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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익대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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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익(謙益)은 백제의 승려로 생몰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무령왕(武寧王)과 성왕(聖王)의 재임기인 4세기 초엽부터 중엽까지 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무령왕은 발정(發正)을 중국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겸익 역시 이 같은 후원에 힘입어 불교 문화의 원류를 찾아 그 정수를 배우고자 무령왕 22년인 522년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동시대 인물인 겸익과 발정은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나름대로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다. 발정이 닦는 법화수행과 겸익의 교학(敎學)은 수레의 양바퀴처럼 하나라도 없으면 불교는 생명력을 잃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서해를 건너 남중국을 거치는 험난한 해로를 통해 인도에 도착한 겸익은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를 찾아갔다.
겸익이 중인도로 간 까닭은 다른 지역에는 율이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원본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겸익은 대율사에서 꾸준히 범어와 율장을 배웠는데, 이미 백제에서 범어를 접한 겸익의 공부는 눈이 부시도록 진척이 빨랐다.

그러던 어느 날 겸익은 중국에서 온 승려들을 통해서 무령왕이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고민에 빠진다.
“아직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내게 그토록 기대를 걸고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어버이와 같은 분이 돌아가셨으니 귀국을 하는 것이 도리일 게야.”
결국 백제를 떠난 지 5년만에 겸익은 율장을 비롯한 많은 경전을 배에 싣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 4년인 526년, 겸익이 백제의 수도 웅진에 도착하자 성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마중하였다.
부왕인 무령왕 때부터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었고, 겸익이 인도로 떠날 때 함께 전송을 했기에 그의 무사귀환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5년만에 다시 재회한 두 사람은 새로운 백제, 불국토의 백제를 만들기 위하여 의기투합했다.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興輪寺)에 머물게 하였다.
흥륜사는 ‘법륜을 굴리는 절’이라는 뜻으로, 성왕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빗대어 불교이상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미륵이 하생하여 3번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때 중생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이 계율의 실천이었기에, 성왕은 율장을 가져 온 겸익에게 크나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성왕은 그즈음 중앙 정치의 효율성을 위하여 6좌평제를 22부사로 개편하는 등 정치제도 운영을 개혁하고 있었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당시 불교승단의 운영과 통제가 먼저 정리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백제불교는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경전(漢譯經典)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한역되지 않은 경전이 있는 불교교학의 이해에 있어 한계가 있었다.
겸익이 인도로 가서 직접 범본을 구해 온 것도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범본 가운데 특히 율장(律藏)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율은 작게는 승려 개인의 계율에서부터, 크게는 전체 승단의 질서를 잡는 틀이 되었으며 나아가 국가의 제도정비를 측면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기도 했다.
겸익은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을 비롯한 이름난 승려 28명을 흥륜사로 불러들여 인도에서 가져온 범어(梵語)로 된 아비달마에 관한 논소(論疏)와 5부의 율장의 번역 사업을 시작했다.

겸익이 평생을 거쳐 이룩한 아비달마와 율의 정비는 이후 백제불교가 한 단계 진전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 불교는 예의와 의식에 치중하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으며, 그 뒤 일본 율종의 토대가 되었다.
백제의 율이 완비되자, 후세 사람들은 겸익을 '백제 율종의 비조(鼻祖)'라고 이름하였다.
역본을 완성한 얼마 후, 겸익은 꿈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났다.
손에 광명주를 들고 나타난 관세음보살은 “불경 번역이 무척 잘되었도다”라는 칭찬의 말을 하고는, 돌연 커다란 새로 변하여 임천 가림성으로 날아갔다.

겸익의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왕은 그 자리에 큰 절을 짓도록 했다.
워낙 대규모의 공사였으나 불철주야 서두른 끝에 5년만에 절은 완공되었고, 준공법회에는 성왕도 멀리 웅진에서 찾아와 참석하였다.
성대한 법회가 끝날 무렵, 황금빛의 큰 새가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 신비스러운 일로 대조사(大鳥寺)라 부리게 된 이 절은 그로부터 백 수십 년간, 웅진으로부터 소부리로 천도한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성흥산성의 영장으로서 존속하였으며, 18만 나당연합군이 공격을 해왔을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은 신력(神力)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