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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이야기七世 薛花郞 (7세 설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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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薛花郞 (7세 설화랑)

원문

七世薛花郞 初名薛原郞 金珍娘主之私子也 其父薛成以郎徒美皃善媚爲仇梨知40)龍陽臣 仍通于娘主而生也 美風彩善玉笛而 出微之故郎徒無奉意 而美室以上寵 號令郎徒 使之隸屬 郎徒不敢多言 美室常以珍寶下賜之物以遺薛原曰 母自有以懷汝郎徒也 薛原乃得數人爲心腹 及爲七世風月主 以美生爲副 乃屈折下士 散財懷人 郎徒咸服之而猶有未洽

美室乃勸原娶毛郞公寡妻俊華娘主 娘主時年三十八 寡居十八年 復得花郞爲夫 遂生子薛雄 於是諸徒賀之曰 魏公之孫 無復有不服之人

原素與美室相通 至是益無忌憚 俊華知之而不能禁 先是俊華女俊毛 因美室得通于銅太子 至是又欲納金太子 薛原沮之曰 事銅太子之事 聖上知之 又納金太子則 上知之則 必不悅于吾夫妻矣 俊華曰 郞君之言善矣 乃命俊毛爲尼 毛不肯 原乃誘以通之 歲餘有娠 俊華知之怒曰 沮納太子而自私之 是何道乎 原乃求乞于美室 美室乃使美生娶之而事平 俊毛乃生薛原女于美生 名美毛 郎徒不知之

時文弩一派從世宗于外 有戰功而不得位 不服於薛原郞 自立一門 於是郎徒遂分 薛派以爲正統在我 而文派以爲淸議在我 互相上下 美室憂之 使世宗和之 不得而 眞興大王崩 美室雖有寵於新主 而未若知道夫人 知道之父起烏公 與文弩爲從兄弟 故知道素服於文弩 乃勸王立文弩爲國仙 以秘宝郞副之

文弩之徒 好武事多俠氣 薛原之徒 善鄕歌好淸遊 故國人指文徒爲護國仙 指薛徒爲雲上人 骨品之人多從薛徒 草澤之人多從文徒 互相磨義爲主

眞智大王以美室之故得立 而好色放蕩 思道太后憂之 乃與美室議廢之 乃使弩里夫公行之 弩里夫公乃思道之兄也 與美室之夫世宗將擧大事 恐文弩之徒不服 以太后命合 兩徒爲一 復奉美室爲源花 世宗爲上仙 文弩爲亞仙 薛原秘宝爲左右奉事花郞 美生爲前方奉事花郞 以鎭之 以此文弩之徒 多以微賤之人 擢爲高官 草澤之人降順之徒 以爲出身之門 而奉文努如神

美室乃知薛原之不及文弩 乃命文弩爲仙道之師 使薛原美生等師事之 薛原之徒多有不平 原曰 寵主之命不可抗也 乃屈膝事之 以此文弩之徒 亦善服於薛原 美室喜之 使讓其位於文弩 文弩曰 國仙不下風月主 且子爲我弟 旣有以師受弟乎 薛原曰 國仙雖是前王所立 非風月正統也 且世宗殿君以王子之貴 尙繼斯多含公 况我奉事師兄以美室宮主之有命故也 今美室宮主 又命讓位 故不敢背也 文弩曰 宮主旣有命 臣亦何敢反乎 乃繼之

花郞之法 後繼者下拜于前主而稱臣 讓位之日 美室與世宗同車而至 薛原備服 捧印簿劒仗 以獻于美室·世宗而 先拜美室 次拜世宗而退立 世宗問於美室曰 文弩於薛原道脉則師 統脉則弟 當何居 美室曰 薛原我之寵臣且正統之兄也 文弩雖師 非正道也 安可不拜乎 世宗乃命薛原坐于美室之側 文弩備服 膝行詣之 先拜美室 次拜世宗 次拜薛原而 俯伏叩頭辭以不(材) 美室乃授印符曰 無忝爾兄 文弩受?○○ ○(宗)乃授簿書曰 無忝爾? ○○○○○○ (薛)原乃授劒仗曰 無忝爾? ○○○○○? (古)者必擇公主之未嫁者爲?○○○印簿 前主授劒仗 至是美室始行(三??)法 自此以後 必下拜于薛原而稱臣

美室聞而喜之 乃謂薛原曰 吾所以使汝先屈者 以有今日也 薛原拜謝曰 臣之一髮一膚無非寵主有也 又何多言乎文弩以國仙爲花郞之首 故曰仙花 弩徒有不平者 謂弩曰 仙花先師而後弟 無乃宮主所賣者乎 弩叱之曰 宮主乃殿君之所奉也 安敢有言乎 以此其徒莫敢復言 盖文弩之志非爲美室 而乃爲世宗也 世宗奉事美室 猶恐不及 故文弩不得不屈也

薛原旣讓位 從美室于永興寺 擇其手徒出入護之 以爲私臣頭上 後加號彌勒仙花 終始于美室者薛原也 終始于世宗者文弩也 盛矣至矣

公以建元十四年生 以建福二十三年七月卒 時美室宮主以奇疾數月不起 公晝宵侍側 夜必禱以身代 竟以其疾代身 美室及起哀之 自以衵服幷葬曰 吾亦不久從汝于天矣 時年五十八

公有五子七女 正宮夫人俊華娘主 生長子雄次子仍皮嫡女淨金娘主而卒 美室宮主命娶開元娘主 生子忠竹善竹 生女開○開川善月良月六人 美室宮主?○○○一宝宗殿君爲公所生蘭?○○○○○○ 雨若公主卽予祖母也 仍(皮)○○○(元曉)之祖也 薛氏於是而大昌 其?○○○于先也

역주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이다. 금진낭주(金珍娘主)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仇梨知)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인하여 낭주(娘主)와 통(通)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받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미실이 임금의 총애로서 호령하여 낭도들을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하였다.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너의 낭도를 잘 타일러 보겠다” 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사람들에게 몸을 굽히고 재물을 풀어주어 사람을 위로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는데, 오히려 미흡함이 있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공(毛郞公)의 과처(寡妻)인 준화낭주(俊華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지 18년이었다.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인 설웅(薛雄)을 낳았다.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위화랑공(魏花郞公)의 손자이다” 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원랑은 평소에 미실과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준화(俊華)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준화(俊華)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동태자와 통(通)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금태자에게 바치려 하였다. 설원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동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100)이 아는데 또 금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101). 준화가 말하기를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다.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졌다.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서 미모(美毛)라고 하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그 때 문노(文弩)의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位)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자립하여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102). 그리하여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103)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진지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부인(知道夫人)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도의 아버지인 기오공(起烏公)은 문노(文弩)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104) 삼고 비보랑(秘宝郞)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협기(俠氣)가 많았다.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하고 청유(淸遊)를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도(文徒)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고 하였고 설도(薛徒)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骨品)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도를 많이 따랐다105).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진지대왕(眞智大王)은 미실(美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106)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思道太后)가 걱정을 하였다.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107). 노리부공(弩里夫公)108)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思道)의 형109)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개의 도(徒)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110).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左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111). 이로써 문노의 도(徒)는 미천한 사람으로 높은 관직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초택)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112).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師)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랑의 도(徒)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다. 설원이 말하기를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하고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주도록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설원이 말하기를 “국선이 비록 전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世宗殿君)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師兄-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는 까닭에 감히 거역할 수 없다.” 하였다. 문노는 “궁주(宮主)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臣)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이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稱臣)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 ·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세종이 미실에게 물어 말하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脉)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脉)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 하였다113).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다.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질이 없습니다.”하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符)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세종이)… 이에 부서(簿書)114)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劒仗)을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을 삼아 … 인부(印簿)를 …하였다. 전주(前主)가 검장(劒仗)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天 · 地 · 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이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설원이 절하며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寵主)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어찌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仙花)115)라 하였다. 문노의 도(徒)에 불평하는 자가 있어 문노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화(仙花)가 먼저 스승(師)이 되었다가 후에 제(弟)가 된 것은 궁주에게 팔아 먹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궁주는 전군이 받드는 바이다. 어찌 감히 말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에 그 도(徒)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대개 문노의 뜻은 미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이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문노는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永興寺)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私臣頭上)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彌勒仙花)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죽었다.116) 그 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奇疾)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 준화낭주(俊華娘主)는 장자인 웅(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嫡女)인 정금낭주(淨金娘主)를 낳고 죽었다. 미실궁주가 개원낭주(開元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인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인 개○(開○)와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미실궁주 …. … 보종전군(宝宗殿君)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난○(蘭○) … . 우야공주(雨若公主)는 곧 나의 조모(祖母)이다. 잉피(仍皮) …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설씨(薛氏)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117). … 보다 앞섰다.

해설

100) 임금의 존칭이다.

101) 이는 신라시대에 남녀관계가 난잡한 것만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102) 화랑도에 파가 갈리는 장면이다.

103) 붕(崩)으로 나오고 있다.

104) 풍월주가 아닌 국선의 임명을 왕이 한 것을 볼 수 있다.

105) 화랑도에 파가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06)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思道)가 대원신통이었기에 진지 역시 대원신통이었다. 미실도 그의 어머니인 묘도가 대원신통이었기에 진지왕과 같이 대원신통이었다. 그에 비하여 진평은 진골정통인 만호의 아들로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다. 진지왕과 진평왕은 각기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으로 계통을 달리하였다.

107) 진지왕의 폐위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문제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때문에 폐위된 것을 알 수 있다.

108)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노리부가 진지왕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상대등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109) 실제는 노리부공이 사도의 오빠다. 신라인들은 오빠를 형으로 부룬 것을 알 수 있다.

110) 당시 왕의 폐위에 화랑도가 개입된 것을 알 수 있다.

111) 화랑도가 원화, 상선, 아선, 좌우봉사화랑, 전방봉사화랑 등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112) 일반 백성들도 낭도가 되어 활동을 하면 관등을 부여받고 관직을 갖게된 것을 보여준다.

113) 도맥(道 )은 선도(仙道)의 맥을 뜻하고 통맥(統 )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인통(姻統)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14) 관청의 출납전, 관청의 문서를 의미한다.

115) 국선화랑을 의미한다.

116) 졸(卒)이라고 나오고 있다.

117) 잉피, 원효로 이어지는 설씨집안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설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설씨집단과는 그 계통이 달랐던 것으로 신라인들이 인식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저자/역주자: 金大問(김대문) / 이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