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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설화와 고려

고려의 건국
고려의 건국과 국호

왕건은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의미로서 즉,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왕실의 기원고

고려사에 인용된 김관의의 편년통록은 고려왕실의 기원이 고구려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장군 호경(虎景)은 송악지역에 내려와 상사찬 강충(康忠)을 낳았고, 강충은 보육(寶育)을 보육의 딸 진의(辰義)는 당 숙종과의 사이에서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다. 작제건은 편년통록에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이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王隆)이다.

고려의 서경 경영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계승의식의 표방과 함께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서경을 적극적으로 경영하였다. 왕건을 계승한 고려의 왕들 역시 고구려의 계승과 고구려 고토의 회복을 내세우며 서경을 북방경영의 중심지로서 활용하였다. 이러한 서경의 중요성은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 더욱 높아졌다.

고려전기의 고구려 계승의식
고려의 대거란 정책과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의 멸망이후 고려와 거란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993년(성종 12년) 고려는 거란의 소손녕이 이끈 80만 대군의 침입을 받았다. 서희는 거란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할지론’을 논박하고 거란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이 회담에서 서희는 고려의 ‘고구려계승’과 고구려 고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강동6주의 귀속권을 인정받았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고구려 계승의식

고려 정부의 ‘서경’에 대한 관심속에서 성장한 서경의 정치 세력들은 ‘고구려계승’, ‘고구려 고토의 회복’, ‘금국정벌’ 등을 주장하며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하지만 개경 중심의 정치세력의 견제에 의해 이들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려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고려후기의 역사인식
이규보의동명왕편(東明王篇)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은 고구려의 시조였던 ‘동명왕’의 생애와 고구려의 건국을 한시의 형식을 빌어 노래한 서사시이다. 여기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건국과정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특히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그 신성함과 장대함이 중국의 그것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일연의 삼국유사

일연(一然; 1206 ~ 1289)의 삼국유사는 관찬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특히, 기이(紀異)편에 실린 ‘고조선’조는 단군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승휴의 제왕운일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을 한시의 형식을 빌어 기록한 서사시이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조선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 기록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이승휴는 단군조선이 신라, 고려, 옥저, 부여, 예와 맥 등 고려로 통합된 모든 민족의 뿌리가 되었음을 명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