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박혁거세

박혁거세

1. 박혁거세와 신라 건국

1.1. 박혁거세 설화
박혁거세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교적 충실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박혁거세와 그의 신라 건국에 대한 자세한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 ‘제 1권 기이편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다. 지금의 담엄사 남쪽에 있었다. 촌장은 알평이다. 처음 표암봉에 내려 왔다. 이 사람이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설치해서 이름을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 5년(1000년) 경자에 중흥부로 개명하였다. 파잠동산, 피상동촌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이다.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 형산에 내려왔다. 이가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남산부라고 한다.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촌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무산대수촌이다.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 이산에 내려 왔다. 이가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孫)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 이른다. 박곡촌 등 서촌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진지촌이다.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 화산에 내려 왔다. 이가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이다. 시파 등 동남촌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이것이 최씨의 고택이라 하는데 아마 명확할 것이다.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이다.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 명활산에 내려 왔다. 이가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 이른다.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이다. 촌장은 호진이다. 처음 금강산에 내려 왔다. 이가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다. 지금 임천부이다.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 등 동북촌이 이에 혹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들 육부의 조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 9년(32년)에 처음 육부의 이름을 고쳤고 또 육성(六性)을 주었다. 지금 민간에서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라 하고, 임천부를 아들이라 하고,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자세하지 않다. 전한 지절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두 모여 의논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흩어져서 제멋대로 하고 있다. 어찌 유덕한 사람을 찾아, 그를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음을 열어야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에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곁에 전광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웠고, 한 백마가 무릎 꿇어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찾아 가서 살펴 보니, 한 보랏빛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어 사내아이를 얻었다.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은 그 일을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동천에 몸을 씻겼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조수가 줄지어 따르며 춤추었고,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름을 혁거세라 하고 위호(位號)를 거슬감이라 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다투어 경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는 이미 강림했다. 마땅히 유덕한 여군을 찾아서 짝지어야 하겠다.” 이 날 사량리 알영정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용모가 매우 수려했다. 그러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 데려가 월성 북천에 몸을 씻겼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그로 인하여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이라 했다.
남산 서록에 궁실을 조영하고 두 아이를 봉양했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알이 박과 같아서, 마을 사람들이 박(조롱박)을 박(朴)이라 하는 까닭으로 성을 박이라 하고, 여자아이는 태어 나온 곳의 우물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은 나이 열 세 살이 되었다. 오봉 원년(기원전 57년) 갑자에 사내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리고 여자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고, 혹은 사라 또는 사로라고 했다.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혹은 계림국이라고 한다지만, 그것은 계룡이 출현한 상서로운 징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으면서 숲속에서 닭이 울어, 이에 국호를 고치어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가서 드디어 신라의 국호가 정해졌다. 나라를 다스리기 육십일년에 왕은 하늘에 오른지 칠일 후에 남은 뼈가 땅으로 떨어졌다. 왕후도 또한 돌아가 국인이 합치어 장사지내려 했더니 큰 뱀이 따라다니며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기 장사지내어 오름(五陵)이 되었다. 또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 능이 이것이다. 곧 태자 남해왕이 즉위했다.

1.2. 박혁거세 설화와 역사적 상황
박혁거세의 탄생과 즉위를 둘러싼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삼국유사』가 훨씬 자세하지만 그 기본 줄거리에서는 차이가 없고 설화의 원형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는 박씨 왕계가 일찍 소멸하여 후대에 설화의 기본 줄거리를 윤색하려는 시도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위의 설화는 연대를 지나치게 확실한 것으로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신라 상고기의 역사상을 거의 사실적으로 전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위 설화가 어떤 역사상황을 보여주며 설화의 상징적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6촌은 무엇이고 각 촌의 촌장은 누구일까? 대략 기원전 70년경 지금의 경주와 월성군 주위에는 여섯 부족이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직경 10~15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에 대략 500호 2,500명 정도 되는 주민들이 청동기를 사용하여 논밭을 갈고 수렵을 하며 무문토기를 사용하였다. 각 촌은 씨족집단을 구성하였는데 씨족장이 촌장이 되어 각 촌을 다스렸다. 촌장이 죽으면 수 톤에서 수십 톤에 이르는 돌을 옮겨 고인돌(지석묘)을 만들만큼 이 때의 촌장은 지배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 촌장을 비롯한 지배층들은 보다 발달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가지고 와서 신석기 문명을 누리던 선주민(先住民)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6촌을 형성하여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한 이들은 현재 고조선의 유민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 1’에 보면 사로 육촌에 대해,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고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지』, 『사기』 등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도 위만조선의 성립(기원전 194년) 그리고 위만조선이 멸망(기원전 108년)한 시기에 한나라에 왕과 귀족을 비롯한 많은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로 남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6촌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또한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는 것과 유사하여 이러한 추정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그러나 이 6촌의 지배층들은 단순히 고조선 유민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닌 듯하며, 중국대륙의 어지로운 정세 때문에 동쪽으로 피난을 온 한나라 유민들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 사람들까지도 6촌의 주요한 구성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6부족은 주변 지역에서 살면서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기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인들이 중흥부(양산촌, 급량부)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대수촌, 모량부)를 아버지로 삼고 임천부(고야촌, 습비부)를 아들로 삼으며 가덕부(가리촌, 한기부)를 딸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이들 6부족은 가족에 비유할 만큼 서로 친밀한 집단이었거나, 아니면 아버지뻘과 아들뻘로 이들 6촌간에 서열이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혁거세는 누구이며 그가 왕으로 즉위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조선 유민들은 6부족 연맹체를 형성하며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6촌내에서 생산력이 더욱 발전하고 인구가 늘면서 좀 더 큰 단위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또한 철기의 사용과 더불어 문제가 되기 시작한 소유와 생산 및 분배를 둘러싼 주민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할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지배자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전의 서라벌의 촌장들은 전통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선의(善意)에 따라 선출되어 일종의 경험자, 연장자로서의 지도자 역할만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발전과 더불어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 내부에서 이상적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당시 최고의 숭배를 바치던 존재인 하늘로부터 계시나 보증을 받은 인물을 구하게 되었고,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혁거세를 마침내 새로운 지배자로 선출하게 되었다. 설화속에서, 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이른바 ‘천강족(天降族, 하늘이 내린 족속)’이 된다. 천강족 설화는 단군신화는 물론 고구려의 건국설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출현시키는 존재로써 하늘을 인식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혁거세 세력은 고조선이 멸망한 후 남하한 이주민 중 한 유력한 세력으로 현재 파악된다. 이들은 앞선 문명의 지혜와 문물을 가지고 남하하였고 그 새로운 문명과 지혜를 바탕으로 10여년간에 걸쳐 토착세력을 복속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혁거세가 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혁거세 세력이 말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전의 6촌은 작은 지역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이 절실하게 요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 촌이 크게 성장하고 각 촌의 경계가 이전보다 훨씬 넓어지면서, 말을 가진 세력이 이들을 통합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세력 중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혁거세 설화에서 말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혁거세 세력은 과연 선주민들과 별 충돌 없이 그들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모두 혁거세가 사람들로부터 추대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혁거세 세력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토착세력의 반발을 받기보다 토착세력의 지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혁거세 세력은 멸망한 고조선의 한 유력한 세력으로서 말을 기반으로 하며 우수한 청동기, 철기 문화를 가졌던 집단이었다. 여기에다 혁거세 세력은 토착세력보다 좀 더 뛰어난 통치능력과 정치철학을 가졌던 지배자 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 혁거세 거세간조’에는 다음의 기록들이 전한다.


혁거세 8년(서기전 50년)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

혁거세 17년(서기전 41년)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었다.

혁거세 19년(서기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혁거세 30년(서기전 28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변경사람들이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혁거세 38년(서기전20년)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이에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그러니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 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불렀다.

혁거세 39년(서기전 1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마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喪)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혁거세 53년(서기전 5) 동옥저에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상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볼 때 혁거세왕은 6촌을 두루 순시하며 농경을 권장하였다.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는 그 예의를 다하였는데, 특히 이웃나라 왕이 상중일 때는 그 나라를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국가간의 도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통치는 왕국 내부에서 큰 반발이 없었던 만큼 원만하고 순탄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통치는 국내 안정을 이루고 타국에도 모범이 된 듯 주변국들이 공물을 바치는 일도 빈번히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후대에 어느 정도의 과장이 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혁거세 세력이 우수한 문화와 세련된 통치력을 바탕으로 토착세력을 무리없이 포섭해서 왕국을 건설하여 다스렸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들은 중요한 전거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과 관련해서, 먼저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알영정에서 출현한 계룡(鷄龍)의 겨드랑이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알영이 계룡의 겨드랑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보이는데, 계룡이 우물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알영의 세력이 토착적 성격을 지닌 집단임을 의미한다. 알영이 용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알영 세력이 아울러 해양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닭은 날지 못하므로, 계룡이라 했던 것은 알영이 토착세력이었음을 의미한다. 닭 토템은 후대에도 신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제 5권 의해편 귀축제사(歸竺 諸師, 천축에 간 여러 스님들)’ 조에는 다음의 기사가 전한다.

인도인들은 신라를 ‘구구탁 예설라’라고 하였는데 구구탁은 닭이라는 말이요 예설라는 신라말로 귀하다는 말이다. 그 나라에 전해오는 말로는, ‘신라는 닭의 신을 섬겨 머리에 날개 짓을 꽂아 꾸미개로 삼았다

이 기록은 신라와 닭 토템이 후대에도 계속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닭 토템과 신라와의 밀접한 연관 관계는 닭이 경주 지역의 토착세력의 토템신으로 숭배 받았고, 그 토착세력이 계속해서 신라의 주요한 지배세력으로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닭은 날이 밝음을 알리는 일을 하므로, 반도의 동쪽 끝 해가 제일 먼저 솟아오르는 서라벌 지역에서 닭은 매우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연유로 신라의 닭토템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입술이 부리모양이었던 알영을 발천에서 목욕시켰더니 알영의 부리가 떨어져나갔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물에 씻자 부리가 떨어져나갔다는 것은 물이 성수(聖水)의 구실을 하였음을 뜻한다. 물은 맑으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런 물은 모든 죄를 씻는 성수이자 한 존재를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매개체이다. 비단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물로 세례하는 것은 고대사회에 널리 퍼진 민속이다. 알영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닭에서 혁거세 세력과 혼인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이로써 천상계로 상징되는 외부세력과 계룡으로 상징되는 토착집단이 혼인을 통하여 연합정권이 형성되고 혁거세 세력을 중심으로 신라 왕국이 건국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혁거세의 유해가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이에 대해선 먼저 구전되어 오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박혁거세 왕이 나이가 무척 들었을 때였다. 그는 이상하게도 밤이면 어딜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늦은 밤 신하의 호의도 없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행동에 가장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알영 부인이었고, 그녀는 왕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왕은 잠시 다녀온다는 말 뿐 그이상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영 부인은 어느 날 왕을 몰래 따라가 보았다. 왕이 말을 타려 하는 순간, 어디서 말방울 소리는 들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좀 더 지켜보니 그 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이었다. 왕의 일에 대해선 좀처럼 간섭을 하지 않았던 알영부인이지만 이 일에 대해선 왠지 모르게 크게 걱정되고 숱한 의심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도술을 잘 쓴다는 사람을 불러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는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도술을 잘 쓴다고 불려온 이는 왕이 연관된 일이라 발뺌만을 계속하였다. 부인이 다른 계책을 생각해 내어 어쩔 수 없이 작은 미물로 변하는 도술을 그 술사에게 물었다. 그는 그 요구만은 쉽게 들어 주었다. 어느날 밤 왕이 또 스스로 일어났다. 밖에는 여전히 말방울 소리가 들렸다. 부인의 작은 미물로 변해 말에 붙었다. 말은 순식간에 왕을 태운 채 하늘로 치솟더니 천국에 도착하였다.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있어 예를 갖추어 왕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곧 풍악이 울리고 왕과 옥황상제는 음식을 들었다. 옥황상제가 왕에게 이제 이 곳에서 함께 할 날이 머지 않았다며 기쁨을 표하였다. 그렇게 담소를 주고받던 중 갑자기 옥황상제의 얼굴에 노여움이 나타내며, "이 보시오, 어찌하여 이 곳에 인간을 데리고 왔소. 인간을 데리고 오면 안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혁거세왕은 그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놀람운 표정을 지었다. 이 때 옥황상제가 말을 데려다가 빗질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미물이 떨어지더니 점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바로 알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옥황상제에게 용서를 빌며 혁거세왕과의 친분은 변치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의 노여움은 가실 줄 몰랐다. 알영부인은 다시 인간 세계로 보내졌다. 그런데 그 다음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궁 앞에 혁거세왕의 몸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널려 있었던 것이다. 곧 궁안은 눈물바다로 변했고 장을 치른 후 혁거세왕의 시신을 한데 모아 왕릉을 만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커다란 폭음과 함께 왕릉이 폭발하며 왕의 시신이 나와 널려졌다. 그런 일이 있자 신하들은 궁리 끝에 시신을 각 부분으로 나눠 다섯 개의 능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하고 그 능이 오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구전되어온 이야기여서 이 이야기만으로는 그 상징성을 살펴보는데 큰 무리가 있다. 이 이야기보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훨씬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일 것이므로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혁거세는 하늘로부터 온 천신족이므로 죽어서 하늘로 올라감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땅에 떨어졌고, 나라 사람들이 그 유해를 묻으려 하자 큰 뱀이 와서 그 일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혁거세왕의 장례를 방해한 뱀을 장례를 방해한 부정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오릉을 열게 한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뱀에 관련된 기사가 대략 10군데 정도가 나오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 ‘제 4권 탑상편 오대산오만진신조’에서는 푸른 뱀이 문수보살의 화신 36종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제 2권 기이편 경문대왕(48대 임금)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왕의 침전에 날마다 해가 저물면 무수한 뱀들이 모여드니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쫓으려 하면 왕은 ‘과인이 만일 뱀이 없으면 편히 자지 못하니 금하지 말라’ 하였다. 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어 주었다.

이 기사에서 뱀은 왕을 대신하는 존재인 대신에 왕을 보호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제 5권 의해편 사복불언(蛇福不言)조’에서 사복은 원효를 꾸짖을 정도로 깨달은 자로 결국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 해탈을 이루는 사문(승려)이다. ‘제 3권 흥법편 동경 흥륜사 금당 십성(東京 興輪寺 金堂 十聖)’조에는 사파(蛇巴)라는 스님이 표훈, 원효, 혜공, 자장과 함께 신라의 열 성인 중 한명으로써 서쪽 벽에 모셔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당시에 뱀의 의미가 부정적이었다면 성인들의 이름에 이 글자를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은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실제 유물을 통해서도 뱀은 당시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남대총동 109호분에서 출토된 고배(高坏)를 보면 뱀이 C자형으로 몸을 서린 채 머리를 들고 있는 위력적인 모습이 새겨져 있고, 고배의 뚜껑에도 S자형으로 사행하는 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경주 노동로에서 출토된 긴 목 항아리의 목부분에는 개구리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을 토우로 빚어 붙여 놓았다. 토우가 신앙 대상을 형상화한 것이므로 뱀형 토우를 토기에 부착한 것은 뱀이 용과 함께 신성시된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뱀이 긍정을 뜻한다면 뱀은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들게 한 매개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박혁거세의 몸은 하필 5부분으로 나누어 떨어졌을까? 이는 신라의 오악숭배(五岳崇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신라는 나라중심과 영토의 네 변방에 있는 명산을 오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오악숭배가 정치적으로 신라 왕권의 확대와 수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오악숭배는 신라 통치기간 내내 지속되었으며 신라의 영토가 확장하면서는 같이 변화하였다. 나중에는 팔공산,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이 오악으로 숭배되었다. 결국 뱀이 왕을 합장하는 것을 막고 유해를 5부분으로 나누어 5개의 묘에 나누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는 뱀으로 상징되는 신성한 힘을 빌어 혁거세로 대표되는 신라 왕권이 신라의 네 변방과 중앙을 수호할 것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2.1. 박혁거세의 어머니 사소(娑蘇)
『삼국유사』 ‘제 7권 감통(感通)편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는 박혁거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짧게 실려 있는데, 이 기사에서 박혁거세는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도산의 지신인 사소라는 인물이 낳은 자식이라고 되어 있다. 그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진평왕조에 지혜라고 하는 비구니가 있어 현행이 많았다. 안흥사에 머물면서 불전을 새로 수리하려는 논의를 했으나 힘이 미치지를 못했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용모가 아름답고 푸른 구슬로 구름 머리를 장식한 한 여선이 위로하며 말했다. “나는 선도산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이 기뻐서, 금 십근을 시주해서 돕고 싶다.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가져다가 주존삼상을 장식하도록 하고, 벽에는 오십삼불과 여섯가지 성중 그리고 여러 천신, 오악신군을 그리도록 하여라. 그래서 매년 봄, 가을 삼월 십일과 구월 십일에 선남선녀를 모두 모아, 널리 일체의 함령(含靈)을 위해 점찰법회를 열어 항례(恒例)로 삼도록 하여라.” 지혜는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무리를 거느리고 신사(神祠) 밑을 파서 황금 160냥을 얻었다. 지혜의 무리는 불전 수리하는 일을 추진해서 공덕을 쌓았는데, 모두 신모가 깨우쳐준 대로 따른 것이다. 그 사적만 남아 있고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다.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지술(神仙之術)을 얻어 해동에 와서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 되었거나 돌아가지 아니했다. 부왕이 수리의 다리에 서신을 묶어 보내면서, ‘수리가 머무는 곳에 따라가 집을 삼도록 해라’라고 말하였다. 사소는 서신을 받아보고 수리를 놓아 보냈다. 수리는 선도산에 날아가서 멈추었다. 드디어 사소는 이 산에 와서 살면서 땅신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 곧 서수리산)이라 했다. 신모가 이 산에 오랫동안 웅거해 있으면서 나라를 지켜 영이한 일이 매우 많았다.
제 54대 경명왕이 매를 부리기 좋아하더니 일찍이 여기에 올라 매를 날렸다가 잃었다. 그래서 신모에게 빌기를, “만약 매를 얻으면 벼슬을 봉하리라.”라고 했는데, 조금 후에 매가 날아와 책상에 앉았다. 이로 말미암아 선도산이 대왕(大王)에 봉작되었다. 신모가 진한에 와서 처음 낳은 성자가 동국(東國)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대개 혁거세와 알영 부인 두 성인의 유래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계림․백마 등으로 일컫는 것은 닭이 서쪽에 속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여러 천선(天仙)을 시켜 비단을 짜서 붉은 색으로 물을 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그의 남편에게 주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신험(神驗)을 알았다 한다. 또 국사(삼국사기)에는 사신(김부신을 일컬음)의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김부식이 정화 연간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우신관에 갔더니, 한 집이 있고 거기에 여선상(女仙像)이 설치되어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이것이 귀국의 신인데 공께서는 아시오?’라고 말하고, 마침내 이어서 왕보는, ‘옛날에 중국 제실의 딸이 있었는데,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에 도착했습니다. 진한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는 해동시조(海東始祖)가 되었습니다. 그 제실의 딸은 땅신이 되어 선도산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 소상(塑像)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대송국(大宋國)의 사신 왕양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한 제문 가운데에 현인을 잉태하여 나라를 창업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 기사에서 중국 제실의 후손인 사소란 인물이 선도산의 신모이며 신라 시대 내내 나라로부터 숭배를 받았던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박혁거세와 알영의 유래를 말해주는 인물이라 말하면서 사소가 박혁거세의 어머니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에는 김부식이 중국에 가서 왕보란 학자에게 들은 얘기를 인용하여, 사소가 박혁거세의 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리하여 이 설화는 박혁거세가 백마의 알에서 나왔다는 앞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박혁거세의 출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박혁거세가 사소의 아들이란 『삼국유사』, 「감통편」의 이야기는 신라 사람들의 선도산 신모인 사소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도산 신모의 설화는 신라인들의 산악숭배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파악되며, 신라 창건 이후로 사소는 삼사(三祀)의 대상이었으며 그 제사도 여러 산천제의 으뜸이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소의 설화에서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사소가 확정되는 것은 선도산의 여신인 사소를 좀 더 부각하기 위하여 후대에 설정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김부식, 정구복 외 4명 번역, 『역주 삼국사기』2, 4 (정신문화연구원, 2003)
일연, 이재호 번역, 『삼국유사』1, 2, (솔, 2002)
김기홍, 『천녀의 왕국 신라』(창작과 비평사, 2000)
윤철중, 『한국의 시조신화』(보고사, 1996)
김정환, 『상상하는 한국사』1~3 (푸른숲, 1996)
이도흠,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푸른 역사, 20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