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음갈문왕

음갈문왕(飮葛文王 | ?∼?) :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남편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남편이 음(飮)이고, 갈문왕이었다고 전한다. 갈문왕은 왕과 가까운 남자 친족에게 주는 호칭인데, 이것은 왕과 왕비의 아버지나 동생, 그리고 여왕의 남편 등의 경우에 붙여졌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조에 나오는 삼서제(三婿制)에 관한 기록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선덕공주가 왕위계승을 하게 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선덕공주는 용춘을 사신으로 삼았고, 용춘은 선덕을 받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물러났다. 이에 진평왕은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또 자식이 없었다. 왕이 된 선덕은 용춘을 남편으로 삼았다. 그런데 용춘공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물러날 것을 청하자, 군신들이 세 명의 사위를 두는 삼서의 제도에 따라 흠반공과 을제공을 보좌토록 하였다. 여기서 『삼국유사』 왕력편에 나오고 있는 선덕여왕의 남편 음 갈문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와 있다.
첫째, 흠반공이라는 의견이다. 갈문왕은 왕과 가까운 남자 친족에게 주는 호칭인데,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음(飮)’이라는 이름의 한자 음(飮)자는 반(飯)자와 비슷하므로 목판을 찍어낼 때나 필사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될 때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당시에 ‘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진평왕의 동생이자 선덕여왕의 삼촌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둘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또한 『삼국유사』권1, 기이2, 태종춘추공조를 보면 김춘추는 661년에 59세로 사망한 사실을 들어,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 당시 음갈문왕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선덕여왕 즉위시 김춘추가 30세였고 선덕여왕의 여동생인 천명부인의 출산 연령을 20세로 추정하여 선덕여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50세가 넘었을 것이고 음갈문왕의 나이가 선덕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지만, 모두 추정에 그치고 있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첫번째 견해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단서로 ‘음(飮)’이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한자의 음(飮)자는 반(飯)자와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목판을 찍어낼 때나 필사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될 때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 당시 ‘반’이라는 글자를 이름으로 가진 사람이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이라는 추측 또한 가능해진다. 당시에 ‘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진평왕의 동생이자 선덕여왕의 삼촌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 있었다. 따라서 둘 중 한 사람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이 즉위 원년에 백반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고, 국반은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진덕여왕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간이고, 국반은 그의 남편이 될 수 없다. 당연히 백반이 음갈문왕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계는 근친혼이 된다. 근친혼 자체가 형제자매간의 유대관계 강화, 친족집단의 분지화(分枝化) 방지 및 통합 유지 등의 기능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라시대 왕실 혼인관계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는 고려해볼 수 있는 내용이다.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이 자식을 갖지 못하여, 신라의 제도인 삼서제(三婿制)를 따랐다고 전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진평왕의 명을 받아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형제가 선덕여왕과 관계를 가졌다고 하는데, 먼저 용춘이 관계를 가졌고 이후에 용수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군신들의 건의에 의해 흠반(欽飯)과 을제(乙祭)가 왕을 보좌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선덕여왕이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식을 얻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음갈문왕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