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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준비기

원효(617~686)가 활동하던 시대는 삼국의 격변기에 해당한다. 특히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게 될 때(654)까지의 기간을 <삼국유사>에서는 중고(中古)라는 시대로 설정할 만큼 특징이 있는 시대이다. 신라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고 대외적으로도 크게 영토를 확장했다. 먼저 지증왕 때 신라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중국식 왕호를 썼으며 지방통치제도로 주군(州郡)제가 채택되었다. 또한 502년, 508년 2차례에 걸쳐 중국 북조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120년간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회복되었다. 법흥왕 때는 이처럼 다져진 토대위에서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병부 등의 주요관청을 설치(516~517)하며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전반적으로 국가체제를 법제화, 조직화했다. 또한 이때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의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획기적인 조치가 있은 뒤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처럼 국가토대가 다져진 기반위에서 진흥왕 때부터 정복전쟁을 활발히 추진해나갔다. 이미 법흥왕 때 신라는 김해에 위치한 본가야를 정복하여 가야연맹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 가야 여러 나라를 잇달아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세력의 맹주인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신라는 가야 정복과 병행하여 한강유역에도 손을 뻗쳤다. 즉 진흥왕은 백제와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상류지방을 점령했다가 다시 백제군이 수복한지 얼마 후에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결국 한강유역을 독차지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삼국 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이처럼 확대된 영토를 지키는데 모든 국력을 쏟았다.

진평왕 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끈질긴 국경 침범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면서 국내의 지배체제를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618년(진평왕 40) 중국에서는 수(隋, 581~618)나라가 패망하고, 당(唐, 618~907)나라가 건국된다. 621년(진평왕 43) 진평왕은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하면서, 이찬(伊飡) 김용춘(金龍春)을 내성사신(內省私臣)이 삼는다.

624년(진평왕 46)에는 백제 무왕(武王, ?~641)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해에 고구려 영류왕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고조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그러다가 627년(진평왕 49)에 백제 무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다 당나라가 백제·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는 628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의 경계도[封域圖]를 보내기도 하였다.

629년(진평왕 51) 8월 김용춘(金龍春)은 대장군으로 부장(副將) 김유신(金庾信, 595~673)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淸州)을 공격, 5000여 명을 살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김유신은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며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30년 백제 무왕은 사비궁(泗沘宮)을 수리하다가 가뭄 때문에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631년 당나라가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헐어버렸고, 이에 대해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631~647)했고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다.

진평왕의 사후에 왕위를 이어받은 선덕여왕은 632년(선덕여왕 원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했고, 633년(선덕여왕 2)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했다. 634년(선덕여왕 3)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해 백제 무왕은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이를 왕의 유흥지(遊興地)로 삼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하여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635년(선덕여왕 4)에는 선덕여왕은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되었고, 김용춘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을 순무(巡撫)하게 하였다. 638년(선덕여왕 7) 10월에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신라는 11월에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던 중 641년에는 당나라 사신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 지리를 정찰하는 등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점차 긴장되었다.

그렇게 선덕여왕 때는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는데, 642년(선덕여왕 11)에 백제 의자왕이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선덕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겨우 돌아왔다.

643년에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구하여,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그해 백제 의자왕은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았다.

645년 1월에 김유신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한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 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 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해 6월에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 백암, 비사, 개모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안시성으로 향했다.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신라에서 원군을 보냈지만, 신라는 병력의 공백 상태 때문에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다. 연개소문은 고연수, 고혜진에게 15만 병력을 주어 지원하게 했지만 이들 군대마저 패배했다. 그러나 안시성은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지략으로 고립상태에서도 당군과 계속 항전했으며, 음력 9월 18일 당 태종의 철수로 전쟁이 종료되었다. 이처럼 신라는 당과의 외교를 강화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한 국난기에 신라의 지배층들은 한때 분열하여 647년 1월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이 선덕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에 의해서 옹립된 진덕여왕 때 야심적인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해 10월에 김유신은 무산(茂山: 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에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또한 진덕여왕은 김춘추(金春秋)를 중국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했다.

649년(진덕여왕 3) 8월에 김유신은 석토성(石吐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그해 자장, 진덕여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도록 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당 태종의 소위,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가 종식되고, 이치(李治, 당 고종)가 황위를 승계했다.

650년(진덕여왕 4)에 고구려가 도교를 국교로 한 것에 반발해서 보덕(普德) 화상은 백제로 망명했다. 또한 자장은 당나라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는데, 중국의 정삭(正朔)을 시행, 관제를 중국식으로 하고 독자 연호 폐지하였다. 진덕여왕은 김법민(法敏; 훗날의 文武王)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같은 해에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했다.

651년(진덕여왕 5)에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진덕여왕의 명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여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 되었다. 652년에도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653년에 김인문은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뒤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조직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654년 3월에 진덕여왕이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 慶州)에 묻혔는데, 당 고종(高宗)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했다.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유신은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 太宗武烈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 김법민(金法敏; 文武王, 626~681)은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