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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검

임검(壬儉)

1. 임검신화

임검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박제상(363~419(?))이 쓴 『부도지(符都誌)』에 적혀 있다.

환웅씨가 임검(壬儉)씨를 낳았으니, 때에 사해의 여러 종족들이 천부의 이치를 익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를 닦아 계불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를 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자랐는데,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여러 종족들을 차례로 방문하니, 백 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부를 비추어서 수신(修信)하고 미혹함을 풀고 근본으로 되돌아 갈 것(解惑復本)을 맹세하며 부도(단군 조선의 수도) 건설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이 멀고 소식은 끊어져서 종족들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 변하여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익혀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후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배우고 익히는 실마리가 되니, 사람들의 일이 번거롭고 바빠 익히지 않으면 (천부의 이치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하는 핵심 지역이요, 4와 8이 상생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열 방향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인삼과 잣과 일곱 가지 색의 옥돌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였다. 보단의 사이는 각각 세 겹의 도랑으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 본성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아랫부분은 나누어 마을을 만들었다. 삼해(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네 나루와 네 포구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나루와 포구 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하였다. 6부에는 여러 종족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빛나고 밝아서 온 천하를 화합하기에 충분하였으며, 모든 종족의 삶을 지탱해주는 맥박이었다.…(중략)…
때에 도요(陶堯: 중국의 요임금)가 천산의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일차로 성을 나간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 간은 방(防)이요 장(長)이다)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를 늘어놓으면 5가 중심이 되는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가운데 수인 5 이외의 8개 수는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내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그 비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 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역(曆)을 만들고 천부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간세상의 두 번째 큰 변이었다.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의 손자 유호씨 부자에게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등 백여 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요)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하고 공손하게 대접하여 황하의 물가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중략)…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와 흑소씨가 살던 곳이었다. 백소씨와 흑소씨의 후예가 오히려 보금자리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높은 탑과 계단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의 본음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유래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기를 일삼았다.
마고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남은 흔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여러 종족들의 지역을 돌며 마고와 천부의 이치를 말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옛일을 맡아보는 자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래 이치를 말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적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 때에 임검씨가 하나라 땅의 형세를 심히 걱정하고 마침내 입산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夫婁)씨가 천부 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로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하늘의 웅대한 법을 행하여 인간 세상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천궁씨의 일족)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나라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가 천부를 아들 읍루(挹婁)씨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가 날 때부터 대비(大悲)의 원(願)이 있어 천부삼인을 이어받고,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리가 거짓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하여 백 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남은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임검씨가 후천 말세의 초에 태어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한, 천 년 사이에 그 공업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져 마고 분거 이래로 환궁, 유인, 환인, 환웅, 임검, 부루, 읍루의 7세에 천부가 전해진 것이 7천 년이었다.

2. 임검론(壬儉論)

우리는 흔히 옛 제왕들을 호칭할 때 임검님 또는 임금님이라 하는지라 임금이라는 말뜻을 풀이하여 본다.
원시 사회에서는 어떤 한 종류의 자연물을 부호로 삼아 그 단체를 표시하거나 혈통을 높여 신성시하며 숭배하였다. 상고시대에 우리 백두산 민족인 맥족의 부족들에게는 천지(天地)를 숭배한 환족, 봉황(鳳凰)을 숭배한 봉씨족, 우양(牛羊)을 부호로 한 강족, 소나무를 부호로 한 송족, 잣나무를 부호로 한 백족 등이 있었고 중국에는 곰을 부호로 한 웅족, 불을 부호로 한 주족 등이 있었다.
환(桓)족은 환인의 부족으로 지금도 천(天)을 칭하매 하느님이라 하니 이는 환인임(桓仁壬)에서 전음된 말이다. 설문에 임(妊)은 여자가 사람을 낳았다는 뜻이니 옛날 신성한 성인은 어머니가 하늘로부터 느낀바 되어 아들을 낳았으므로 천자(天子)라 칭하였고 그 낳게 된 원인에서 성씨를 삼았다고 했다.
봉(鳳)씨족은 풍이(風夷)족으로 설문에 봉은 신조(神鳥)이니 동방군자의 나라에서 나온다. 그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하며 날면 만 가지 뭇 새들이 따른다고 했다. 봉씨족의 태고의 모계사회 때 수령을 황(皇)이라하였으니 이는 봉의 암컷인 황(凰)에서 기인된 말이다. 이들은 같은 부족을 붕(朋)이라 호칭했고 부족장이 죽으면 붕(崩)이라했으니 붕(朋)과 붕(崩)은 봉(鳳)자에서 나온 것이다.
우러러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 땅의 법칙을 보며 가운데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살펴 팔괘를 만들어 결승문자에 대신하도록 한 태호 복희씨가 바로 풍성(風性)인 봉씨족이다.
풍성의 뒤를 이은 신농씨는 강족이며 강성(姜性)의 사직을 멸한 헌원은 웅족인데 지금까지도 이들을 가리켜 삼황(三皇)이라 부르는 것은 황(凰)을 수령의 부호로 삼은 데서 연유된 것이다.
강족은 지명과 직위에만 소의 부호를 사용하고 성은 염소로 하여 강성이라 하였다. 우수촌(牛首村), 우수하(牛首河), 속말(우수의 변칭) 등의 지명과 서불감(舒弗邯)(쇠뿔한신라명), 각간(角干), 가한(可汗)(몽고의 왕칭 칸)등이 전해진다. 강족은 큰 염소를 아름답게 여겼으니 양대(羊大)를 미(美)라는 글자로 아름다운 것을 표현했고, 길한 것을 좋아했고, 착한 것과 의로운 일을 좋아했고, 이들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봉양(奉養)했기에 상(祥), 선(善), 의(義), 양(養)등의 글자가 비롯되었다. 염소의 성품이 무리지어 다니기를 좋아하기에 개(犬)는 독(獨)이라 하는데, 염소는 군(群)이라 하니 군(君)은 군(群)과 같다.
우양(牛羊)족은 본래 추운 장백산 주위에 살았기에 불로써 봄이 빨리 오길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신농씨가 시제(示帝)하였다 하여 그를 염제(炎帝)라고도 칭하니 제(帝)나 군(君)은 강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강족과 곰족이 싸웠던 일을 중국에서는 황염투쟁사라고 전해진다. 뒷날 이들이 대대로 혼인한 기록도 보이는데, 우양족 여인 강원(姜嫄)이 곰족과 혼인하여 주나라 시조 후직을 낳았다. 대개 곰족은 창을 잘 썼으므로 융(戎)이라 한다. 융은 웅(熊)에서 전음된 것이다. 황제 유융(환원)씨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곰족은 금천(金天)씨에게 쫓겨났다. 『사기(史記)』에는 금천씨가 유융씨의 아들로 기록 되었으나 근래 중국 학자들이 봉씨족이었음을 고증하였다.
봉족이 곰족을 서쪽으로 몰아낼 때 이보다 먼저 소수맥에서 하늘을 상징으로 하는 환족이 일어났으니 수령은 환인이며 그 아들은 환웅(桓雄)이니 님이라는 말은 환인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壬)은 크다는 뜻이다. 공광거는 임(壬)은 옛날의 임(妊)자이며 또 옛날의 임(任)자이니 그 때의 말로 만물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다스린다는 뜻이라 하였다.
검(儉)은 환인님의 손자인 환검신인(桓儉神人: 환검이 신으로서 사람이 되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니 나라사람들이 높이어 임검으로 삼고 국호를 단이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단군이시다-태동일람)의 이름자이니 검이라는 말은 감히 방종하고 사치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임검이란 하느님(환인님)의 큰손자이신 단군의 이름이며 만물을 맡아 무위의 조화로써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북애자는 임검성는 곧 옛말로 서울이란 말이며 평양도 비록 확실치는 않으나 도성이라는 뜻임에 틀림없을 것이니 신라의 서라벌, 백제의 위례가 그러하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고려가 평양성을 다스렸다하는 것은 본래 왕검성이라 했다. 『한서』와 통전에 왕험성이라 기록된 것은 검(儉)자를 험(險)자로 잘못 전해진 때문이다.
송(松)족은 수령을 공(公)이라했다. 뇌공숙신씨가 이에 해당된다. 소나무를 남쪽에서는 솔이라 부른다. 백제의 관명에 달솔(계백장군이 사기달솔(斯紀達率)), 덕솔, 대솔, 은솔 등이 있다.
백(栢)족은 수령을 백(佰)이라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옛 고구려의 전신이 잣나무 족으로 흰색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산해경(山海經)』에 백민국(白民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 다섯 부족을 총칭하여 맥(貊)족이라 하며 고구려 때에는 다섯 부족이 모여 임금을 도와 정사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막리지를 뽑았다. 막(莫:맥?)은 맥에서 전음 된 듯하다.
주(主)족은 불로써 그 선대를 제사했기에 수령을 왕(王: 불이 꺼지지 않는 王의 형상) 또는 주(主: 등(燈) 가운데 불의 심지) 혹은 후(后: 하나의 호령하는 입(口)을 따르는 것)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신수(神獸)인 맥으로부터 불을 사용하는 지혜를 터득하여 치우씨 때에는 쇠를 녹이고 단련하는 법을 일으켰으며 고시(高矢)씨 때에는 백성들에게 화식(火食)을 가르쳤기에 지금도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고시씨께 감사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고시래, 고수래가 바로 그것이다. 쇠와 돌과 쑥을 휴대하고 다니게끔 만들어 불사용을 간편하게 발전시킨 이는 임검의 셋째아들인 부소(夫蘇)씨다.
맥을 지금 누구나 신화적 동물로 생각하나 삼천 년 전에 우리 백두산 민족들이 남하하여 은(殷)나라를 세워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었던 하남성 안양현 은허에서 근래에 맥골(骨) 등을 발굴하였다. 은나라의 갑골문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보면 임금을 임(임구우(壬求雨))으로 표현하였다. 학자들이 운(云)자로 풀이하고 있지마는 임(壬)자로 하여도 비문의 뜻이 자연스럽게 풀이된다. 중국민족의 금정(金鼎)문에 왕(王)으로 표현한 것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님(임)이라는 말은 우리조상들로부터 비롯되어 지금까지도 옛 제왕을 임금님이라 칭하고 있으며 주인을 임자라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지극히 높은 분을 호칭할 때 반드시 님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어느 이민족의 신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주라는 말을 먼저 내세우니 그 주라는 말이 불을 숭상했던 곰족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어찌 감히 야소(耶蘇)를 주라고 호칭하겠는가?

3. 변왕검(辨王儉)

왕검이라는 말이 임검이 와전되어 생긴 잘못된 말이라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왕검(王儉)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불민한 후예가 임검(壬儉)을 잘못 기록한 데서 연유한 왕검이란 말을 바로잡는다. 예의와 법도와 문명을 비로소 열어 밝힌 선대(先代) 임검님들의 면모를 그린다.
이들은 환인님의 아들 환웅과 웅녀(雄女)사이에서 태어난 분이 환검(桓儉)이니, 세 분의 명자(名字)를 합하면 인웅검(仁雄儉)이요, 임(壬)은 크다는 뜻이니 인웅(仁雄)의 장자장손(長子長孫)인 환검을 임검(壬儉)이라고 칭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니사금(尼師今)의 끝 자를 합하면 간웅금(干雄今)이니 인웅검과 비슷하고 간(干)은 몽고(蒙古)의 칸(可汗)과 같다. 그러면 어찌하여 왕검(王儉)이라 전해왔는가를 생각해보자.
이를 ‘壬(임)’자와 ‘왕(王)’자가 서로 비슷하매 불민한 후예들이 임검(壬儉)을 왕검(王儉)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며, 임검님이 계셨던 곳은 임검성이라 했었는데 뒷날 왕검성(王儉城)이라 칭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하게는 『한사(漢史)』에 왕험성(王險城)이라 기록되기도 하였는데(武帝元封二年), 이는 ‘儉(검)’자와 ‘險(험)’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또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옛날 제왕(帝王)들을 칭함에 임검님 또는 임금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왕검님이라 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반만년이 되도록 임검님이라는 말이 전하여 오거늘, 한자만을 고집하여 왕검(王儉)이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임검(壬儉)으로 고쳐져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선시(先時)에 신시씨(환웅)께서 주인씨(朱因氏:웅녀의 부친이라고 전함)를 개마국(蓋馬國)에 봉하여 학가(鶴加)를 겸직시키고 예법을 관장케 하여, 남녀가 결혼할 때 중매하는 법을 정하게 했으며, 고시씨(高矢氏)로 우가(牛加)를 삼아 백성들에게 짐승을 기르고 농사짓는 법을 새롭게 가르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경기(京畿)이북 지방에서는 중매하는 사람을 주인(朱因)이라 하며 중매하는 일을 ‘주인(朱因)선다’고 하는데 이는 주인씨에게 일컬어져 온 것이요, 들에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하던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래!’라고 하는 것은 고시씨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하는 말이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대야발, 『단기고사』, 개마서원, 1981
박병록, 「고어(古語) 원천고(源遷考)」『국학』3, 1947
박제상, 『부도지』, 한문화멀티미디어, 2002
임승국 역,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2002
지승, 『부도와 단의 이야기』, 대원출판,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