용왕신을 신성시하여 용왕제를 지냈다.
용왕이 신성시되면서 용왕의 가족인 용자나 용녀가 인간계에 출현하고 용궁의 보물을 얻은 사람이 발복(發福)을 한다는 설화가 많이 전승되었다. 해인사 창건과 관련된 해인(海印)의 유래나 공지천 유래 등의 설화는 용자를 구해 주고 용궁에 들어가 보물을 얻어온 이야기이다. 이처럼 용신신앙은 용궁이라는 신비의 이계(異界)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2. 건국 신화 속의 용왕
우리나라에서 용이 신으로 인식된 것은 고대부터 자생했던 수신신앙이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되어 용신신앙으로 변모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주몽신화(朱蒙神話)에서 하백의 딸 유화가 고구려의 국모신(國母神)으로 제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수신신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몽신화에서는 용이 오룡거(五龍車)라는 해모수의 수레를 끄는 동물로 되어 있어 본격적인 신으로 숭앙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에서는 국모 알영(閼英)이 수신이면서 용신의 성격을 보여준다.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의 몸에서 태어나서 시조왕의 왕비가 되고 박혁거세(朴赫居世)와 함께 두 성자(聖者)로 신라인의 숭앙을 받았다. 여기서 수신과 용신이 교섭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석탈해신화(昔脫解神話)에서도 용성국(龍城國)의 이십팔용왕(二十八龍王)이 있다고 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존재로서 용왕이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용신에 대한 숭앙이 고조되는 계기가 된 것은 신라시대 호국(護國)용신신앙이 형성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신라 31대 문무왕(文武王)은 당군(唐軍)이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배워 왔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를 시켜 문두루(文頭婁)의 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배를 침몰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용왕이 살고 있다는 바다의 용궁이 등장함을 보아 용왕신앙이 있었음을 찾을 수 있다.
문무왕은 세상을 떠나며 유언하기를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하였다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동해 바다 바위 위에 장사지냈는데 그 후 문무왕은 호국용신으로서 이적(異蹟)을 나타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는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이 떠다니는 산을 보고 점을 쳐 말하기를 문무왕이 해룡이 되어 삼한을 진호(鎭護)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라의 호국용신신앙이 확립됨을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이견대(利見臺)에 행차하여 용으로부터 옥대를 받는다. 이 옥대는 용신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받친 보물로서 만파식적과 함께 국가를 태평하게 하는 보물이었다. 만파식적의 기능을 보면 호국용신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적병을 물리치고 가뭄에 비를 오게 하고 물결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신신앙은 호국불교의 사상과 본래부터 자생하였던 수신신앙이 습합(習合)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러한 호국용신의 관념은 백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백제 29대 무왕(武王)이 된 서동은 모친이 남지(南池)의 지룡(池龍)과 교통하여 탄생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용의 후손이 국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성혈통으로서 용손사상을 찾을 수 있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義慈王) 때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때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격할 때 용신이(또는 의자왕이 용으로 변하여) 백제를 보호하자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아 제거했다는 조룡대(釣龍臺) 전설이 구전된다. 여기서 백제를 지키는 호국용신의 관념을 찾을 수 있다.
용의 혈통이 왕으로 이어져서 신성시되는 관념은 고려 국조신화에까지 계승되었다.『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에는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 여우에게 시달리는 서해용왕을 구출하고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바로 작제건과 용녀의 손자라고 되어 있다. 국조 왕건을 용녀의 후예로 설정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용신신앙이 굳게 자리 잡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용신은 호국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용의 혈통은 신성시되어 국왕의 혈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미술 속의 용왕
용신신앙의 소산물로서 또 하나 주목되는 자료는 용신탱화(龍神幀怜)이다. 이것은 용궁에 있는 용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용이 인격과 신격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산신탱화(山神幀怜)와 병행하는 귀중한 종교화이다.
산신과 같이 용신도 백발의 노인 상으로 나타나는데 수염이 용의 수염을 닮은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용궁부인으로 여신상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용신탱화는 무당들도 모셨고, 사찰에서도 모셨고, 도관(道觀)에서도 모셨으나 많이 보존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3. 용신 설화와 민담
3. 1 아홉용이 살았다는 구룡산과 구룡정 설화
용성면 매남4리 동북쪽에 해발 400여 미터의 고지를 이루고 있는 우뚝 솟은 산이 바로 구룡산이다. 이 산은 청도군과 영천시를 경계로 하고 있어 청도구룡, 영천구룡, 자인구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 산의 위치가 3개의 시군과 경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룡산은 곧 전설 속의 산으로 처음 구룡이라 명명하게 된 동기가 동해의 용왕 이야기와 연계된다.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동해의 용왕에게 딸이 셋 있었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세상을 뜨고, 왕실은 새 왕비를 맞아들게 되었는데 새로 들어온 왕비는 처음 전처의 소생인 세 공주를 사랑해 주었으나 날이 갈수록 계모의 본질을 드러내어 학대가 심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용왕은 용궁에서 학대를 받는 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그 중 한 딸을 육지에 나가 살도록 하였다.
세상으로 나온 용왕의 딸은 해동 조선의 정기를 지닌 명산 금강산을 찾아갔으나 이미 그곳에는 용왕의 동생이 터를 미리 잡고 하늘에 비를 다스리고 있음에 그도 같이 그곳에 자리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의 태백산 줄기를 따라 살기 좋은 남으로 계속 내려오다 보니 수목이 울창하고 정상이 평평한 좋은 산을 발견하고 이 곳에 영주의 터전을 잡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구룡산 이라 한다.
동해 용왕의 셋째 딸이 이곳에 터를 잡아 천우를 다스리며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아홉의 자식을 두게 되었는데, 이가 곧 구룡이란 지명의 어원이 된 것이다.
용왕의 딸이 낳은 자식 중 여덟 용은 모두 어미용의 말을 잘 따르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으나 그중 막내아들이 항상 말썽을 부리며 어미용의 속을 태웠다고 한다. 어미용은 항상 막내를 타이르며 바르게 자라기를 바랐지만 한번 벋나기 시작한 막내의 행실은 바로 잡히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용이 지켜야할 계율마저 저버리고 말아 어미용을 몹시 난처하게 하였다. 그래도 어미용은 계속 막내를 설득하며 바른 길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어미용은 동해의 부왕을 찾아 이를 벌해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이 때 바다의 용왕은 어미의 고생을 어여삐 여겨 용궁으로 다시 부르고 아홉 용은 더 높은 하늘에 올라가 생활하게 하였는데, 이때 승천하게 된 샘이 바로 구룡정이다. 아홉의 용이 높고 넓은 하늘에 올라가 세상의 비와 구름을 관장하며 천우를 다스렸으나, 말썽꾸러기인 막내는 이 또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용왕의 영을 거역하고 본래의 살던 곳을 그리워하며 구룡산으로 치닫다 용왕의 노여움을 사 병을 얻어 그만 죽게 되었는데, 막내용이 죽은 자리가 바로 반룡산이라 전해지고 있다.
구룡산의 아홉 용이 하늘로 올라간 뒤로부터 이 산 정산에 생긴 마을을 구룡리라 부르게 되었고, 그 때 용이 승천하였다는 곳에는 깊은 웅덩이로 변해 남아있다.
구룡리 북서쪽 건너편에는 장재란 자연부락과 앞 냇가에는 용암이라는 큰 바위굴이 있다. 이 굴은 옛날 이곳에 살고 있던 용이 막 승천하려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한 여인의 개짐을 빨래하는 부정한 모습을 보고, 큰 바위에 머리를 박고 승천하지 못하였다는데, 그때에 그 용이 들이박은 바위를 용암이라 한다. 이 용암에는 용이 살았다는 샘이 있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 샘의 물은 얼지 않는다 하며, 그 샘은 깊고 물 색깔이 짙푸르러 아무도 이 근방을 접근하지 않으며 지금도 이 샘가를 지나면 마치 용이 나타나 금새 입에 불을 품으며 승천하려는 듯한 으슥함 마저 준다.
구룡산 일대에는 큰 바위가 귀의 모양과 같이 생겼다하여 귀바위(耳岩)라는 자연부락과 남쪽에서 먼저 매화가 봄소식을 전하는 곳이라 하여 매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신라 때에는 구룡산 아래 송림사와 구룡사라는 큰절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파편들과 전설만 남아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동남쪽의 반룡산 또한 구룡산의 준령으로, 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그 흔적조차 희미한데, 근래(196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라는 대웅전은 당시의 웅장함만 간직한 듯, 깨어진 석조물에 몸체를 의존한 채 복원될 날만 기다리려는 듯 남아있다. 이 사찰이 있는 곳을 용전(龍田)이라 부르는데, 원래 이 일대는 반룡사에 따라붙은 불지로, 융성기 때에는 사찰에서 씻어 내리는 쌀뜨물이 청도 금천까지 흘러내렸다고 한다. 조선말기 큰 화재 시 급히 불상을 청도의 한 사찰로 옮겨 화재로 인한 화는 면했으나, 당초의 삼존불 중 주불인 아미타불만 되찾아 모시고, 좌우의 협시불은 당시 피난처의 거부로 되돌려 받지 못하였다 하며, 주불마저 주지승이 며칠동안 이 절을 비운 틈에 잃었다 하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반룡사가 자리한 산은 원래 구룡산 이라 하였으나, 이곳에다 절을 짓고부터 반룡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의 준령은 청도 소천과 용성 곡란의 용산 줄기와 갈라지며, 소천을 지나는 산 준령은 다시 남산의 대왕산과 연결되는 명산중의 명산이다.
3. 2 용원설화(龍猿說話)
바다 속에 용왕이 살았는데, 그의 왕비가 잉태하여 원숭이의 염통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용왕은 원숭이의 염통을 구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와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 먹고 있는 원숭이를 만났다. 용왕은 "그대가 사는 이곳은 좋지 못하니 아름다운 수목이 있고 먹을 열매가 많은 바다 속으로 안내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솔깃한 원숭이는 기뻐하여 용왕의 등에 업혀 물 속으로 갔다. 도중에서 용왕은 그만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원숭이는 용왕을 보고 "염통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왔으니 얼른 다시 가지러 가자."고 하였다. 용왕은 원숭이의 말을 곧이 듣고 다시 육지로 업고 나왔다. 원숭이는 육지에 나오자마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용왕을 보고 조소만 하였다.
3. 3 백두산의 천기(天氣) 설화
아득한 옛날에 동해용왕, 흑룡강용왕, 천지용왕은 의형제를 삼고 서로 오가면서 의좋게 지냈다. 그들 중 제일 나이 많은 동해용왕이 맏이였고, 버금으로는 흑룡강용왕이었고 막내둥이는 천지용왕이었다.
여름철이 돌아오면 동해용왕과 흑룡강용왕은 동생을 찾아서 백두산에 와서 놀다가 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동생의 안내를 받으며 두 형은 천지로부터 폭포에까지 내려왔다. 그날따라 날씨가 유난히 맑아서 폭포를 구경하기가 아주 좋았다. 수십 명의 용녀들이 폭포에서 노니는 것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용녀들은 흰 나래를 활짝 펼치고 천길 벼랑에서 뛰어내렸다가는 폭포에서 튕기는 물줄기를 잡아타고 외무지개와 쌍무지개사이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오고갔다. 기절할 지경으로 매혹적인 광경에 정신을 홀딱 빼앗기고 군침을 삼키며 구경을 하는 자는 흑룡강용왕이었다. 그를 황홀하게 한 용녀는 남달리 파란 옷을 입은 용녀였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등허리에 드리우고 날씬하고 가는 허리를 절도 있게 움직이며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은 흑룡강용왕을 홀딱 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용녀 미홍은 동생인 천지용왕의 애첩이었다. 밤이 깊어 진수성찬에 술을 마신 흑룡강용왕은 미홍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 자꾸 사물거려 도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그는 동생에게 미홍을 넘겨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해용왕이 둘째를 꾸짖었다.
그 후 유두에 두 형은 또 백두산으로 놀러 왔고, 하루는 온천에 와서 몸을 시원하게 씻고 낮잠을 청하였다. 잠결에 용녀들의 기겁한 아우성소리가 들려오기에 동해용왕과 천지용왕이 눈을 번쩍 떴다. 그들 가운데 누워서 자던 흑룡강용왕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용왕은 짐작이 가는지라 쪽빛 용검을 꼬나들고 뛰어나갔다. 흑룡강용왕이 미홍을 겁탈하려하니 미홍이 죽기 살기로 반항하고 있었다. 천지용왕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니 흑룡강용왕은 검은 용검을 들고 동생과 맞닥뜨렸다. 동해용왕이 쫓아가서 보니 두 동생이 대판으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피를 흘릴 것만 같아서 동해용왕은 은빛 용검을 휘두르며 그들의 사이에 들어가서 싸움을 말리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호되게 꾸짖자 둘째와 셋째는 용검을 거두는 수밖에 없었다. 동해용왕이 흑룡강용왕을 닦달하자 흑룡강용왕은 마지못하여 무릎을 꿇고 동생에게 빌었다.
칠월칠석날, 동해용왕과 흑룡강왕은 또다시 백두산으로 놀러왔다. 술에 취한 흑룡강용왕은 또 미홍이 생각나서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맏형도 크게 노하였고, 흑룡강용왕과 천지용왕은 서로 결사전을 벌였다. 동해용왕은 천지용왕을 두둔하면서 흑룡강용왕을 쳤다. 그는 하늘높이 올라가서 흑룡강용왕에게 펄펄 끓는 물을 퍼부었다. 흑룡강용왕은 천지용왕을 견제하면서 차디찬 입김을 내뿜었다. 뜨거운 물은 우박이 되어 땅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동해용왕과 천지용왕이 좌우에서 흑룡강용왕을 협격하자 흑룡강용왕은 머리 위로 휙 날아 올라가서 얼음을 와르르 토하였다. 동해용왕은 뜨거운 입김으로 얼음덩이들을 녹여서 소나기가 되게 하였다. 천지용왕이 토하는 불길은 검은 구름을 헤쳐 가르는 번개가 되었고 그가 휘두르는 용검은 광풍을 휘몰아치게 하였다.
아무리 싸워도 그들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흑룡강용왕은 형제들과 척을 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화의를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자주 맞닥뜨려 싸운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작은 싸움이 벌어지면 가랑비가 내리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면 우레가 울며 소나기가 퍼붓는다고 한다. 그들의 싸움이 잦기에 백두산의 천기는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게 천변만화한다고 한다.
3. 4 백두산 천지 신화
백두산 일대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평화로운 마을에 하늘에서 심술 사나운 흑룡이 나타났다. 검은 구름을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흑룡은 불칼을 휘둘러 이 골 저 골의 물곬을 지져놓았다. 곡식들이 노랗게 말라들었고 나뭇잎이 쪼글쪼글해졌다. 밭이란 밭은 갈라져서 거미줄을 늘인 듯하였다.
사람들은 성이 백가라는 장수를 모시고 가뭄과 싸웠다. 샘물줄기를 찾느라고 숱한 사람들이 자리를 떨치고 나섰다. 괭이소리, 삽질소리, 메질소리가 낮에 밤을 이어서 울려 퍼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샘물줄기를 찾아내었다. 콸콸 솟구쳐 오르는 샘물을 보고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들이 금방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청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덮쳤다. 번쩍번쩍 번개치고 우르르 우레가 치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샘물줄기를 찾아놓은 뒷산 벼랑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광풍은 집채 같은 바윗돌들을 가랑잎 날리듯 하여 샘물줄기를 덮어놓았다.
날이 개자 남녀노소가 달려 나왔다. 힘들게 파놓은 샘물터가 눈 깜빡할 사이에 돌산으로 변한 것을 보고 여인들은 눈물을 머금었고 장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바윗돌에 걸터앉은 한 사람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몸집이 집채만 하고 우람한 그는 키가 구척이나 됐다. '울분을 참지 못하는 그가 바로 백장수였다. 이때 그의 앞에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났다.
백장수가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자 공주는 백장수가 물을 찾자고 싸우는 일편단심에 감천하여 작은 힘이라고 보태려 찾아왔다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렇게 서두를 뗀 공주는 지난밤에 꿈을 꾼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밤에 잠이 들었을 때 하늘에서 칠색 무지개를 정원에 드리워서 무지개에 취해 멍하니 서 있자니, 하얀 옷을 입은 늙은이가 금막대기를 짚으며 왔다. 공주가 공손히 인사를 했더니 노인은 자신이 하늘의 신선으로서 지금 흑룡이 백두산 일대의 물줄기를 지져놓아서 큰 가뭄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백장수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우물을 파며 물줄기를 찾고 있는데, 그의 힘이 아직 흑룡을 당할 수 없으며, 백장수가 흑룡을 이기려면 백두산에 있는 옥장천의 샘물을 석달 열흘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주의 나라의 일이므로 공주가 알려한 한다고 말한 뒤 금막대기를 휙 젓더니 사라졌고, 공주는 잠에서 깨어나 백장군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이에 공주와 백장군은 함께 옥장천을 향하여 떠났다. 백장수는 험한 길도 날아가는 공주의 재간에 탄복하면서 공주를 따라 사흘 동안 걷고 걸었다. 얼마나 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깍아 지른 벼랑이 앞길을 막아서서 백장수와 공주는 걸음을 멈추었다. 벼랑 밑에서는 옥 같은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공주는 이 샘물이 옥장천이라고 말했고, 백장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샘물가에 엎드렸다. 그는 단숨에 다 마시기라도 할 듯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물을 기껏 마시고 백장수가 일어서자 공주는 석달 열흘이 차는 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묘연히 사라졌다.
공주가 떠나가자 백장수는 벼랑가에 작은 막을 치고 쉴 새 없이 샘물을 마셨다. 과연 석 달 아흐레를 마시고 나니 힘이 마구 솟구쳤다. 집채 같은 바윗돌도 공깃돌처럼 다룰 수 있었고 하늘을 찌르는 노송도 밭고랑 넘듯 하였다. 그 날 공주가 말과 같이 왔다. 이튿날까지 석달 열흘 동안 옥장천의 샘물을 마신 백장수는 백두산 마루에 올라가서 삽으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한 삽을 파내서 던지면 하나의 산봉우리가 우뚝우뚝 일어섰다. 그가 열여섯 삽을 떠서 동서남북으로 버렸더니 16기봉이 생겨났고 움푹하게 패인 밑바닥에서는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 때, 졸지에 광풍이 일며 먹장구름이 삽시에 하늘을 덮었다. 동해에 나가서 용왕의 딸을 희롱하던 흑룡은 백두산에 큰물이 났다는 급보를 듣고 부랴부랴 날아왔던 것이다. 흑룡은 노하여 불칼을 휘두르며 땅이 들썩하게 울부짖었다.
백장수는 추호의 겁도 없이 흰 구름을 잡아타고 만근도를 휘두르며 웅전하였다. 흰 구름과 검은 구름이 마주치자 뇌성이 울부짖고 하늘이 진동하였다. 공주는 기회를 엿보며 그들의 싸움을 쳐다보았다. 불칼을 휘두르는 흑룡은 하나의 불덩어리 같았고 만근도를 휘두르는 백장수는 하나의 은 덩어리 같았다.
백장수와 흑룡은 아무리 싸워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공주는 흑룡을 향하여 연속 단검을 뿌렸다. 단검들이 꼬리를 물고 유성마냥 흑룡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백장수를 당하기 어렵겠다고 여기던 흑룡은 단검까지 연속 날아들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백장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근도로 흑룡의 불칼을 힘껏 내리쳤다. '쟁강!'소리와 함께 불칼이 뭉텅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흑룡은 동해로 꼬리를 빳빳이 쳐들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흑룡을 물리친 백장수와 공주가 백두산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는 흙구덩이에 맑은 물이 꽉 차서 넘실거렸다. 그것이 오늘의 천지가 되었다 한다.
백장수와 공주는 흑룡이 다시는 백두산에 와서 물줄기를 지져놓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천지 속에다 수정궁을 지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흑룡은 하늘의 천궁에서 사처로 쏘다니며 사고를 쳤다. 하늘의 과수원에 들어가 주렁주렁 열린 천도복숭아도 마음대로 따먹고 복숭아 나뭇가지에 앉아서 널뛰듯 하다가 부러지게도 하고, 꽃밭에 들어가서 데굴데굴 구르며 꽃밭을 여지없이 짓밟기도 하였다. 이에 옥황상제는 대노하여 흑룡을 붙잡아 들이라고 분부하였고 곤장 백 대의 엄벌을 내렸다. 형벌이 끝나자 옥황상제는 흑룡을 백두산에 보내어 속죄하게 하라고 호령하였다.
흑룡은 눈물을 흘리면서 천궁에서 백두산으로 쫒겨 갔다. 그러나 막상 백두산에 와보니 천궁에서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다. 산에는 피둥피둥 살찐 짐승들이 있었고 천지에선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노닐었고 마을에선 꽃다운 여인들과 늠름한 장정들이 늙은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흑룡은 과거의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 하였다. 흑룡은 천지 속을 마음대로 쏘다니며 맛있는 물고기들을 하루에도 몇 백 마리씩 넙적넙적 삼켜버렸다. 물 속을 벗어나 천지 기슭에 나선 흑룡은 둔갑을 써서 사람으로 변장하였다. 그는 이 골목 저 골목을 지키다가 숫처녀만 나오면 훌쩍 안고 으슥한 곳에 가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희롱하였다. 총각이나 장정들을 만나면 죽신하게 두들겨 패지 않으면 목을 쭉쭉 뽑아서 아무 곳에나 뿌려 던졌다. 수림 속에 들어가서는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서 먹고 싶으면 먹고, 먹고 싶지 않으면 나무를 분질러놓고 거기에다 배를 쭉쭉 꿰어서 달아놓았다.
아늑하고 화기애애하던 백두산은 발칵 뒤집히고 세상 만물이 공포 속에서 떨었고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칠 사이 없었다. 날이 흐리면 산짐승들이 천궁에다 흑룡을 공소하였고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빗줄기를 타고 천궁에 올라가 흑룡의 죄악을 밝히었고 날이 개이면 사람들이 무지개에다 흑룡의 죄악을 알리는 편지를 띄웠다.
흑룡의 죄악을 공소하는 소식이 날마다 날아들어서 옥황상제는 하루도 마음이 편안할 사이가 없었다. 옥황상제는 꼭 문제가 있으리라 단정하고 흑룡을 천궁으로 불러들였다. 영을 받은 흑룡은 낯빛이 잿빛이 되고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 올라가 죄를 승인하는 날이면 천길 지옥에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흑룡은 옥황상제 앞에서 흑백을 전도하고 시비를 흐리는 방법을 써서 발뺌을 하리라 마음먹고, 빈 틈 없이 흉계를 짜고 나서 천궁으로 올라갔다. 천궁에 들어선 흑룡은 옥황상제에게 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억울하고 가련한 상을 지으며 백두산의 나쁜 놈들이 요언을 날조하고 시비를 뒤섞고 있다고 모함을 하였다. 그러나 흑룡의 행동거지를 잘 알고 있는 용왕은 넘어가지 않고 지상총감을 내려 보내 이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지상총감은 사리 밝고 침착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흑룡을 강아지 다루듯 하였다. 흑룡은 천궁에서 지체하다가는 일이 잘못될까봐 마음이 초조해졌다. 진상이 밝혀지는 날이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는 한시 급히 천궁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룡은 자신이 회궁한 후 백두산에 남은 악당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며, 이 길로 백두산에 내려가 불쌍한 어족과 산수, 그리고 인간들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천궁을 나와 줄행랑을 놓았다.
백두산으로 부랴부랴 내려온 흑룡은 자기의 죄악을 고자질한 자들을 단숨에 처치하지 못 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지상총감이 내려오는 날이면 모든 죄악이 백일하에 드러나겠으니 아무래도 죽을 바엔 백두산을 휘딱 뒤집어엎어서 피바다로 만들고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 치우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흑룡은 천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나운 물길이 뒤번지며 천지는 태풍을 만난 바다처럼 설레었다
흑룡은 물고기를 만나는 족족 물어 죽이기도 하고 꼬리로 쳐 죽이기도 하고 몸으로 깔아 죽이기도 하였다. 물고기들은 죽는 것들은 죽고 쫒기는 것들은 천지를 따라서 내려와 폭포로 떨어졌는데 태반이 생명을 부지하지 못하였다. 대 도살을 당한 고기들이 흘린 피는 폭포수를 뻘겋게 물들였다.
천지에다 전례 없던 재앙을 들씌운 흑룡은 흉흉한 기세로 마을에 덮쳐들었다. 흑룡은 마구 날치며 시뻘건 불을 토하여 가옥을 불살랐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마을에서는 아우성소리, 비명소리가 귀 아프게 울렸다. 이번 길에서는 온 집들의 식솔이 당장에서 몰살당하였다. 그런 중에서 흑룡은 제일 예쁜 처녀 셋을 골라내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두었다가 희롱하기 위하여 흑룡은 그 세 처녀를 용문봉의 18동굴에다 가두어 놓았다.
흑룡은 불로 태우고 물로 씻어 버리고 바람으로 날려 보내어서 웬만해서는 그 자취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흑룡이 수림 속으로 들어가니 짐승들은 진작 소식을 듣고 뿔뿔이 도망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흑룡은 하루 사이에 이 모든 일을 해놓고 하하하 하고 하늘이 떠나갈 듯한 너털웃음을 쳤다.
백두산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당한지 이틀 만에 지상총감이 내려왔다. 흑룡은 얼굴에 거짓웃음을 지으며 지상총감을 치켜 올려주며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마련하였다. 흑룡은 비상을 풀어 넣은 불로주를 지상총감에게 부어주었다. 그러나 지상총감은 흑룡의 아부에 의심을 품었다. 지상총감은 들었던 잔을 놓고, 어족, 인간, 산수의 대표들을 불러오라고 하였다.
흑룡은 울상이 되어 거짓을 고하자 지상총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천지로부터 백하수로 내려왔다. 물기슭을 따라 내려가던 그는 바위 곁에서 거의 죽어가는 정장어, 이면수, 가재들을 발견하였다. 지상총감이 흑룡의 소행이 어떠냐고 물으니 그들은 재앙을 입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하였다. 지상총감은 그들을 안심시켜 주고 천문봉 기슭으로 발길을 돌렸다. 갑자기 사람 냄새가 풍겨와 따라가니 커다란 굴이 나왔는데 굴 어구에는 집채 같은 바위들이 쌓여 있었다. 굴 안에 산 사람이 갇혀 있음이 분명하였다. 지상총감은 천지 가로 나와서 흑룡을 불러 죄를 이실직고하라고 호통을 쳤다.
흑룡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거짓을 고하자 지상총감은 추상같이 호령하여 발로 땅을 '탕' 굴렀다. 그 소리에 18층 동굴 문 어구에 쌓였던 집채 같은 바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동굴 속에서 세 처녀가 화들화들 떨면서 나왔다. 지상총감은 그들을 불러다가 어찌하여 18층 동굴에 갇혔는가 하고 물었다. 지상총감의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떠는 흑룡을 본 처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흑룡을 공소하였다. 그때서야 흑룡은 지상총감의 다리를 붙잡고 애걸복걸하였다. 지상총감은 흑룡을 붙잡아다가 화개봉 중턱에 우둑 솟은 돌기둥에다 꽁꽁 묶어놓고 햇볕에 말리우고 추운 밤에 얼리면서 석 달 열흘을 두고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세 처녀한테는 한쪽 끝이 뾰족한 잣대를 내주었는데, 잣대를 지니고 떠난 세 처녀는 일가친족을 찾고 행복하게 살아갔다.
백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화개봉의 돌기둥에는 흑룡이 말라붙은 얼럭덜럭한 용 껍질이 감겨 있었다 한다. 이 돌기둥을 옛날에는 용을 동여맨 돌기둥이라 일컬었고 지금은 하늘을 떠받든 기둥과 같다면서 천지일주(天地一柱)라 부리고 있다.
4. 용왕과 관련된 무속
4. 1 용왕굿
용왕굿은 물을 관장하는 용왕신을 모시는 굿거리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굿에서 행하는 제차의 하나로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액을 막고 복을 구하기 위하여 행한다. 동해안 별신굿이나 서낭굿, 위도 띠뱃놀이, 제주도 영등굿 같은 굿의 후반부에 용왕굿을 한다.
용왕굿은 굿당에서 하지 않고 바닷가나 선창에 나와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용왕의 신격은 동해용왕·서해용왕·북해용왕·남해용왕 등 사해용왕을 한꺼번에 모시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는 소당애기씨 같은 여신으로 믿기도 한다. 굿을 하는 방법은 지역마다 다르다. 제주도에서 용왕(龍王)맞이를 할 때는 긴 천을 깔아 바다에서부터 굿청으로 신이 올라오시는 길을 만들어 놓고 그 길을 깨끗이 치우는 것에 주력한다.
신들린 무당이 용왕굿을 할 때는 대개 동이에 물을 담고 과일을 넣은 다음 신을 벗고 그 가장자리에 올라간다. 이를 ‘동이탄다’고 하는데 물동이는 용궁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동이를 탄 무당은 공수를 내리게 된다. 동해안 별신굿의 용왕굿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별신굿에서 용왕굿은 직접적으로 생업과 관련이 되는 신을 모시는 탓에 아주 중요한 거리이다. 먼저 용왕굿을 하기에 앞서 선주들을 비롯한 해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각자 상을 차려와 바닷가에 늘어놓는다. 상은 쌀과 메, 어물과 채소, 삼실과, 술 등으로 차린다. 무당은 먼저 사해용왕을 청한다. 그리고는 배와 선주들 이름을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축원해준다.
이어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고 사고 없게 해달라는 축원을 한다. 어촌계장과 선주들 머리를 창호지로 묶어 상투처럼 만든다. 이는 만선이 되었을 때 배에 높이 꽂고 돌아오는 선왕기(船王旗)를 상징하는 것으로 만선을 축원하는 행위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올라가 일년 동안 해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예언하고 조심시키는 일종의 공수를 주기도 한다.
이어서 사람들은 굿청 안에 있는 용선에 돈을 넣고 한번씩 흔든다. 용선에 광목필을 연결해서 주민들 모두가 붙잡고 흔들면서 뱃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 다음에 무녀는 바닷가에 개인들이 차려놓은 상으로 간다. 쌀을 집어 산을 맞추어보고 집안의 길흉을 말해준다. 삼재가 들거나 특별히 운이 나쁜 집에서는 이때 대주나 가족의 속옷을 가지고 나와 태우기도 한다.
무당의 축원이 끝나면 가족들은 밥을 한지에 싸서 여러 개의 뭉텅이로 만들어 바다에 던진다. 이는 수중고혼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 위도 띠뱃놀이의 경우를 보면 행사는 크게 원당굿과 용왕굿으로 나뉜다. 그런데 당에 올라가 행하는 원당굿이 신성한 종교성을 띠는데 비해 선창에서 행하는 용왕굿은 놀이성이 강하다.
무당은 선창에 따로 차려놓은 용왕상 앞에서 수중고혼들을 풀어먹인 뒤 주민들과 함께 선창을 오가면서 물밥을 던진다. 그리고는 〈배치기〉 등을 부르면서 모두 흥겹게 논다. 이는 용왕굿이 수신을 모시는 굿인 동시에 잡귀를 풀어먹이는 이중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4. 2 용왕맞이
용왕맞이는 제주도 무당굿에서 용왕신을 모시는 굿을 말한다. 바다를 차지한 용왕을 맞아들여 축원하는 굿으로 제주도에서는 ‘요왕맞이’라고 한다. 큰굿의 한 제차로 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익사한 영혼을 건져내어 저승으로 고이 보내거나 풍어를 빌기 위하여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 그 중심 제차는 용왕이 오는 길을 치워 맞아들이고 소원을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용왕은 무가(巫歌)에서는 동해 청룡왕, 서해 백룡왕, 남해 적룡왕, 북해 흑룡왕, 중앙 황룡왕 등 방위에 따라 다른 용왕이 있다. 그 아래 여러 관원과 용왕차사(龍王差使)가 있는 것으로 창되나, 요왕맞이를 할 때의 제상차림이나 제차에는 이러한 여러 용왕의 구분이 하나로 다루어진다.
요왕맞이 제당은 시왕맞이 때와 같이 차려 메(밥)·시루떡·도래떡·계란·채소·과일·쌀·술 등 여러 가지를 올리는데, 바닷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북·징·설쇠·장구 등 모든 악기가 소요됨은 다른 굿과 같다.
제상차림이 완료되면 정장한 수심방(큰 무당)이 초감제부터 시작한다. 천지개벽으로부터 시작하여 지리적·역사적 사실의 형성을 설명하는 베포도업침, 굿하는 날짜와 장소를 설명하는 날과 국섬김을 하고, 굿하는 사유를 설명하는 집안연유닦음을 한 뒤 군문열림으로 들어간다. 수심방이 서서 한 단락 한 단락을 노래하면 소미(小巫)가 전 악기를 쳐 울리고, 수심방이 여기에 맞추어 춤을 추며 집행하여 가는 것이다.
군문열림은 용왕이 오도록 요왕문(龍王門)을 여는 대목으로 요령과 감상기를 들고 노래와 요란한 춤으로써 시행하고, 문이 열리면 신칼과 산판으로 점을 쳐서 용왕이 흔쾌히 문을 열고 오는가 여부를 제주(祭主)에게 전달하는 분부사룀을 한다. 이로써 초감제를 끝마치고 다음은 요왕질침으로 들어간다.
요왕질침이란 용왕이 오는 길을 치워 맞아들이는 제차이다. 요왕질침을 하려면 먼저 푸른 잎이 붙은 대나무가지 여섯 개씩을 2열로 나란히 지면에 꽂는다. 이를 요왕문이라 하는데, 2열의 대나무가지 사이의 공간은 요왕국(龍王國)으로 가는 길을 상징한다. 요왕문의 설비가 끝나면 용왕이 오는 길을 치워 닦는데, 익사자의 영혼을 위한 굿이면 영혼이 오는 길도 함께 치워 닦는다.
용왕질침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요왕님이 오려는데 요왕문을 돌아보자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요왕문을 돌아보는 춤을 춘다. 요왕문을 돌아보니 각종 해조류가 무성하여 요왕님이 못 오겠으니 베어 버리자고 노래하여 신칼로 베는 시늉을 하며 춤을 춘다. 베어 놓고 보니 태산같이 쌓인 해조류를 작대기로 치워야겠다고 노래하고, 작대기를 들어 치우는 시늉을 하며, 춤을 추며 돈다. 치우고 보니 바위가 거칠어 못 쓰겠다고 하여 바위를 깨는 시늉을 하며, 춤을 추며 돈다.
이번에는 굵은 돌과 잔돌을 모두 치우자고 노래하고, 요왕문 사이로 돌멩이를 몇 개 굴린다. 돌을 치우고 보니 지면이 울퉁불퉁하여 못 쓰겠다 하여 평평하게 밀어 고르자고 노래하고, 신칼을 들어 고르는 시늉을 하며 춤을 춘다.
다음은 요왕다리를 놓자고 하여 긴 무명을 요왕문 사이에 깔아놓고, 요왕차사의 다리를 놓자고 하여 그 옆에 다시 긴 무명을 깔아놓는다. 다음은 올구멍 실구멍이 솜솜하여 못 쓰겠다 하여 쌀을 무명 위에 조금 뿌리고, 홍마음(말방울)다리도 놓으러 가자고 하여 요령을 말방울 울리듯 흔들어 소리 내며 돌아다닌다. 용왕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길을 닦아 신을 모셔 들이는 신청궤를 한 다음, 신이 즐거이 왕림하였는가 여부를 신칼과 산판으로 점치고 그 결과를 제주에게 전달하는 분부사룀을 한다.
다음은 요왕문열림이다. 용왕에게 소원을 빌고 “초군문도 열어 가십시오.”, “이 군문도 열어 가십시오.” 하면서 지면에 꽂아놓은 대나무가지, 곧 요왕문을 하나하나 차례로 뽑아 정리하는 것이다. 정리한 대나무가지는 요왕길인 무명으로 말아서 불태워 버린다.
풍어를 비는 요왕맞이는 이로써 중심 제차가 끝나는데, 익사자의 무혼(撫魂 : 혼을 달램.)을 위한 요왕맞이 때에는 계속하여 익사한 혼을 건져오는 ‘초매장’으로 들어간다. 초매장을 할 때에는 먼저 짚으로 허수아비처럼 만들어 고인이 입던 옷을 입혀서 가시체(假屍體)를 만들어둔다. 이 가시체를 ‘메치메장’이라 한다.
심방이 이 가시체를 업고 유족들과 같이 바닷가로 내려간다. 심방은 가시체를 업은 채 바닷물에 종아리를 적시며 들어가서 고인이 입던 저고리를 흔들며 “언제 어떻게 하여 수중고혼이 된 아무개 보.” 하고 세 번 혼을 부른 다음 뭍으로 올라와 적당한 장소에 메치메장을 눕혀서 시체를 염습하는 시늉을 하여, 수의를 입히고 동심결(同心結 : 두 고를 내고 맞죄어서 매는 매듭)을 놓고 하여 정말 시체 다루듯 한다.
그리고 메치메장 옆에 물그릇을 놓아 “삼혼신은 물가로 올라왔으나 육신은 요왕국에 잠자는지, 어느 바위틈에 갔는지, 어느 모래밭에 올렸는지 모릅니다. 요왕황제국에서 천문〔巫占具〕으로 판단하여 주십시오.” 하는 내용을 창하고, 천문을 물그릇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뜨린다.
천문이 물그릇 바깥으로 떨어지면 시체가 육지에 떠오른 것이라 하고, 물그릇 속에 떨어져 자빠지면 요왕국 좋은 곳에 간 것이라 하고, 만일 천문이 엎어지면 허허 바다 깊고 험한 곳에 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체의 행방을 점친 뒤, 상여노래를 부르며 메치메장을 운구하여 제장으로 돌아와 메치메장을 시체 다루듯 안치한다.
그런 다음 원미죽을 올리고, 시왕맞이 때의 영혼을 위로하고 시왕에게 빌듯이 ‘방광침’을 한다. 한편, 안치한 메치메장에는 이불을 덮고 그 위에 접시를 놓아 쌀가루를 뿌려둔다. 이를 ‘영가루 친다’고 하는데, 나중에 그 가루가 가라앉은 모습을 보고 시체의 행방과 무엇으로 환생하였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로써 요왕맞이의 중심 제차는 끝난다. 그 뒤는 시왕맞이 때 질침(차사영맞이)을 하듯, 저승으로 가는 길을 치워 닦아 영혼을 위무하여 저승으로 보내는 행사를 하고 부수적인 제차를 하여 끝마친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국립민속박물관, 『위도의 민속』, 1984.
김대숙, 「문학적 제재로서의 용의 변용」,『국어국문학』100호, 국어국문학회, 1988.
박경신, 『울산지방무가자료집』 제 4권,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3.
윤열수, 『龍 불멸의 신화』, 대원사, 1999.
정병헌, 「백제 용신설화의 성격과 전개양상」,『구비문학』1집, 한국구비문학회, 1994.

▒ 참고 도판
김태곤 (편), 韓國巫神圖, 열화당, 1993, 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