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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무학(無學)은 고려 말엽에 태어나 나옹(懶翁)의 법맥을 이어 조선 불교의 터전을 닦은 고승(高僧). 스님의 법명은 자초(自超), 법호는 무학이며 속성은 박(朴)씨로서 삼기군(三岐郡) 즉 경남 합천군 사람이다. 고려 충숙왕 14년(1327) 9월 20일 태어났으며 거처하는 방의 이름은 계월헌(溪月軒). 서산(西山)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釋王寺記)》에는 무학과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밀접한 관계와 함께 조선 건국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고려 우왕(禑王) 10년(1384), 청년 이성계는 전북 금마(金馬)로부터 함경북도 남쪽의 학성(鶴聲) 지방으로 옮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다. 1만 집의 닭이 ‘꼬꾜오“하며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일제히 두들겨대는 다듬이 소리가 났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재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 꿈이 하도 신기해 이웃에 사는 노파를 찾아가 해몽(解夢)을 부탁했더니 그 노파는 정중히 사양하며 다른 ‘물을 곳’을 소개해 준다.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대장부의 꿈이야기를 함부로 하리까. 여기서 40리(里) 가량 떨어진 설봉산(雪峯山) 토굴(土窟)에 이상한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사는 그를, 얼굴이 검다 하여 세상 사람들은 흑두타(黑頭陀)라 부르지요. 그곳에서 그는 9년 넘도록 꼼짝않고 수행하고 있으니 거기 가서 물으시면 좋은 해몽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삼베옷과 지팡이 하나 즉 간편한 행장으로 토둘을 찾아가 예(禮)를 올리고 나아가 찾아온 뜻을 말한다.


“풀집을 얽고 사는 가난한 속인[人]이 의문 나는 일을 판단코자 하여 찾아왔으니 부디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답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냐’는 스님의 반문(反問)에 이성계는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의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며 제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허름한 집에서 나왔습니다.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암시일까요”


다 듣고난 스님은 옷깃을 여미며 말한다.


“모두 앞으로 임금이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꿈입니다. 1만 집의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高貴位:꼬끼요의 音讀]를 경하(慶賀)하는 것이고 1천 집의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御近當]을 알리는 겁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또 서까래 셋을 사람이 지면[負] 임금‘왕(王)’자(字)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성계에게 당부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큰 일은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닌 만큼 이곳에 절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왕될 꿈을 해몽한 절’이라는 뜻으로 석왕사(釋王寺)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서둘러 짓지 말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5백 성인을 모셔다 재[五百聖齎]를 올리면 반드시 왕업(王業)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십분 조심하십시오.”


이성계는 자리를 물러나 예를 올리며 말한다.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큰 일이 원만히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성계는 1년 만에 절을 짓고 5백성 재를 올리는 한편 3년 동안 불공을 드렸는데 아무도 그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몰랐다.

고려 우왕(禑王) 14년(戊辰)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략하게 했다. 4월초 이성계는 의주(義州)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5월중 압록강을 건너 강 속의 섬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대의(大義)를 밝혀 군대를 되돌렸다. 공양왕(恭讓王) 4년(壬申, 1392) 7월 16일 이성계는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임금 자리에 오른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곧 설봉산 토굴의 스님을 찾도록 하여 왕사(王師)로 봉하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無學)이다. 무학은 토굴에서 나와 태조(太祖) 이성계를 위해 그 조상들의 산소를 옮기고 나라의 새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다.

《청야만집(靑野漫潗)》에는 이태조가 즉위 직후 사람을 시켜 무학을 찾게 하는 이야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이태조는 조선국을 건국한 뒤 영(令)을 내려 무학을 찾았다. 이에 함께 무학을 찾아나선 세 도(道)의 방백(方伯:도지사)들은 황해도 곡산(谷山)지방에 이르러 ‘고달산의 조그마한 암자에 한 고승이 홀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시종하던 측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고달산 골짜기로 들어가 소나무 가지 끝에 방백의 관인(官印)을 걸어놓고(비렸다는 뜻)짚신을 끌며 그리로 달려갔다. 초암(草庵)에 다다르니 한 스님이 쇠코잠방이[犢鼻]를 입은 채 손수 채소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방백이 다가가 물었다.


“이 암자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노승이 지었습니다.”
“뭘 보고 이런 곳을 택하여 절을 세웠습니까”
“세 개의 관인(官印) 형상을 하고 있는 저 삼인봉(三印峯)때문이지요.”
“무엇 때문에 삼인봉이라고 부릅니까”
“저 앞의 세 봉우리가 곧 삼인(三印)의 형국입니다. 만약 이곳에 절을 지으면 삼도의 방백이 골안의 나무 위에 관인을 벗어 거는 그러한 응험이 있게 됩니다.”


삼도 방백들은 노승이 말을 마치자마자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분은 틀림없이 무학일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들은 무학과 함께 돌아와 조정에 글을 올려 일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이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무학을 스승의 예(禮)로써 섬기는 한편 그에게 새 도읍지 선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무학은 이에 한양(漢陽)에 이르러,

“인왕산(仁王山)으로써 진산(鎭山)을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삼아 도읍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도전(鄭道傳)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자고로 임금은 모두 남향(南向)하여 나라를 다스려왔습니다. 동향(東向)하여 다스렸다는 예는 없습니다.”


무학은 무한한 아쉬움을 표하며,

“내말을 좇지 않으면 2백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라 때 의상(義湘) 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山水記)》에는 한양도읍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제 5대(代)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 한 지 2백년쯤 뒤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國難)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의상(義湘)대사 《산수기(山水記)》에서 말하는 ‘스님’은 무학(無學)을 가리키고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정도전(鄭道傳)을 지칭하는 것이다. 의상이 8백년 뒤의 일을 미리 아는 것이 마치 부절(符節)이 맞듯 꼭 맞으니 어찌 세상만사를 꿰뚫어 보는 성스러운 스님이라 아니 하리오! 팔역지(八域志)》에는 무학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에게 조선의 수도(首都)를 정하게 하자 무학은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로부터 맥(脈)을 찾아서 만경(萬景)에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비석봉[碑峰]에 다다르니 글씨가 새겨진 큰돌이 보였다. 그 돌에 쓰여진 글씨를 자세히 보니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리라’는 뜻의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여석 글자였다. 이는 곧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 국사가 세운 것이다. 무학은 이에 길을 바꾸어 다시 만경으로부터 정남쪽으로 걸어 가다가 백악산(白岳山) 아래 이르러 세 개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들[坪]을 이룬 것을 보고 마침내 궁궐터를 정한다. 그곳은 곧 고려 때 조선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오얏을 심은 곳이다. 바깥성[外城] 쌓을 자리를 놓고 무학과 선비들의 의견이 엇갈려 성의둘레와 거리[遠近]등을 결정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밤에 천하를 모두 뒤덮기라도 하려는 듯 많은 눈이 내려 안으로는 깎이고 밖으로는 계속 쌓여 성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태조는 이에 명령을 내려 눈을 좇아서 성을 쌓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이다.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38년, 조선 태조 14년(1405,太宗 5년임)을유(乙酉) 9월 11일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 79세였다. 1407년(丁亥) 스님의 영골(靈骨)을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회암사에 모셨으며 1410년(庚寅) 탑명(塔銘)을 짓고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무학(無學) 세 존자(尊者)의 사당(祠堂)을 석왕사에 세웠다. 그리고 편액을 내려 석왕사(釋王寺)라 했다. 이곳 석왕사에는 태조와 숙종, 영조의 친필이 있으며 또한 숙종ㆍ영조ㆍ정조가 직접 쓴 기록들이 남아 있다. 시호를 추증하여 묘엄존자(妙嚴尊者)라 했다. 정조 임금때 스님의 비석글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