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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여행기, 유산기북정록 - 김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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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록 - 김지남

임진년(1712년, 숙종 38년) 2월 24일 정축일.
[평안 감사의 장계(狀啓)편에 중국 연경에서 보내 온 자문(咨文)이르기를,
"예부(禮部)에서 알리노라. 강희(康熙) 50년(1711년, 숙종 37년) 8월 초4일 태학사(太學士) 온달(溫達) 등이 올린 계(啓)에 따르면, 금년에 목극등 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봉황성(鳳凰城)에서 장백산(長白山)까지 우리 변경을 조사하려 한다. 그러나 길이 멀고 물이 커서 바로 그 곳에 이르지 못하니, 내년 봄 얼음이 녹을 때 차사관(差司官)으로 하여금 목극등과 함께 의주 강가에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물을 따라 올라가려 한다. 그리고 만약 배가 전진할 수 없게 되면 육로를 따라 토문강(土門江)에 가서 우리 지방을 조사할 것이다. 이번에 가는 것은 특별히 우리 변경을 조사하려는 것이니 그대들 나라와 관계되지는 않으나, 다만 우리 변경의 육로 길이 요원하고 지세도 매우 험하여 중도에 장애가 있으면, 조선국으로부터 가끔 도움을 받도록 하고자 한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해당 부서의 서명을 받아 조선국의 금년 정사로 온 관원으로 하여금 베껴 가지고 가 그 왕에게 알리도록 하니 이를 준행하기 바란다.]
조선국 진공 정사(進貢正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 등에게 일러서, 베껴 가지고 가서 그 왕에게 주고 조선국에 조회하는 것이 좋겠다. 이를 위해 전번의 사조(査照)와 합하여 시행하니 모름지기 따르도록 하라. 이를 조선국에 자문으로 보낸다."
라고 하였다.

(중략)

2월 28일 신사일. 맑음.
식후에 접반사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님 뵙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접반사는 응당 빨리 떠났어야 할 것인, 지금까지 떠나지 않았다면 빨리 가는 것이 좋겠다. 어제 저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비국 당상이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만약 접대 사항들을 모두 결정한 후에 떠나면 또한 지연될 걱정이 있으니 접반사는 금일 내에 떠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당일 정오쯤에 접반사가 임금님을 뵙자, 어첩(御帖)을 의례대로 하고 예단을 넉넉히 마련할 것을 담당 관서에 분부하라고 어전에서 하교하였다. 임금을 뵈온 뒤에 접반사는 즉시 인사하고 길을 떠났다.
나는 집에 떠날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내일 이른 아침에 뒤따라 출발하겠다는 뜻을 접반사에게 고하고 돌아왔다.

(중략)

2월 30일 계미일. 맑음.
접반사를 따라 새벽에 횃불을 들고 출발하여 금천군(金川郡)에 도착한 후 해서역(海西驛)의 말로 갈아탔다. 평산부(平山府) 총구참(蔥秀站)을 거쳐서 서흥현(瑞興縣)에 도착하여 익연당(益捐堂)에서 잤다. 이 날 170리를 갔다.
(중략)

3월 초2일 을유일. 비옴.
접반사가 장계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행차가 중화(中和)에 도착하여 동지사 선발대를 만나 장계(狀啓)의 초안을 얻어보니 목극등의 행차가 폐사군이 끝난 곳 맞은편으로 온다고 합니다. 폐사군의 끝은 바로 함경도 땅이니 응접하는 일은 의당 함경도에서 하여야 하고 평안도에서 기다릴 일이 아니므로 저희들 일행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우선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조정의 분부를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3월 초6일 기축일. 맑음.
저녁 후에 비변사에서 접반사는 되돌아와 상경하였다가 다시 함경도로 가라는 지시 공문이 도착하였다.

(중략)



3월 15일 무술일. 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양(高陽)에서 점심을 먹은 후, 접반사에게 보고하고 먼저 여현(礪峴)의 산소에 가서 절하였다.
오후에 경영고(京營庫)에 가서 관복을 갈아입고 접반사를 따라 대궐로 가서 복명(復命)하였다. 막 나오려고 할 때에 비변사 관리가 한 장의 시행 지침서를 가지고 와서 접반사에게 바쳤다. 접반사가 보고 나서 나를 불러 보여주었다. 이 날 비변사에서 임금을 알현할 때 접반사 권상유(權尙游)를 우윤(右尹) 박권(朴權)으로 교체하기로 한 바, 박권은 지금 천장(遷葬)하는 일로 원주에 내려가 있으므로 말을 타고 속히 올라오라고 임금께서 재결한 글이었다.
그저께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博)의 장계가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목극등의 행차가 의주를 거치지 않고 심양에서 곧바로 폐군의 끝인 후주(厚州) 땅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청나라 쪽에서는 그 궁벽진 곳으로 들어갈 길이 없으므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삼수, 갑산을 경유하여 들어갈 것이니, 서울에 있는 역관 가운데 통역 잘하는 자를 급히 보내주십시오. "
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함경 감사에게는 유능한 통역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니, 역관 김경문(金慶門)을 별도로 차출 임명하여 말을 주어 내려가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임금께서 이를 허락하였다.

(중략)

3월 26일 기유일. 아침에 비 오다가 낮에 갬.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철원(鐵原)에서 관리하는〔出站〕 풍전역(豐田驛)에 이르렀다. 이 곳은 강원도 땅이다. 부사(府使) 이이만(李頤晩)이 참(站)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공궤(供饋)하는 것이 경기 지방의 고을보다 훨씬 나았다.
역마를 갈아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쇄마(刷馬)편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점심 식사 후 40리를 가서 김화현(金化縣)에 닿았다. 현감은 이병연(李秉淵)이었다. 새참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금성현(金城縣)에 이르러 묵었다. 현령은 홍중복(洪重福)이었다. 이날 130리를 갔다.

(중략)

3월 28일 신해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배로 서진강(西津江)을 건너 가마를 타고 철령(鐵嶺)을 넘었다. 상당히 험한 고갯길이 멀리 30여 리나 이어졌다. 고개 정상에 이르니 이 곳이 바로 함경도와의 경계였다. 안변(安邊)의 안내인들과 함경감영 아전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리를 더 가니 현문령(懸門嶺)이 있는데, 좌우의 암석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문테〔框〕를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그 사이가 매우 좁아서 두 바리를 실은 말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다. 그 아래 15리쯤 더 내려간 곳은 너무나 험준하여 오르내리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만일 문을 만들어 닫으면 만 명의 사람이라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가히 제1 관방(關防)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안변에서 관리하는 고산역(高山驛)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부사 남적명(南迪明)이 병으로 인하여 나와서 맞이하지 못하였다. 또 50리를 가서 석왕사(釋王寺)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100리를 갔다.
석왕사는 안변의 큰 절인데 우리 태조대왕이 세운 절로서 건물들이 장려하고 승려 수도 많았다. 앞에는 용비루(龍飛樓), 흥복루(興福樓)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서쪽에는 오백 나한전(羅漢殿)이 있는데, 나한들이 걸친 가사(架裟)는 창건 당시에 입힌 금단(錦段)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3백여 년이 지났는데도 비단 색깔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주지승이 올린 고적(古跡) 가운데에는 지금 임금님(숙종)이 친히 쓴 제(題)와 발(跋)이 있었으며, 청허자(淸虛子)가 쓴 글도 있었다. 석비(石碑)가 하나 있는데, 글은 시직(侍直) 남학명(南鶴鳴)이 짓고, 글씨는 부솔(副率) 이염(李濂)이 썼으며, 비문의 제목 전서(篆書)는 밀양 부사 이징하(李徵夏)가 쓴 것이다.
고산 찰방(高山察訪) 박성로(朴聖輅)가 접반사에게 와서 뵈었다.

(중략)



4월 5일 정사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함관령(函關嶺)을 넘었다. 고갯길이 높고 가파른 것이 철령보다 갑절은 되어 보였다. 45리를 가서 홍원(洪原)에서 관리하는 함원역(函原驛)에 닿았다. 현감 이진상(李震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25리를 가서 홍원현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70리를 갔다.
읍의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천도(穿島)라는 섬이 있는데 경치가 볼만하다 하여 접반사가 가마를 타고 가 보았다. 내가 또한 수행하였다. 이른바 천도는 포구가에 잇따라 펼쳐 있는 긴 둑으로, 가로로 길게 뻗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둑 가운데에 큰 굴이 뚫려 석문(石門)을 이루고 있었다. 높이는 3길이고 너비는 4길로, 바닷물을 먹었다 뿜었다 하고 그 속으로 배들도 지나가곤 하는데,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조금 남쪽에 언덕이 하나 있는데 평평하여 앉을 만하였다. 앞에는 큰 바다가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좌우에는 여러 섬들이 빙 둘러 바다에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바닷가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또 전복 따는 어부들을 한참 구경한 후에 돌아왔다.

4월 6일 무오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홍원에서 관리하는 평포역(平浦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삼관령(三關嶺)을 넘어 다시 55리를 가서 북청(北靑)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95리를 갔다. 관찰사가 몸이 불편하여 이 곳에 머물렀다.
아들 경문이 북청의 성(城) 남쪽 5리 밖에 나와 맞이하니 매우 기뻤다. 이 곳은 바로 함경남도 병영(兵營)이다.
병사 윤각(尹慤)은 예동(藝洞) 윤 대감의 조카이다. 올 때에 윤 대감이 부탁한 편지가 있어서 곧바로 건네주었다. 우후(虞候) 민진두(閔震斗)와 판관 성임(成任) 또한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먼 변경 땅에서 만나니 더없이 기쁘고 위로가 되었다.

(중략)

4월 19일 신미 비
구가을파지에 머물렀다. 의주부에서 (청나라 목극등) 총관 일행이 이 달 초 6일에 심양을 출발해서 곧바로 두도구(頭道溝)로 향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도착했다. 그간의 일정이 보름길에 해당하는데 아직도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신가을파지 첨사 이여회(李汝晦)가 접반사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는 전(前)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이한규(李漢圭)의 아들인데, 내가 일찍이 무고 감관(武庫監官)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과 함께 근무했고, 병술년(1706년, 숙종 32년) 북경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그의 형 여적(汝迪)과 동행했었다. 이 외딴 변방에서 친구의 자제를 만났으니 피차의 즐거움이 어찌 쓸쓸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때문만겠는가?

(중략)



4월 26일 무인 맑음
새벽녘에 어첩을 받들고 먼저 출발하여 충천령(衝天嶺)을 넘었는데, 고갯길이 후치령이나 함관령보다 더 험했다. 작년에 평안도 강변(江邊)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하루에 몇 개의 큰 고개를 넘었는데, 그 중에서도 벽동(碧潼)의 신리(新里)가 가장 험했다. 그러나 고갯길이 험한 것이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고개의 험하기는 신리 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멀리 뻗은 형세의 시작과 끝이 모두 50리이며, 촉나라의 산길이 지극히 험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와 같을지는 모르겠다.
송전참(松田站)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에 가파른 절벽을 따라 10여 리 정도를 나아가니 강 속에 암석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둘레가 가히 수십 아름이나 되었고 높이는 수백 길이나 되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바라보는 듯했다. 산꼭대기 위에 잣나무 세 그루가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으니, 하늘이 솜씨 좋은 장인을 시켜 깎아 만든 듯하였다. 정말로 빼어난 경치라 하겠다.
또 몇 리쯤 가니 김호연(金浩然)과 아들 경문이 마중나왔다. 그들이 보고하기를,
"간신히 청나라 통관 홍이격을 만났는데, 그가 시위와 함께 마상선(馬尙船) 을 타고 올라와서 말하기를, '금방 거슬러 올라갈 테니 중신(重臣)들께서는 험한 곳을 건너와서 영접할 필요없이 편안한 곳에 머물며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접반사가 말하기를,
"이미 ‘영접'이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험한 곳을 꺼려서 스스로 편안하고자 하겠는가? 다만 채찍질하여 갈 뿐이다."
라고 하였다.
후주에 도착하여 동대파수(東臺把守) 앞에서 멀리 저쪽의 배를 바라보니 바야흐로 노를 저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접반사의 지시로 강가로 달려가니, 홍이격이 나를 보고는 배를 돌려서 왔다. 강가로 올라와서는 모래밭에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우리 사또(접반사)의 안부를 전하니, 홍이격이 감사의 뜻으로 대답하고 나서 말하기를,
"칙사는 초6일에 심양〔盛京〕을 출발했습니다. 이 곳 강가에 도착하여 일행을 둘로 나누어, 총관(摠管)은 많은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 길을 갔고, 시위와 나는 수행원 20명을 거느리고 마상선 10척에 나누어 타고 물길로 왔습니다. 19일에 두도구(頭道溝)를 출발했는데 (조선측) 파수를 바라보고 물으니 숨어버리고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파수마다 모두 그러했습니다. 미리 분부해 놓았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떻게 이와 같았겠습니까?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미리 분부한 것이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으나 촌사람들이 무식하여 한갓 두려움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접반사께서 만일 그러한 일을 아시면 반드시 그 죄를 무겁게 다스릴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들이 저지른 일은 비록 매우 밉지만, 만약 중죄를 입는다면 매우 불쌍한 일이니 반드시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시위의 행차는 지금 거슬러 올라오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강가에 13도구(十三道溝)가 있어 길을 나누어 출발한 후에 매일 밤 각 도구(道溝)에서 만나 함께 잤습니다. 25일부터 서로 헤어져 이미 8도구(八道溝)까지 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총관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거취를 결정하지요."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일행의 사람과 짐을 옮길 말들을 제대로 대기시켜 놓았는지요?"
하고 묻기에,


"평소에는 칙사가 압록강을 건널 때 강변에서 인마(人馬)를 대기시켜 놓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서울로 올라가는 칙사와는 다르고, 작년에 이미 그대들 스스로 말을 타고 짐을 실은 규례가 있었으니 어찌 우리가 미리 대기해야 할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자 홍이격은 깜짝 놀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자문(咨文)에 '잘 보살펴 주라'는 말이 있고, 패문(牌文)에도 '그대나라의 예에 비추어 준행하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금은을 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오. 이것들은 '잘 보살펴 주라는 일'에 불과한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이 같은 일을 일찍 알았다면, 다른 도(道)의 역마(驛馬)를 모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러나 지금 이 도의 형세는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사람들이 드물고 역마 행정 또한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빨리 갖춘다고 해도 지금 그 방도가 전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니,
"총관께서 옥하관(玉河館)에서 그대 나라의 동지 사신(至至使臣)과 더불어 담화할 때 보여 준 황제의 말씀 중에는 조선에 도착하면 인마를 징발해 쓰고 데리고 간 마필은 모두 돌려보내라는 뜻으로 박(朴), 김(金) 두 당상(堂上) 역관에게 재삼 신신 당부하였소. 지금 마필을 대기시키지 않았다고 하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칙사의 행차에 인마를 대기시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황제의 말씀은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만약 신신 당부했다면 박, 김 두 당상이 어찌 동지사 일행에게 말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극히 괴이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 장백산의 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미리 대기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였다.
“김 당상관이 전한 사신의 보고서에는 두 가지 사항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급 통역관 몇 명을 파견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장백산을 조사할 때 길 안내인을 미리 대기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장문에는 이외에 다른 사항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같은 마필 대기에 관한 논란은 피차에게 낭패스러운 일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무릇 일을 하자면 여러 가지 말이 나오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미봉삼아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는 여러 말 말고 빨리 가서 상의하여 좋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총관이 도착한 후에 그대가 만약 이를 말한다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고는, 그는 옷소매를 떨치고 배를 타고 가버렸다.
돌아와서 마필을 갖추어 놓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을 접반사께 보고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양쪽 사이에 끼여 내가 속 태운 일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시위와 홍이격은 동대파수 건너편에서 숙박했는데, 숲속에 천막을 치고 숙소로 삼아 머무르면서 총관을 기다릴 요량인 것 같았다.
저녁에 도차사원(都差使員)인 홍원(洪原) 현감(縣監) 이진상(李震相)과 김호연, 김만희, 이세만 등과 함께 강을 건너, 시위를 찾아가 우리 접반사의 뜻이라고 하고 돼지 한 마리와 쌀 한 섬, 간장과 채소 등의 물품으로 취사를 돕겠다고 했다. 이에 시위는 말하기를,
"음식물을 보내겠다는 뜻은 감사할 만하나, 총관께서 부재중이므로 마음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이격이 말하기를,
"총관은 조선에서 음식물을 보내주더라도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낮에 말한 짐 실을 말에 대한 것은 깊이 유의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전과 같이 대답은 하였지만 어찌 근심이 크지 않겠는가? 여러 사람이 돌아와서 강변에 친 천막에서 잤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중략)



4월 29일 신사 저녁에 비
아침 8시쯤 총관 일행이 유구치동(劉九致洞)으로부터 왔다.
시위 이하 모두 마상선을 타고 영접하였고, 우리들도 강변으로 가서 영접하였다. 총관은 황색비단으로 된 홍상(洪廂)과 금으로 그린 용기(龍旗) 2쌍을 앞세우고 있었다. 기타 장비와 수행원들은 이전에 비해 달라 보였다. 의장과 수행원은 모두 강가를 따라 가고, 총관은 시위, 주사, 이격, 필첩식, 장경 등 여러 관인들과 함께 마상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서 시위가 설치한 천막에 머물렀다.
선발대가 순식간에 나무를 베어내고 천막을 배치하여 치니, 마치 성책(城柵)의 한가운데에 설치한 것과 같았다. 총관과 시위 두 장수는 큰 천막 앞에 네 폭의 황룡기(黃龍旗)를 세우고, 장경, 발십고 갑군들은 활과 화살, 칼을 차고 총을 멘 자들이 좌우로 열을 지어 늘어서니 그 위풍이 매우 성대하고, 안팎이 엄숙하였다.
나는 도차사원, 김호연 이하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강을 건너갔다. 차통관 오옥주(吳玉柱)를 통해 알리니, 여러 차관들을 불러서 앉게 한 후에 남쪽 뜰에 자리를 깔고서 우리를 들어오게 하였다.
먼저 내가 총관과 시위께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고 여러 차관에게도 돌아가면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치자 총관께서 나의 귀를 본 후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김 첨지(僉知), 자네는 동지(同知)로 승진했는가? 몸과 집안이 편안하고 또 계급과 직책이 올랐으니,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나는 머리를 숙여 사의를 표하고 대답하기를,
"대인의 은덕을 힘입어 이 병든 몸을 간신히 보전하고 외람되게도 벼슬이 높아졌는데, 지금 대인의 축하를 받으니 황공하여 감당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고, 총관은 아들 경문에게도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늙은 아비가 나를 환영하러 오고 그대 또한 같이 왔으니, 그대 나라에는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아니면 네가 자원하여 온 것인가?"
라고 하기에,
"늙은 아비는 조정의 차사(差使)로서 이 곳에 오게 되었는데, 해가 갈수록 병이 많아지고 거동이 불편하여 저의 안타까움이 실로 컸습니다. 그래서 접반사 어른께 호소하여 대인 일행도 영접하고, 늙은 아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어찌 사람이 없어서 제가 왔겠습니까?"
라고 하니,
"너의 말이 참으로 옳구나. 가히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하였다고 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 묻기를,
"장백산으로 가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을 대기해 놓았는가?"
라고 하기에,
"길 안내인은 혜산(惠山) 땅에 이르면 응당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두 나라의 국경을 살피는 일은 산길이 지극히 험하여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는 어떻게 길을 가시려하십니까?"
락 하니,
"그대는 양국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저희들이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장백산 꼭대기에는 하나의 큰 호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 되었으니, 그 호수의 남쪽이 곧 우리나라의 영토입니다. 그러므로 작년에 황제께서 창춘원(暢春苑)에서 사신을 불러 물어보았을 때 두만, 압록 두 강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것을 증빙할 어떤 문서라도 있는가?"
라고 하였다.


"상고 시대 이후로 나라를 세운 후에는 이로써 경계를 삼아 왔으니, 지금에 와서는 어린 아이들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 문서가 있어야만 증명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니,
"장백산 남쪽에 파수(把守)가 설치되어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이 산의 정상은 지극히 험하여 사람이 갈 수 없으니, 파수를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황폐하게 비어 있고 버려져서 대국(大國)의 책문(柵門) 밖의 땅과 같을 뿐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산 정상에서 조금 아래 지역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라고 하기에,
"산 남쪽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은 수목이 비록 무성하고 빽빽하나 산세가 자못 낮고 평평해서 길을 낸다면 겨우 인마는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우리 일행이 탈 말은 대기시켜 놓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이 문제는 저희가 받은 자문과 패문에 모두 거론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징발하라고 하시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아주 변두리 지역으로 짧은 시일에는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조정에 보고를 올리려면 갔다오는 데에 열흘에서 한 달이 소요될 것이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요."
라고 하니,
"패문 중에 황제가 파견한 관원 7명과 갑군 50명이 간다고 명백히 써 놓았고, 말미에 '그대들 나라의 예(例)에 따라 준행하라'고 밝혀 놓았다. 무릇 칙사가 파견될 때 패문을 보내는 것은 인마를 지급하라는 뜻이니, 지금 우리 행차에 대해서도 너희 나라에서 당연히 스스로 준비해서 대기했어야만 할 일이다. 하물며 자문 중에 있는'조관(照官)'이란 두 자는 바로 이러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황제께서 '작년에 행차할 때 말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으니, 이번에는 조선 말을 빌려 타고 우리가 타고온 말은 모두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셨다."
라고 하였다. 이에,
"보통 때 칙사 패문에는 허다한 갑군들이 따라오는 규례가 없었으니, 규례에 없는 일을 어떻게 미리 헤아려 대기하겠습니까? 또 동지사의 장계 중에 총관께서 '행차에 소요되는 먹고 마시는 것들은 전부 스스로 가져다 쓸 것이고 너희 나라 물품은 쓰지 않겠다'라고 하셨으니, 대인께서 우리 나라를 염려하여 폐단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시는 줄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필의 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질책하시니 이는 실로 생각 밖의 일입니다. 정말로 어떻게 주선하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허여 이와 같이 거듭 쟁변하였더니 총관은 말하기를,
"우리가 타고온 말은 이미 황제의 명령에 의해 돌려보냈다. 만일 그대 나라가 조달할 길이 없다면, 우리는 비록 걸어서 가더라도 오로지 황제의 명령을 준수하여 국경을 조사하고야 말겠다. 너희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며, 총관은 노여운 얼굴로 계속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 너희 나라 인부와 말을 이용해서 여행하여 국경을 조사한 후에 강가를 따라 경원(慶源)에 도착하면 국경 저편은 바로 후춘(厚春) 지방이다. 그 곳에서는 우리나라의 인부와 말들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너희 인마는 거기서 돌려보내겠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접반사와 관찰사 두 사또에게 의논하고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물러나와서 홍이격, 오옥주와 함께 좌담하기를,
"차관 중에서 목 대인은 내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고 포 시위 또한 여러 차례 인사를 드렸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초면입니다. 그래서 누가 소 시위(蘇侍衛)인지, 누가 악 주사(鄂主事)이고 합좌령(哈左領)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들의 서열은 과연 어떻게 되 니됩니까?"
라고 하니,
"금번 행차에는 소(蘇) 시위라는 사람이 없는데 그대가 말하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포극소륜(布克蘇倫)이 두 사람 이름이 아니라 본디 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까?"
라고 하자,
"그렇습니다. 우리 청나라 사람의 이름은 네다섯 자가 됩니다. 목 총관, 포 시위, 악 주사 세 분은 고관 대인입니다. 합 좌령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게 되자, 심양에 도착하여 우록 장경(牛鹿章京) 한가(韓哥)라는 사람을 대신 차출하여 왔습니다. 그의 서열은 필첩식의 아래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필첩식의 직위는 예전부터 어첩을 드리는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고, 지금 장경은 필첩식의 밑에 앉아 있으니 어첩을 드린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홍이격은 곧 들어가서 총관에게 품의하였다. 총관은, ‘장경의 품위가 비록 주사의 윗자리에 있으나, 이는 외관(外官)이므로 경관(京官)과는 다르다. 입급(入給)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다시 강을 건너 돌아와서 문답했던 내용을 모두 두 사또께 아뢰었다. 그리고 다시 강을 건너가서 두 사또의 뜻을 보고하기를,
"우리나라가 황제의 사신을 받들어 모시는데 어찌 감히 소홀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급작스럽게 되었으니 다른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57인이 탈 기마(騎馬)와 짐을 실을 50여 필은 결코 조달하기가 어려우니 잘 생각하시어 선처하여 주십시오. 짐들은 임시로 대인 일행이 타고 온 마상선으로 운반하는데, 혜산(惠山)까지 거슬러 올라간 후에는 부근 민가의 우마(牛馬)들을 징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에서 오신 일곱 분이 탈 말은 마땅히 저희 일행이 가져온 역마로 모시겠습니다. 나머지 갑군 등속은 돌려보내거나 수를 줄임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더니, 총관은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사정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짐들은 타고온 마상선으로 혜산까지 운반하고, 갑군 20명은 마상선을 가지고 올라가게 할 것이다. 일행이 탈 말과 이부자리와 음식물을 실을 말 40필을 준비하여 대령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이 또한 대인께서 우리나라를 염려하여 민폐를 덜어 주시는 성의입니다. 분부하신 것을 마련하는 데는 감히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두 사또가 앞으로 음식물과 마른 반찬을 올리겠다는 뜻을 말하자,
"우리들이 올 때, 황제께서 혹 조선에 폐를 끼칠까 염려하시어 식량과 경비를 매우 풍족하게 하사해 주셨다. 이제 그대들이 주는 음식물은 결코 받기가 어렵다."
라고 말하고 끝내 물품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돌아와서 두 사또께 아뢰었더니, 관찰사가 말하기를,
"당초의 1백여 필을 책임지고 준비하라고 했다가 지금 40필로 줄여 주었으니 민폐를 덜게 된 것이 적지 않다. 우리의 도리로서는 이제 다시 숫자를 줄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식량을 운반할 방안을 변통할 수 있다면 정말로 다행이겠다. 그대는 잘 생각해서 주선하도록 하라 "
하였다.
"무릇 청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 경내로 들어오면 우리가 공급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 고을에서는 마땅히 예에 따라 준비를 잘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
"칙사 응대에 필요한 물품들은 내가 이미 다 갖추어 여러 고을에 배치해 놓았다. "
"그와 같이 하셨다면 일을 쉽게 처리할 방안이 있습니다. "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
"저들의 식량을 우리로 하여금 운반하게 하는데, 저들로 하여금 그 수량을 자세히 헤아려서 기록해 두도록 하고, 봉수차원(逢授差員)에게 운반 책임을 맡겨 삼수부에 보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는 저들 일행이 매번 도착하는 곳에는 그 곳에 배치되어 있는 양식을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정산하여 처리하면 인부와 말을 동원하는 폐단이 자연히 줄어들 것입니다. 이런 방안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그 방안이 좋은 듯하지만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혹시라도 부실하다고 질책이 돌아올까 염려가 된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쪽 짐 싣는 말을 조달하기 어려운 사정은 처음부터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러한 계책을 내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입니다. 또 저쪽 하급 군졸들의 양식은 반드시 잡곡〔田米〕일 것이 틀림없으니, 이를 쌀로 바꾸어 지급하겠다는 뜻을 먼저 홍이격에게 말해서 총관에게 품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라고 하니, 이에 두 사또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대가 가서 도모해 보라."
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강을 건너가서 먼저 이격에게 그 말을 전했다. 이격이 총관에게 가서 말하자 총관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짐 싣는 말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그렇게 하도록 하고 차질이·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므로, 나는 곧 돌아와서 이 사실을 두 사또에게 알리니,
"오늘의 형세로 보면 앞으로 모든 일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하였다.
"어찌 매번 순탄하기를 보장하겠습니까? 오로지 잘 대처하여 그들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니, 두 사또도 이 말에 동의했다.
저녁 늦게 총관이 오옥주를 시켜 3척의 마상선에 잡곡 20석을 실어보내고 한 장의 문서를 함께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쌀 20석을 보내니, 10석은 토문강(土門江)으로 실어 보내 일행이 가면서 먹도록 하고, 10석은 삼수부에 보관하도록 하라. 만약 우리가 토문강을 따라 올라가면 인원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고, 되돌아 내려오는 자들이 있을지는 지금 정해지지 않았다. 만일 되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보관해 놓은 쌀을 지급하여 먹게 하라. 우리나라에 돌아갈 때까지 되돌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삼수부 백성들에게 상으로 지급하라."
라고 하였다.
접반사가 도차원(都差員) 이진상(李震相), 차비역관(差備譯官) 이세만(李世萬), 지방관 장세익(張世翼)에게 명령하여 오옥주가 와 있는 강가로 가서 함께 수량을 확인하고 감독인을 별도로 정해서 창고에 운반한 다음, 칙사의 처분을 기다려 차례로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대개 오늘은 칙사를 만난 첫날이다. 그들을 접대하여 공식적으로 처리한 일과 문서를 주고받으며 처리한 일이 이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빠짐없이 기록하기가 어려우므로, 번잡한 말은 빼고 긴요한 것들만 기록했다.

(중략)



5월 15일 정유 맑음
무산부에서 머물렀는데, 지난밤에 총관을 따라갔던 접반사 군관인선전관 이의복에게서 급보가 왔다.
"11일에 총관이 백두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중덕 남쪽 가장자리에서 나오는 까닭에 이쪽은 이미 경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쪽 가의 가장 아래에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있어 총관이 이것을 두만강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두 물줄기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 위에 비석 하나를 세워 경계를 확정하려고 합니다. 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는 것은 황제의 지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접반사와 관찰사도 역시 비석에 이름을 새겨야 할 것 같은데 가부를 묻고자 합니다. 운운"
또 비문을 베껴 보내봤는데, 거기에는 기록되기를,
"오라 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고자 여기까지 와서 살폈다. 서쪽 지류가 압록강이 되고 동쪽 지류가 토문강이 되니,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라고 하였다.
보고서에는 또 총관이 장차 개울 언덕을 따라 살피며 내려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접반사가 즉시 문서로 전령하였다.
"접반사와 관찰사는 총관이 남아 있으라고 하여 함께 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석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성실한 일이 아닐 것이다. 차원, 군관, 역관 6인의 이름을 함께 돌에 새긴다면 가히 후일의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총관이 저희 둘의 성명을 반드시 함께 새기겠다고 한다면 또한 구태여 다틀 것은 없다."
하고, 걸음이 날쌘 역졸을 특별히 뽑아서 보내도록 하였다. 후에 김경문 등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는,
"총관이 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고자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그쪽 대통관과 우리 나라 군관 조태상 및 역관 김응헌으로 하여금 길 안내인들을 데리고 60여 리를 가 보게 하니, 확실히 물길이 있어 의심스러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하 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