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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대사

크고 우람한 법화경 10만 게송이 다시 신독에서 일어난 것은 용수에서 말미암았고, 부상에서 비롯된 것은 의상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고려 때 널리 퍼짐은 수좌로 말미암은 정업이다. 돌아간 서서원 학사 이철찬 청하공 최치원이 의상대사의 전기를 지었는데, 오직 수좌의 행장이 빠졌으므로 일승 행자가 안쓰럽게 여기었고, 나 또한 아쉽게 생각했다. 근래 전중 내급사 강유현이 수좌의 초종의 자취를 모았으니, 글은 유려하지만 사실이 많이 빠졌으므로 일승 행자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나 또한 유감으로 여겼다. 함옹 10년(1074) 초여름 4월에 이르러 신중원 경주대사 창운이 실록한 구고 한 권을 보이며, 나에게 찬술하기를 부탁하므로 수락하였으나, 세속의 일에 이끌리고 얽히어 뜻이 그 일에 전심하지 못하고, 이어 달빛 아래에서 생각을 얽으며, 등불 앞에서 글을 짓느라고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나서 그 이듬해 봄에 마치자 스스로 머리한다. 전진사 혁련정은 삼가 서한다.
이제 바야흐로 수좌의 행장을 지음에 다다라 10부문으로 가르니,

첫째는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 둘째는 출가청익분(出家請益分), 셋째는 자매제현분(姉妹齊賢分), 넷째는 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 다섯째 해석제장분(解釋諸章分), 여섯째 감통신이분(感通神異分), 일곱째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 여덟째 역가현덕분(譯歌現德分), 아홉째 감응강마분(感應降魔分), 열째 변역생사분(變易生死分)이다.

첫째, ‘강탄영험분’이란 수좌의 속성은 변씨요, 휘는 균여이다. 아버지는 환성으로 뜻을 높이고 이름을 세웠었다. 어머니 이름은 점명으로 일찍이 천우 13년(917) 4월 초7일 밤 꿈에 암수의 두 봉황이 모두 누런빛인데,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기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20년(923)에 이르니 점명의 나이 이미 60이 되었지만, 능히 태기가 있어서 21순이 차서야 이해 8월 8일에 균여를 황주 북쪽 형악 남쪽 기슭 집에서 낳으니, 지금의 광주판관 전 습유 이준이 그 예전 터를 중수하고 이름을 경천사라 한 것이 곧 그곳이다.
균여가 처음 낳았을 때 얼굴이 아주 못나 견줄 데가 없었으므로 부모가 좋아하지 아니하고 골목에다 내버려 두었더니, 새 두 마리가 날개를 펼치어 서로 아기의 몸을 덮어 주니, 길 가는 사람이 보고 이상하게 여겨 그 집을 찾아가서 말해주자, 아비는 후회하고 어미는 한스러워서 거두어다 길렀다. 그러나 그 몰골을 꺼려 이내 상자 속에 가두고 몰래 젖을 먹인지 수월에서야 비로소 마을 사람에게 보였다. 균여가 포대기에 있을 때에 <원만게>를 잘 읽었으므로 아버지의 구수를 받았는데, 열에 하나도 빠짐이 없었다.

둘째, ‘출가청익분’이란 젊어서 고독하게 있다가 공부할 나이인 열다섯 살이 되어서 당형 승 선균을 따라 복흥사에 나아가 식현 스님을 뵙고 섬기면서 업을 배웠다. 이에 그 가르치는 그릇이 도리어 배우려는 바보다 뒤떨어지니, 비록 소쿠리의 먼지라도 높이 쌓는 데는 도움이 되기는 해도, 한 잔의 물이 어찌 몹시 목마름을 덜어 줄 수가 있으랴. 이때에 영통사 의 순공은 도량이 큰 쇠북과 같아서 묻는 자를 잘 대접하므로 사방의 배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저자를 이루었다. 균여가 서로 구하는 마음이 바람에 불리는 풀처럼 따르게 되어 매일 황혼이 진 뒷면 식현의 잠자는 저녁에 틈을 타서 몰래 영통사에 나아가 배움을 청하고 바야흐로 새벽이 되면 돌아와서 몸소 죽을 받들고 공양을 받들었다. 식현이 진작 그 속을 알았으나, 막을 수 없는 일이라 마침내 순공에게로 가길 허락했으니, 균여가 저 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온 것은 일이 소원과 더불어 맞은 것이다. 이후 깊이 교해에 묻혀 높이 의천을 더듬게 되었다. 그 때에 양식이 7일이나 모자라서 먹지 못한 끼니가 십여 번이었으나, 일찍이 한 번도 싫음과 게으름을 나타내어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셋째, ‘자매제현분’이란 균여가 오래 절에 있어서 집안의 생각에 매이기 때문에 마침내 돌아가 부모를 뵙고 수명으로 더불어 재주를 내기 했었다. 워낙 수명이 균여보다 3년을 먼저 낳았으니, 이해는 천우 17년(920)이다. 그미는 나면서부터 울부짖음이 절제가 있더니, 커서 총기가 무리에 뛰어났다. 염불하면 빌어먹은 중이 집에 와서 법화경을 외우매 그미는 안으로부터 듣고 문득 신심을 내어 인하여, 자리를 베풀고 그 스님을 청하여 마저 읽기를 마치니, 스님이 8권을 읽어 마치고 인하여 청하여 하루 밤을 잤다. 경지를 펴서 통달하여 무릇 귀로 들은 바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스님이 돌아갈 때 그미에게 이르기를, “나는 곧 보리유지 삼장이고, 너는 곧 덕운 비구의 화신이다.”고 하였다. 균여가 다시 와서 뵙던 날에는 수명이 그 업을 득기를 청하므로 균여가 보현과 관음 두 지식의 법문을 강하며, 신중·천수 두 경문을 강하기를 삼촌의 구설로써 편 바는 한 자도 잃지 않았다. 균여가 또 초저녁에 화엄 육지의 약 오백문답을 염송하니 수명이 엿듣고서 다 깨우치었고, 5년 뒤에 수기를 써보라 하니, 이미 깨치었던 대문을 한 글자 한글귀도 빠친 것이 없었다.

넷째, ‘입의정종분’ 균여는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화엄사종이 있었으니, 첫째는 관혜공으로, 백제의 우두머리가 된 견훤의 복전이었고, 둘째는 희랑공이니, 우리 태조 대왕의 복전이었다. 공이 신심을 받아서 향화의 원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원이 하마 다른지라 마음이 어찌 같으랴. 그 문도에게는 점점 물과 불처럼 번지었으니, 하물며 법이겠는냐. 시고 짠 맛을 각기 받았으니 이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더욱 시체의 무리들이 혜공의 법문을 일러 남악이라 하고, 낭공의 법문을 일러서는 북악이라 하였다. 균여가 매양 남북의 종지가 모순이 되어 분간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고, 많은 갈래를 막아 한 수레바퀴로 가리켜 돌리고자 하여, 수좌 인유와 함께 명산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현사에 노닐다가 큰 법고를 울리며 큰 범당을 세워서 불문의 어린이나 늙은이로 하여금 불꽃처럼 교풍에 쏠리게 하였으며, 또 화엄교 중에 『선공초삼십여의기』가 있었으니, ‘三敎所爲同體 空有盡不盡…淨土菩提樹 性起五果四句 廣修供養主伴章’ 등이다.
균여가 말씀하기를 흐름이 달라서 어긋나는바 자못 많아, 글의 번거로운 것은 요긴하게 거두어 깎아 다듬고, 뜻의 오묘한 것은 자세히 궁구하여 나타내되, 부처의 경과 보살의 논으로써 증거를 삼았으니, 한 대의 성교를 짐작할 만하게 되었다. 국가에서 과장을 크게 왕륜사에 베풀어 법문 급제를 뽑아 취할 때에는 곧 우리 균여의 의로 정론을 삼고, 나머지는 방계로 여겼을 뿐이다. 무릇 재주와 명성이 있는 무리야 어찌 이 길을 밟지 아니 했으리요. 큰 자는 왕사와 국사의 자리를 취하고, 작은 자는 법계가 대사와 대덕에 이르렀으며, 홀로 몸을 드러내고 자취를 찾은 이는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다섯째, ‘해석제장분’이란 균여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법을 넓히고 남을 이롭게 하는 대문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만약 제가의 문적에서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면 반드시 주석을 붙여서 새겼다. 그러므로 『수현방궤기』10권 ·『공목장기』8권 ·『오십요문답기』4권 ·『담현기석』28권 ·『교분기석』7권 ·『지귀장기』2권 ·『삼보장기』4권 ·『법계도기』2권 ·『십장기』1권 ·『입법계품초기』1권이 모두 당대에 통행하였다.

여섯째, ‘감통신이분’이란 건우 2년(949) 4월 그믐날 대성대왕의 대목황후가 음부에 부스럼이 나서 의원에게 보일 수 없으므로, 균여의 스승인 순공을 불러서 법약으로써 구원할 것을 청했었다. 순공이 곧 그 괴로움을 대신해서 황후로 하여금 금방 낫게 했으나, 순공이 그 병을 대신 앓아 7일 동안이나 심한지라, 자신의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균여가 향로를 받들고 주원했더니, 부스럼이 절로 느티나무 서쪽 가지에 옮으니, 느티나무는 균여의 방 동쪽 모퉁이에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무가 시들어 버려서 청녕(1055~1064) 중에 이르도록 그 나무 등걸이 남아 있었다.


광순 3년(953)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장차 대성대왕을 봉하려 하므로 왕이 유사를 명하여 각각 그 직책을 드날리며, 3개월 만에 일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책봉을 받음에 다다라서, 심한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책봉의 명을 행하기에 방해될까 꺼렸더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동국에는 반드시 성인이 계실 터인데 어찌하여 하늘의 개기를 빌지 않느냐. 하늘이 맑게 개인다면 나는 성현의 징험으로 알겠다.” 하니, 광종이 그 말을 듣고 걱정이 되어 잠을 아니 자고 앉았더니, 공중에서 부르는 말소리가 있었다. “대왕께서는 도리어 시름하지 마소서. 내일이면 반드시 해당설법을 들으리라” 고 하므로, 왕이 곧 뜰에 나가 우러러 봤으나 아롱아롱 자취가 없었다. 그 이튿날 어진 승을 찾아서 법석에 맞으려 하니, 치반의 대덕들이 사양하고 피했다. 그 때에 국사 겸신이 주달하여 균여를 천거하니, 사는 그때에 나이 젊었다. 나라의 소청을 받아서 코끼리의 걸음으로 침착하게 사자좌에 올라 원음으로 한 번 연설하니, 우레와 번개가 조용히 사라지고, 삽시간에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자서 하늘이 밝고 해가 났다. 이때에 임금께서 공손히 예를 구배로 가하고, 인하여 師의 낳은 곳을 물으니 황주 북쪽 마을 둔대엽촌이라 한다. 이곳은 비구의 옛터라 하므로, 임금께서 “용의 남은 큰 못이 아니며, 충신이 어찌 十室이 없으랴”

고 하여, 마침내 사를 봉하여 대덕을 삼고, 겸해서 속가의 권속 10여인을 조서를 내려서 사람마다 논밭 25경과 남녀의 종 각각 5명씩을 주고, 황주성안에 옮겨 살게 했다.
현덕 5년(955)에 불일사 안에 벼락 친 곳이 있으므로, 그 변괴를 없애고자 하나 모름지기 대법을 의지해야 하므로, 사를 청하여 강연하였다. 밤낮으로 21일을 하는데, 그 묻고 대답한 것이 항상 어진 일을 맞거든 사양하지 말라는 줄거리로 뜻을 삼았다. 회중에 오현 스님이라는 이가 있어 ‘강주가 비록 민첩하나 오히려 나보다 후배인데다, 내가 비록 재주 없지만 도리어 선배가 되거든 어째서 묻고 대답하는 중에 조금도 겸손하는 예도가 없는가?’ 하는 생각으로 시기하여 자못 비방하려고 했더니, 얼마 아니하여 거사 하나가 말리기를 “너는 모름지기 시기하고 한탄하지 말라. 오늘날 강사는 바로 너의 선조 의상대사의 제칠신이다. 대교를 널리 펼치고자 하여 세간에 다시 온 것이라”고 하니, 오현이 듣고 놀라, 이내 대중에게 말을 전하고 참회하여, “내가 허물인 줄을 알겠노라” 라고 하였다.
사가 내도량에 나가매 밤중에 광명이 있어 방안으로부터 밖으로 쪼이는 빛이 마치 무지개처럼 끊이지 않았다. 임금께서 그 빛을 보시고 시봉을 시켜, 가서 그곳을 찾게 했더니, 돌아와 사의 안광이라 하므로 임금께서 사의 처소에 나가서 묻잡기를 “무슨 법을 하였기에 이렇게 됨을 얻었나이까?” 하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잘난 행이 없소이다.” 하였다. 그때에 경상 위에 염주 한 줄이 있었는데, 그것이 공중에 올라가서 사를 세 둘레나 두르고 그치므로, 임금께서 이에 경중하여 은총이 고금에 없이 넘쳤다.

일곱째, ‘가행화세분’이란 사의 불도 외에 학문에는 사뇌에 더욱 익숙하였다. 보현십종의 원왕에 의탁해서 노래 11장을 지었으니, 그 서에 이르기를 ‘무릇 사뇌란 것은 세상 사람의 희희덕거리고, 즐거워하는 짬이요, 원왕이란 것은 보살들의 행을

닦는 요점이다. 그러므로 얕은 곳은 건너서 깊은 데로 돌아가고자 함이요, 가까운 곳을 따라서 먼 곳에 이르고자 함이다. 세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서는, 졸렬한 근기를 끌어낼 수 없고, 누추한 말을 부치지 않고는 넓은 인연을 나타낼 길이 없다. 이제 흔히 가는 가까운 일에 의탁해서 도리어 생각하기 어려운 먼 종지를 알게 하려고, 10가지의 대원의 글을 의지해서 11가지 노래의 글귀를 짓는다. 여러 사람의 눈에 스스럼이나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 맞기를 바란다. 비록 뜻이 잘못되고, 말이 어긋나서 성현의 묘한 의향에는 합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글월을 전하고 글귀를 지어서 범속한 사람들의 선근이 나기를 바란다. 즐겨 외우고자 하는 자는 외워서 원하는 인연을 맺고, 헐뜯어 염송하는 자도 원하는 도움을 다잡을 것이다. 엎드려 청하노니 훗날의 군자들이 비방하거나, 찬탄하는 것은 모두 한가로운 짓이리라’ 고 하였다.


예경제불가
마음의 붓으로 그리옵는 부처 앞에
절하옵는 몸은 법계 마치도록 이르거라
티끌마다 부처의 절이 절마다 모시온
법계에 차신 부처 구세 다 예하옵소서
어즈버, 신어의업 피염없이 이에 부지런히 통달하거라

칭찬여래가
오늘 대중들이 남무불이여 사뢰옵는 혀에
무진한 변재의 바다 일념 안에 솟아나거라
진진허물 모시온 공덕의 몸을 대하였삽기
가이없는 복덕의 바다를 서왕들로 기리옵고저
어즈버, 비록 일모의 덕도 다 사뢰지 못하옵네

광수공양가
부젓가락 잡으며 불전의 등불 도두려니
등불 심지는 수미산이며 기름은 큰 바다를 이루거라
손은 법계 마치도록 하며 손에 마다 법공으로
법계에 차신 부처 부처마다 두루 이바지하소서
어즈버, 법공이야 많으나 이 어와 최승공이여

참회업장가
전도 이루어 보리 향한 길을 잃어
짓사온 모진 법계나마 나니라
모진 배운 지는 삼업 정계의 주로 지니고
오늘 대중의 덧없는 참회 십방의 부처 아오소서
어즈버, 중생계진 아참진 미래제에 길이 조업 버리과저

수희공덕가
미오 동체의 연기의 이치를 찾아보고
부처 중생 마치도록 내 몸 아닌 남 있으리
닦으시란 덧없이 내 닦을지언정 얻을 사람마다 남이 없고
어느 남이 선들이야 아니 기쁨을 두오리까
어즈버, 이렇게 여겨 가거든 질투의 마음 이르오리까


청전법륜가
저 넓은 법계 안의 불회에
나는 또 나아가 법우를 비옵나이다
무명토 깊이 묻어 번외열로 다려 내매
毒牙 길지 못한 중생의 밭을 적시심이여
어즈버, 보리의 열음 완전한 각울 밝은 밭이여

청불왕세가
모든 부처 비록 화연 다하였사오나
손을 비벼 올리어 누리에 머물게 하여지라
새벽으로 아침 밤에 향하실 벗 알았어라
이를 알게 됨에 길 잃은 무리 서러움이여
어즈버, 우리 마음 맑거든 불영 응하시오리

상수불학가
우리 부처가 과거 누리 닦으려 하는
난행 고행의 원을 나는 덧없이 좇았소이다
몸이 밧아 티끌이 가매 명을 베프실 사이에도
그렇게 할 배울 이 큰 부처도 그러하신 이로이다
어즈버, 불도 향한 마음이여 다른 길 빗겨 가지 않고저

항순중생가
각수왕은 迷人을 뿌리로 삼으셨나이다
대비의 물로 적시어 시들지 않을 것이러라
법계 가득 구믈구믈할 나도 동생동사
념념 상속하여 간단 없이 부처 하시듯 공경할 것이다
어즈버, 중생 편안하거든 부처 또 기쁘시리라

보개회향가
모두 나의 닦는 바 일체선 덧없이 돌이켜
중생의 바다 안에 迷失한 무리없게 깨치고저
부처의 바다를 이룬 날은 참회하는 모진 업도
법성의 집의 보배라 예부터 그리하였어라
어즈버, 예하올손 부처도 내 몸 아아 남 있으리


총결무진가
생계 다했거든 내 원 다할 날도 있으리
중생의 깨치옴이 갓 모를 원해이고
이렇게 가 이렇게 가고는 향한대로 善길이여
어와 보현행원 또 부처의 일이어라
어즈버, 보현의 마음 아시와 이로나마 딴 일 버리세

이 노래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어서 간혹 담벼락에다 써지기도 하였다. 사평군 나필급간이 고질에 걸린 지 3년이 됐는데도 고칠 수가 없었다. 사가 가서 보고 그 괴로워함을 민망히 여겨, 이에 이 <보현십원왕가>를 가르쳐 주고서 늘 외우라 권하였더니, 다음 날에 공중에서 불러 말하기를 “네가 큰 성인의 노래의 힘을 입었으니, 아픈 것이 분명 나으리라” 고 하더니, 그로부터 곧 효험이 있었다.

여덟째, ‘역가현덕분’이란 한림학사 내의승지 지제고 청하 최행귀란 이가 있었다. 사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사를 찬양한 지 오래였다. 이 노래가 이루어지자 시로써 번역했으니, 그 서에 말하기를 ‘게송이란 불타의 공과를 찬양하여 경문에 나타나 있고, 가시(歌詩)란 것은 보살의 행인(行因)을 드날리는 것이라, 논과 장으로 거두어 귀의하니, 그래서 서쪽 팔수로부터 동쪽 삼산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개사(開士)들이 사이사이에 나서 높고 묘한 이치를 읊고, 때때로 철인들이 걸출해서, 낭랑하게 참모습의 노래를 읊조렸다. 저 한나라에는 傳公이 있어 가 씨(賈氏) 賈氏 탕사(湯師)와 함께 강남에서 비롯했고, 현수와 징관과 종밀은 관중에서 강을 벌였다. 혹 교연과 무가의 무리가 다투어 아름다운 문채를 아로새겼고, 제기와 관휴의 무리가 다투어 꽃다운 말을 새기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마사와 문칙과 체원이 공문을 개척한 우아한 시편이 있었고, 원효와 박범과 영상이 원음을 본보기로 삼았다. 혹 정추와 신량의 어진 분들이 한갓지고 다급한 시편을 남기었고, 순의와 대거의 준들이 우아한 시편을 지었으나, 모두 벽운(碧雲)으로 얽지 않음이 없지만, 그 맑은 시편을 맛볼 수 없으며, 모두 백운(白雲)으로써 묘한 소리를 전하여 들을만 하였다. 그러나 시는 당나라 말로 얽음으로써 오언 칠자로서 탁마를 하고 가는 우리말로써 배열하여 三句와 六名으로써 가다듬는다. 어성을 논하면 어긋나기 참성과 상성과 같아서 동서를 분별하기 쉽고, 이치를 의논하면 적대하기 모(矛)와 순(盾)과 같아서 강약을 가리기 어렵다. 비록 사봉(詞鋒)을 마주 드날렸으나, 족히 한 가지 의해로 돌아갈 줄을 알았고, 저마다 제자리를 얻은 것이니 내 어찌 좋다고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한스러운 바는 우리나라의 재자와 명공들은 당나라 글귀를 읊을 줄만 알지만, 저 땅의 거유와 대덕이라도 우리 노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당나라 글은 제망과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읽기 쉽지만, 우리 글은 마치 범서로 연철한 것 같아서 저 땅에서는 알기 어

렵다. 양송의 주기를 자주 동으로 흐르는 물에다 붙였지마는 진한의 금수로는 서쪽으로 가는 별을 따라가기 희한했으나, 그 가로대를 열고 통했으니 감탄할 일이다. 어찌 써 노나라 공자가 이 땅에 살고자 했더라도 동방에 이르지 못했고, 설한림이 굳이 사문을 바꾸려 했으나 쥐꼬리를 이룬 까닭이 아니겠느냐.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좌수는 이름이 현완과 나란해서 삼천 수계의 스승이 되시었고, 자취가 묘광에 버금하여 80권 화엄경의 강주가 되었고, 자리가 화엄의 엄지를 차지했으니, 여러 대중이 귀의할 수 있었고, 은혜를 중생을 제도한 대수(大樹)의 그루에 적시었으니 중생들이 이익을 얻게 하였다.
이는 종 틀에 걸린 큰 종이 치기를 기다리듯, 물음이 있으면 다 대답하며, 내내 달아 놓은 보배 거울이 피로를 잊어버리고 어둔 곳까지 비치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무릇 학문에 뜻한 이로 누가 관광을 게을리 하랴. 사는 이에 이런 사람들을 권유해서 저 부처님께 우러러 귀의하게 했다. 사마의 패배를 위해 혜도를 차게 했고, 그 익우의 지남을 위하여 자실을 열 수 있게 하였다. 이르되 정원 별본과 행원품의 종편인 <장남위>의 법계와 현문에 들어가서 동자 향성 깨끗한 길에 놀게 하였다. 그러므로 청량강주가 한 권을 닦아서 선양하고, 신독의 행자들이 평생을 한하고 일과로 삼았었다. 처음으로 진단에 온 것은 오방의 성제의 수서로부터이고, 그 후 신라에 이른 것은 토군의 대덕들의 혈자를 인한 것이다. 사구게가 한 번 귀에 스치면 곧바로 죄의 뿌리가(罪根)이 멸해지고, 10가지의 문이 다시 마음에 기록되면 능히 각과를 낸다. 실로 좋은 인연이 크게 후하니 남다른 복이 얼마나 깊은가. 이 <원왕가>를 읊되 시객으로 대신하게 해서 남녀로 하여금 한 가지 듣고 발원해서 길이 수인을 맺어 자타가 겸해서 제도하여 공을 이루어 마침내 묘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냐. 대저 이와 같으므로 팔구행의 당문(唐文)으로 서한 것은 뜻이 넓고 글이 풍부하지만, 11수의 노래는 사가 맑고 구가 곱다.


그 지은 바를 일컬어 사뇌라 하니, 가히 정관의 사를 넘보는 듯하고, 정하기는 부와 같아 자못 혜명의 부에다 비길 만하다. 그러므로 당인이 보게 되면 서 외에는 상세히 알기 어렵고, 우리 선비가 들을 때는 노래하는 가운데서도 나아가 외우기가 쉬워 모두 반리를 얻고 전공에는 각각 성그니, 이러므로 간략히 요하와 패수의 사이에서 읊어서 뒤쳐 법을 아낀 듯하고, 오진의 즈음에서 읊는 이가 감해졌으니, 누가 동문(同文)이라 일컫는가. 하물며, 사의 심지에 속해서는 본래 부처의 뜻을 갖춘지라 비록 통속에 가깝기를 기약하여 옅은 곳을 좇아 깊이 들어가게 했다 해서, 어찌 먼 데 사람에게는 그릇됨을 버리고 바름에 돌아감을 방해하랴. 옛적 김 씨의 번역은 부서진 구슬을 온전한 기왓장으로 해서 널리 중국에까지 아름다움을 날렸고, 최 공의 번역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 같아서 해역에 꽃다움을 날렸다. 속도 오히려 이렇거든 승은 진실로 마땅히 그럴 것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행귀는 뜻이 하충(何充)에 부끄럽고, 붓이 사령운에 부끄러우나, 관원이 마땅히 도울 것을 적이 생각하나, 전에 닦은 것을 본받지 못하고, 미루어 재상이 남몰래 전한 것을 생각하나, 한갓 행열(行烈)만이 기꺼워한다. 일전에 도하는 벗을 만나서 다행히 현언을 보았는데 함부로 묘창을 따를 길이 없으나, 고정의 기다림이 있을까 두렵다. 한 근원에 두 줄기가 됨을 의지해 부탁하니, 시와 노래가 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고, 각수마다 각각 번역하여 글 편을 사이하여 인해 써서, 바라는 바는 우리나라와 중국에 두루 구애됨이 없을 것이다.
진과 초서를 아울렀으니 승과 속을 향하여 써 인연이 있고, 보고 듣는데 끊어지지 아니해서 마음과 마음이 생각을 이을 것이다. 먼저 상가(象駕)를 보현보살에 우러러서 저마다 연하여 읊어 훗날로 용화를 자씨에게 만나리니, 이에 애오라지 이 서로서 아름다운 말에다 머리를 얹는다. 바라건대 쇠를 가져다 금을 이루기를 바라서, 벽돌을 던져서 옥을 당기는 것을 피치 않고자 하니,

혹 박식을 만나거든 모름지기 용렬한 음조를 고치소서.
송력 8년(983) 1월 일에 삼가 서한다.

예경제불송
마음으로써 붓을 삼아 부처를 그리고 우러러 절하옴은 마땅히 시방에 두루함이요
낱낱이 띠끌 같은 부처님 나라요 중중한 절들은 여러 높은 어른 집입니다.
보고 들음에 스스로 삼생의 먼 진리를 깨닫고 예하고 공경하는 데 어째서 여겁의 긴 것을 사양하오리까.
몸과 말과 아울러 뜻의 업으로 모두 싫어함이 없어서 이것으로 벼리를 삼겠소이다.

칭찬여래송
불계에 두루하여 정성을 기울이니, 한번 남무를 외워서 부처를 찬양합니다.
변계 바다는 거의 조그만 혀끝에서 나오고 말의 샘은 바라건대 두 입술 사이에서 솟아납니다.
부처를 칭송해서 진사를 화하게 하고 의왕을 송열해서 찰토에 바람 일으키소서.
비록 말이 일모의 덕을 다하지는 못해도 이 마음 곧장 다한 허공을 비기옵니다.

광수공양송
지성으로 밝히 비치는 부처님 전의 등불 바라건대 이 향이 법계를 싸고 일어나소서.
향은 그윽한 봉우리와 같아서 구름이 머물고, 기름은 큰 바다와 같아서 넓고 맑습니다.
중생을 다잡아서 苦를 대신하는 마음 항상 간절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여 행을 닦는 힘이 점점 더해집니다.
나머지 공양으로 법계를 취하여 가지런히 공양하오니 바로 넉넉히 10만이라도 모두 이기기 어렵소이다.

참회업장송
무시겁 초중으로 좇아, 삼독으로 이러온 죄 몇 겹이옵니까.
만일 이 악연이 원래 상이 있다면 모든 공계가 다할지라도 능히 용납되지 못하오리다.
업장을 생각하니 서글퍼지고 정성을 다하니 어찌 게으름이 있사오리까.
이제 바라기는 참회하고 정계를 지니면 길이 진염을 떠나는 것이 청송과 같사오리다.

수희공덕송
성인과 범부, 진심과 망심 서로 나누지 말며, 같은 몸체로 원래 넓은 법문입니다.
중생 밖에 본시 남은 부처님 뜻이 없고 나 외에 따로 남이라는 의논이 있사오리까.
삼명의 많은 공덕을 쌓아 모드옵고, 육취의 작은 선근을 닦아 이루옵니다.
남이 짓는 것이 모두 다 내가 짓는 것이어니 모조리 기뻐 따르고 모두 높아집니다.

청전법륜송
부처의 성도한 것은 수로 헤아리기 어려우니, 나의 소원 모두 정각에 나아갈 인연입니다.
감로를 뿌려서 번뇌의 열을 삭히고 계향을 맡아서 죄와 허물의 티끌을 멸하오리다.
선우를 따라 모시어 자실을 우러르고 능한 사람을 권해 청해서 법륜을 굴립니다.
보배 비를 주어 두루 사바세계를 적신 뒷면, 다시 어느 곳에 혼미한 사람이 있사오리까.

청불주세송
極微塵數의 성인과 현인들이 부생의 화연을 마치시고
열반을 보이시어 적멸로 드시고자 하실 적에 묘겁을 지내도록 人天을 이롭게 하기를 청하셨소이다.
참을 말하신 풍성한 모임에는 오히려 그리워 하니 속에 체하는 여러 迷한 것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약에 혜등이 장차 은멸할 것을 보면 어찌 정성을 기울여 오래 머물기를 빌지 않사오리까.

상수불학송
이 사바세계에서 비로사나 부처님의 마음이 물러나지 아니하고 닦아온 자취를 알만합니다.
가죽으로 종이를 만들고 뼈로 붓을 만들어 겸하여 피로 먹을 만드시어 나라의 성과 대궐과 동산까지도
보리수 아래에서 三點을 이루고 중회 마당에서 일음으로 강을 베푸셨소이다.
위와 같은 妙因을 모조리 따라 배울진댄, 길이 이 몸으로 하여금 고해의 깊은 곳에서 헤어나오리다.

항순중생송
수왕은 치우쳐 들 가운데 향하여 영화스럽고 이욕이 천가지와 만가지로 납니다.
꽃과 실과는 본래 성현의 몸자체가 되고 줄기와 뿌리는 원래 범속의 앙금입니다.
자비의 물결이 만일 영근을 함초롬히 적시어 준다면 정각의 길은 마땅히 행업을 좇아 이루어 지오리다.
매양 원하노니 두루 여러 품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여러 부처님의 줄거우심도 가볍지 않음을 알겠소이다.


보개회향송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룬 바 공덕은 돌이켜 함령의 일체 중에 더불었소이다.
안락을 얻고 고해에서 떨어질 수 있으며 모두 죄를 삭히며 참바람을 우러릅니다.
다 같이 동시에 한가지로 번거로운 진역에서 나며, 다른 몸 한 가지로 법성의 대궐로 돌아갑니다.
나의 이 지극한 마음 회양하는 소원은 미래 제가 다하도록 떳떳이 그치지 않사오리다.

총결무진송
중생계의 다함으로 기약을 삼으니, 중생계가 궁함이 없으므로 어찌 옮겨지오리까.
사의 뜻은 종요로이 迷한 자의 꿈을 논하려 하심이니 법의 노래는 능히 <원왕가>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장차 망녕의 지경을 제하려거든 모름지기 이를 읊고 외울 것이며, 진원으로 돌아가고자 할진댄 피염은 내지 마오리다.
계속하는 한 마음이 간단이 없으면 크게 보현의 자비를 따라 배우겠소이다.

위의 노래와 시가 이루어지자 저들이 다투어 한 권씩을 써 가서 중국에 전하니, 송조의 군신들이 보고 이르기를 “이 사뇌가의 임자는 참으로 한 부처님이 나타남이라” 하고 드디어 사신한테 사에게 절하게 하니, “사의 용모가 얄궂어서 세인의 경신할 바 못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군신들은 중국 사람이 업신여길까 해서 또 객인의 생각에 맡기지 않고 앞으로 보이기를 허락지 않더니 객이 이 뜻을 알고 가만히 총지원에 나가서 먼저 통역으로 하여금 정을 통하고 뵈이기를 청하니 사가 옷을 정제하고 홀연히 도망해 가버리니 객인이 듣보고 말하기를 “어느 곳에 가서야 부처를 볼 것인가” 하고 인하여 두어 줄기 눈물을 흘리었다.

아홉째, ‘감응강마분’이란 개보 중에 귀법사 승 정수가 법관에 나아가 참소하여 무고하기를 균여사는 수상한 뜻이 있어 행을 닦고 있다고 하므로, 관원이 그 사단을 아뢰니 광종께서 듣잡고 노하여 급히 사를 불러 죽이려 하니, 사가 대궐에 나아가서 황공하여 땅에 엎드렸다. 왕이 그 정상을 보시고 바르다 하고, 도리어 의원 3인에게 조치하여 호송해 보내고 마침내 승선인 설광을 보내서 절에 나가서 위무하게 하였다. 이날 밤 왕이 꿈에 신인을 봤는데, 몸이 한 길이 되며 침전을 누르고 서서 이내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무고하는 말을 믿고 법왕을 능욕하였으니 반드시 불길한 일이 크게 일어나리다.” 하였다. 꿈을 깨니 진작 땀이 흘러 몸에 흥건하였다. 옆에 신하를 불러 꿈을 이야기하고 다음날이 밝자 송악산 북쪽 소나무가 바람도 없이 저절로 쓰러진 것이 몇 천 그루가 되는지 몰랐다. 임금께서 이 괴변을 들으시고 명하여 점치게 하니, 이르기를 “법왕을 욕보인 때문에 난 것이다.” 하므로 왕이 이에 뉘우치고, 두려워하여 문득 대문에다 특별히 소앙도량을 설치하고, 법관으로 하여금 정수를 저자에서 목베이게 하고, 인하여 정수의 승방은 못을 파게 하고, 속형 랑이 글월을 지어 아우로 하여금 무고케 했다 해서 정수와 같은 날에 베임을 입었다. 또 영통사 백운방은 세월이 오라 점점 무너지므로 사가 중수하려 하니 이로 인하여 지신이 책하는 바 되어 재변이 날마다 일어나므로, 사가 간략히 노래 한 수를 지어서 빌고 그 노래를 벽에 붙였더니 그 뒤로는 괴변이 이내 없어졌다.

열째, ‘변역생사분’이란 개보 6년(973) 중에 김해부사가 주달하기를, 올해 모월 모일에 이상한 중이 머리에 종려의 갓을 쓰고 바닷가에 오므로 그 이름과 사는 곳을 물으니 스스로 비파시라 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백년 전에 이 나라를 지나다가 인연을 맺었는데, 이제사 보니 삼한은 통일이 되었지만 불교가 흥하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宿因을 갚기 위하여 잠간 송악 밑에 이르러 ‘같을 여’자로 법을 펴고, 이제 일본으로 가고자 한다.”하며 말을 마치자 곧 숨어버렸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명하여 그 날을 헤아려 추구하니, 곧 사가 돌아간 날이었다. 변역분을 이에 마친다.
사가 세상에 계실 때, 대성대왕에게 인연이 후하여 왕께서 큰 원을 발하기를 송악 밑에 귀법사를 새로 짓고 절이 이루어지매 조서하여 사를 청하여 주지하게 했더니, 사가 공경히 향화를 명하여 여러 대중을 거느려 법을 키웠다. 일찍이 강법하던 전 날에 대덕인 전업을 시켜서 경의 서문을 지으라 하므로, 업이 10여 장을 지어서 장차 강헌가에 가져가서 사에게 아뢰려 하였더니, 사가 향로를 받들고 코끼리 걸음으로, 한번 보고는 강설하기를 마치 진작부터 익혀 놓은 듯하니, 그 총명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슬프다. 변화가 인연이 있어서 인연이 다함에 여기서 죽고, 저기에 나는 것은 보살의 일이라, 개보 6년(973) 6월 17일 모시로써 귀법사에서 멸적을 보였으므로, 팔덕산에 장례하니, 산이 귀법사 동남에 있어 절에서 백보쯤 되니 풍성하고 빼어난 이곳이다. 속가의 나이는 □년이고 승가의 나이는 □년이고, 뛰어난 제자는 담림과 조□이니, 다 한 때의 용상이라, 자리가 수좌에까지 이르러서 그 후학들이 참으로 많다. 이제 이르러서는 벼와 삼처럼 점점 성하여 혹은 밖에 흩어져 있고, 혹은 본방을 지키고 있다. 훗날 문하시랑 평장사 김정준이 봉황은 날아가고 둥지만 있는 것을 보고는 주인을 생각해서 그 방안을 받들어 드디어 중수하고, 이름하여 감로원이라 하고, 옛 급사중 고정이 위로하여 비문을 지었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철인이 죽어서 하늘에 놀며, 우람스러움은 땅을 휩쓸었다. 보각과 구슬 기둥은 선재가 흩어져 땅에 거칠고, 청산과 백운들은 뿔뿔이 헤져 광경이 참담하다.’고 했다.

후서
성인의 보통 사람과 다른 까닭은 미혹한 자는 인도하고 어리석은 자는 가르쳐 크게 이익을 짓는 바에 있다. 정이 엎드려 우리 스승의 행장을 살피건대 바로 성인로구나! 양웅이 말하기를 “태산을 오른 연후에 여러 산이 잇닿음을 안다.”고 하였으니, 내가 곧 옛 대덕의 비명을 보고 경탄하여 해를 넘긴지가 몇 10년이지만, 우리 스승의 행장을 본 연후에야 여러 비명이 잇닿음을 알겠다. 어즈버, 앞의 부처님이 이미 설하고 뒤의 부처님이 일어나지 아니해서 세상의 눈이 점점 어둡고 법륜이 중간에 거두어졌으니, 대사께서 능히 우뚝하여 현화를 드날리고 신통과 瑞應이 인연을 따라 진사계에 두루 보이거늘, 본 것이 적고 들은 것이 적어 요점을 추린 것만 겨우 만의 일로 남았으니, 바라건대 박식한 이를 만나서 이 글이 윤색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함옹 11년(1075) 1월 모일에 후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