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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여행기, 유산기유백두산기 - 서명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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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두산기 - 서명응

병술년(1766년, 영조 42) 5월 21일.
임금이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 나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마땅히 이 일을 주관해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름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유지를 내려 질책하기를,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
라고 하였다.
세 번째 부름을 받았지만 또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갑산부로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조엄(趙曮) 을 대신 부제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엄도 나가지 않았다. 임금이 또 삼수부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귀양가던 날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왔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 갈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였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진령(榛苓)의 시 를 읊어 임금의 덕망을 위로하였다. 틈만 나면 고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말하기를,
"나는 자식들 혼인을 모두 마쳤으니 할 일은 대충 마쳤다. 그러나 아직 못한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역》을 읽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백두산을 유람하지 못한 것이며, 셋째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유배지가 백두산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혹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 유람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조엄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북쪽에 온 것은 두 번째고, 그대는 세 번째인데 한 번도 백두산에 오르지 못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대도 유람을 못하였고 나 또한 유람을 못했으니, 우리 둘이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귀양지에 도착한 지 3, 4일 되는 날, 나와 조엄은 서신으로 6월 10일 백두산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갑산 부사 중연(仲淵) 민원(閔源)과 삼수 부사 사진(士振) 조한기(趙漢紀)는 산수 유람을 좋아하는 자들로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내 손님 최우흥(崔遇興)과 홍이복(洪履福), 조엄의 손님 이민수(李民秀)와 민원의 아들 무숙(武叔) 민정항(閔廷恒)까지 모두 동행하였다. 백두산 길 안내는 갑산 선비 조현규(趙顯奎)와 군교 원상태(元尙泰)가 담당하였다.
가는 데 4일, 돌아오는 데 4일이 걸렸다. 빼어난 산택(山澤), 시원스럽게 보이는 조망, 궁경과 관방(關防)의 형세를 한눈에 볼 수 있었으니, 평생에 바라던 쾌거였다. 산에서 돌아오자 용서한다는 임금님의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아! 두 사람이 임금님께 죄를 얻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이 백두산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묵은 빚을 갚게 하고자 함이었다. 두 사람의 행적이 여기에서 그쳤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집에 돌아와 각각 한 본(本)씩 기록하였다. 관직 생활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삼으려고 한다. 또한 후일에도 금일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을 뿐이다.



6월 10일. 갑산부를 출발하여 운총진(雲寵鎭)에 도착하다
나는 갑산불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후덕산(厚德山), 마고정(麻姑頂), 손전항(遜田項)을 지났다. 촌락들이 띄엄띄엄 뒤섞여 있는 것이 마치 바둑판과 같았다. 길 주변에는 산앵두나무〔棠樹〕가 많았다. 열매는 대추알과 같았으며 길가에 많이 떨어져 있다. 그곳 주민들은 산대추라고 부르면서 대추를 대신하여 사용하였다. 흰 새 수십 마리가 떼지어 있다가 사람의 행차를 보고 놀라서 푸드득 날개 치며 날아갔다.
손전항에서 10리까지는 삼봉(杉峯)이며, 삼봉에서 10리까지는 두 산이 좌우로 벌려 있다. 따라서 성보(城堡)를 쌓을 수 있는 지역이다. 동인진(同仁鎭)은 권관(權管)이 관리하였다. 점심을 먹고 주변을 살펴보니 돌무더기를 쌓아 성벽처럼 만들었다. 높이는 8, 9척 정도이고 둘레는 천여 척이었다. 토병은 33인, 봉수군(烽燧軍)은 30인이 있다. 봉수대는 삼봉 위에 있다. 북쪽으로는 안간봉(安間峯)에 맞닿고 남쪽으로는 갑산부의 앞산인 응굴봉(鷹窟峯)에 닿았다. 동인진에서 동쪽으로 40리를 가면 대동(大同) 땅으로 파수(把守)가 있다. 권관이 멀리서 통솔하였다. 이전에 오랑캐가 검천(劒川) 주변에 모여 살면서 이곳까지 약탈하였기 때문에 이를 물리치려고 동인진을 설치하였다. 성벽은 오래되어 군데군데 허물어져 견고하지 못했다. 동인진의 막사도 낡고 기울어져 있으니, 방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듯하다.
조엄은 삼수(三水)에서 북쪽으로 광승판(廣承坂)을 넘어오는데, 길이 좁고 험준해서 말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진행하였다. 허천강(虛川江)을 건너 별사(別社)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운총에 도착하였다. 이 날 나는 80 리를 갔으며, 조엄은 60 리를 갔다. 운총성의 통군루(統軍樓)에 올라 오랫동안 바람을 쐬고 누각에서 내려와 일반 백성의 집에서 잤다. 혜산 첨사 유언진(兪彦鎭), 운총 만호 윤득위(尹得偉), 진동 만호 송석손(宋錫孫), 나난 만호 김귀서(金龜瑞), 인차외 만호 김홍제(金弘濟), 구갈파지 권관 윤수인(尹守仁), 행영 비장 유상화(柳尙和), 삼수인 전 군수 우정하(禹正夏)가 영접하여서 행로의 수고로움을 위로하고 각기 차례대로 돌아갔다.



11일. 운총진을 출발하여 심포(深浦)에 도착하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말을 먹였다. 위로하러 왔던 진장(鎭將)들이 모두 돌아갔다. 내가 먼저 출발하고 조엄은 뒤에 출발하였다. 갑산 부사, 삼수 부사, 민정항, 최우흥, 이민수, 홍이복 등 여러 사람이 그 뒤에 출발하였다. 운총진 뒤에 있는 은사문령(銀沙門領)을 거쳐서 위로 올라가 약 15리를 가면 오시천(五時川)이 있다. 오시천은 덕은봉(德隱峰) 아래에서 서쪽으로 200 리를 흘러 은사문령을 휘감아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고개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니 첩첩이 쌓인 산이 상투를 구름 속에 꽂은 것과 같다. 이것이 보다산(寶多山)이다. 고개를 넘으면 지세가 평탄하다. 두 산이 둥글게 합해져 마치 사람의 두 손을 포갠 것과 같은 곳이 나항포(羅巷浦)다. 파수가 그 왼쪽에 있는데 운총진에서 관할한다. 소위 변방 오랑캐들이 침략할 때 이 길을 따라 운총과 동인(同仁)에 이르렀기 때문에 파수를 설치하였다. 임진년(1712년, 숙종 38) 이전에는 이 길은 잡초가 무성하여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임진년 목극등이 경계를 정하기 위해 백두산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뚫렸다. 이때부터 갑산에서 무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기 때문에 대로(大路)가 되었다.
나항(羅港)을 지나 긴 골짜기를 지났다. 그 사이 15리는 나무들이 하늘 높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지 않았다. 부러지거나 불타 쓰러진 나무들이 길 사이에 가로놓여 어지러운 것이 마치 치초(薙草) 같다. 뿌리가 드러나 무성한 것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고 용이 서린 것 같다. 사람을 시켜 도끼로 앞에 있는 나무를 베고 길을 낸 후 몸을 숙이고 지나갔다. 그러나 말이 넘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푹푹 빠졌다. 고개를 넘어 산을 내려왔다. 골짜기에는 돌이 날카롭게 삐쭉삐쭉 솟아 모두 바로 걷지 못하고 기우뚱거렸다.
10리를 가면 시내가 있다. 오시천과 검천 사이에서 나와 검천 하류와 합쳐져 서쪽으로 5리를 가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신대신천(申大新川)이라고 한다. 신대신천 안쪽은 깊고 넓어 집도 짓고 밭도 경작할 수 있다. 북쪽 사람들은 서로 전하여 신대신동이라고 한다. 옛날에 신대신(申大新)이라는 사람이 인삼을 캐고 고기를 잡고 담비를 잡느라 이 곳을 왕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세 골짜기가 있는데 북쪽은 신대신동처럼 깊고 넓다. 수년 전 날이 가물어 초목이 말랐을 때 행인이 불을 놓아 산이 불타버린 후에는 산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새가 보이지 않고 관목 위의 꾀꼬리만 보인다. 울음소리가 남쪽의 새처럼 조금 촉박하게 들렸다. 짐승은 호랑이와 표범은 없고 곰과 사슴뿐이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백두산으로 왔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다시 남쪽으로 간다. 담비와 박쥐는 사계절 모두 있다. 담비 사냥군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 물을 채운다. 담비가 물을 먹으러 나무에 올라왔다가 구멍에 빠지면, 그때 사람이 잡는다.
골짜기 앞쪽 땅은 평탄하고 낮은데 형세가 장곡(長谷)의 검천같이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갔다. 이곳은 오랑캐가 옛날 거처하던 부락이다. 마전봉(馬顚峰)이 가로놓여 있는데 그 서쪽은 험한 낭떠러지다. 압록강은 옷 하나 사이의 짧은 거리에 있다. 명나라 숭정(崇禎) 갑신년(1644년, 인조 22)에 변방 오랑캐들이 청나라 임금을 따라 심양에 들어간 후 모두 우리 땅이 되었다. 무술년(1718년, 숙종 44)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동인진과 동량진(東兩鎭)을 이곳에 옮겨 설치하려고 남병사(南兵使) 이삼(李森)을 파견하여 터를 살피게 하였다. 기미년(1739년, 영조 15)에 또 남병사 신익하(申益夏)를 보내 터를 보게 하였다. 이삼은 진을 설치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익하가 말하기를,
"신대신동은 북쪽 변방을 왕래하는 길목이다. 한 군졸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적이 뚫을 수 없는 형세이니 진을 설치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 신익하가 옳았고 이삼은 틀렸다. 어떤 사람은 골짜기가 높아 서리가 일찍 내리기 때문에 곡식을 심지 못한다고 하지만 골짜기 동남쪽은 길주, 갑산 두 고을의 사이에 있다. 또 감평산(甘坪山)이 감싸기 때문에 길이 20리, 넓이 5리의 땅은 매우 비옥하다.
갑인년(1674년, 현종 15) 낙천(樂泉) 남구만(南九萬)이 관찰사로 오면서 길주의 서북진을 경유하여 감평에 이르러 형편을 살피고 진을 설치하도록 건의했다. 영파보(寧波堡)라고 부른다. 7년 후인 경신년(1680년, 숙종 6) 백성들은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익지 않는다고 하자, 함경도 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어 혁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수목이 울창하여 춥기 때문에 곡식이 익지 않았을 뿐 서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수목이 성글어서 백성들이 골짜기에 들어와 오곡을 심었는데 모두 잘 익었다. 갑산 고을과 다르지 않으니, 어찌 골짜기가 평지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백두산 한 줄기가 동남쪽에서 꺾여 보다산, 마등령(馬等嶺), 완항령(緩項嶺), 설령(雪嶺)이 된다. 그런데 설령부터는 서북진이며, 길주가 그 아래에 있다. 설령 북쪽에는 참두령(巉頭嶺)과 원봉(圓峰)이 있으며, 갑산이 그 아래에 있다. 두 봉우리 모두 남관, 북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갑산에서 남병영까지는 마덕령(馬德嶺), 후치령(厚峙嶺), 관령(關嶺)이 있는데, 겹겹이 쌓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오가는데 5, 6일이 걸리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아무리 빨리 알리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이제 동인진과 동량진을 혁파하고 감평과 신대신동에 진을 설치한 후 갑산을 방영(防營)으로 삼아 오랑캐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삼수부와 연변의 절진(節鎭)은 길주와 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설령에서 길주까지의 험한 옛길을 개통하면 영(營)과 진(鎭)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견고하게 될 것이다. 무릇 후치령 밖 남병사가 적의 동태를 들을 수 없는 곳은 갑산 방영에서 독자적으로 명령하여 적을 막는다면, 비록 밖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의 장성(長城)이 될 수 있다.
검천을 따라 상류의 남쪽 언덕에 이르렀다. 혜산(惠山) 백성들은 막사를 먼저 마련하였다. 그리고 삼나무를 베어 들보와 기둥을 세우고,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덮었으며, 삼면에 보루를 세웠다. 산에서 구한 것인데도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만약 남쪽 백성들에게 이 일을 시켰다면 일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엌일 담당자가 점심 밥상에 큰 물고기를 준비하였다. 물고기 이름은 여항(餘項)인데 맛이 달고 좋았다. 그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앞 냇가에서 때려 잡았다.
밥을 먹고 검천을 건너 서수라덕령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수십 리를 갔는데 고개가 더욱 험해지고 산길은 비탈져 앞사람은 위에 있고 뒷사람은 아래에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황천 같고 위를 쳐다보면 구천(九天)이다. 우박과 가랑비를 만났으나 이내 그쳤다. 고개에 올라 동쪽으로 길주를 바라보니 뒤로 덕은봉, 완항령이 구름 속에서 점점이 보였다. 여기의 지세는 평탄하고 삼나무가 많은데 개오동나무와 자작나무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15리를 가면 간산봉(艮山峰)이 있다. 왼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밖으로는 오랑캐 산들이 푸른 장막을 친 듯 늘어 서 있다. 백두산의 희미한 모습이 서북방에 드러나는데 책상 위에 흰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하다. 간산봉을 경유하여 5리를 가면 곤장평(昆長坪)이다. 이곳은 탁 트인 광활한 숲이 화살 다발처럼 울창하였다. 15리를 가면 심포(深浦)이다. 이곳은 하늘이 탁 트이고 골짜기가 광활하다. 일행은 막사를 치고 밥을 먹은 후 잤다. 삼나무를 베어 불을 지펴서 온기를 느꼈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12일. 심포를 출발하여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하다.
아침을 먹고 삼나무 숲을 통과하여 지나갔다. 모기들이 좌우에서 사람을 공격하였다. 손으로 휘저어도 달아나지 않았다. 5리를 가니 중심포(中深浦)였다. 또 5리를 가니 말심포(末深浦)가 나왔다. 동남쪽에는 연암봉(輩巖峰), 동쪽에는 보다산, 동북쪽에는 침봉(枕峰), 북쪽에는 소백산이 보였다. 또 5리를 가니, 태산준령이 끊어질 듯하고 삼나무가 얽혀 있는데, 구현(狗峴)이라 한다. 또 5리를 가면, 자포(滋浦)인데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보다산 아래 서쪽에서 내려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산 서북쪽에서 내려왔다. 여기서 물줄기가 합쳐져서 서쪽으로 10리를 흘러가면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지명을 소위 자포라고 한다.
평지에 천막을 치고 점심을 먹은 후 자포령을 넘었다. 고개가 끝나면서 대평원이 널리 펼쳐졌다. 40리에 걸쳐 있는 것을 판막(板幕)이라고 한다. 삼나무가 모두 불타 말랐다. 예전에 사냥꾼이 실화하여 이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나무줄기가 천 자나 되고, 끝은 뾰죽하지만 정정하게 서 있으며, 줄기는 바람 구멍이 나 있었다. 따라서 여러 구멍에서 소리가 나는데, 휘파람을 부는 것도 같고 생황을 부는 것도 같아서 음조가 들을 만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장자(莊子)가 말한 소위 하늘의 퉁소인 듯하다.
자포에서 40리를 가서 임어수(林魚水)에서 묵었다. 이 물은 보다산에서 발원하여 여기까지 흐르고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처음 나와 조엄은 백두산을 가기로 약속하였지만, 그래도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 운총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일을 할 때 항상 몇 가지를 겸하였다. 우리가 한갓 산천의 경치나 즐긴다면 천박한 일이다. 관방의 지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고, 북극성이 떠오르는 것을 관측하는 것도 좋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재목과 목수를 구하여 상한의(象限儀)를 제작토록 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여 천구의 별 하나를 관측하였다. 별은 땅에서 42도 조금 못 되는 곳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곳은 심양(瀋陽)과 같은 위도에 해당된다. 동지에는 태양이 진시(辰時) 초2각(刻) 2분에 떠서 신시(申時) 정1각 13분에 진다. 낮은 35각 11분이 되고, 밤은 60각 4분이 되며, 신혼(晨昏)은 6각 14분으로 나뉜다. 하지에는 태양이 인시(寅時) 정1각 13분에 떠서 술시(戌時) 초2각 2분에 진다. 낮은 60각 4분이고, 밤은 35각 11분이 되며, 신혼은 9각 3분으로 나뉜다. 그 나머지 22절기는 이것으로 유추해 알 수 있다.



13일. 임어수를 출발하여 연지봉 아래까지 가다.
해가 뜨자 임어수를 떠나 수풀 속으로 10리를 가니, 허항령에 도착하였다. 허항령은 비탈져서 북방으로 길게 뻗어 절정을 이루었다. 삼수, 갑산의 척추가 되고, 백두산과 소백산의 출입문이 된다. 이곳은 무산으로 가는 길과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다. 북쪽 사람들은 여기를 천평(天坪)이라고 부른다. 동북쪽은 수백 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수풀에 가려서 멀리 볼 수가 없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북쪽으로 5리를 가면 산수가 수려하여 마음과 눈이 낭랑하게 되어 삼지연(三池淵)에 도착한다. 오른쪽 못은 둥글고 왼쪽 못은 네모지고, 가운데 못은 넓고 주위가 15리나 되는데, 작은 섬을 에워싸고 있다. 나무는 한 아름씩 되어 낙락장송과 같고, 물은 맑아서 바닥이 보이니, 고기를 헤아릴 수가 있다. 물오리 수십 마리가 범범히 떠다니거나 자맥질을 하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지 않는다. 물새 한 마리가 비상하여 울며 지나가고, 노루 사슴의 자취가 모래톱에 어지러이 나 있으니, 이야말로 신선의 땅이요 사람 사는 땅이 아니다. 일행 중에 경포대와 영랑호를 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 자신도 일찍이 태액지(太液池)를 본 적이 있지만 이보다는 훨씬 못했다.
삼지연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천수(泉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샘물이 지상으로 솟아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며, 점심을 지어 먹는 곳이다. 천수에서부터 북쪽으로 5리를 가면 낭떠러지 골짜기다.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아 겉으로 보면 나무 말뚝비나 창을 세워 놓은 것 같지만, 속은 깊은 구렁텅이다. 말을 세우고 내려다보니 대협곡이 한가운데 갈라져 하나의 골짜기를 형성하였다. 검정색 수포석(水泡石)이 양쪽 언덕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푸른 삼나무가 화살촉처럼 그 위에 병풍처럼 벌려져 있다. 그 가운데로 물길이 나 있는데, 모래가 눈처럼 희다. 모두 수포석이 부서져서 생겼다.
말이 사납게 발을 들어올릴 때마다 먼지가 얼굴을 때린다. 10칸씩 갈 때마다 흑포석이 계단처럼 쌓여 있고 매우 높아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길 양쪽 언덕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져 흙이 끊어진 곳으로 돌아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무릇 35리나 하였다. 이곳은 백두산 아래 산록인데 골짜기의 물이 흘러가는 곳이다. 오래 가물었기 때문에 큰 길이 났다. 만약 비가 오면 여러 골짜기에서 물이 넘쳐흐르면서 폭포가 되기도 하고, 격랑이 되기도 하며, 웅덩이가 되면서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 강원(江源)이 된다.
무지봉(膴脂峯)에 가까워지면서 소백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겨우 사람 상투만한 높이로 보였다. 무지봉 골짜기에서 산이 끝난 북쪽을 바라보니, 3개의 봉우리가 둥그렇게 솟아 있다. 그런데 그 색이 모두 백자를 엎어 놓은 것처럼 희게 보였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의 동남면이다. 나와 조엄은 그 산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을 달려 곧장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오후 3, 4시였다. 조현규와 원상태가 말 앞에 나서서 말리기를,


"여기서부터 백두산 정상까지는 30리 거리다. 그 곳을 유람하면서 왕복하려면 90리 길의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이 이미 3, 4시를 넘었으니, 산 아래에 도착하면 반드시 어두워질 것것이다. 만약 비바람을 만나게 되면 진퇴유곡에 빠질 것이니 두 분께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나와 조엄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나아가자, 여러 수행원들도 모두 따라왔다. 약 10리를 갔는데 날이 저물었다. 앞의 봉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나와 조엄 그리고 수행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탄식하기를,
"큰 일과 작은 일의 이치는 한 가지다. 우리가 조현규와 원상태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떠난 것이야말로 진(秦)나라 목공이 맹명(孟明)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결과가 아닌가?"
라고 하였다.
결국 우리는 무지봉 아래 휴게소로 되돌아왔다. 상태가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람들이 여기에 도착하면 목욕재계하고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그래야만 비로소 정상에 올라가 유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름 안개 바람 비 등이 사납게 일어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역시 글을 지어 제사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 갑산 부사가 제수를 준비하고 갑산의 장교를 시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뚝한 백두산이 우리 강토에 진주하니, 땅 아래 사람들이 우러러 그 전모를 보고자 합니다. 이번의 행차는 참으로 하늘이 편의를 베풀어 주신 것으로, 풍찬노숙하면서 온 것이 거의 삼천 리나 됩다. 산에 신령이 계시면 우리의 성의를 아실 것입니다. 구름과 안개를 거두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하늘이 어찌 감추려고만 들겠습니까? 해와 별도 하늘에 밝게 걸려 있습니다. 땅의 도리로서도 하늘의 뜻을 순응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깨끗한 채식을 담아 희생을 대신합니다."
삼수 부사가 제수를 준비하고 삼수의 장교를 시켜 제사를 올렸다. 그 제문은 이러하였다.
"천하의 명산은 서른 여섯이 있는데, 곤륜산을 으뜸으로 칩니다. 중국 사람들은 모두 곤륜산에 오르는 것을 장관으로 생각합니다. 곤륜산도 또한 그 장엄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숨겨서 감추지 않는데, 이 때문에 성수해(星宿海) 가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같은데, 만약 해동의 편협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백두산에 올라 그 웅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전하기를,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풍우와 운무 때문에 제대로 경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곤륜산의 신령이 중국인들에게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데, 어찌 백두산의 신령만이 그러하겠습니까? 산신은 우리를 보우하셔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어서 만상이 밝게 드러나고 산의 풍광을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십시오."
이는 모두 내가 지었다. 갑산의 제사는 13일 저녁에 지냈고, 삼수의 제사는 14일 새벽에 지냈다. 모두 땅을 청소하고 자리를 깔고 제사하였다. 신당을 지어서 제사하던 잘못된 관례는 모두 폐지하였다. 두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하지 않은 것은, 두 수령이 지방관의 책임을 가진 자이므로 임금만이 할 수 있는 산천의 제사를 지내기에 곤란한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두 고을의 장교로 하여금 제사케 한 것은, 토착인들은 마땅히 그 지방의 풍습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날 밤에 얕은 운무가 사방에 드리웠는데 그 형색이 그림과 같았다. 상한의로 천추(天樞) 를 측정해 보니 땅과의 각도가 42도 3분이었다. 대개 위도가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는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이로써 측후의 정밀함을 알 수 있다.



14일. 연지봉 밑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위에 오르다.
이날은 일찍 일어났다. 하늘은 한 점 구름도 없고 솟은 해가 빛났다. 일행은 가마를 타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며, 걸어서 서서히 산에 올랐다. 산은 모두가 백색이고 나무는 없었으며, 가끔 녹색 잡초가 이름없는 풀과 꽃으로 덮여 있어 붉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였다. 계독 사이에 층층의 얼음이 녹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조각 눈이 있는 듯했다. 이리저리 돌아서 위로 올라가니 깎아지른 바위가 있고 20리를 가니 백산(白山) 세 봉우리가 면전에 깎아지른 듯했다. 역시 연지봉(臙脂峯) 밑에서 본 것과 같다. 동남쪽 언덕 위에 나란히 목책을 세웠는데 길이가 수십 보였다. 자빠지고 떨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몇 자의 조그만 비가 깎지도 다듬지도 않았는데, 위에 새기기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밑에는 다음과 같았다.
"오라 총관(烏刺摠管) 목극등(穆克登)이 황지(皇旨)를 받들고 변경 조사를 위하여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로는 압록이요 동으로는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朝鮮軍官)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差使官) 허량(許樑), 박도상(朴道常), 통관(通官) 김응현(金應瀗), 김경문(金慶門) 운운(云云)."
여러 사람이 본 다음에 형세를 둘러보았다. 비의 뒤쪽 수보 쯤에 이전의 장마비가 흘러 내려가 움푹 파여 골짜기가 되었다. 그런데 깊이는 몇 척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한 방울의 물도 없고 또 전에 돌아서 언덕 위의 비석 앞으로 나온 흔적도 없다.
백두산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가서 떨어져 연지봉이 되었다. 그런데 겹겹이 막혀서 소위 압록강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개의 이름을 ‘분수(分水)’라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또 양국의 사신이 함께 경계를 강정할 때 한 나라의 사신은 비에 이름을 실었는데, 다른 한 나라의 사신은 그렇지 않으니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서 그런 것인가? 여러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당혹하여서 원상태에게 물어보니, 원상태가 말하기를,


"저의 형 상필(尙弼)이 혜산 토병 김애순(金愛順), 운총진의 백성 송태선(宋太先)과 함께 길잡이로 뽑혔는데, 상필은 병이 나서 돌아오고, 태선과 애순이 따라가서 정계의 시말을 자세히 상필에게 전하였습니다. 상필이 또 저에게 전하였는데, 당시의 접반사 박권과 관찰사 이선부가 목극등과 만나 먼저 황제의 건강을 물으니 목극등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외국 사신이다. 어찌 감히 황제의 건강을 묻는가? 나를 따라 경계까지 좆아오지 말라'고 하니, 박권과 이선부가 크게 놀라서 검천, 허항령을 지나 무산으로 돌아와서 나아가지를 못하였습니다. 목극등이 우리 나라 통역관, 길잡이와 함께 백두산에 이르러 산골짜기가 갈라진 곳의 빗물이 지나갔던 곳을 가리키며 갑자기 말하기를 '이곳이 토문강의 근원이고 이곳이 압록강의 근원이다'고 하였습니다. 태선과 애순이 다투어 말하기를, '토문의 상류는 토문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압록의 상류이니 당연히 서쪽으로 가서 의주에 이릅니다. 지금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가니 둘 다 모두 틀렸습니다. 토문강 외에 두만강이 있는데, 옛날부터 우리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또 지금 말하는 압록강의 상류 바깥에 보은수(保恩水)가 있어서 백두산의 서쪽에서 나가서 서쪽으로 흘러 서대산(西臺山)을 지나니 이른바 압록강 상류라는 것이 합해져서 의주의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실로 압록강 상류다'라고 하니, 목극등이 꾸짖어 말하기를, '빨리 칼을 가져오라. 두 사람의 눈을 빼겠다'고 하므로, 두 사람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목극등이 그 언덕을 강제로 '분수령'이라 하고 밑에 비를 세우고 우리 나라 두 사신의 이름을 넣지를 않았다."
라고 하였다. 조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어사로 무산에 있었다. 선비 윤명삼(尹命三)은 당시 향임(鄕任)의 아들로서 나이가 18세였다. 그는 아비를 따라 정계하는 곳에 갔다. 서로 힐난하는 말은 원상태가 전하는 것과 같지만 자세한 것은 차이가 있다. 또 강막종(姜莫從)도 무산인으로 나이가 80세였다. 어려서부터 두루 북방의 산수를 돌아다녀서 익히 물의 원류를 알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토문강은 백두산 동남쪽 30리밖 천평(天坪) 두평처(頭平處)에서 나와 북쪽으로 흑룡강에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그것을 토문이라고 하고, 장항해탄(獐項害灘)을 지나 유원(柔遠)에 이르러 두만강과 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유원의 물은 회령성변(會寧城邊)의 긴장수(緊長水)에서 나온다. 대개 온성의 서남쪽 1백 리에 분계강(分界江)이 있어서 선춘령(先春嶺) 밑에 고려 시중 윤관의 정계비가 있다. 강의 이름과 비로 추정하건대 이 곳이 우리나라의 경계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분계강은 윤이후(尹伊厚)의 우가토강(件加土江)과 합류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두만강은 또 백두산의 동쪽에서 솟아나오니, 그 원류를 찾아서 한 번만 보면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7백 리의 땅을 하루 아침에 두 손을 들고 잃어버렸으니, 아! 아깝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목극등은 오랑캐 사람으로 오히려 그 나라를 위하여 그 땅을 더했는데, 박권과 이선부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가? 목극등이 그 나라에 보고하는 글에 '백두산에 올라 지수(池水)를 보니 동으로는 토문이요, 서로는 압록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산 위의 못 물이 동서로 흘러가 두 강이 되었는데, 비를 세우면서 명확히 못 물을 말하지 않고 범연히 두 강이라고 칭하였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와서 상고하여 무너뜨릴 수 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음을 알겠다. 박권과 이선부가 산에 올라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었다면 목극등이 어떻게 하였을까? 두 사람은 자기 몸만을 돌보고, 국토를 가볍게 보았으며, 그 국토가 크게 줄어듦을 아깝게 여기지 않아, 백 년 사이에 땔나무를 하고 삼을 캐는 백성이 국경을 범하여 죽은 사람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아! 일을 한 번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이와 같다. 남의 신하된 자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행은 비의 우측을 돌아서 언덕 위에 가서 굽어 돌아 우러르며 약 10리를 올랐다.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자리 밑에 있어서 시야가 하늘 끝까지 다 들어왔다. 멀리 볼 수 없는 시력을 한탄할 뿐이다. 그러나 추측컨대 북쪽은 영고탑, 오라, 길림이고, 서쪽은 요양, 심양이며, 서남은 혜산, 인차, 가파, 폐사군이다. 동은 무산, 회령, 종성, 온성인데, 동남쪽 한 줄기가 소백산, 침봉, 허항령을 지나서 보다산이 되고, 마등령이 되며 덕은봉이 된다. 완항령, 설령, 참두령, 원봉, 황토령(黃土嶺), 후치령, 통파령(通坡嶺), 부전령(赴戰嶺), 죽령(竹嶺), 상하검산(上下黔山)이 되니 모두 한양(漢陽) 산의 정맥(正脈)이다.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혹은 높고 혹은 낮으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둥근 것이 마치 파도가 치는 것과 같다. 구름이 넓고 푸르러 만리에 걸쳐 서로 이끌며 받드는 것 같다. 몸을 돌려 두 봉우리 사이에 서니 봉우리 밑에 5, 6백 장 정도 거리에 텅 비고 평평한 곳에 큰 못이 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가 한색이다. 못의 동남 언덕에 정황석산(正黃石山) 세 봉우리가 있다. 높이는 같고 그 바깥 봉우리 셋이 있어 사람의 혀가 입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뒤의 사면은 열두 봉우리가 둘러 있는데 못을 성처럼 둘러쳤다. 선인(仙人)이 쟁반을 이고 있는 것,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는 것, 기둥으로 떠받드는 것, 솟아서 빼어난 놈 같은 것들인데 안쪽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에 붉고 누런 분을 발라 찬란하게 빛나서 잘 짜진 포목으로 둘러친 것과 같다. 바깥쪽은 비스듬히 창백하여 혼연히 하나의 큰 수포석이 응결하였다.
발걸음을 여러 봉우리로 옮기니, 큰 못은 둥글기도 하고 네모지기도 하여 그 보이는 모양이 각각 다르다. 사방이 조금 평평한 봉우리에 앉으니 봉우리에 오석(烏石)이 많다. 작은 것은 주먹만 하고 큰 것은 말〔斗〕만 하였다. 뒷면에 검푸른 모래 같은 점이 박혀 있다. 갑산 사람들은 이것을 갈아서 갓끈 장식으로 사용하였다.
큰 못을 아래로 내려다보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한쪽만 열려 있다. 그쪽으로 물인 넘쳐 흘러 흑룡강이 되고 곧바로 영고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압록강과 토문강이 큰 못으로부터 발원한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사슴들이 무리지어 있는데, 물을 마시기도 하고, 걸어다니기도 하며, 누워있거나 느릿느릿 달리기도 하였다. 검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르내리고, 신기한 새 한 쌍이 물에 점을 찍듯 오락가락 날아다녔다. 마치 그림 가운데 장관을 보는 듯했다.
이때 일행은 약 1백여 명이었다. 봉우리에 둘러서서 경치를 바라보면 산수의 정취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순간 다리가 앞으로 나가며 몸이 기울어졌다. 나와 조엄은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되어 이를 금지시켰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현규에게 붓과 벼루로 그 경치를 그리게 하고, 지남침으로 그 봉우리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대개 반나절을 자유롭게 유람했지만, 아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갑산 사람 중 여러 번 산행길에 동행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옛부터 이 산에 들어오는 자는 여러 날 목욕재계하고 수행원들을 부리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운무가 갑자기 일어나고 바람과 우레가 번갈아 일어나서, 기쁘게 모든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차처럼 마음대로 방랑하며 구경을 흔쾌히 한 일은 아직 없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조엄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기이한 일이네. 이곳에 와서 병든 몸으로 노숙을 꺼리지 않고 이 행차를 하게 된 것도 또한 기이하다. 이 행차 중 춥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적당한 기후로 풍우가 일어나지 않아 백두산 원근을 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신통한 일이다. 대개 자연이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일세. 하늘이 아마도 산과 못에 이름이 없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조엄이 대답하기를,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을 가지게 되면 진실로 좋은 일이다. 다만 우리들이 작명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산을 연지, 소백, 침봉이라고 한 것은 모두 토착인들이 이름을 붙여 후대에 전해져서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은 것이오. 이제 백두산은 우리 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고 저들의 나라에 속하지도 않으니, 우리 같은 세상의 호사가들이 여기에 발길이 미치는 것은 천백 년이 지나도록 한두 명 뿐이오. 만약 우리들이 지금 이 산들의 이름을 짓지 아니하면 이 산들의 이름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백두산 아래에 사는 토착인들이 사사로이 지은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서 결국 이 산들의 이름으로 정해지게 되면 이 산들에게 불행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조엄이 좋다고 하였다. 따라서 산과 못의 이름을 궁리하여 정하였다.
연못의 이름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연못의 중심이 동북 산수의 한 가운데있어서 동북의 산천이 모두 이 연못에서 근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극(太極)의 ‘태’자와 천일(天一)의 ‘일’자를 따서 그 연못의 이름을 정했다. 연못가의 솟아 있는 봉우리를 황중봉이라고 하였다. 이 봉우리는 12봉우리의 가운데 있으므로 그 색이 황색이다. 따라서 주역의 곤(坤)괘 중 둘째 효(爻)의 설명인 ‘황색 가운데서 이치를 통한다.〔黃中通理〕’는 말을 따서 봉우리 이름으로 정하였다.
그 봉우리의 인(寅, 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옛적부터 대각봉(大角峯)이라고 하였다. 하늘에는 대각이라는 별이 있는데 섭제성과 천정성의 가운데 위치하여 청룡좌의 머리를 직향해 있다. 청룡의 머리는 인 방향이므로 대각이라고 칭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뜻을 취한 듯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묘(卯, 정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청양봉(靑陽峰)이라고 하였다. 오행(五行) 중 목덕(木德)은 동쪽에 있으며 그 색이 푸르고 그 기운이 밝다. 명당성(明堂星) 동쪽의 태묘성(太廟星)이 청양이 되므로 청양봉이라고 하였다.


진(辰, 동남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포덕봉(布德峯)이라고 하였다. 목덕이 진 방향에 있으면 임금님이 덕을 베풀고 은혜를 행하며 명사를 초빙하고 어진이를 예로써 대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행한다'는 것은 모두 덕을 베푸는 데서 근본하므로 이름을 포덕봉이라 하였다.
사(巳, 동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예악봉(禮樂峰)이라 하였다. 사의 화기가 일어나면 곧 임금이 악사에게 명하여 예악을 조화시킨다. 우리 나라가 사봉 아래 있으며 예악 문물로써 정치를 빛내고 있으니 예악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오(午, 정남) 방향의 봉우리는 주명봉(朱明峰)이라고 하였다. 오의 화기는 붉고 그 하는 일은 문명이기 때문이다.
미(未, 남서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황종봉(黃鐘峰)이라고 하였다. 황종은 오행의 토에 속하고 흙의 기운은 3월, 6월, 9월, 12월에 왕성하게 되는데 6월에는 더욱 성하기 때문이다.
신(申, 서남서) 방향의 봉우리는 실침봉(實沈峰)인데 하늘의 12차(次)가 실침이며 신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봉우리 가운데 유(酉, 정서) 방향에 있는 것은 총장봉(總章峯)이라고 하였다. 명당(明堂) 자리의 여덟 별 중 총장은 서쪽의 한 가운데 있는데 12진법(辰法)으로 치면 유(酉)에 해당한다.
술(戌, 서북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신창봉(神倉峯)이라고 하지만 지경봉(祗敬峯)이라고도 하였다. 금덕(金德)이 술 방향에 있으면 임금이 그 백성의 호적을 거두어 신창(神倉)에 보관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신창봉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경봉이라고도 한다.
해(亥, 북북서) 방향의 것은 일성봉(日星峯)이라고 명명하였다. 백두산은 해 방향을 등지고 사 방향으로 향하고 앉아서 우리 나라 팔도의 여러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12봉 가운데 해 방향에 있는 것은 해의 해 방향에 해당한다. 해월 에 태양이 차성(次星)을 돌아 천장(天將) 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동지가 오는 것과 같다.
자(子, 정북) 방향에 있는 것을 현명봉(玄冥峯)이라고 하였다. 북방의 신을 현명이라고 하는데 산의 북쪽은 바로 궁색하고 아득한 곳이어서 현현명명(玄玄冥冥)하기 때문이다.
축(丑, 북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오갈봉(鳥碣峯)이라고 하였는데, 오갈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갈석(碣石)이 있기 때문에 《서경》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백두산은 우리 동방의 동북쪽이고 오갈봉은 또 백두산의 동북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았다.
허항령 이북에서 백두산까지는 사람의 자취가 없고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산천은 높고 낮은 것이나, 평평하고 비탈진 것이나,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있는 북극성이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움직이는 별들의 몸체가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땅의 12봉에 반드시 4계절의 방위를 활용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용》에 ‘아득하고 끝이 없지만 만 가지 형체가 울창하게 갖추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직 그 사용하지 않는 중에도 사용하는 바탕이 있으니, 무궁하게 활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다.
12봉 외에 또 하나의 산맥이 동남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소백산이 된다. 소백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는 작은 봉우리 둘이 있는데, 위쪽은 보라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이다. 흰 봉우리는 둥글고 보라색 봉우리는 뽀죽하여 마치 두 산에 각도(閣道) 를 놓은 것 같다. 갑산 사람들이 억지로 이름을 붙여 연지봉이다. 그러나 연지는 그 뜻이 탐탁하지 않으니 지금 고쳐서 자각봉(紫閣峯)으로 한다.
그날 정오에 우리 일행은 모두 내려왔다. 몇 사람이 뒤처져 있었는데 검은 안개가 천지의 중심에서 일어나 뭉개뭉개 위로 솟아 오르니 두려워서 내려왔다. 모두 연지봉 앞 야영하던 곳에 모여서 조금 쉬었다. 곧 40리를 가서 천수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산은 공허하고 밤은 서늘하니 월색은 물빛과 같았다. 피리를 불고 해금을 타게 하였다. 해금을 3, 4곡 연주하자 노래하는 사람들이 화답하니 온전히 속세를 떠난 듯하였다. 천수는 우리가 갈 때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그 때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할 수 없었지만, 이날 밤에 측정하니 고도가 42도 이상이다.



15일. 천수를 출발하여 자포에 이르다.
처음 나와 조엄은 삼지를 지나면서 그 경치가 맑고 운치있는 것에 감탄하였다. 다만 백두산을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그 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날은 여러 사람과 함께 삼지도(三池島)를 유람하기로 하였다. 앞에서 해금과 피리를 불게 하고 천천히 나아가 중지(中池)에 도착하였다. 왼쪽 언덕의 주위를 돌아 오른쪽 모래 사장에 앉았다. 물을 건너 섬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종자들이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 두려워 건너지 못하였다. 조엄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어찌 이곳까지 와서 이 섬을 구경하지 못한단 말인가?"
라고 하니, 중연이 그 관노비를 질책하며,
"빨리 가서 물의 깊이를 알아보라."
라고 하였다.
"만약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라고 내가 만류하였다. 중연은 듣지 않고 재촉하여 물 속에 들어갔다. 언덕의 동쪽에서 섬의 서쪽까지 물은 겨우 무릎에 스칠 정도였다. 나는 기뻐서 즉시 견여에 올라탔다. 조엄이 그 뒤를 따르고 중연이 또 그 뒤를 따랐으며, 사진 등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라왔다.
섬에 도착하니 나무가 대오리 자리처럼 빽빽이 들어차서 사람이 몸을 돌려야 지나갈 정도였다. 갈대가 밑에 엉겨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시종들을 시켜 풀을 헤치게 한 다음, 철쭉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 옷을 걷어 올리고 발길 닿는 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못의 둘레는 10여 리 정도였고, 섬의 둘레는 수백 보가 되었다. 서북쪽을 돌아보니 백두산, 소백산, 침봉이 차례로 보였다. 흰 매와 푸른 매가 서로 좆아 좌우로 날아드는 듯했다. 동남쪽을 바라보니, 천평, 허항령이 앞에서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었다. 삼나무가 뾰족뾰족 솟아 있는 것이 상 위에 죽순 껍질을 벌여 놓은 듯했다. 봉래산, 영주산과 비교하여 이 경치가 어떠한지 알 수가 없다.
조엄은 연못 가에서 갓을 씻고 나는 그 옆에 앉아 물장난을 하였다. 해금과 피리 소리가 숲 속에서 은은하게 서로 화답하니 그 소리와 산수의 정취가 잘 어우러졌다. 원상태가 앞에서 말하기를,
"옛부터 이곳을 지나는 자는 이 섬에 신령이 있다고 여겨서 감히 발걸음을 들이지 못했다. 참으로 두 분께서 이곳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섬과 못에 정해진 이름이 있는가?"
라고 하니, 원상태가 없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상의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세 연못 중 가운데 것을 상원(上元), 오른쪽 것을 중원(中元), 왼쪽 것을 하원(下元)이라 하고, 섬은 지추(地樞)라고 하였다. 대개 침봉에서 백두산까지는 60여 리로 동북 산하의 중심이 된다. 북극성의 6도가 하늘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지추도라 이름하였다. 내가 붓을 찾아 삼나무 껍질에다 큰 글씨로 ‘지추도이다. 서명응과 조엄이 이 곳을 지나갔다’라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사진과 무숙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이 이름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곧바로 칼을 꺼내 새기는데 나무가 단단하여 깊이 파서 돌에 새긴 것처럼 오래 가도록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떠나간 후에 다시 어떤 사람들이 이 섬에 이르러 새겨놓은 것을 보겠는가?"
라고 하니, 조엄이 말하기를,
"나무가 돌로 변하는 수도 있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반나절 동안 시를 읊조리며 즐기다가 해가 기울 때 자포참 막사로 돌아왔다. 20리쯤 가서 돌아보니 서북쪽에서 우레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더니 빗발이 온 산에 가득 찼다가 한두 시간 후에 그쳤다. 이 곳은 대개 백두산과 소백산의 중간이다.
이 날 밤 달빛은 산에 가득하고 흐르는 물소리가 삼나무 사이로 들려왔는데, 패옥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엄이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오늘은 유두일(流頭日)이다. 소 동파가 황강(黃岡)에 유배되었지만, 오히려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7월 16일 생일날 배를 적벽(赤壁) 아래에 띄우고 유람하였다. 우리도 일행들이 이날을 헛되게 보낼 수가 없다."
라고 하고 종자를 시켜 막사 앞에 솥을 걸고 나무를 베어다가 콩을 볶아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피리 소리와 해금 가락에 노래를 불러 화답하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꿈 속에서도 정신이 맑았다.



16일. 자포를 출발하여 운총에 이르다.
자포에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서수라덕령에 도착하였다. 순찰사가 파발을 보내 나와 조엄이 유배에서 풀렸다는 관문을 보냈다. 그런데 관문과 집에서 보낸 편지가 같이 도착하였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수풀에 앉아 공문을 보았다. 임금님의 기체는 편안하고 건강은 평상시와 같으며 6월 8일에 진전(眞殿)과 원묘(原廟)를 배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면서 기뻐하였다. 다음으로 관문을 보니 임금님의 말씀이 간절하고 선조까지 언급하고는 특명으로 두 사람의 유배를 석방한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돌아보며 눈물을 머금고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 다음으로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은 후에 길을 출발하여 검천에서 점심을 먹었다.
5리를 가니 혜산 첨사 유언신, 운총 만호 윤득위가 길에 나와서 맞이하였다. 길 옆 풀섶에 앉아 천천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또 출발하여 운총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나와 갑산 부사는 갑산으로 돌아가고 조엄과 삼수 부사는 삼수로 돌아갔다. 6월 22일 서울로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대개 유배지에 도착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모두 19일이고, 백두산에 갔다 온 것은 8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서명응과 조엄이 죄를 지어 이곳으로 유배된 것은 하늘이 두 사람에게 백두산을 견문토록 함이었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