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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루

해부루

1. 해부루 신화

해부루(解扶婁)는 부여의 전설적인 왕이다. 해부루에 관한 학설로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고, 단군과 서하하백녀(西河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단군의 태자라고 한 문헌 중에는 태자시절 단군의 명령에 따라 중국 우왕이 소집한 제후회의에 참석하였다고 한 것도 있다.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은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유에 따라 도읍을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고 한다.
가섭원의 위치는 강원도 강릉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고대의 예국(濊國)으로 한무제 초기 이곳에 창해군(蒼海郡)을 두었고, 또 조선을 멸한 뒤에는 임둔군(臨屯郡)을 두어 영동의 일곱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방은 고구려 때에 하서량(何西良)이라 하다가 뒤에 하슬라주(何瑟羅州)가 되었는데, 모두 바다와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섭원과도 서로 통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가섭은 석가모니 10대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일컬어졌고, 석가모니의 열반 후에 제자들을 이끌었던 지도자이다. 가섭원이라는 이름은 불교가 전래된 뒤 비슷한 음을 한문에서 차자(借字)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곤연(鯤淵) 부근의 큰 돌 밑에서 한 아이를 얻어 금와(金蛙)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는데, 이 금와의 재위 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이 태어났고, 주몽은 그의 말을 맡아 키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제 비류왕의 아버지인 우태(優台)가 그의 서손(庶孫)이라는 설도 있다.

1.1. 금와와의 만남

옛날, 송화강 유역에 부여라고 하는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따뜻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늘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살기 좋은 나라를 거느린 부여왕 해부루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걱정이 더해 갔다. 그는 아들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을 하나 얻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해부루는 여느 때처럼 기도를 하고 대궐로 돌아오는 길에 곤연이라는 연못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이 타고 가던 말이 연못 옆에 있는 바위 앞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게다가 말은 눈물까지 흘리며 슬피 우는 것이었다. 해부루는 퍽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신하들에게 그 바위를 치우도록 했다. 그랬더니 바위 밑에서 누런 황금빛이 찬연하게 빛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바위 밑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바위 밑에는 온 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 형상의 아기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해부루는 이제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귀한 아들을 주었다며 몹시 기뻐했다.
해부루왕은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가 개구리 모양으로 생긴데다 금빛을 발하므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지었다. 금와는 해부루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해부루왕은 금와를 태자로 삼았다.
해부루에게는 아란불(阿蘭弗)이라는 어진 재상이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천제가 꿈속에 나타났던 것이다.
천제는 지금 이 땅은 장차 자신의 자손이 나라를 세울 땅이니 이 곳을 떠나 동해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또 그는 그 곳은 땅이 매우 기름지며 오곡이 풍성한 곳이라면서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천제는 아란불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아란불은 이튿날 아침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해부루왕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그는 곧 아란불의 말대로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늙은 해부루왕이 죽고, 태자로 있던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는 해부루가 낳지 않았지만 하늘이 내린 인물이기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렸다.

1.2. 해부루 탄생 설화

북쪽에 있는 고리국의 왕이 출타 중에 그의 시녀가 후궁에서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서 그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지난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로 임신이 됐다고 말했다.
왕이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 왕이 그 아이를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 어머니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고, 이름을 해부루라 하였다.
해부루가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했다.
이에 해부루가 남쪽으로 도망하여 송화강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해부루는 그것을 밟고 물을 건너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2. 해부루 신화 해석

(1) 이 일(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산천에 기도를 드려서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다.
(2) 왕이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게 하였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어린 아이가 금빛의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한편으로는 개구리를 달팽이라고도 한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거두어 길렀다.
(3) (왕은)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4) 그 뒤에 제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저에게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게 하고자 하니, 너희들은 여기에서 피하여 가거라. 동쪽 바닷가에는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므로 도읍을 정할만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5) 아란불이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서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였는데, (그렇게 하여 세운) 나라의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6) 그의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서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거기에 도읍을 정하였다.
(7) 해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자료는 해부루 집단이 행한 국가의 양도와 이주, 동부여라는 나라의 건국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연하여 말하면 해부루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 집단이 뒤에 들어온 천강족(天降族)의 해모수 집단에게 거주하고 있던 삶의 터전을 물려준다. 그리고 그들은 동쪽 바닷가에 있는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삼품창영(三品彰英)은 이 신화의 주인공인 해부루를 주몽과 같은 인물로 간주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해부루와 주몽은 다른 이름을 가진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북부여조에는 『고기(古記)』로부터 인용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본기에는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주몽을 달리 동명성왕이라고 부르는데, 동명이란 말은 천제의 아들에 어울리는 이름으로서, 광명이 동방에서 오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루 역시 밝음을 나타내는 <밝>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 개의 이본(異本)들로 전승되는 자료들을 취합하여 신화적인 인물의 계보를 작성하는 작업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체제 아래 정리되지 않은 채 제각기 별개의 이본들로 전해지는 자료들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부루를 <밝>과 관련지어 동명과 같은 의미의 말로 추정한 것은 더 위험한 발상이다. 만약 그의 견해가 옳다고 한다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로 정착된 해부루 신화와 주몽 신화는 같은 인물에 연루된 두 개의 전승이라는, 해괴한 논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삼품창영의 견해는 해부루 신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후세에 위작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실제로 해부루라는 이름은 <광명> 내지는 <밝다>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말인 듯하다. 이것은 양주동의 견해에 근거한다. 그는 <발(發), 부여(夫餘), 부리(夫里), 벌(伐), 부불(不弗), 불(弗)> 등은 나라 혹은 벌판을 의미하는 한국어 <>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한국 고대어의 재구를 통해서 보다 면밀한 검증을 거쳐야만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의 신화적 자료들, 그 중에서도 해부루 신화와 송양왕의 비류국 양도 신화, 비류의 미추홀 양도 신화 등을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말하는 까닭은 부루나 비류라고 하는 신화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비류라고 하는 나라의 이름이 수도경작(水稻耕作)의 농경문화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 <벌>과의 친연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보다 명확하게 해명하기 위해 해부루 집단이 어떠한 형태의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는 부여의 지리적인 배경이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그 사람들은 대대로 정주하여 살았는데, (거기에는) 궁실도 있고 창고도 있으며 감옥도 있다. 산과 언덕, 넓은 못들이 많아서 동이 지방 가운데에서는 가장 평평한 땅이다. 토지는 오곡을 심는 데는 알맞아도 오과는 나지 않는다.

이 기록은 해부루를 수장으로 하는 부여족이 대지의 원리를 신봉하고 벼를 지배하던 농경민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화전경작의 농경민은 땅은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 그러다가 경작하는 토지의 힘이 쇠하게 되면 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서 이동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머물러 살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는 사람들이 대대로 정주하여 살았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부여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지방에서 정착 생활을 했던 농경민이었음을 이야기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등장한 부여는 만주에 있는 송화강 유역을 무대로 하여 성장한 국가이고, 그 중심지는 이통하(伊通河) 부근의 장춘과 농안 일대로 추정된다. 이 지방에 넓은 못이 많았다는 것은 그것들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벼를 재배하기 우한 관개시설로서 인위적으로 축조되어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 해부루 신화의 단락(4)에서도 이 추단이 사리에 맞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해부루 집단이 이주하여 동부여라는 나라를 세운 곳이 동쪽 바닷가에 있으며, 그 곳은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을 심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하였다. 국사학계에서는 이 곳을 만주의 길림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 일대는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더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신화에서 말하고 있는 오곡은 삼과 보리, 콩, 수수, 메기장 등의 밭곡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벼를 포함하는 오곡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고찰로부터 해부루 신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해주는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즉 해부루를 구심점으로 하여 만주의 장춘과 농안 지역 일대에 살고 있던 선주(先住)의 부여족은 대지의 원리를 신봉하는 세계관을 가졌고, 일찍부터 수도 경작의 농경생활을 주된 경제 형태로 삼았던 농경민이었다. 그러한 글들이 동해안의 가섭원 지방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는 것은 뒤에 들어온 천손계통의 해모수 집단과의 역학적 갈등에서 밀려나 삶의 터전을 양도하고 벼농사를 짓는 데 더 적절한 땅을 찾아서 이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거주지를 옮겨가는 해부루는 자신의 왕권을 물려줄 후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그는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서술된 곳이 단락(2)이다. 이 단락에는 해부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금와가 비정상적인 탄생을 하였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후계자의 탄생담에 신비성과 이상성을 부여하려는 의도의 소산으로써 자신들이 장악한 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통치 계층의 지배 논리가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금와의 탄생담이다. 그의 탄생담은 금와가 금빛을 띤 개구리의 형상을 하고 나왔다는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금빛이 왕권을 상징하는 색이며, 개구리는 다산의 생산성을 표상하는 동물이므로 금와 역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돌 아래에서 나왔다고 하는 표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문일환은 “어린 아이가 출생을 하면 이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라고 하는 진한의 편두(偏頭) 풍습과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었다”라고 하는 고구려의 묘제를 관련시켜 영혼 불멸의 관념을 믿는 암석 문화에 연원을 둔 암출신화(岩出神話)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금와의 탄생담이 진한 지역에서 행해지던 편두 풍습의 기원을 이야기해 주는 설명 신화(explanatory myth)일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현전하는 설화들 가운데에 주인공이 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암출 설화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돌 아래서 나왔다고 하는 모티브를 고구려의 묘제와 관련지어 그의 탄생담을 암출신화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 것이다.
이 자료에는 해부루가 사람들을 시켜서 돌을 옮기게 하여, 금와를 얻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금와가 커다란 돌이 놓여 있던 곳, 곧 우묵하게 들어간 땅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의 탄생담은 인간이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출현 신화(emergence myth)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암출 설화도 출현 진화의 후대적 변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출현 신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자료들이 얼마간 산견(散見)된다. 문헌 신화로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의 탄생담이 있다. 이 신화에서는 그녀가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계룡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알영정은 문자 그대로 우물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우물이란 땅이 움푹하게 들어간 상태나 장소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그녀의 탄생담은 출현 신화의 일종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와의 탄생담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와가 돌 아래서 나왔다는 것은 인간이 대지에서 탄생했다고 하는 출현 신화의 일종이다. 한국에는 알영 신화와 당신(堂神) 본풀이로 이어지는 출현 신화의 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밭곡식을 재배하는 농경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해부루 신화는 동부여에 두 종류의 농경문화, 즉 벼를 재배하는 문화와 밭곡식을 재배하는 문화가 혼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전자는 탄생 신화를 갖고 있지 않은 데 반해, 후자는 출현 신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탄생담을 갖고 있다. 이는 초기 농경문화의 집단은 탄생 신화를 가졌으나, 그것이 발전하여 벼를 재배하게 된 집단의 수장은 탄생 신화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수도경작의 농경문화 집단에서 구했다는 것은 금와 집단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였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3. 해부루의 한계

해부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가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 점이나, 아란불을 말을 듣고 나라를 옮긴 경솔함 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해모수는 태양신을 자처하면서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을 찬 채 오룡거를 타고 북부여를 세웠다. 열흘 만에 성을 점거하고 ‘해 모습’의 신격으로 자처하며 왕권을 장악한 해모수의 위력은 대단하다. 건국시조로서 손색이 없는 신이성과 권위를 지녔던 것이다.
북부여는 고조선과 달리 왕권이 제법 발달한 상태의 고대국가였으므로 정치적 권위와 함께 군사적 무력을 갖추지 않으면 나라를 지탱하기 어렵다. 환웅처럼 우세한 농경문화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적 지배를 할 수 있었던 단계는 벗어났다. 따라서 해모수의 부여시대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 오우관을 쓴 해 모습의 해모수는 왕으로서 권위를 갖추었다. 또한 반대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탁월한 용력과 투쟁력도 갖추었다. 오룡거를 타고 용광검을 찬 해모수는 투쟁적 영웅의 면모까지 지녀 북부여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걸맞은 영웅이다.
해모수의 왕권을 이어받은 해부루는 어떠한가? 해모수와 같은 역량과 면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라를 처음 세운 경우에는 왕권이 확립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온전히 잡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왕위가 안정적으로 세습되기 어렵다. 신라의 왕권이 초창기에 박혁거세에서 석탈해로, 석탈해에서 다시 김알지 계통의 김씨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아버지의 혈통과 왕권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뿐, 정치력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북부여의 초기 왕국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지 못하게 된다. 주체적 결단력마저 없는 까닭에 아란불이라는 대신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북부여를 내주고 동해의 가섭원으로 옮겨 가서, 나라 이름까지 동부여로 바꾸었다. 이로써 해부루는 북부여의 정통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적의 위협도 없는 가운데 신하의 꿈 이야기만 믿고 나라를 고스란히 내주고 다른 곳으로 가서 나라 이름까지 바꾼다는 것은 왕으로서 정치력이 빈약하기 그지없음을 말한다. 꿈에 천제로부터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해부루 자신이 천제이자 태양신인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신성성을 이미 잃은 상태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천제를 인정할 뿐 아니라 자신은 천제 해모수의 아들로서 왕권의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스스로 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천제 해모수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의 왕 노릇을 할 수 없다. 감히 신하가 자신의 꿈 이야기로서 왕권과 함께 해모수의 혈통까지 부정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만 하더라도 해부루의 정치적 한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해부루는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해모수와 같은 탁월한 무력도 지니지 못한 것 같다.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은 해부루의 육체적 허약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해부루는 아버지 해모수로부터 물려받은 북부여도 지탱하지 못했을 뿐더러 북부여로부터 이주해 와서 세운 동부여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것이다. 늙도록 나라를 물려줄 후손을 두지 못했다는 것은 세습왕조에서 치명적인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왕으로서 발휘할 만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함께 상실한 처지인 해부루는 마지막 수단으로 나라의 최고 사제자로서 제의적인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산천에 제사를 올려서 대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아들을 빌기 위하여 길을 가다가 곤연이라는 연못에 이르렀을 때 타고 가던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돌을 들추어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하늘이 주신 아들로 알고 이름을 그 모양에 따라 금와라 지어서 태자로 삼았으며, 해부루가 죽은 뒤에 금와가 왕위에 오른다. 그럼으로써 해부루는 사진의 무능 때문에 태양신을 자처하는 해모수의 후손으로서 ‘해’씨의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금와라고 하는 다른 혈통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다.
금와의 등극은 곧 태양신을 표방하던 ‘해’씨족의 몰락을 뜻하며, 해모수의 등장과 함께 세워진 부여국의 쇠퇴를 초래하게 된다.

4. 부여사(夫餘史)

북부여 시조는 해모수(B. C. 239-B. C. 194)고, 2대는 모수리(B. C. 194-B. C. 169), 3대는 고해사(B. C. 169-B. C. 120), 4대는 고(해)우루(B. C. 120-B. C. 108), 5대는 고두막(B. C. 108-B. C. 59), 6대는 고무서(B. C. 59-B. C. 58)이다.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기 (迦葉原夫餘)의 시조는 해부루(B. C. 86-B. C. 47), 2대는 금와(B. C. 47-B. C. 6), 3대는 대소(B. C. 6-AD 22)이다.
동부여의 세 왕인 해부루와 금와와 대소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시조 해부루(解夫婁)

첫해(乙未 기원전 86년)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3년(기원전 83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을 내려, 진대(賑貸) 제도를 만들고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이 제 때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였다.
8년(기원전 78년) 이보다 앞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가 놀다가 부여(夫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의 꼬임을 받아 강제로 끌려가 압록강의 가에 있는 방에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고모수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를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였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10년(기원전 76년)에 왕이 늙고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어 뒤를 이를 아들이 있기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관연에 이르러 큰 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렸더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
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기원전 5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 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39년(기원전 47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4.2. 2대 금와(金蛙)

첫해(甲戌 기원전 47년)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24년(기원전 23년)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떴다. 고구려가 호위하는 군사 수만명을 시켜 졸본으로 돌아가 황태후의 예로 산릉(山陵)에 장사지내고 옆에 사당을 세웠다.
41년(기원전 6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4.3. 3대 대소(帶素)

첫해(乙卯 기원전 6년)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19년(서기 13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28년(서기 22년) 2월에 고구려가 온 나라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진창을 만나 왕이 탄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怪由)가 앞으로 다가와 이를 죽였다. 그러나 군사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이레 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군사를 몰아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도망갔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가 자기를 따르는 자 수백 명과 함께 달려가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이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해 달아나 갈사수(曷思水)가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갈사(曷思)이다.
갈사(曷思)는 고구려 막힐부의 힐주였던 길이가랑(吉爾가浪)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갈사국은 고구려 태조왕에게 항복하고 다시 두만강 가 훈춘(琿春)으로 옮겨갔다. 해두왕(海頭王)은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되며 해모수가 수도로 삼았던 웅심산이 있는 강평현 북쪽 해주(海州)의 왕으로 추정된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서기 68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 (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두(都頭)를 명하여 우태(于台)를 삼아 집을 내려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고 그를 봉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를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 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 (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뒤에 차음 자립하게 되자 개원(開原) 서북 쪽으로부터 이사하여 백낭곡(白狼谷 연국(燕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부신시(阜新市) 지역)에 이르니 연(燕)과 가까운 땅이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甲戌 494년)에 이르러 그 나라를 가지고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굽히고 들어가니 낙씨들이 드디어 제사 지내지 않았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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