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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생애

원효스님(元曉, 617~686)의 전기를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800-809)로 불리는 비문의 일부,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의 「원효불기(元曉不羈)」(1281-1283), 중국 송나라의 찬녕스님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의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皇龍寺元曉傳)」(988), 조선후기의 각안스님이 지은 『동사열전(東師列傳)』 권1의 「원효국사전(元曉國師傳)」(1894년 탈고)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의상스님(義湘)의 전기 자료 등,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 나타나는 원효 스님 관련 기록 및 여타 자료들을 통해서 원효스님의 생애를 살필 수 있다. 이들 자료를 활용하여 원효스님의 생애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간추린 전기

「원효스님은 진평왕 39년(大業 13년, 丁丑, 617), 압량군(현재의 경산시 압량면)의 남쪽에 있는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밤나무골(栗谷)의 사라수(娑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부친은 담랄내말(談捺乃末)이었다.

원효의 명호(名號)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일반적으로는 ‘원효(元曉, 우리말로 ‘새벽’이라는 뜻)’라고 불리었고,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 우리말로 ‘새 털’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렸다. 환속한 후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으며, 자(字)는 ‘구룡(丘龍)’이다. 고려의 숙종은 1101년 8월에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원효스님은 15세 전후의 나이에 출가하였다. 출가한 이후에 혜공스님, 낭지스님, 보덕스님 등에게서 배웠다는 기록은 있지만, 특별하게 한 분의 스승을 정해놓고 배우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원효스님의 저술에서도 당시 중국과 신라에서 유행했던 대부분의 불교사상들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특정한 스승을 모시고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원효스님은 의상스님과 동문수학했다고 착각할 만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며, 두 스님의 사상과 실천의 모습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기록에 의하면 두 스님의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귀족이 상류계층보다는 서민 계층이며, 이들과 어우러져 살아감에 조금도 거리낌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원효스님이 저술과 대중교화 활동에 주력한 것과 달리 의상스님은 수행과 제자의 양성에 주력했다는 점이 다르다.

원효스님은 의상스님과 함께 650년과 661년, 두 차례에 걸쳐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유학길 중간에 깨달음을 얻고서 되돌아와서, 이후에 저술 작업에 한동안 골몰하였다. 따라서 원효스님은 66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저술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은 원효스님이 대중교화 활동에 나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요석궁의 과부 공주를 만난 사실이 전해지고, 후에 이두를 창안하게 되는 설총이란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원효스님이 언제 환속해서 자식을 낳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혈사(穴寺)라는 절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만년에는 다시 승려의 모습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짓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서 절필하고 대중교화에 나섰는데, 원효스님의 대중교화 활동 이후에는 신라의 민중들까지 부처의 명호를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저술 및 대중교화 활동에 전념하던 원효스님은 686년 3월 혈사(穴寺)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으며, 아들인 설총이 스님의 유해를 빻아서 소상을 만든 다음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입적 후 100여 년 지난 애장왕 대(800-808)에 현손 설중업과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후대의 헌덕왕) 등이 중심이 되어 비(「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를 세웠으며, 1101년 8월에 고려의 숙종은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사상과 삶의 근본정신

원효스님의 사상과 삶을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은 ‘앎에 모자람이 없었고, 그 앎을 넘어서서 아는 바대로 실천했다’는 점이다. 원효스님의 사상은 불교의 다양한 사상을 망라한 것은 물론 불교 이외에 유교경전이나 노장(老莊)의 경전까지 두루 포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이러한 사상의 다양한 스펙트럼만큼이나 자유로우면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스님은 한적한 산중이나 절간과 시끄러운 장터를 가리지 않고 다녔으며, 사람 역시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만났다. 다만 그러한 다양한 행로 중에서도 끝까지 얽매이지 않았는데, 특정한 형태의 삶을 편벽되게 고집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이타행(利他行)의 삶을 추구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

스님의 사상은 이 땅에 불교의 새벽을 열었다고 자부했을 만큼 큰 것이었고, 스님의 이타행(利他行)은 후대의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이라고 기렸을 만큼 전국 방방곡곡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늘날 전국 곳곳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은 원효스님의 아는 바 그대로 행했던 치열한 삶의 흔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