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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주몽(朱蒙)
1. 주몽신화
주몽(朱蒙)은 기원전 58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19(동명성왕 19)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왕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도 한다.
다음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관한 신화로, 아래의 자료는 주몽신화 가운데도 그 본래의 신화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평가되고 있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소재의 이야기이다. 이규보의 민족서사시 「동명왕편」에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내용을 인용해놓은 것인데, 원문을 그대로 옮겼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다. 해모수와 하백의 도술 대결, 주몽 탈출 시 유화의 역할, 비류와 송양과의 대결 등등 흥미로운 신화소를 폭넓게 갖추고 있는 소중한 자료다.
한(漢) 신작(神雀) 삼년 임술(壬戌)에 천제는 아들 해모수를 부여왕의 옛 도읍터에 내려 보내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에는 오룡거(五龍車)를 탔고 종자 백여인은 모두 백곡(白鵠)을 탔으며 채색 구름은 위에 뜨고 음악은 구름 속에 들리었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서 십 여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는 까마귀 깃으로 된 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이 빛나는 칼(龍光劍)을 찼다. 아침에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성북(城北) 청하(靑河)에 하백(河伯)의 세 딸이 아름다웠는데 장녀는 유화(柳花), 차녀는 훤화(萱花), 계녀는 위화(葦花)라고 하였다. 그녀들이 청하로부터 웅심연(熊心淵) 위로 놀러 나가니 신 같은 자태는 곱고 빛났으며 수식한 패옥이 어지럽게 울려 한고(漢皐)와 다름이 없었다. 왕(해모수)은 이들을 보고 좌우에게 말하되 "얻어서 왕비를 삼으면 아들을 두리로다" 하였다. 그녀는 왕을 보자 즉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어찌 궁전을 지어 여자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문을 닫지 않으십니까?"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동실(銅室)이 문득 생기어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는 세 자리를 마련해 놓고 동이술을 두었다. 그 여자들이 각각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왕은 세 여자가 크게 취하기를 기다려 급히 나가 막으니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장녀인 유화만이 왕에게 붙들린바 되었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인데 나의 딸을 머물게 하였는가?" 하니 왕은 대답하되 "나는 천제의 아들로 이제 하백에게 구혼하고자 한다" 하였다. 하백이 다시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네가 천제의 아들로 나에게 구혼을 하려 한다면 마땅히 중매를 보내야 될 터인데 이제 갑자기 나의 딸을 붙잡아 둔 것은 어찌 실례가 아닌가?" 하였다. 왕은 부끄럽게 여겨 장차 하백을 가서 보려 하고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여자를 놓아 주려고 하였으나 여자는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권하기를 "오룡거(五龍車)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리켜 고하니 문득 오룡거(五龍車)가 공중으로부터 내려왔다. 왕과 여자가 수레를 타니 풍운(風雲)이 갑자기 일어나며 그 궁(하백의 궁전)에 이르렀다.
하백은 예(禮)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정한 뒤에 말하되 "혼인하는 법은 천하에 통용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예를 잃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하였는가? 왕이 천제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이함이 있는가?" 하니 왕이 말하되 "오직 시험해 볼 따름이다."라고 했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이어(鯉魚)가 되어 놀자 왕은 수달로 변화해서 이를 잡았다. 하백이 다시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늑대가 되어 이를 쫓고 하백이 꿩으로 변화하니 왕은 매가되어 이를 쳤다. 하백이 이 사람은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라 여기고 예로써 혼인을 이루고 왕이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겁내서 잔치를 베풀고 술을 왕에게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한 뒤 딸과 함께 작은 혁여(革輿)에 넣어서 용거(龍車)에 실어서 승천하도록 하였다. 그 수레가 물을 채 빠져 나오기 전에 왕은 바로 술이 깨어서 여자의 황금 비녀를 취해서 혁여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홀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그 딸에게 말하되 "너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했다." 하고 좌우에게 명령해서 딸의 입을 잡아 늘려 그 입술의 길이가 삼척이나 되게 하고 다만 노비 두 사람을 주어 우발수(優渤水) 가운데로 귀양 보냈다.
어사(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금와왕에게) 고하기를 "요즈음 양중(梁中)에 고기를 가져가는 자가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왕은 이에 어사를 시켜서 그물로써 이것을 끌어내게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내니 비로소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나왔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입술을 세 번 자른 뒤에야 말을 했다. 왕은 천제자의 비(妃)임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는데 그 여자는 햇빛을 받고 그 때문에 임신을 해서 신작(神雀) 사년 계해(癸亥) 하사월(夏四月)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울음소리가 매우 크고 골표가 영웅답고 기이했다.
처음 주몽을 낳을 때 왼편 겨드랑이로 한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五升)들이쯤 되었다.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말하되 "사람이 새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 알을 마목(馬牧)에 버렸으나 여러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에 버렸으나 백수(百獸)가 모두 보호했다. 구름이 낀 날에도 그 알 위에는 언제나 일광(日光)이 있으므로 왕은 알을 가져다가 그 어미에게 보내고 기르도록 했다.
알은 마침내 열리고 한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말을 하였다. (주몽은) 어머니에게 여러 파리들이 눈을 물어 잠을 잘 수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자 이것으로 방거(紡車) 위에 파리를 쏘아서 화살이 날면 모두 맞았다. 부여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장대해지자 재능도 겸비하였다. 금와왕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하였다. 왕자 및 종자 사십여 인은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은 사슴을 쏘아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왕자는 이를 질투해서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가 버렸는데 주몽은 나무를 뽑아서 돌아왔다. 태자(太子)인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되 "주몽은 신용(神勇)이 있는 사람이고 눈길이 남다르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뒷근심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왕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코자 하였다. 주몽은 속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되 "나는 천제의 손(孫)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을 먹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남쪽 땅으로 가서 국가를 세우고자 하나 어머니가 계시기로 감히 마음대로 못하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되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속 썩이던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좋은 날에 힘입는다고 했으니 내가 말을 골라 주겠다." 하고 드디어 말 기르는 데로 가서긴 말채찍으로 마구 치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서 달리는데 한 누른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그 말이 준마임을 알고 몰래 말 혀끝에 바늘을 찔러 놓았더니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고 야위어 갔다.
왕이 마목을 순행하다가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를 얻어서 바늘을 뽑고 더욱 잘 먹였다.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삼인(三人)과 같이 남쪽으로 행하여 개사수(蓋斯水)에 이르렀으나 건널 배가 없었다. 추격하는 병사들이 문득 닥칠까 두려워서 이에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되 "나는 천제의 손이요 하백의 외손으로서 지금 난을 피해 여기 이르렀으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나를 불쌍히 여겨 급히 주교(舟橋)를 보내소서." 하고 활로써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서 주몽이 건널 수가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추병(追兵)이 이르렀는데 추병이 물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의 다리는 곧 없어지고 이미 다리로 올라섰던 자는 모두 몰사하였다.
주몽이 어머니와 이별에 임하여 차마 떨어지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되 "너는 어미의 염려는 하지 말아라." 하고 이에 오곡의 씨앗을 싸서 주었는데 주몽은 생이별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보리 씨앗을 잃고 말았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서 쉬더니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은 "응당 이것은 신모(神母)가 보리씨를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후 이에 활을 다려 이를 쏘아 한 살에 함께 잡아서 목구멍을 열고 보리씨를 꺼낸 다음 비둘기에게 물을 뿜으니 비둘기는 다시 살아나서 날아갔다. 왕(주몽)은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임금과 신하의 위계를 정했다.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불러서 자리를 주고 말하되 "바닷가에 편벽되게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본 일이 없더니 오늘날 만나 보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니 왕이 말하되 "과인은 천제의 손으로 서국의 왕이거니와 감히 묻겠는데 군왕은 누구를 계승한 왕이냐?" 하자 송양은 "나는 선인(仙人)의 후예로서 여러 대(代) 왕노릇을 했는데 이제 지방이 아주 작아서 두 왕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하니 그대가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나에게 부용(附庸)함이 옳지 않겠느냐?" 하니 왕이 말하되 "과인은 천제를 계승했고 이제 당신은 신(神)의 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고 하니 만약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손(天孫)이라고 일컫자 속으로 의심을 품고 그 재주를 시험코자 하여 말하되 "왕으로 더불어 활쏘기를 하자."고 하였다. 사슴을 그려서 백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서 옥지환(玉指環)을 백보 밖에 걸고 이를 쏘니 기와 깨지듯 부서졌다.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왕이 말하되 "나라의 창업을 새로 해서 아직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하되 내가 능히 왕례로써 영송(迎送)하지 못하니 이것이 나를 가볍게 보는 까닭이다." 하였다. 종신 부분노(扶芬奴)가 나와 말하되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을 취해 오겠다." 하니 왕이 말하되 "타국의 감춘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인데 어째서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곤(困)할 때 누가 대왕이 여기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이제 대왕이 만 번 죽을 위태로움에서 몸을 빼내어 요수 왼쪽[遼左]에서 이름을 드날리니 이것은 천제가 명해서 된 것인데 무슨 일이든지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가져왔다. 비류왕은 사자를 보내 고했으나 왕은 고각을 와서 볼까 겁내서 색을 어둡게 칠해서 오래된 것처럼 하였더니 송양은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은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附庸)시키고자 하므로 왕은 궁실을 짓되 썩은 나무로 기둥을 하니 오래됨이 천년이 된 것 같았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 세운 것의 선후(先後)를 다투지 못했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아 이것을 해원(蟹原)에 거꾸로 매달고 주술을 행해 말하되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의 왕도(王都)를 표몰(漂沒)시키지 않으면 나는 너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난관을 면하려면 네가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하니 그 사슴이 슬피 울어 그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장마 비가 칠일이나 와서 송양의 도읍이 떠내려가 버렸다. 왕이 갈대 새끼줄을 가로질러 늘이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이 모두 그 줄을 잡았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은 나라를 들어 와서 항복하였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사람은 그 산을 볼 수 없고 오직 수천 명의 사람 소리만 들리며 나무 베는 소리만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해 성을 쌓는다."고 하더니 칠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대(宮臺)가 스스로 이루어졌다. 왕은 하늘에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추구월(秋九月)에 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지 않으니 그 때 나이가 사십이었다. 태자(太子)는 왕이 남긴 옥편(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를 지냈다.
유리(類利)는 어려서부터 기절(奇節)이 있었다. 어렸을 때 새를 쏘아 잡는 것으로 업을 삼더니 한 부인이 인 물동이를 보고 쏘아 맞추었다. 그 여자는 노해서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아이가 내 동이를 쏘다니.. 미천한 것."이라고 했다. 유리는 크게 부끄러워 진흙 탄환으로 동이를 쏘아 구멍을 막아 옛것같이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가 어리므로 희롱해서 말하되 너에게는 정해진 아버지가 없다고 하였다. 유리는 울면서, "사람이 정해진 아버지가 없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른 사람을 보리오?" 하고 드디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앞의 말은 희롱이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자이며 부여의 신하됨을 원망하고 남쪽 땅으로 도망가서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너는 가서 뵈옵지 않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니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되 "너의 아버지가 떠날 떄 말을 남긴 것이 있으니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춘 것이 있으니 이것을 얻은 자라야 나의 아들이라' 하였다."고 했다. 유리는 스스로 산골짜기로 다니면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치고 피로해서 돌아왔다. 유리는 집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보니 그 기둥은 돌 위에 소나무였고 나무의 몸은 일곱 모였다. 유리는 스스로 이를 해석하되 일곱 고개 일곱 골은 일곱 모요 돌 위에 소나무는 곧 기둥이라 하고 일어나서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어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매우 기뻐했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하사월(夏四月)에 고구려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바치니 왕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어 이를 맞추자 피를 흘리며 이어져서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말하되 "네가 실로 나의 아들이라면 어떤 신성함이 있는가?" 하니 유리는 소리에 응해서 몸을 들어 공중으로 솟으며 창을 타고 해에 닿아 그 신성의 기이함을 보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세워서 태자를 삼았다.
2. '동명형설화'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의 토착 신앙과 제사
우리는 고대 정치권력의 형성과정을 '동명왕(東明王)'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추구하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고대 및 삼국 시대의 토착 신앙에 대해 '동명형설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의 천신신앙, 조상숭배신앙, 지신신앙,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래의 토착신앙을 신봉하였으며 불교가 공인된 후 토착신앙과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동명형설화'를 근거로 하여 고대사회의 정치권력을 형성하는 이론적 바탕을 고대 사회의 토착신앙과 제사의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1. 동명형설화에 남아있는 단군 전통의 전승과 천신 신앙
부여시조 동명의 설화나 고구려시조주몽의 설화는 중국의 문헌에만 남아있는데 부여시조 동명의 설화는 『삼국지(三國志)』 배주(裵註)에 인용된 『위략(魏略)』과 『후한서(後漢書)』 부여조에 남아있는 동명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북쪽땅 고리국왕(高離國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해서 왕이 죽이려 하니 "하늘에서 달걀 같은 기가 내려와 임신했다"고 말해서 죽이지 않고 가두었다. 나중에 아기를 낳아 왕이 돼지우리에 버리게 했으나 돼지는 입김으로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마굿간에 버렸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은 아기가 하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에게 기르도록 했다. 아기의 이름은 동명인데 왕은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동명은 자라서 활을 잘 쏘니 왕이 두려워해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지니 어별(魚鼈)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동명이 건너고 나니 어별이 흩어져서 쫓아오던 병사들이 건너지 못하게 했다. 동명은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부여왕이 됐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설화를 『위서(緯書)』와 『북사(北史)』에 따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여왕이 하백의 딸을 방에 가두었더니 몸에 햇빛이 비쳐 태기가 있어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알을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렸더니 소, 말이 피했다. 들에 버리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 나중에 알에서 사내아기가 나와 이름을 주몽이라 했는데,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왕은 그에게 말을 기르게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큰 강물에 닥쳐 주몽은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 말하니 어별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건너고 나니 어별이 흩어져 부여병들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고구려왕이라 했다.
이들 중국의 문헌에 채록된 두 계열의 설화, 즉 부여의 동명설화와 고구려의 주몽설화가 구조적으로 똑같다는 것은 한눈에 봐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설화에서 종교․사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공통점들은 1)여자를 가두었더니, 2)알이 태어나, 3)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4)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해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동명 또는 주몽의 어머니를 '유폐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가 "삼칠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기(忌)했다"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것이다. 동명형설화의 밑바닥에는 단군신화의 유산이 상당히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의 전승은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고 '신령스런 새'를 천신의 아들로 섬겼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령스런 새'는 부여 시조설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 시조설화에 남아있다. 앞서 인용한 주몽신화에 의하면 하백의 딸이 낳은 알을 들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고 한다. 주몽이 하늘의 대리자로서 '신령스런 새'의 보호를 받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서 동명형설화에 바탕을 둔 지배자들의 '새'에 대한 관련을 특히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관모에 새 깃을 달았다는 사실이다. 『위서』는 고구려의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중국의 변(弁)과 같은 절풍(折風)을 쓰고 새 깃을 꽂았다고 말하고 있다. 지배층이 새 깃을 꽂는 것은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주서』는 백제 사람들이 조배와 제사 때 "기관양상(基冠兩廂) 가시(加翅)"했으나 싸움에 나갈 때는 그렇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가야나 신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는 것은 왕을 둘러싼 귀족층의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이나 금동관에 대부분 새 깃이나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신령스런 새'는 하늘의 대리자를 표현한 것으로도 보아야 할 것이다. 주몽이 살아 있을 때 기린(麒麟)을 타고 하늘 위로 오가며 천정(天政)에 참여했다고 『제왕운기』는 말하고 있으며, 신라에서도 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것도 흰말이었다고 한다. 말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 타고 가는 신령스런 동물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명형설화에 등장하는 말도 이 지역의 샤머니즘과 관련돼 있음이 분명하다.
주몽설화에는 또한 동물로 변신하는 초인적 능력에 관해서 언급돼 있다. 『동명왕편』에 의하면 하백이 잉어가 되자 주몽은 수달이 되고, 하백이 꿩과 사슴이 되자 주몽은 매와 늑대로 변신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신주(神主)를 갖고, 마음대로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초능력이 있다는 믿음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를 포함한 동명형설화에 남아있는 이런 초능력은 주술적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적 기능은 단순한 신이성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돼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명형설화의 권능 바탕을 둔 고대 지배자들의 사제로서의 권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지배자들이 주술을 벗어난 사제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책임지는 공공의 담당자요, 제도화된 제의의 관리자라는 것으로 분명하다.
단군과 마찬가지로 동명형설화의 권위를 이 땅의 백성에게 베풀던 고대의 지배자들이 '홍익인간'을 그들의 정치이론으로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홍익인간'이란 하늘의 자손이 이 땅에 내려와 베푸는 은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대국가의 하늘에 대한 신앙 즉 천신숭배신앙을 엿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천신숭배신앙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나타난다. 천신 신앙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삼국시대의 천신 신앙은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 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 신에 대한 신앙이라 했던 이유는 동명형설화는 단순한 '하늘의 자손'이 아니라 눈부신 '태양의 자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늘에서 '달걀 같은 기'가 내려와 태기가 있게 됐다거나, 햇빛을 받아 위대한 영웅이 태어났다는 것이 동명형설화의 특징이다.
신라의 박혁거세와 김알지도 해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 빛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나정(羅井)곁에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서 보니 자줏빛 알이 있었는데, 말이 크게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알속에서 아기가 나오니 박혁거세(朴赫居世)였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말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샤먼을 하늘로 태워주는 신령스런 동물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번개 빛과 자란(紫卵)은 해를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이름이 단순히 '밝다'는 뜻인 '박(朴)' 또는 '혁(赫)'으로 돼 있는 것도 주목된다. 결국 그의 이름은 동명과 같은 해의 자손임을 말하고 있다.
신라의 또 하나의 시조설화에서 김씨 왕의 시조로 적혀 있는 알지(閼智)의 탄생도 그가 해의 자손임을 말해주고 있다. 밤에 시림(始林) 숲 속에서 닭 우는소리가 있어 날이 밝아 가보니 나뭇가지에 작은 금빛 궤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궤 속에서 나온 아기가 김알지였다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 금빛 궤는 해를 상징하는 것이요, 닭은 눈부신 태양이 어둠을 쫓는 새벽을 알리는 것이다. 원래 부여족의 지배자들은 '해(解)'로써 성을 삼았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북부여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이며, 그가 하백의 딸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주몽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또 부여왕 '해(解)'부루(夫累)가 동부여로 옮긴 뒤 곤연(鯤淵)이 큰 돌 밑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기를 거둬 길렀으니 금와왕(金蛙王)이라 했고, 금와왕은 북부여 에서 천제의 아들을 칭하던 해모수의 아기를 가진 하백의 딸을 데려다가 주몽을 낳았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얘기가 보이고 있다. 곤연이 큰 돌 밑에 있었다는 금개구리도 눈부신 해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해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의 '물의 신령'의 영험은 고대 왕자들에게 중요한 권위의 원천이었다. 주몽설화는 물고기를 부리고 물을 지배하는 권능은 하백의 딸인 어머니에게 귀속시켜 설명하고 있다. 주몽이 '하백의 외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동명설화에도 이러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곤연'이라는 물가에서 태어났듯이 신라에서도 혁거세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강탄(降誕)했고, 알영이라는 용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 하백의 딸은 섬겼다는 것은 '물의 신령의 자손'을 주장하는 구체적 결과였다. 백제가 동명왕을 시조로 모셨다는 입장에서 볼 때, 온조왕모가 '물의 신령'과 관련되는 신이스런 국모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다. 고구려왕들이 시조를 '하백의 외손'이라고 주장했듯이 백제의 왕들도 스스로 '물의 신령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대의 왕자와, 왕권을 둘러싼 지배층이 일컬었던 샘 또는 물이 뜻하는 사회사적 권능은 무엇이었을까? 말하자면 '물'은 사회의 생존을 좌우하는 농사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땅 위에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적 힘의 원천을 뜻하는 것이다. 부여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와 아마도 가야와 탐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동명형의 권능을 주장했던 고대의 지배자들은 모두 농사를 생존의 기반으로 삼은 사회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그 최초의 전형적인 예는 북부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마가 지거나 가물어서 농사가 안 되면 그 죄를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어야 된다는 의론(議論)이 일어난다는 『삼국지』 부여전의 기록이 그것이다. 물을 지배하는 권능은 농사를 지배하는 권능이었던 것이다. 북부여에서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지배자들은 모두 '물의 신령'의 영험(靈驗)을 대행하는 사제적 성격을 띤 지배자였다.
그러면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천신 신앙의 제사의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의 하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제사지 『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10월에 제천의례를 행하는데 그 제의는 거국적인 대회이며 그 이름은 동맹이라 하였다. 그 제의명인 동맹은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과 관련이 있다. 천(天)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계층성이 매우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여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과시한 것이다. 백제에서도 천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삼국사기』 제사지 에서는 중국의 각종 문헌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제사의례가 행해진 달을 보면 대부분이 정월이나 2월이다. 이것은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동왕 38년이나 모대왕 11년에는 10월에 제사의례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삼한의 10월제와 같은 시기로 농경을 마친 수확 의례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을 보면 삼한의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천신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제사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신궁에서 천지 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시조 묘가 오묘로 변화하고, 신궁이 사직단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신궁의 설치는 중앙통치력 확대과정이 일환으로써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 대에 이르면 더욱 강고해진다.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의미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 체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증왕 대의 신궁제사를 토착신앙 자체 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으로 간주한다면 불교 공인 이전에 왕실의 노력으로 토착신앙 내의 사상적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제천의례는 종교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2.2. 고대 사회의 조상숭배신앙과 지신신앙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조상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 묘'에 대한 기록이다. 고구려의 시조 묘는 시조 동명성왕이 묻힌 시조 묘 주변의 사당을 의미하며 백제의 시조 묘는 동명 묘와 구태묘 두 계통으로 전한다. 신라의 시조 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로써 일년에 사시로 이를 제사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시조 묘에 대한 제사의례는 어떠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하늘(天)의 아들(子) 또는 하늘(天)의 손(孫)이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시조 묘를 세우고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삼국 및 남북국 시대의 지신신앙은 땅과 하늘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행하였다.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2.3.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전래가 늦은 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천경림,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 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동명형 설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인들의 천신, 지신, 조상숭배,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고대사회 지배자들이 동명형설화의 권능을 바탕으로 한 사제로서의 권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해와 물의 자손이라 하여 지배자의 권위를 반영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균형과 생존을 위해 농업생산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지배자들이 주술의 범위를 벗어난 사제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회전체의 복지를 책임지는 공공의 담당자요, 제도화된 제의의 관리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지배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불교로 바뀌었으며 토착신앙은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에 불교와 토착신앙은 갈등을 겪었으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되어 불교를 받아들인 지배자들도 토착신앙의례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토착신앙의 구조 안에서 불교의 수용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형태로 볼 수 있겠다.
3. 소재의 상징성
우리는 이 신화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소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우선 해와 알(卵)과 활의 의미이다. 햇빛이 유화의 몸을 비추어 잉태한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세계가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 알을 새나 짐승이 보호한다는 것은 신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의 제유적 표현이며, 활과 화살은 바로 제왕의 상징이다. 화살은 햇살과 같은 의미로 활을 잘 쏜다는 것은 해를 거느려 제압하는 존재, 곧 왕인 것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화살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상징되어 내려오는 방향에서는 번개나 햇살, 빗줄기처럼 신의 권능을 의미했었다. 또 활은 달의 형태로 풍요, 강함, 생명력 등을, 화살은 형태와 내쏘는 기능에서 남성을 상징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햇빛과 알, 그리고 활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한편 말(馬)이 주몽과 상당히 밀착된 관계에서 등장하고 있음은 유목민족적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4. 고구려의 성립
주몽은 졸본(卒本: 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성립을 실증주의적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찍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옛 고조선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압록강 중류일대에서는 훗날 고구려라는 고대 동아시아 강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압록강 중류지역은 좁은 평야를 중심으로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이 있는데, 서북쪽으로 혼강을 건너 요동지역에 통하고, 동으로는 독로강을 넘어 개마고원과 동해안으로 통해 동서 교통의 중간지가 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서남쪽으로는 황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와 만나고 북쪽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지대나 요하 상류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며 발전해 나갔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초 사이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는 주변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보다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예군남려’, ‘구려’와 같은 정치세력으로 기록상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 잡은 지역집단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 ‘내’와 음이 통하고 ‘천’, ‘양’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川邊)의 평야를 뜻한다. 점차 여러 지역집단들이 생겨나게 되자,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구별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관노(官奴), 절노(絶奴), 순노(順奴) 등과 같은 집단의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고 훗날 이들 중 가장 유력한 5개의 나가 5개의 부를 이루면서 고구려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나집단은 철기 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보급된 철제 농기구는 토지이용과 수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자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가 더욱 진전되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철제농공구를 집중적으로 소유하는 집단이 생겨나면서 소집단간의 통합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지역정치집단이 바로 나집단이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엽, 이들이 거주하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만조선과 한(漢)의 영향력이 뻗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진번, 임둔 등을 복속시켜 세력을 키운 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주변 집단과 중국의 교통을 통제하고 나섰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중 한나라에 의지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예군남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투항하자 한나라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을 설치하려는 한나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해서 이후에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야 압록강 중류 일대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예군남려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가진 국가형태가 아니라, 각 지역집단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연맹체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분포하는 집단들의 연맹체에서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이 설치하려던 창해군이 계획만으로 끝나게 되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은 안으로 자신들의 통합을 강화시키면서 주변을 복속시키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변 요새지마다 ‘구루’나 ‘홀’이라 불리는 성을 쌓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 지역집단을 주변지역 사람들이 ‘구려(句驪)’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서, 기원전 121년에 한이 압록강 중류일대에 설치한 현도군의 여러 현 가운데에 고구려현이 있음을 들 수 있다.
단일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이들 ‘구려’집단은 현도군의 설치로 한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 일대일대의 나집단들은 다시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뭉쳐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한군현과 대항하면서 그 힘을 키워 마침내 이들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이전의 예군남려 집단보다 강력하게 결합한 연맹체가 등장하였는데, 그 연맹체는 정치적 수장이 있고 무장력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들이 결집한 것이었다.
처음 이 연맹체의 중심이 된 것은 소노집단(消奴集團)이었는데, 이들은 농경과 군사 방어에 유리한 환인(桓仁) 일대에 기반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는 내부의 성장을 바탕으로 각 집단들 간에 통합과 복속이 진행되었다. 또한 일찍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부여계 이주민 집단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동해 왔고, 이들이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주몽집단이다. 그리고 혼강(渾江)의 졸본(卒本) 지역에 정착해 그곳의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간 주몽집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새로운 중심에 서게 되니 이들이 바로 계루집단(桂婁集團)이다.
계루집단은 현도군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환인지역으로부터 국내지역으로 천도한 후, 그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 자리 잡은 후, 다른 정치세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래서 소노집단과 계루 집단 외에 독로강 아래와 운봉댐 위의 압록강 유역과 그 지류 일대에 있었던 대표적인 정치체들을 자신의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재하였다. 한편, 당시의 한군현은 이들의 내부 통합을 방해하기 위해 각 지역집단에게 필요한 물자나 작위를 주어 회유하는 정책과 무력을 동원하는 정책을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계루집단은 한군현의 이 같은 분리 통제책에도 강력하게 대응하여, 정치체들이 한군현과 개별적으로 맺어오던 대외교섭권을 일원화시켰다. 이는 비로소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며 강력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정치적 힘, 즉 국가권력이 등장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이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갖게 된 시기는 태조대왕 때 즈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및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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