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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여행기, 유산기백두산기 - 이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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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기 - 이의철

신미년(1751년, 영조 27년) 5월 24일 경신일.
갑산부를 출발하였다.
오늘은 망종이 지난지 11일째 되는 날이다. 이백흥과 함께 출발하였다. 전 수어 초관 강덕구, 병방 군관 백수회, 그리고 장교 몇 명이 따라왔다. 그밖에 토병과 포수까지 합치면 일행은 모두 40여 명이다. 4, 5일 전에 색리와 운총, 혜산, 별사 등 세 고을의 백성 약 1백 명을 선발대로 보내 길을 닦고, 점심과 유숙할 곳의 임시 숙소를 마련토록 하였다.
타고 갈 말과 천막, 말 먹이 등 여러 가지 여행 물자를 운반하는 말이 모두 16필이었다. 일행은 전립을 쓰고 군복을 입었다. 이것은 평상시 의관으로 산의 나무 사이를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인령에서 점심을 먹었다. 동인령 권관은 유춘빈이다. 저녁에 운총진에서 묵었다. 운총진 만호는 유성협이다. 모두들 전례에 따라 영접하였다. 혜산 첨사 유언진이 또 문안 인사를 왔는데, 운총 만호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5월 25일 신유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운총 만호 유성협이 20리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오시천 부근 인가에서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곧 출발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무인지경이었다. 길이 산골짜기로 접어들자 수목이 빽빽이 하늘을 가려서 해를 볼 수가 없었다. 나무는 유삼목이 제일 많았는데, 화살처럼 곧게 뻗은 이 나무들이 삼마〔麻〕같이 10여 리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 가마를 타고 백덕령에 올랐다. 고개마루의 길은 조금 평평해서 말을 타고 몇 리 정도를 갔다. 내려오는 길은 다시 가마를 탔는데, 돌길이 지극히 험난해서, 가마를 타고 있어도 마음이 불안하였다.
검천이 갈라지는 곳에서 임시 천막을 치고 점심을 먹고 말도 꼴을 먹였다. 가마를 타고 출발하여 검천을 지났다. 검천은 보다산에서 발원하는데 비가 조금만 내려도 사람들이 건너갈 수가 없다. 말을 타고 얼마쯤 가서 서소라령에 도착하였다. 다시 가마를 타고 올라갔는데, 서소라령의 길이 험하고 가파라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겨우 고개마루에 도착하였다. 고개마루 이후부터는 산길이라 해도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것은 백덕령보다 덜 했지만 바바람이 심하였다. 나무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어 사람과 말은 마치 그물 위를 걸어가는 듯했다. 걸리고 넘어져서 지나가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나무 뿌리가 없는 곳은 깊은 진창이었다. 심한 곳은 말의 정강이 부분까지 빠졌다. 어떤 곳은 말이 진창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고 큰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그 위로 지나갔다. 이런 진창이 생긴 것은 고개 위가 두루 평평하게 넓어서 비가 내리면 빗물이 흘러 내리지 못하고 고이기 때문이다.
모기 같은 것들이 따라오면서 옷 위로 사정없이 물었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부채질 하기에 바빴다. 고목이 길 가운데 쓰러져 있는 것이 빈번했다. 가로누운 통나무는 말이 넘어갈 수가 없었고, 사람들이 치우기도 힘이 들었다. 그 중에 반 가량은 이전에 지나갔던 사람들이 나무를 몇 자 정도 깎아 놓아서 근근이 넘어갈 수 있었다. 최근에 쓰러진 나무들은 이번 행차에 길을 내는 일꾼들이 잘라내거나 깎아서 낮추었다. 깎지도 자르지도 못할 나무는 피하여 이쪽 저쪽으로 길을 만들면서 나아갔다. 온통 사방에 수백 척 되는 나무들이 쓰러져 누워 있으니 그 험하고 힘든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30리 정도였다. 그러나 길을 가는 데 3일이나 걸린 것은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 날은 심포에서 묵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5월 26일 임술일.
자개령 아래서 점심을 먹었다. 자개령을 내려올 때는 가마를 타고 절벽 길을 지나왔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 가마를 타고 자개북령에 올랐다. 고개마루에 오르자 지세가 평탄하고 넓은 것이 모두 서소라령과 같았다.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녁에는 임어수에서 묵었다.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5월 27일 계해일.
아침에 출발하여 허항령을 넘었다. 허항령은 평지와 같았다. 상지(上池)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상지는 하지(下池)의 절반쯤 되었다. 가뭄이 심하면 물이 말라 버린다고 한다. 하지는 사방 둘레가 10리 정도였다. 남쪽에는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길에서 조금 들어갔기 때문에 그 곳에 가지는 않고 바라만 보았다. 크기는 상지와 하지의 중간 정도였다. 하지는 사방이 푸른 산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수면은 거울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밝았다. 그리고 중앙에 조그마한 섬이 있어 뛰어난 경관을 이루었다. 이곳에서부터 길의 험한 정도가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천회참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 5리쯤 가니 길이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이곳은 비가 오면 시냇물이 생기지만 날씨가 개이면 모래뻘이 된다. 모래 위에 깔려 있는 것들은 사람들이 소위 거품돌〔泡石〕이라고 부른다. 거품돌 가운데 큰 것은 주먹만하다. 크기가 감만한 것도 있는데, 작은 것은 바둑알이나 밤정도였다. 큰 것을 부수면 모두 잘게 쪼개지는데, 작은 것은 매우 가벼워서 물에 둥둥 뜬다. 나무나 가죽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 돌을 숫돌로 만들어 직업으로 삼았다. 어떤 것이 모여서 이와 같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백두산 근처에만 있다고 한다.
거품돌이 있는 곳을 지나서 위로 얼마쯤 올라가니 거품돌은 없어지고 지세가 절벽같이 된 곳에 도착하였다. 모래가 비에 대부분 쓸려 내려가서 거친 돌들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골짜기 옆으로 올라가면서 돌들을 피해 갔다. 골짜기 중턱쯤에 오르니 모래뻘이 평평하게 필쳐진 곳이 나왔다. 연지봉이 매우 가까이 보였다. 골짜기 양 옆이 평평해지면서 모래길이 점차로 넓어졌다. 눈앞이 탁 트이면서 어둡고 답답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저녁에 연지봉 서북쪽 골짜기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서 묵었다. 여기에서부터 처음으로 절벽의 그늘진 곳에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는 것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연지봉 중턱 아래와 백두산에는 눈이 녹지 않은 곳이 많았다.

5월 28일 갑자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곳은 모두 구릉지대였다. 산록이 빗물에 씻겨나가 언덕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겉흙 위에서부터 수십 자까지는 모두 횐 모래와 거품돌이었다. 겉흙 아래로 산 속살이 드러나 있는 곳은 모두 빈틈없이 자흑석(紫黑石)이 쌓여 있어서 그 모양이 마치 철갑을 두른 듯하였다.
10여 리를 가서 청나라 목극등이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이른바 분수령이다. 분수령은 평지에 솟은 조그마한 언덕으로 높이가 한 자도 되지 않았고 좌우에 얕은 골이 있었다. 본디 샘은 없는데 비가 내리면 물길이 서쪽으로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정계비의 높이는 침척(針尺)으로 한 자 정도였고, 너비는 한 자가 채 못 되었으며 두께는 두 치가 못 되었다. 돌에 글자를 새겼는데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백두산 근처에는 비석을 만들 만한 돌이 전혀 없어서 목극등이 먼 곳에서 이 곳까지 실어왔다고 한다.
비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도착하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세워 기록한다.”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산등성이 한 곳을 오른 후 비로소 가마를 탔다. 가마꾼이 한 차례 휴식한 다음, 서너 식경에 곧바로 연지봉을 올랐다. 연지봉 아래에서부터 백두산의 상봉까지는 30리 정도였다. 백두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매우 높고 크지만 산 아래에서 직접 바라보면 한 개의 작은 산에 불과하다. 그 산세가 평지로 내려올 때까지 몇일이 걸리는 노정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래에서 위로 오르면 점차 높아지기 때문에 마치 평지에서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 북청까지는 모두 백두산 자락에 해당된다. 이 산을 ‘백두’라고 부르는 것은 산에 나무가 없어 멀리서 보면 희게 보이므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사시사철 오직 여름 몇 개월만 빼고 나머지 동안은 눈이 쌓여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백두산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다. 그런데 오직 한 곳만 돌산이 솟아 있고 그 꼭대기는 탁 트여서 일곱 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다. 가운데 큰 연못이 있으니 이것이 소위 천지다.
상봉에 올라가서 천지를 굽어 살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황흘하고 두렵게 하였다. 알지 못하지만 천지 조화의 기묘함이 여기에서 극치를 이루는 듯하다. 천지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서는 주위 둘레가 80리라고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10리, 아니면 5리 정도에 불과하였다. 남북으로는 조금 길고 동서로는 조금 짧았는데 대체적으로 둥근 모양이었다. 천지의 수면에 얼음이 가볍게 얼어 있었다. 물 색은 푸른 빛을 띤 검은 색이었으며 또한 녹색도 있었는데 조금도 흐리거나 탁한 기색이 없었다. 사방을 에워싼 석벽은 위태롭게 깎아지른 듯이 서서 천지를 향하여 굽어보고 있었다. 한 곳도 비어 있는 곳이 없어서 흐르는 물이 밑으로 흘러갈 수 있을 듯하였다.
정북쪽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그런데 천지 부근에서 끊겨 열려 있어 천지 물이 그 사이로 흐른다. 이름하여 ‘천상연’이라는 것이 영고탑 지역으로 흘러들어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된다는 설은 모두 잘못되었다. 석벽의 높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석벽의 윗부분에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뾰족하게 서 있는데 마치 소뿔같기도 하고 칼 같기도 하였다. 그 모습 전체를 형용하자면, 연꽃으로 휘장을 두른 듯하였다. 상봉 아래에는 또한 세 개의 뾰쪽한 석봉(石峰)이 천지로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데, 약간의 사이를 두고 상봉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었다. 비록 섬은 아니지만 그 산맥이 연결된 곳이 곧바로 천지 부근의 평지이다. 상봉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백두산 아래의 여러 산들이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또는 평평한 산록같이 보였다.
이 산이 뻗어 나간 줄기를 알고자 하여 멀리 서북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리 여러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둘러 서 있는데 그 이름이 고다산이다. 서남쪽의 방향으로 길고 평평한 산이 하나 있었다. 이름을 피목령이라고 한다. 산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토성으로 여러 산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이름은 서대령(西大嶺)이다. 산맥이 차차로 달려오다가 우뚝 솟아 이 산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서북으로 멀리 보이는 곳은 모두 청나라 땅인데, 매우 광활하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컨대 이곳은 오곡이 자라지 않아서 오랑캐도 살 수 없는 곳이다. 동북쪽으로는 육진(六鎭)과 조금 가까운 곳에 이른바 영고탑이 있는 듯하였다.
백두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구름 끝에 띠처럼 가로 걸쳐 있다. 이것이 바로 보다산이다. 산맥이 뻗어서 장백산, 마운령산, 마천령산 등 여러 산이 되는데, 모두 우리 나라의 지경 안에 있다. 보다산은 소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삼고, 소백두산은 대백두산을 조산으로 삼는다. 이른바 분수령은 소백두산에서 내려오던 산맥이 협곡을 지나다가 북북서쪽에서 맥이 떨어져 평탄하게 되었다. 좌우에서 옹위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다. 이것이 바로 풍수설에서 말하는 “협곡을 지나는 곳은 바람을 맞지 않는다.〔過峻處不受風〕”라는 것이다.
백두산의 천지를 에워싸고 있는 일곱 개의 봉우리는 모두 화성(火星)이다. 소백두산도 또한 화성이다. 보다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성(土星)이 된다. 중간의 봉우리나 산세는 멀리서 본 것으로 상세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다만 풍수설로 논하였다. 백두산의 일곱 봉우리는 하나의 산으로 보이는데 그 꼭대기는 탁 트였다. 백두산은 청나라와 우리 나라 여러 산들의 조산으로 가장 빼어났다. 그러나 소백두가 흡사 비박하게 떨어져 나와 있고, 또 산이 너무 높기 때문에 좌우에 뻗어 나온 산들이 모두 낮고 적어서 옹위하기에 부족하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산세는 부득불 그렇게 된 것인가? 이것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천지의 기이한 경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오악(五岳)에도 이러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상봉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나라의 산세는 모두 거칠었다. 그러나 이 산은 절대로 거칠거나 혼탁한 기상이 없었다. 덕을 갖추고 밝고 깨끗한 기상은 우리 나라 큰 산들 가운데 최고다. 그래서 우리 산천의 조종(祖宗)이 되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나라가 소중화(小中華)가 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듯하다.
산에 오를 때, 산꼭대기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바라는 대로 관람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꽉 막고 있던 운무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봉우리 위에 올라 천지 동쪽을 굽어보면서 머뭇거리던 것이 조금 오래 되었는데, 운무가 또다시 가득히 에워쌌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상봉에 앉아서 운무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한 식경쯤 지나니 미풍이 부는 듯하다가 사방이 탁 트이면서 원근을 조망하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운무가 씻은 듯이 사라지자, 쌍무지개가 천지 남쪽에 떴다. 위에서 굽어보니 또한 참으로 기이했다. 이날 연지봉 아래로 되돌아와 천회참에서 점심을 먹고 유숙하였다. 총사냥을 잘하는 장교 한 명이 작은 사슴 한 마리를 잡아와서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5월 29일 을축일.
임어수에서 점심을 먹고 자개령에서 유숙하였다.

윤5월 1일 병인일.
심포에서 점심을 먹었다. 검천이 갈라지는 곳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오시천에서 잤다.

윤5월 2일 정묘일.
아침 밥을 먹기 전에 혜산진에 도착하였다. 혜산진 진장 유린지가 머무르라고 힘껏 만류하였고 게다가 비가 와서 괘궁정에서 유숙하였다.

윤5월 3일 무진일.
운총진에서 아침을 먹고 동인진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임지인 갑산의 관사로 돌아왔다. 이곳에 와서 고을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비바람이 불어 날이 흐리고 연일 개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바라던 것처럼 백두산에 올라 유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에 올라 유람한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놀랐다. 이 지역 사람들의 풍속에 산에 들어가면 노루, 사습, 담비 따위를 사냥하기 때문에 반드시 산신령에게 기도한다.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수신(水神)에게 기도한다. 이번 행차에 장교와 하인들이 목욕재계하고 허항령에서 제사를 지냈다. 연지봉 아래에 이르자 다시 제사를 지냈다. 연지봉 숙소에서부터는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거나 농담을 하며 웃지도 않았다.
백두산에 올라 유람할 때에 운무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자 모두 부사의 행차에 산신령이 돕고 있다고 하였다. 이전에 백두산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이번 행차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인마가 병들고 죽거나 하는 사고없이 다녀온 경우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 웃음이 나왔다.
백두산에 들어갈 때 길을 안내하는 백성 20여 명 정도를 선발하여 3일 전에 먼저 보내면 임시 숙소와 길을 닦는 것 등은 충분히 해결된다. 그런데 처음에 산 속의 형편을 알지 못하였던 까닭에 백성을 지나치게 많이 동원하였다. 다음에 유람하는 자들은 마땅히 삼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