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신라화랑 디지털콘텐츠대야성 전투

연관목차보기

대야성 전투

사건명 : 대야성 전투
사건연도 : 642 - 642
연호 : 선덕여왕 인평 9 - 9
장소1 : 대야성
장소2 : 고구려
장소3 : 당항성
장소4 : 대매현(신라)

관련내용1
원문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역문

(이 해:선덕여왕 때) 신라가 백제를 치려고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해설

김춘추의 청병은 고구려측 기록에도 나오고 있다. 청병을 고구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춘추는 고구려에서 생명을 구해 탈출할 수 있었다.

출처

三國史記, 金富軾, 권 21, 고구려본기 9, 보장왕 상, 즉위조

관련내용2
원문

八月, 遣將軍允忠領兵一萬, 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萬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역문

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합천)을 공격했다. 성주 품석(品釋)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였는데,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부여)에 전하였다. 남녀 1,000여 명을 생포하여 나라 서쪽 주현(州縣)에 분거(分居)하게 하고 군사를 머물려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을 논상(論賞)하여 말(馬) 20필과 곡(穀) 1,000석을 주었다.

해설

백제 장군 윤충의 대야성 함락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나오고 있다. 윤충은 백제로부터 논공의 대상이 되어 상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三國史記, 金富軾, 권 28, 백제본기 6, 의자왕 2년

관련내용3
원문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 又與高句麗謀欲取党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湌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 冬, 王將伐百濟以報大耶之役, 乃遣伊湌金春秋於高句麗以請師, 初, 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 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鄰, 伹威刦行人, 以要歸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囚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역문

가을 7월,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8월,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당에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에게 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공격해 함락시켰는데 도독(都督) 이찬(伊飡)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 · 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의 싸움을 복수하려 하였다. 이에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성의 패전에서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을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 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신(臣)이 사신으로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본래 춘추의 이름을 들었는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후에 그를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장사봉시(長蛇封豕)가 되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므로 우리 임금이 대국의 병마(兵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하집사(下執事)에게 명을 전달하게 한 것입니다." 고 하였다. 고구려 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니 네가 만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보내면 군사를 보내 주겠다." 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신(臣)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청한 것인데, 대왕께서는 환난을 구하여 이웃과 친선하려는 것에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받을 것을 요구하시니,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노하여 (춘추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의 행군은 한강을 지나 고구려 남쪽 변경에 들어섰다. 고구려 왕이 이것을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왕이) 유신을 배(拜)하여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산군)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출처

三國史記, 金富軾, 권 5, 신라본기 5, 선덕왕 11년

관련내용4
원문

竹竹, 大耶州人也, 父郝熱爲撰干, 善德王時爲舍知, 佐大耶城都督金品釋幢下, 王十一年壬寅秋八月, 百濟將軍允忠領兵, 來攻其城, 先是, 都督品釋見幕客舍知黔日之妻有色, 奪之, 黔日恨之, 至是, 爲內應, 燒其倉庫, 故城中兇懼, 恐不能固守, 品釋之佐阿湌西川【一云沙湌, 祗之那】登城謂允忠曰, 若將軍不殺我, 願以城降, 允忠曰, 若如是, 所不與公同好者, 有如白日, 西川勸品釋及諸將士欲出城, 竹竹止之曰, 百濟反覆之國, 不可信也, 而允忠之言甘, 必誘我也, 若出城, 必爲賊之所虜, 與其竄伏而求生, 不若虎鬪而至死, 品釋不聽, 開門, 士卒先出, 百濟發伏兵, 盡殺之, 品釋將出, 聞將士死, 先殺妻子而自刎, 竹竹收殘卒, 閉城門自拒, 舍知龍石謂竹竹曰, 今兵勢如此, 必不得全, 不若生降以圖後効, 答曰,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遂力戰, 至城陷, 與龍石同死,

역문

죽죽(竹竹)은 대야주(大耶州:지금의 합천)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외위(外位)로 내마(奈麻)에 준함)이다. 선덕왕 때에 사지(舍知:제13등)가 되어 대야성(大耶城)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의 당하에서 보좌하였다. (선덕왕)11년 임인(壬寅:642) 8월,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도독(都督)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색이 있음을 보고 빼앗은 일이 있었다. 검일이 이를 한으로 여겼다. 이 때에 이르러 (적에게) 내응하여 창고를 불지르니, 이 까닭에 성중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능히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혹은 사찬(沙飡) 지지나(祗之那)라고도 함]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이르기를, "장군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기를 청한다. "고 하니, 윤충이 "만일 그와같이 한다면, 공과 더불어 같이 좋아하지 아니할 경우, 저 백일(白日)을 두고 맹세하겠다." 고 하였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사들에게 권하여 성 밖으로 나가려 하였는데, 죽죽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백제는 반복(反覆)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만일 성에서 나간다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니, 항복해서 살기를 구하는 것은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만 못하다." 고 하였다. 품석이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군사들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일으켜 모두 죽였다. 품석도 장차 나가려다가 병사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죽죽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앞장서서 막았는데,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이르기를 "지금 전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서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 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 말이 당연하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한 것은 나로 하여금 세한(歲寒)에도 (소나무처럼) 퇴색하지 않고, 꺾일지언정 굴하지 않게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어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힘써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해설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칠 때, 죽죽이 항복하지 말도록 만류했다. 그러나 품석과 고타소가 항복하여 죽임을 당하고 죽죽 등도 전사했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죽죽의 가족들을 왕경으로 이주시켜, 골품 신분을 주었다.

출처

三國史記, 金富軾, 권 44, 열전 7, 죽죽

관련내용5
원문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相飮, 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則可療也, 然海中無▩,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本大國地, 令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此與本記眞平王十二[善德王十一]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역문

선덕대왕(善德大王) 11년 임인(壬寅:서기 642), 백제가 대량주(大梁州:지금 합천)를 함락하였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것을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공(公)과 한 몸으로 나라의 고굉(股肱)이 되었다. 지금 내가 만일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 " 라고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공이 만약 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마당)을 짓밟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국인(國人)을 볼 것인가? " 라고 하였다. 춘추가 감격하여 기뻐하며, 공과 더불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마시며 맹세하기를,
"내가 날짜로 헤아려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일 이 (기일을)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서로 작별하였다.

후에 유신이 압량주(押梁州:지금 경북 경산) 군주(軍主)가 되었다. 춘추가 훈신사간(訓信沙干:8위 사찬(沙飡))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두사지사간(豆斯支沙干:사찬)이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었다. 이미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수상) 개금(蓋金:연개소문)을 보내어 맞아 관사를 정해 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누가 고구려왕에게 고하기를
"신라 사자(使者)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도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은 횡문(橫問)을 하여 그가 대답하기 어렵도록 하여 욕을 보이려고 말하기를,
"마목현(麻木峴:조령)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 나라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춘추를) 가두고 죽이려다가 아직 행하지 않았다. 춘추가 청포(靑布) 300보(步)를 몰래 왕의 총신인 선도해(先道解)에게 주니, 도해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한창 술이 무르익었을 때 (도해가) 농담으로
"그대도 일찍이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를 들었는가?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 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중(海中)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한 거북이가 용왕에게 자기가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아뢰었다. 마침내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하는 말이, 바다 속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 아름다운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하니, 네가 가기만 하면 편히 지내고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토끼를 등 위에 업고 헤엄쳐 2 · 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에게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오직 토끼 간만이 약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로움을 불구하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하였다. 토끼가 (그 말을 듣고) 아,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日前)에 속이 좀 불편한 듯하여 간(肝)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감언(甘言)을 듣고 바로 왔기 때문에 간이 아직 거기에 있다. 어찌 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쪽이 다 좋은 일이 니겠는가? 하였다. 거북이가 그 말을 믿고 돌아가니, 언덕에 오르자마자 토끼는 풀 속으로 들어가며 거북이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구나.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겠는가? 하니, 거북이가 어리석어 조용히 물러갔다고 한다." 하였다. 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왕에게 글월을 보내어 말하기를,

"두 영[嶺: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臣)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 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유신은 국내(國內)에서 용감한 장사 3,000명을 뽑아 놓고 함께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일에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烈士)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죽음에 나서면 백 사람을 당하니, 백 사람이 죽음에 나서면 천 사람을 당하며, 천 사람이 죽음에 나서면 만 사람을 당하는 것인즉, 그렇다면 천하를 횡행(橫行)할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宰相)이 다른 나라에 잡혀 있는데, 어찌 무서워서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할 것이랴? "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가더라도 감히 장군(將軍)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왕에게 청하여 떠날 날짜를 정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첩자인 중 덕창(德昌)이 이 일을 왕에게 고하게 하였다. 왕은 앞서 춘추의 맹세하는 말을 들었는데, 다시 첩자의 말을 들으니, 감히 다시 붙잡아두지 못하고 후한 예로 돌려보냈다. (춘추가) 국경을 벗어나자 전송하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제에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해 (고구려에) 와서 군사를 청했는데, 대왕은 허락하지 않고 반대로 토지를 구하니, 이것은 신하로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번 대왕에게 글을 보낸 것은 죽음을 면하려 한 것이다 " 라고 하였다[이것은 본기(本紀)의 진평왕(眞平王) 12년[선덕왕(善德王) 11년]조에 써 있는 것과 같은 일인데 조금 다르다. (그러나)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는 것이므로 둘 다 남겨 둔다]

해설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가 연개소문을 만나 청병을 하러 갈 때 유신은 결사대를 거느리고 국경에 가서 머물며 춘추에게 일이 생기면 고구려를 공격할 태세를 갖춘 바 있다. 642년에 김춘추와 유신의 결합 정도를 알 수 있다.

출처

三國史記, 金富軾,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스토리배경1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陜川)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백제와의 접경(接境) 지대인 신라 서부 지방의 요지(要地)로서, 선덕왕 11(642)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다. 의자왕은 즉위 직후에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여 대야성을 비롯하여 신라의 40여성을 공취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백제는 1만의 군사를 보내 대야성을 공취하였고 남녀 1천여인을 사로 잡아 가서 백제 영토 중 서쪽의 주현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년) 대야성의 성주 품석은 자신의 막객인 사지 검일을 아내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검일은 품석에게 원한이 있었는데, 백제가 공격해오자 창고에 불을 질러 이에 내응하였다. 성 안이 흉흉해지자 품석과 아찬 서천은 백제군에 항복하였다. 이 항복에 반대하던 죽죽과 용석은 백제군과의 전투 끝에 사망하였다.(『삼국사기』 47 열전 7 죽죽)

품석과 고타소는 항복 직후 백제군에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삼국사기』 28 백제본기 6 의자왕 2년)과 자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성주와 그 처가 죽었고, 죽죽와 용석이란 장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낸 크게 패한 전쟁이 바로 대야성 전투였다. 이 전투로 서남쪽 지역 곧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축소되었다. 특히 품석의 아내 고타소는 춘추와 보라낭주 사이의 딸인데 고타소의 사망은 신라 왕실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딸을 잃은 김춘추는 자진하여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가 오히려 연개소문에게 억류되기도 하였다. 김유신은 대야성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647년 백제를 쳤고, 이 때 사로 잡은 백제 장수 8인과 고타소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여 왔다. 660년 신라가 백제의 항복을 받은 다음에 법민이 고타소의 죽음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 계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김영사, 2000., 이종욱

『신라의 역사 1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읽은 신라와 신라인 이야기- 』, 김영사, 2002., 이종욱

스토리배경2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그 때 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가 죽었다. 이에 춘추는 백제를 치기 위해 직접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청병을 했다. 춘추의 청병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648년에 당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나 청병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김춘추는 642년에 자기 딸이 죽은 것을 깊이 새겨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김영사, 2000., 이종욱

『화랑』, 휴머니스트, 2003., 이종욱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 소나무, 1999, 김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