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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

우태

1. 백제의 시조

백제의 시조에 대한 학설로는 비류설, 온조설과 함께 우태설이 있다. 우태설이란 말 그대로 우태(優台, 于台)가 백제의 시조라고 보는 학설이다. 백제의 건국 시조를 우태, 혹은 구태(仇台)로 기록한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① 백제는 그 선대가 마한에 속하였던 나라인데, 부여의 계통이다. 구태가 처음으로 나라를 대방(帶方)에 세웠다. 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지배집단은 왕을) ‘아라하(於羅瑕)’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주서(周書)』

② 백제의 선대는 고려국에서 나왔다.…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는데,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점점 번창하고 강성해져서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여 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수서(隋書)』

③ 백제국은 마한의 족속으로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는데,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자,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백제라 불렀다.-『북사(北史)』

④ 그 시조 구태묘를 국성(國城)에 세워 사계절마다 제사를 지낸다.-『수서』, 『북사』

구태를 시조로 기록한 최초의 사서는 ①과 ②이며, 이어서 ③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①에서는 구태의 건국에 대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으나, ②나 ③에서는 구태에 관한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즉, ①에는 구태가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만 되어 있는데, ②와 ③에서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두터워서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시조가 구태이며 건국지가 대방이라는 내용은 같으나 ①에 보이지 않는 동명의 후예라는 것과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는 내용이 덧붙여졌다.
또한 백제는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시조는 구태이고, 왕족의 성씨가 부여라는 것과 왕족과 백성들의 언어에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③에서 구태에 대한 제사를 지녔다는 것은 실제로 사비시대에도 시조로써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동명 사당에 대한 기록이나, 시조로서 온조와 비류는 전하고 있지만 중국 측 사서에는 이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구태에 대한 제사가 동명제(東明祭)와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구태의 사당을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4번의 제사를 정례적으로 시행한 것은, 구태제가 시조에 대한 국조제(國祖祭)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런 제사 기록은 위의 중국 측 사서에는 등장하고 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백제본기에는 구태묘의 건립이나 구태제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제사조에 구태묘와 구태제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구태묘와 구태제가 기술된 사서들은 모두 7세기 전반에 편찬되었고 이전 시대의 사서나 지지(地誌)류에서 볼 수 없는 백제의 사회상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전해주고 있다. 즉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매년 4번의 제사를 올린다고 전하고 있으며, 국성에 시조인 구태의 사당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사비시대에 백제 왕실의 시조로서 구태묘를 도성 내에 세우고 1년에 4번에 걸쳐서 묘사(廟祀)를 올린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온조의 제사 기록은 없는 반면 구태에 대한 제사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구태묘는 백제 왕실의 종묘적 성격의 사당으로 볼 수 있어서 구태를 시조로 삼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래서 구태의 실체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이병도는 구태가 8대 왕인 고이왕(古爾王)을 지칭하며 실질적인 건국의 시조인데 중국에는 구태로 알려졌다고 하였다. 그는 구태와 고이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천관우는 구태와 고이의 음은 서로 같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또한 김성호도 이병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구태는 곧 비류를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구태가 곧 비류백제의 시조로서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웠다가 다시 남하하여 미추홀에 건국하였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그는 비류와 온조의 혈통 계보도 각각 우태(구태)와 주몽의 아들로 소서노에게서 태어난 이부동복형제(二父同腹兄弟)이기 때문에 우태계의 비류와 주몽계의 온조가 동일 혈통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구태와 비류 두 인물이 함께 시조로 되어 있고 대방에 살았으며, 그들의 살았던 시대가 공손도의 사망 이전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졸본부여와 동부여에서 모두 구태의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비류의 생부인 우태(구태)는 고구려계가 아니라 졸본부여와 동부여로 연결되는 부여계 인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비류는 부여계의 인물이 되고 온조는 고구려계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남하한 경로가 다른 것과 미추홀과 위례에 정착한 것은 이들이 서로 다른 집단이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강길운은 비교언어학의 입장에서 고대사를 연구한 그의 글에서 앞의 ③, ④의 내용과, 비류는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이며 우태의 생자라 한 기록을 보더라도 김성호의 생각대로 구태와 비류를 동일 인물로 보았다.
그는 구태와 비류가 언어학적으로 동일 인물임을 입증할 정확한 방법은 없으나 비교언어학을 이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구태가 비류부 족장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구태와 비류가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차라리 비류부 족장 중에 구태가 있었다고 보아야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구태(우태)의 아들이 비류로 기록되었고, 비류는 미추홀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므로 같은 인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부자 관계 내지 계보 상으로 선후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여계 집단인 구태가 부여에서 갈려 나와 이동하는 가운데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처음 세웠으며, 그의 뒤를 이어 비류가 미추홀로 다시 옮겨 소국을 세웠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보다는 구태를 건국 시조로 섬겨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고, 비류는 그 후예이므로 굳이 시조로 표방하기보다는 중시조 정도로 인식하지 않았나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나라의 종묘로서 구태의 사당이 세워지고 그에 대한 제사가 끊임없이 행하여 졌다는 것을 보면 백제의 지배층에서 구태를 건국의 시조로 모시고 있었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얻는다고 여겨진다.

2. 구태백제 역사

2.1. 대방고지로 이동하여 온조백제와 마한연맹 정복

위구태는 A.』 204년 10월에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고(高)자나 구(仇)자가 들어가는 왕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부터 온조백제의 왕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왜(倭:구태백제가 서․남해, 대마도,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를 군사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가 백잔(百殘:온조백제)을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구태백제에 정복된 익산 금마 마한은 여러 개의 소국(小國)이 모여 연맹을 이룬 소국연맹(小國聯盟) 형태였으나, 온조백제는 건국 후 주변 소국(小國)들을 정복하는 즉시 해체(解體)하고 직할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규모는 커도 1개의 나라였다. 따라서 구태백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후 정복지를 통치한 방법은 각 달랐다. 온조백제는 왕이 전 지역을 직할통치 한 중앙집권체제 국가였기 때문에 담로를 보내지 않고 온조백제왕만 구태백제왕이 책봉하였다. 그러나 익산 금마 마한은 수십 개의 소국이 모여 연맹을 이룬 소국연맹 형태였기 때문에 구태백제의 왕자, 종친들이 각 수개의 소국을 맡아서 통치하였다. 이때 각 소국(小國)의 왕(王)은 구태백제왕이 보낸 담로들에게 복속하였고, 각 소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사람은 구태백제왕이 보낸 담로들이었다.

부여 무리의 대방 이동

2.2. 야마대연맹 복속시킴

익산 금마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A.D. 97-103년경에 일본열도에 세워진 소국연맹)을 복속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 조에는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고,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왜왕(倭王)이 백제의 후왕(侯王)으로 적혀 있으며,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왜(倭)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혀 있고,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46년 조에는 백제(百濟)와 왜(倭)가 초고왕 때부터 교류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동 49년 조에는 일본열도 왜와 백제 군사가 가야지역에서 같이 군사 활동을 벌여 점령한 점령지를 백제에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백제와 일본열도 왜가 교류를 시작한 해가 신공황후 46년(A. D. 246년)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초고왕 재위 시기는 A. D. 166년부터 214년까지이고, 구태백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해는 A. D. 205년 7월이며,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한 해는 A. D. 208년경(내해이사금 13년)이므로, 야마대연맹이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기 시작한 때는 A. D. 205년 7월에서 208년 사이 어느 해이다. A. D. 205년 7월-208년경은 야마대연맹의 신공황후 재위 때이므로 신공황후가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긴 것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을 복속시키기 이전에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통로에 있는 남해(南海)와 대마도에 있는 소국(小國)들을 먼저 복속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2.3.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 받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49년 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 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49년은 A .D. 249년이 되나, 실제로는 A. D. 208년경이다.
A. 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기 49년(A. D. 249년)조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왜(倭)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의 백제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초고왕과 구수왕은 온조백제(溫祚百濟) 지역을 다스린 구태백제(仇台百濟)의 후왕(侯王)이다.
위 신공황후기에는 백제, 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 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 조에는 신라가 가라국(아라가야 지칭)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과 『삼국유사』 물계자편에도 적혀 있다. 『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백제, 야마대연맹 연합군은 7국을 평정하였다가 신라군의 개입으로 아라가야를 도로 빼앗겼다. 이때 신라가 아라가야를 구원한 것은 아라가야가 A. D. 201년에 신라와 강화한 후 그때부터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 백제, 야마대연맹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된 가야국들은 구태백제가 책봉한 왕으로 왕통(王統)이 바뀌었고, 이때부터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들이 가야 지방으로 대량 이주함으로써 가야 지방의 중심지가 종전까지 김해, 고성, 함안 등 해안과 가까운 곳에서 고령, 거창 등 내륙 지방으로 바뀌었으며, 부여 무리들의 특성상 이때부터 가야 지방에도 기마전술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2.4. 장춘 방면의 부여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고이왕기(古爾王紀) 5년 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 D. 23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古爾王) 5년(A. D. 238년) 봄 2월 부산(釜山:註 부여 지역)으로 사냥 가서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를 뜻하는 고대 말 불달(해님<천제>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 말 "달"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達" 또는 "山"으로 적었는데, 이 경우는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자주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진(辰)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만주중앙에 위치한 부여 지역으로 출병하여 50일 만에 평정을 마치고 돌아와 4월에 부여 지역을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A.D. 238년에 위구태가 부여 지역으로 출병한 것은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 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 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부여 지역으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장춘 방면의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분국왕으로 간위거(簡位居)를 즉위시켰다.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간위거는 이때 즉위하였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떼어 내어 분국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의 공손씨와 구태백제(장춘 방면의 부여 포함)가 동맹세력이었는데, 요동의 공손씨가 위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장춘 방면의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A.D. 246년에 간위거왕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離間戰術)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2.5. 유성에서부터 북평까지 요서지방에 진출

A. D. 313-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한 후 유성(柳城: 조양)에서부터 난하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나라태수(樂浪太守: 대릉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 대릉하 방면)를 두었다.
그 뒤 A. D. 316년에 구태백제는 서진(西晋)이 망하는 틈을 타서 서쪽으로 난하에서부터 북평(北平: 하북성 定州 방면)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광양태수(廣陽太守: 북경 동쪽 계 방면), 조선태수(朝鮮太守: 난하 서쪽 방면)를 두었다.
진평은 양자강하류 남쪽 지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진평군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나라가 A. D.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한 군현의 이름이다. A. D. 463년에 송․백제 연합군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북평에서 난하 사이 요서지방에 백제가 A. D. 465년에 군현을 설치하자 이에 백제와 사이가 나빠진 송이 A. D. 468년에 복주(福主) 방면에 진평군(晋平郡)을 설치하였다가 A. D. 471년에 고구려에 점령당하여 폐지하였다. 이곳에는 A. D. 316년경부터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이 있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백제가 영유하는 강남(江南:양자강 남쪽)을 진평(晋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 D. 502년)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라 했다. 12년(A. 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한단고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의 중심지는 복건성 복주(福州) 바로 아래인 천주(泉州)였다.

2.6.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

A. D. 316년에 구태백제는 양자강하류에서부터 월남(越南) 사이 즉 지금의 강소성(江蘇城), 절강성(浙江城), 복건성(福建城), 광동성(廣東城), 광서자치구(廣西自治區)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비류왕기(比流王紀) 13년 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比流王) 13년(A. 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분국(百濟分國)의 대장군이 서쪽으로 난하를 건너 북평까지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의 수군이 강해졌다는 뜻이며, 검은 용(龍)이 왕도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새로운 분국(分國)을 개척한 백제분국의 수군 대장군이 왕도로 와서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분국왕으로 임명된 사람은 대방태수(帶方太守: 대릉하 방면), 조선태수(朝鮮太守: 난하 서쪽 방면), 광릉태수(廣陵太守: 양자강하류 방면)를 겸한 양무(楊茂)로 추정된다.
『북사(北史)』나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 등에는 백제가 진(晋), 송(宋), 제(濟), 양(梁) 나라 때 양자강 좌우에 진출해 있었다고 적혀 있고,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백제가 제(齊: 산동성 방면), 노(魯: 齊 서남 방면), 오(吳: 양자강하류 방면), 월(越: 吳 남쪽에서부터 월남 사이 중국동해안지방) 등지를 평정하여 관서를 두었다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는 백제가 중국동해안지방과 유주(하북성 방면)로 진출했다고 적혀 있다.

2.7. 중원(中原)에 진출

구태백제(仇台百濟)는 A. D. 316년에 양자강하류와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자치구 방면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으로 진출한데 이어 후위(後魏:A.D. 386~) 때 중원(中原)에 진출하였다. 중원은 하남성(河南城) 낙양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이다.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에 발령한 태수들의 명칭에 청하태수(靑河太守:산동반도 북부)와 성양태수(城陽太守:산동반도 방면)가 들어 있다. 이를 보면 백제는 후위 때 지금의 강소성(江蘇城) 북부, 산동성(山東城), 하남성(河南城) 방면에 진출하였다.

1) 온조백제 건국(B. C. 18년)
2) 구태백제 건국(A. D. 204년)
3) 일부 가야국과 야마대연맹 복속시킴(A.D. 205-208년 사이)
4) 가야 7국 평정(A. D. 208년경)
5) 장춘 방면에 분국 둠(A. D. 238년)
6) 요서지방 진출(A. D. 313-316년)
7) 중국동해안지방 진출(A. D. 316년)
8) 남평양(지금의 평양) 점령(A. D. 371년)
9) 중원진출(A. D. 386년경)

2.8.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가 궤멸되어 구태백제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피신함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仇台百濟)가 A. D. 313-314년에 고구려의 적국인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은 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였다.
A. D.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步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溫祚百濟)의 민가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A. D. 371년에 구태백제(仇台百濟)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백제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후 A. D. 392년 7월에 광개토대왕은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같은 해 10월에 온조백제를 항복받았다.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광개토대왕은 구태백제를 궤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 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궤멸시킨 후 이어서 보기병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이때 궤멸된 구태백제의 지배층은 일본열도로 피신하였다.
온조백제는 A. 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음해 A. D. 397년에 아신왕이 아들 전지(支)를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2.9. 구태백제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永樂) 9년(A. D. 399년)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 가야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는 A. D. 396년에 고구려에 빼앗긴 남해의 제해권을 A. D.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 가야 지방을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 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 가야 지방을 점령한 왜(倭)를 물리치고 계속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 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 문구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요서분국이 있던 평나(平那)를 평정, 굴복시켰다고 적혀 있고, 『삼국사기』 열전(列傳)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백제의 요서분국과 동해안분국이 있던 유주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백제는 광개토왕에게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모두 빼앗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영락 14년(A. D. 404년)에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는 영락(永樂) 10년(A. D. 400년)부터 임나연정(任那聯政)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A. D. 404년에 왜(倭: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任那聯政)의 일본열도 왜(倭) 통제가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倭: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 년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
광개토왕 즉위 후 구태백제가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선 A. D. 392년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 D. 392년부터 A. D. 404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 전술 때문이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 전술과 고구려의 전략, 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 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주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과 수군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 D. 392년에 고구려 수군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시킨 것, A. D. 396년에 고구려 수군이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지를 궤멸시킨 것, A. 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대마도(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 왜를 복속시킨 것, A. 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2.10. 구태백제왕이 한반도 백제 지역 통치

A. D. 405년 3월에 온조백제 아신왕이 암살당한 후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은 인질로 와 있는 아신왕의 태자 전지(支)를 온조백제로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켰다. 아신왕기(阿莘王紀) 14년 3월조의 "백기가 대궐에서 서쪽으로 필련을 펴 놓은 것 같이 뻗혔다"라는 문구는 왕이 암살당한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아신왕은 이때 암살당하였고, 같은 해 9월조에 "왕이 돌아갔다"라고 적혀 있는 것은 왕위 공백기를 숨기기 위하여 아신왕의 사망시기를 6개월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A. D. 407년에 전지왕(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에 각 임명하였다.
A. 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앉히고 여신(餘信)에게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맡겼다.
A. D. 416년경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으로 있다가 A. 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복속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키고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餘映)이 온조백제 전지왕(支王)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餘映)은 진서(晋書)에는 A. D. 416년에, 송서(宋書)에는 A. D.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支王)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 D. 420년에, 『일본서기』에 의하면 A. 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전지왕(支王)이 아니다.
A. 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은 전지왕(支王)과 구이신왕(久辛王)을 각 제거하여 온조백제의 대(代)를 끊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이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기(久辛王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A. D. 420년에 즉위하여 곧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기(毘有王紀) 29년 조에 의하면 A. D. 455년에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비유왕이 죽었다. 그때까지 제거되지 않은 온조백제계 장군들이 그 해 3월에 수도 한산(漢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비유왕(毘有王)이 진압하지 못하자 그해 9월에 흑룡(黑龍:중국동해안분국 군사 지칭)이 출동하여 한강을 통하여 수도로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때 비유왕(毘有王)이 반란군의 손에 죽었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기(蓋鹵王紀) 21년 조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毘有王)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A. D. 475년에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蓋鹵王)을 죽였다.
A. D. 458년에 개로왕(蓋鹵王)은 백제본국의 군사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이때부터 A. D. 463년 사이에 백제는 북평(北平: 하북성 定州 방면)에서부터 난하까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다시 수복한 후 A. D. 465년에 그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난하 서쪽 방면), 광양태수(廣陽太守: 북경 동쪽 계 방면) 등을 두고 양무(楊茂)를 조선태수에, 고달(高達)을 광양태수에 각 임명하였다.
A. D. 471년에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을 다시 고구려에 빼앗겼다.

2.11.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A. D.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A. 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동성왕(東城王)은 A. 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 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후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후국(侯國)인 일본열도 왜의 군사를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으로 보내어 북위(北魏)와 고구려를 패배시키고 요서분국(遼西分國)을 확장하고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다시 수복하였다.
A. D. 501년에 반란이 일어나 동성왕(東城王)이 죽고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東城王)이 쫓겨나고 동성왕계(東城王系)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이 모두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에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상실하여 국력이 약해졌고, 그 결과 백제는 대화왜(大和倭)의 종주국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나라로 위치가 역전되었다.

2.12. 수도를 사자(泗:부여)로 옮김

성왕(聖王) 16년(538년)에 수도를 사자(泗)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 뒤 무왕 때 백제는 일시적으로 익산을 임시수도 또는 별궁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자왕 20년(A. D. 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오순제, 『한성백제사』, 집문당, 1995
이기동, 「백제 왕실교대론에 대하여」,『백제연구』, 1982
-----, 『백제사연구』, 일조각, 1996
임재해,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 천재교육, 1995
최범호, 「백제건국문제의 재검토」, 전주대학교 석사, 1994
한종섭, 『위례성 백제사』, 집문당, 1994
황패강, 『한국의 신화』, 단대출판부,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