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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

해모수

1. 해모수신화

해모수(解慕漱)는 만주의 북동부에 있는 북부여의 시조다. 천제가 대요(大遼)의 의주지방(醫州地方)에 있는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리하여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해모수라 불렀다.
천제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열고 시조가 되는 데에, 북부여 신화만이 가진 특성이 있으며, 또한 천제 이름이 해모수라는 것도 진기하다. 해모수는 천제의 서자나 혹은 그 직손이었다고 추정된다. 성(性)을 뜻하는 해는 태양이라는 뜻의 해와 동음이며, 천손을 의미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해모수와 관련이 있다. 그는 동부여 출신이라 한다. 또 해모수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주몽(朱蒙)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본래 천제의 아들이며, 천제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리다가 하백의 맏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유인하여 관계를 맺은 후, 하백을 찾아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증명한 다음 정식으로 유화와 혼인하였다. 이 때 유화가 낳은 아이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다.
이와 달리, 해모수가 천제이며 직접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내려와 북부여를 세우고 부루(扶婁)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다. 이에, 18세기 실학자였던 신경준은 해모수와 동명을 같은 인물로 보고 동명은 그 호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나 위서(魏書)와 같이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전하는 오래된 기록에서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 점을 들어 해모수가 원래 북부여의 시조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원래 북부여의 시조로 전승되어 오던 해모수의 이야기를 5세기 경에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한 뒤 부여인을 무마하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결합시켜 재구성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에 대한 신화는 따로 독립해서 전하지 않고 고구려의 건국신화 부분에서 해부루(解夫婁), 금와(金蛙), 주몽(朱蒙) 등과 관련하여 부분부분의 이야기가 전한다.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는데, 어느 날 물가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는 두 여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해모수의 눈에 띄어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鴨)가로 끌려갔다. 큰 딸이 어떤 낯선 남자에게 끌려갔다는 전갈을 받은 하백이 급히 달려와 해모수와 대결을 벌였는데, 하백이 잉어로 변하면 해모수가 수달이 되어서 잡고 사슴이 되면 승냥이가 되고 꿩이 되면 매로 변하여, 마침내 하백은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나 하백은 딸을 버리고 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술을 권하여 크게 취하게 한 다음, 딸과 함께 가죽수레에 넣어 오룡거(五龍車)에 실어서 하늘로 올라가도록 준비했다. 그러나 그 수레가 미처 물에서 나오기도 전에 해모수는 술이 깨어 유화의 황금비녀로 가죽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홀로 빠져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반면 하백은 가문을 욕되게 했다고 유화의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놓고 우발수가에 버렸다. 그때 어사(漁師) 강력부추가 그물에 걸린 여인을 건져 금와왕에게 바쳤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입술을 3번 잘라내게 한 뒤에야 말을 했다. 왕이 해모수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에 거처하게 했다. 일광이 와서 유화를 비추었는데 도망쳐도 피하지 못하고 관통하여, 해를 품고 주몽을 낳았으니 그가 곧 고구려의 건국시조이다.

해모수 신화 중에서 하백녀와 해모수가 만난 부분을 자세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동은 험난하고 인구 희소하였으나 중․동북 일대와 요동에 걸쳐 동이족이 광범하게 분포하여 살고 있으면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창검을 휘둘러 전장을 휩쓰는 용맹은 중원서 으뜸이며 학문을 익혀 문무를 겸한 전형적 무사의 보고였다. 쉽사리 정복 할 수 있다면 어찌 진시황이나 유방 같은 호전 주의자가 패수를 경계 삼아 물러갔을까. 예로부터 송화강 연안 일대에는 비옥한 농토가 있고 강의 동북에는 산림이 울창하여 좋은 수렵지를 이루었다.
동이족은 수렵을 나가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표적을 맞추는데 능숙하였다. 또 그것은 적의 침입을 대비하는 군사 훈련이기도 하였다. 왕도 틈만 나면 백관을 거느리고 왕검성을 나와서 수렵을 즐겼다. 그 시대는 문무를 가리지 않고 마상에서 수렵하였다. 국가 유사시에는 불고 신명하고 헌신하는 절개는 이때부터 조선족의 미풍이었다. 그리고 송화강 일대에는 좋은 목축 지대가 있어 전마를 대량 사육하였다. 그리고 송화강은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왕검성 주민의 좋은 찬거리였다.
이 무렵 송화강 연안에 풍골이 신선 같고 학덕 높은 장자가 한사람 살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큰 재산가가 되었다. 국가 유사시에는 재정을 보조하고 주민이 굶주리면 재물을 나누어 구휼하고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다. 벼슬은 아니하여도 조정 중신들도 존경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신께서 용왕의 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점지하셨다"하여 하백이라 불렀다.
일찍이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으니 장녀는 유화요, 둘째는 훤화 셋째는 위화였다. 딸들이 외모가 모두 아름다워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특히 장녀 유화는 미색과 재주가 뛰어나서 하백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학문을 익히게 하고 고금 치세 병난의 내력과 천문지리를 익히게 하였던 바 재주가 비상하여 사리를 어렵지 않게 통달하였다.
어느 날 한 과객이 찾아와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다. 하백은 과객을 사랑으로 모시게 한 후 얼굴을 가린 관을 벗은 후 자세히 다시 보니 지난 청년 시절 바로 자기를 가르친 스승이라 깜짝 놀라 사랑에 모신 후 일어나 절을 올리고 안부를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세상을 등진 늙은이가 볼일 없는 세상에 나타나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인적 없는 산중에서 삼신암을 지어 거처하며 짐승들과 벗하며 세월을 보냈노라고 하였다. 하백이 그간 세상이 너무나 변하였고, 이러한 때에 장차 또한 어떠한 변화가 올는지 불안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연나라에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니 장차 조선이 혼란을 겪고 역수 순환의 기년이 이르렀으니 하늘에는 해성이 태음을 범하고 북두칠성이 천강운전에 도를 일어 중원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이고, 대홍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 때는 바야흐로 영웅호걸이 마상에서 패권을 다투는 전란을 겪을 것이라 하였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사재간의 정담은 그칠 줄 몰랐다. 하백은 술상을 드리게 하고 딸들에게 예를 올리게 하고 옛날 아비의 스승 자부선사이신데 도통한 신선이시다 하였다. 선사가 유화를 유심히 살핀 후 그들이 나간 후에 큰 영애가 장차 대인을 생산할 것이라 하였고, 초년 파란이 두려우니 경계하고 삼가라 하였다.
하백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러나 선사는 더할 말은 없으니 신의 조화를 누가 알리오 하면서 다음날 며칠 더 머물 것을 간청하여도 끝내 듣지 아니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선생이 떠난 후 하백은 여러 가지로 사색에 잠겼다. '선생은 원래 그 학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신인이라. 우주의 기틀을 헤아리고 천기를 점치며 세상을 통찰하는 신통력이 있는지라 일부러 가르침을 받고저 하여도 얻지 못하니 어찌하랴!' 곰곰이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였다. 그것은 유화의 미색이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끌고 있음으로 무슨 사고나 생길까 불안하였다. 하백은 유화에게 엄히 경계하여 조심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유화는 도사에게 인사를 올리고 방에서 나오면서 그 도사의 태도에 이상한 감이 들어 문밖에서 잠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장차 대인물을 출산할 것이라 하니 더욱 흥분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집안은 평민이니 왕족이나 명문 거족에게 출가하기도 어려운 처지인데 무슨 구세의 대인물이 난단 말인가 의아하였다.
유화가 어느 날 꿈을 꾸니 강가에서 두 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 비룡이 바다에서 날아와서 물고 있는 여의주를 유화에게 안겨 주며 용왕의 명으로 이 여의주를 그대에게 전한다 하였다. 놀라 깨니 삼경이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이 밝음에 하도 이상하여 치장을 하고 집을 빠져나와 송화 강가에 나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때 한 남자가 가까이 오더니 앉아서 자신은 고리국왕의 왕자 해모수며 틈이 나서 바람 쏘이러 왔다가 아름다운 소녀가 여기 있기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한다고 하며 말을 걸었다.
유화가 보니 기우헌앙하고 준수한 얼굴이 과연 그가 마음속에 그리던 호남자였다. 서로가 이야기가 통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하고 유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왕자는 놓아주지 않으면서 부왕의 허락이 없어도 어찌하든 결혼을 성사시키겠다고 설득하였다. 유화는 그러면 그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사사로이 통정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왕자는 자신이 평민의 몸이 아니니 이제 들어가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고, 유화가 끝내 자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유화를 돌려 보낼 수 없는 없다고 말했다. 또 왕자는 지금 그대를 본 후로 자신의 혼은 유화를 떠나지 못한다고 하며,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유화는 진퇴양난이었다. 그의 부친 하백은 그러한 연애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할 것이며 한편 만일이라도 왕자 신상에 사고가 생기면 자신뿐 아니라 일문이 화가 미칠 것인즉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자를 따라 그가 휴식처로 쓰는 조용한 방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기서 밤을 새우게 되어 유화는 저녁상을 물리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것은 부친의 교훈을 어기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달아나 강물에 몸을 던질까 하였다.
왕자가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냐고 물었다. 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는 감싸 안으며 자신이 날짜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결코 유화를 잊지 않고 찾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위로하였다. 유화는 문득 간밤의 꿈을 생각하였다. 사람이란 영감이 있는데 이것도 운명적인 결과로서 하늘에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마음을 돌리니 행복감마저 느꼈다.
며칠 동안 그 곳에서 지낸 후 서로가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하고 유화는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하백은 유화를 보고 분통이 터졌다. 유화에게 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호통과 심한 매질이 가해졌다. 그리고 가문을 더럽히고 아비를 욕되게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하고 종자에게 끌어다가 우발수에 던지고 오라고 엄명하였다.
종자는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묵묵히 죽음의 길로 끌려오는 지난날의 금옥같이 아끼든 상전 아가씨를 보면서 강가에 이르러 배에 싣고 던질 지점에 다다르니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종자는 배를 저어 물살이 약한 곳에 밀어 던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돌아 왔다.
한편 해모수왕자는 때에 한구의 출몰로 출정하는 부왕을 따라 전선에서 수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유화를 찾으니 그녀의 부친이 강에 던져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남몰래 그곳을 찾아가 통곡하였다.
강물에 던져진 유화는 물살이 약한 곳에 던져져 혼신의 힘으로 헤엄쳐 강안으로 나오다가 지나가는 어부에게 발견되어 구출되었다.

3. 북부여의 시조이자 태양신 해모수

고구려의 시조 이야기인 주몽신화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많았으나 고구려 이전의 북부여와 동부여의 시조 이야기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소홀했다. 해모수의 뒤를 이은 북부여의 해부루나 금와왕의 뒤를 이은 동부여의 대소는 한결같이 나라를 물려받았지만 온전하게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권력을 이양받았을 뿐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지 못했던 처지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거나 나라의 역사가 단명했던 탓에 그들의 건국신화는 전승력을 잃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 또한 끌지 못하고 말았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버지로서만 문제될 뿐 그 자체로서는 주목되지 않았다. 동부여의 금와왕 또한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가두어 두었던 부정적인 왕으로, 유화가 낳은 알 곧 주몽의 태(胎)를 짐승이 먹도록 던져 버리게 했던 몹쓸 왕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그러나 북부여와 동부여의 처지에서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한 위대한 시조왕이며 금와는 해부루에 이어 동부여를 계승한 위대한 왕이다. 다만 이들 부여왕들은 고구려 건국에 장애가 되었기에 고구려의 처지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졌을 따름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 제1 ‘북부여’와 ‘동부여’ 항목을 보면 해모수와 금와왕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뉘어 각각 기록되어 있으되 사실은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58년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수도인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라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 천제는 이 성에다가 도읍을 정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으며,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성을 해(解)씨로 삼았다. 해부루는 해모수를 이어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
해부루왕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로부터 장차 자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는 말과 함께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란불이 꿈 이야기를 왕께 아뢰고,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겨서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라 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자 태자가 되었으며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금와왕은 다시 태자 대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대소왕은 서기 22년인 지황(地皇) 3년 임오에 고구려왕 무휼(無恤)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의 공격을 받아 죽고, 이로써 동부여도 망한다.

북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에 기원 전후 수세기 동안 존속하였던 예맥족의 나라이다. 북부여의 중심 지역인 부여성은 지금의 농안(農安)과 장춘(長春) 부근 또는 길림성(吉林城)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기원전 58년경으로 밝혀져 있고 중국측 문헌에도 기원전 1세기경부터 등장하므로 그 이전부터 북부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천제인 해모수이다. 천제는 곧 하늘의 옥황상제이자 하느님인 천신이다. 천신은 곧잘 하늘 또는 태양을 상징한다. 또는 태양과 하늘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럼 북부여의 시조 천제는 무엇에 비유되었을까? 하늘에서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늘 자체를 나타내는 하느님인 것일까?
그러나 해모수는 천제의 이름이 하늘을 나타나는 단군신화의 ‘환인’이나 ‘환웅’과 큰 차이를 나타낸다. 환인이나 환웅은 모두 ‘하느님’ 또는 ‘하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북부여의 천제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해모수’라고 했다. ‘해모수’는 곧 ‘해 모습’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보는 최래옥 교수의 해석을 따를 만하다. 왜냐하면 해 모습을 한 사람은 태양신에 해당되며, ‘환인제석’ 또는 ‘환웅천왕’의 명명법처럼, ‘해모수천제’ 또한 앞의 해모수가 ‘해 모습’이라는 우리말 소리값대로 표기된 것이라 하고 천제는 한자말의 개념대로 표기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제는 그 성씨 또한 ‘해’씨로 삼았다. ‘해’는 태양을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다. 태양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해씨계에 속한다. 해모수는 스스로 태양신을 자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북부여 주민들이 그를 태양신처럼 받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자연신화학파나 태양신화학파는 신화를 자연물의 의인화로 보는데 여기서도 그러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결같이 천제 곧 천신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단군신화는 환인과 환웅처럼 하늘을 상징하고, 북부여신화는 해모수처럼 태양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자신은 다섯 용의 수레를 타고, 따르는 사람 100여 명은 고니를 타고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 맑은 풍악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라든가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간다' 등의 표현은 하늘의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4. 해모수의 하강과 왕권

태양신 해모수는 땅으로 하강하는 절차가 상당히 요란하다. 천신이 땅으로 하강하는 절차는 곧 새로운 왕이 왕좌에 오르는 의식이기도 하다.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 자체도 대단한 신이성을 지니는데, 후대에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부연하여 기술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기록한 것은 단순하게 상상력의 발휘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해모수에 대한 인식 태도와 그가 부여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권 제 154 ‘평안도 평양’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천제가 태자 해모수를 보내어 부여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를 타고 시종 백여명은 백곡(白鵠)을 탔다. 오색구름이 그 위에 떠 있고 음악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서 열흘을 지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땅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해모수가 천제의 태자로 바뀌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환웅이 천제 환인의 아들인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북부여 신화를 단군신화의 체계 속에서 인식하고 수용하는 한편, 해모수가 태양신이라는 사실을 한층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하늘신인 환웅과 차별화하는 경향을 드러내 준다.
북부여신화에서 덧붙여진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면 이러한 두 가지 의도가 두드러진다. 먼저 단군신화의 체계와 일치하는 부분을 보면, 해모수가 시종 백여 명을 이끌고 내려온 것이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내려온 것에 상당한다. 그리고 웅심산에 내려왔다고 하는 사실 또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는 맥락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웅심산’은 곰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곰녀와 일맥상통한다. 단군신화는 청동기를 사용하는 북방계 민족의 신화로 이해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해모수가 오룡거를 탔을 뿐만 아니라 용광검을 찼다는 점에서 금속문명을 지닌 민족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변별성을 지닌 내용으로는 해모수나 환웅이 모두 천제의 아들이긴 하되, 해모수는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달리 ‘해 모습’을 한 태양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태양까지 감싸 안는 포괄성과 너그러움을 지녔다면 태양신은 한층 뚜렷하고 강렬하며 눈부시도록 화려하다. 해모수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종 백여 명은 흰 고니를 탄 채 오색구름 밑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태양빛이 흰 구름을 뚫고 내리비치는 모습을 의인화했다고 볼 수 있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하강하는 것에 비하면 자못 화려하고 웅대하기 그지없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룡거와 까마귀의 깃털로 장식한 오우관(烏羽冠)이 등장할 뿐 아니라, 용광검이라고 하는 신이한 칼까지 찼다.
특히 왕관에 해당되는 오우관은 왕의 권위와 위상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어느 나라든 왕관을 통해서 왕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왕좌를 물려받는 의식을 대관식이라 일컬으며 왕관을 물려받는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한편, 동양에서는 세 개의 다리를 지닌 까마귀, 곧 삼족오(三足烏)가 태양신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오우관은 태양신 삼족오의 정체를 인간 세계에서 구현한 문화적 기호이다. 그러므로 해모수가 오우관을 썼다고 하는 것은 태양신으로서의 그의 권위와 성격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세계에서 왕관이 왕좌를 상징한다면 수레와 칼은 왕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오우관과 오룡거, 용광검은 곧 태양신인 해모수왕의 정치적 권위와 군사적 힘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는 태양신 삼족오의 그림을 중심으로 신선이 용을 타고 하늘을 나는 그림 및 수레바퀴의 신, 대장간에서 철을 다듬는 야철(冶鐵)의 신 등에 관한 그림이 두루 보이는데, 이것은 오우관과 오룡거, 용광검으로 묘사되고 있는 해모수의 신화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따라서 환웅천왕이 설정한 신시(神市)와 달리, 해모수왕이 다스리는 북부여는 그 만큼 세속화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한층 강력한 왕권과 군대의 무력을 장악하고 있어야 왕노릇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모수왕의 이러한 차별성은 그의 통치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환웅천왕이 신시를 설정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교화한 동시에 곰과 호랑이까지 인간으로 교화시키려 했음은 삼라만상을 두루 감싸 안고 그 품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하늘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해모수왕은 사정이 다르다. 아침이면 땅에서 일을 본 뒤에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고 한다. 이것은 곧 태양의 하루 일과를 상징한다. 하늘이 밤낮이 없고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지 않는 포용력을 지녔다면, 태양은 밤낮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낮 동안만 지상 세계의 존재들에게 봉사한다. 사람들이 낮에 활동하고 밤에 칩거한다면 짐승들은 오히려 밤에 활동하는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자연히 동물들은 해모수의 통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고 소외되게 마련이다. 해모수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태양신의 기능적 특성이자 짐승을 배제한 통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신을 표방한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는 구름과 비, 바람을 거느리고 곰과 범까지 인간적으로 교화하고자 했던 데 비하여, 태양신을 표방한 북부여의 해모수 신화에서는 짐승은 철저하게 배격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상을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단군시대에는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 더불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홍익인간의 이념이었으되, 해모수시대에는 인간 세상에서 동식물과 같은 자연물이 상당히 배격되고 있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해모수신화와 단군신화의 역사적 의미

해모수신화의 체계를 단군신화와 비교해 보면, 다음 몇 가지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지역적으로 북방계 신화라는 동질성을 지니면서 천신하강의 요소를 공통으로 지녔는데, 이는 곧 금속문명이 발달한 북방계 민족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천신의 위력과 하늘의 신성을 내세우며 왕권을 장악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특히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열흘을 머문 뒤에 땅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사실은 태양신을 섬기는 해모수족이 북부여를 차지하기까지 일정 기간 토착주민들과 대립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환웅이 신단수 밑에서 곰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생산하고 단군이 비로소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과 일치한다. 다만 그 과정이 환웅처럼 2대에 걸쳐 오랜 동안에 이루어지지 않고 해모수 당대에, 그것도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는 차이를 지닌다. 북부여시대에 이르면 그만큼 민족의 이동과 나라의 건국이 인위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반영한다.
환웅과 단군에 의한 단군조선의 건국 과정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하늘처럼 너그럽고 포용력이 크다. 아직 수렵생활을 하는 범토템족과 수렵 및 채취생활을 하는 곰토템족 사이에서 환웅으로 상징되는 천신족이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농경민족으로서 문화적 우위를 누리되, 결코 무력으로 이들을 위협하지 않았다. 곰족과 범족은 자청해서 천신족과 같은 문화생활을 누리고자 환웅을 찾아왔던 것이다.
제정일치시대에 같은 문화 곧 같은 신앙을 지니며 같은 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종족간의 병합을 뜻한다. 그러나 환웅은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신족처럼 한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한다는 것은 수렵생활이나 유목생활에 젖어 있는 종족에게는 손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생활방식임을 알고 있던 까닭이다.
게다가 신앙양식도 크게 다르다. 제정일치시대에는 신앙이 다르면 하나의 왕국으로 병합하여도 종교적 이질성 때문에 순조롭게 통치할 수 없다. 오히려 종교적 갈등이 나라의 안정을 위협할 따름이다. 당시에는 제의가 곧 정치활동이며 제사장이 곧 왕인데, 제의가 다르고 제사장이 다르다면 한 왕이 통합국가를 수립해 다스리기란 참으로 버겁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정교분리의 문명사회에서도 이교도간의 내전이나 나라 사이의 종교전쟁이 한창인 사실을 염두에 두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따라서 환웅의 천신족으로서는 적절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선별적으로 병합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뒷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증은 문화적 동화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일이다. 환웅은 곰과 범에게 동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백일 동안 지내도록 하는 시험을 부과한다. 이러한 시험은 떠돌이 생활을 하던 문화집단이 한 곳에 붙박이로 머물러 육식이 아닌 초식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가장 빠른 길인 셈이다.
그 결과 환웅의 천신족은 그들과 문화적으로 상당히 유사한 발전 단계에 이르러 있던 곰족과 연대하여 단군을 세우고 고조선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결국 환웅이 농경문화의 우위를 통하여 여기에 동화되고자 하는 다른 종족들을 선별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과정은 자연스러운 반면, 거기에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와 달리 상당히 후대에 나라를 세운 북부여는 이미 문화 수준이나 생활양식이 크게 발달되어 있는 상태이다. 수렵생활의 단계에서 벗어나 일정 수준의 농경생활을 두루 유지하고 있던 상태라 하겠다. 따라서 환웅처럼 농경문화를 앞세우는 문화영웅으로서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벌써 지났다. 해모수에게는 오룡거와 오우관, 용광검과 같은 것으로 상징되는 세속적인 왕권이 필요했으며, 군사적인 무력의 과시가 동원되어야 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적 교화를 거침으로써 자연스럽게 병합한 것이 아니라, 태양신의 권위와 무력의 위협으로 일시에 나라를 지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해모수신화가 단군신화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역사적으로 북부여족 곧 예(濊)와 맥(貊)은 모두 단군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및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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