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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는 어떤 책인가?

Ⅰ. 性格

『三國遺事』는 高麗 忠烈王(1274년~1308년 재위) 때인 1280년대 이후 13세기 말에 一然(1206년~1289년) 禪師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古朝鮮시대부터 고려가 後三國을 통일하기까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三國遺事』는 朝鮮시대의 『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五洲衍文長箋散稿』?『東史綱目』 등에서는 ‘異端의 虛荒한 說 내지 怪說’로 평가되어 그 기록의 신빙성이 부정되었다.1) 『三國遺事』의 내용이 상당 부분 불교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지탄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三國遺事』는 근대에 들어와 李能和2)에 의해 크게 이용되고, 崔南善3)에 의해 그 眞價가 인정되어, 孫晉泰4)에 이르러서는 國史 자료로 중시되면서 『三國史記』와 함께 한국고대사의 본격적인 史書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체로 『三國遺事』의 성격은 ‘佛敎史(佛敎文化史)’5) 내지 ‘佛敎史觀’6)에 입각한 사서로 평가되어 이른바 ‘儒敎史觀’의 『三國史記』와 대조되어 왔다. 또한 『三國史記』의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비합리주의를 표방한 ‘復古的 神異史觀’7) 내지 『三國史記』의 事大主義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적 민족의식’8)의 소산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三國遺事』를 『三國史記』와 대조적인 사서로 이해하여, 『三國史記』에 반대하거나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에는 이후 반성이 있었다. 즉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관계를 상호 보완적인 성격으로 이해9)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三國遺事』에 유교적 합리주의도 상당부분 수용되었다는 지적10)도 있는바, 하나의 관점에서 『三國史記』와 비교·대조하는 것은 앞으로 지양해야 할 것이다.11)



『三國遺事』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필수의 史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三國遺事』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 들어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시 정부 주도의 정책적인 국가·민족의식 고양과 궤를 같이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는데, 그 연구성과가 1980년대에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12)되어 이후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三國遺事』에 대한 연구가 주로 國史 내지 佛敎史 연구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면,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歷史?文學?宗敎?民俗?美術?書誌?考古學’ 등에 의한 이른바 ‘종합적인 연구’13)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의 종합적인 경향은 『三國遺事』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데, 이 책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종교·신앙·예술·문학 등 한국 고대사회에 대한 종합적인 ‘寶庫’라는 사실이다.

한편 이러한 『三國遺事』의 종합적 성격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三國遺事』에 대한 중요한 기초 작업14)들이 완성되면서 이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활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기초 작업을 토대로 최근에 들어와서는 『三國遺事』에 대한 새로운 校勘15)과 譯註16) 뿐만 아니라 역사, 불교, 문학, 민속을 아우른 더욱 종합적인 연구17)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18)



1) 李基白,1987,?《三國遺事》 記錄의 信憑性 問題?,『아시아문화』2,翰林大,97쪽.



2) 李能和,1918,『朝鮮佛敎通史』,新文館.



3) 崔南善,1927,?三國遺事解題?,『啓明』18,啓明俱樂部.



4) 孫晉泰,1949,?三國遺事의 社會史的 考察?,『學風』 2권 1·2호.



5) 閔泳珪,1969,?三國遺事?,『韓國의 古典百選』(월간 『新東亞』 1969년 1월호 附錄);1978,『韓國을 움직인 古典百選』,東亞日報社,88쪽.

金瑛泰,1974,?三國遺事의 體裁와 그 性格?,『東國大論文集』13,25쪽.



6) 河炫綱,1976,?《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史觀?,『讀書生活』 1976년 6월호;1989,『韓國中世史論』,新丘文化社,100쪽.

金相鉉,1978,?三國遺事에 나타난 一然의 佛敎史觀?,『韓國史硏究』20,32쪽.



7) 李基白,1973,?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震檀學報』36,60쪽.



8) 金泰永,1974,?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慶熙史學』5;1976,『韓國의 歷史認識(上)』,창작과 비평사,135쪽.



9) 高翊晉,1982,?三國遺事 撰述攷?,『韓國史硏究』38,53쪽.

鄭求福, 1987,「三國遺事의 史學史的 考察」,『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9,「一然과 三國遺事?,『韓國中世史學史(1)』,集文堂,306쪽.



10) 金福順,1998,?《三國遺事》에 보이는 儒敎史觀?,『大藏經의 世界』(月雲스님古稀記念佛敎學論叢),東國譯經院,946쪽.



11) 崔光植, 2005,「一然의 佛敎史認識」,『三國遺事硏究』창간호, 麟角寺 一然學硏究所.



12) 東北亞細亞硏究會 編,1982,『三國遺事의 硏究』,中央出版印刷株式會社.

白山資料院 編,1986,『三國遺事硏究論選集(1)』,白山資料院.



13) 震檀學會 編,1980,『震檀學報』36(三國遺事에 대한 綜合的 檢討).

新羅文化宣揚會 編,1980,『三國遺事의 新硏究』(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創刊號).

金烈圭?申東旭 編,1982,『三國遺事와 문예적 가치해명(三國遺事의 문예적 硏究)』,새문사.

民族文化硏究所 編,1983,『三國遺事硏究(上)』,嶺南大.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1987,『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

新羅文化宣揚會 編,1990,『三國遺事의 現場的 硏究』(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1집).



14) 三國遺事硏究會(三品彰英?村上四男),1975·1979·1994·1995,『三國遺事考?(上)·(中)·(下之一?二?三)』,?書房.

三國遺事硏究會,1985·1986·1987·1993·1994,?對校 三國遺事 卷一~卷五?,『韓國傳統文化硏究』1·2·3·8·9,효성여대 韓國傳統文化硏究所.



15) 河廷龍?李根直, 1997, 『三國遺事 校勘硏究』, 신서원.

류부현, 2007, 『삼국유사의 교감학적 연구』, 한국학술정보.



16) 姜仁求?金杜珍·金相鉉?張忠植?黃浿江, 2002, 『譯註 三國遺事』 Ⅰ~Ⅴ, 이회문화사.

하정룡, 2003, 『교감 역주 삼국유사』, 시공사.

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 읽기(1)-기이편』, 일지사.

이가원·허경진, 2006, 『삼국유사』, 한길사.

김원중, 2007, 『삼국유사』, 민음사.



17) 박진태·정호완·이동근·김복순·이강옥·조수동, 2002,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 도서출판 박이정.

일연학연구원 편, 2007, 『일연과 삼국유사』, 신서원.



18) 더 자세한『삼국유사』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와 그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韓國史硏究會 編, 1982, ?《三國遺事》 關係 論著目錄?,『韓國史硏究』38.

佛敎史學硏究所 編, 1995, 『增補三國遺事硏究論著目錄』, 中央僧伽大學.

金相鉉, 2003, 「三國遺事論」,『강좌 한국고대사』1(한국고대사연구 100년),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Ⅱ.體裁와 構成

『三國遺事』의 체재는 대체로 ‘5卷 9篇’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재 가장 온전한 형식과 내용을 전하는 壬申本 『三國遺事』에는 그 卷數와 篇名을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임신본의 체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王曆第一 紀異卷第一

卷第二

卷第三 興法第三 塔像

卷第四 義解第五

卷第五 神呪第六 感通第七 避隱第八 孝善第九



애초에 興法第三 다음에 ‘塔像’이라는 篇目을 찾을 수 없었으나, 東京興輪寺金堂十聖條 다음에 있는 ‘塔像’ 두 글자를 찾아 ‘塔像第四’라고 복원19)한 이후 대체로 이를 따르고 있다. 篇目인 ‘塔像’의 경우 ‘第四’가 빠진 것이 분명하므로, 결국 卷3에는 ‘興法第三’과 ‘塔像第四’의 2篇이 속하고, 卷4에는 ‘義解第五’ 1篇으로 채워지며, 卷5에는 ‘神呪第六’~‘孝善第九’의 4篇이 속하게 되는 것이다.

비교적 卷3에서 卷5에 배정된 篇目은 분명한 셈이다. 문제는 卷1과 卷2에 속해 있는 篇目의 구분이 매우 혼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出刊者가 서술의 양에 의해서 구분되는 ‘卷’과 내용에 의해서 구분되는 ‘篇’을 명백하게 분별하지 못한 데서 야기된 것으로 이해되는바, 冒頭에 ‘卷1’을 붙이고 거기에 ‘王曆第一’과 ‘紀異第二’의 2篇을 넣고, 卷2는 앞선 ‘紀異第二’의 연속으로서 篇目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는 입장20)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다.

한편 이와 달리 ‘王曆’을 독립된 하나의 ‘篇’으로 보지 않고 ‘附錄’으로 보며, ‘紀異卷第一’을 ‘卷第一 紀異第一’로 해석하고 ‘卷第二’는 그 다음에 ‘紀異第二’(篇目)가 생략된 형식으로 이해하는 입장21)도 있다. 즉 ‘王曆’은 篇外의 附錄이며, 卷1은 紀異第一이고, 卷2는 紀異第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王曆’을 단순한 부록으로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篇으로 넣을지가 문제이다. 현재까지 국내 연구자들은 王曆을 ‘단순한 부록의 年代表’가 아니라 ‘엄연한 하나의 篇’으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22)

그러나 王曆의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어 1310년 이전에 一然이 아닌 다른 인물에 의해 완성된 독립된 사서였으나 『三國遺事』의 初刊時에 부록의 성격으로 편찬자인 一然에 의해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주장23)되었다. 또한 王曆의 찬술시기는 一然과 무관한 1310년 이후로, 1394년의 ‘鮮初本’이 완성되기까지 84년 동안 사이 『三國遺事』가 初刊 또는 重刊되던 시점에 한 篇目으로 謄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검토24)가 있었다.

이상에 따르자면 王曆은 종래의 견해처럼 『帝王年代曆』이나25) 『歷代年表』를 참조하여26) 一然 또는 그 門徒들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30여 년 이상 지난 시기에 따로 편찬된 독립된 사서였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三國遺事』의 한 篇으로 편입되어 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三國遺事』 편찬 당시의 본래 체재에서 ‘王曆’篇은 제외되는 셈이다.

각 篇들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면 王曆篇과 紀異篇은 내용적 맥락에서 興法篇 이하 부분의 배경으로 제시된 것이라27) 볼 수 있다. 興法篇 이하는 개인을 주 대상으로 서술하였고, 紀異篇과 王曆篇은 개인이 몸담고 있는 國家와 國王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따라서 『三國遺事』의 9개 篇은 크게 보아 歷史의 기술인 王曆?紀異 2篇과 佛敎信仰史인 나머지 7篇으로 나뉠 수 있다.28) 諸篇의 분량도 대체로 전반부(王曆?紀異)와 후반부(興法~孝善)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각 篇 아래 각 條들의 구성은 대체로 다른 문헌으로부터의 인용이 중심이 된 史料的인 부분과 군데군데 필요에 따라 撰者의 의견이 기입된 考證的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29) ‘條目’의 구성은 앞서 보았던 ‘篇目’에 비해 더욱 혼란되어 있는 편이다. 原撰者 이외의 다른 사람에 의해 후대에 추가된 부분도 있고, 한 조목이었던 것이 둘로 나눠지거나 반대로 한 조목으로 합쳐진 경우도 있다. 또 조목이 잘못되거나 순서가 바뀐 부분도 있다.30)

최근 『三國遺事』의 여러 條目 사이에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三國遺事』의 撰者가 여러 명이고 찬술의 시기도 동시대가 아니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31) 『三國遺事』에는 편찬 당시의 序文과 跋文 및 目次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구성상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체재와 구성상의 이러한 문제점들은 『三國遺事』를 미완성의 사서로 이해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기술방식에 대해 『三國遺事』의 紀異篇을 ‘本紀’, 塔像篇을 ‘志’, 王曆篇을 ‘表’, 기타는 列傳으로 파악하여 ‘紀傳體’의 체제로 인식32)하거나, 또는 ‘高僧傳’의 체재를 좇은 ‘高僧傳體’로 파악33)하기도 한다. 이러한 體制의 문제는 『三國遺事』의 성격과 유관한 것으로 역사서로의 입장을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佛家書의 일종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三國遺事』의 체제를 ‘歷史?僧傳類’로 규정하고 『釋門正統』 등의 ‘中國 正史體 僧傳類’에서 시사 받아 모색했을 것이라 추정34)하기도 한다. 또는 中國의 ‘高僧傳’ 체제에 유의하여 篇目을 구성하였지만 王曆?紀異?孝善 등 高僧傳 체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바35), 이것은 一然의 역사의식에서 나온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이해36)하고 있다.

『三國遺事』의 구성을 보면 紀異篇과 王曆篇은 분명 국가나 국왕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서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나머지 7편은 대부분 불교 관계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의 입장만을 확대하여 그 전체적인 체재를 특징짓기는 곤란하다.





19) 今西龍,1928,?記?,『三國遺事』,朝鮮史學會;1971,國書刊行會.



20) 崔南善,1943,『新訂 三國遺事』,三中堂.

李基白,1987,?三國遺事의 篇目構成?,『佛敎와 諸科學』(東國大開校八十周年紀念論叢),東國大,983쪽.



21) 三品彰英 遺撰,1975,『三國遺事考?(上)』,?書房,35쪽.



22) 李基白,1985,?三國遺事 王曆篇의 檢討?,『歷史學報』107,4쪽.

金相鉉,1985,?三國遺事 王曆篇 檢討?,『東洋學』15,42~43쪽. 金相鉉의 경우 『三國遺事』의 체재를 “卷第一 王曆第一 紀異第一. 卷第二 紀異第二”라고 정리하고 있다.



23) 金相鉉,1987,?三國遺事의 書誌學的 考察?,『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韓國精神文化硏究院,41쪽.



24) 李根直,1998,?《三國遺事》 왕력의 편찬성격과 시기?,『韓國史硏究』101,46~47쪽.



25) 崔南善,1927,앞의 논문.



26) 채상식,1986,?至元 15年(1278) 仁興社刊 〈歷代年表〉와 《三國遺事》?,『高麗史의 諸問題』,三英社,682~692쪽.



27) 鄭求福,1999,앞의 논문,295쪽.



28) 金杜珍,2000,앞의 논문,10쪽.



29) 李基白,1987,앞의 논문,100쪽.



30) 金杜珍,2000,?三國遺事의 體制와 내용?,『韓國學論叢』23,國民大,6~9쪽.



31) 河廷龍,2001,?《三國遺事》 諸條目間 關係考?,『韓國史學史學報』4,韓國史學史學會.



32) 高翊晉,1982,앞의 논문,31~33쪽.

한편 井上秀雄,1980,?三國遺事と三國史記:その時代的背景と構成?,『アジア公論』9-5;1982,?三國遺事와 三國史記?,『三國遺事의 硏究』,中央出版,55쪽에서도 『三國遺事』를 ‘紀傳體의 歷史書’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33) 金瑛泰,1974,앞의 논문: 李載浩,1984,?三國遺事에 나타난 民族自主意識:特히 그 體裁와 儀禮에 對하여?,『三國遺事硏究(上)』,2~3쪽. 李載浩는 이를 ‘傳記體’라고 하기도 하였다.



34) 金杜珍,2000,앞의 논문,13쪽.



35) 채상식,1997,?일연과 三國遺事?,『삼성현(원효?설총?일연)의 생애와 학문』,경산대;1998,『한국 지성과의 만남』,부산대,261쪽.



36) 김광식,1999,?《三國遺事》는 왜 필요했을까?,『한국인의 역사의식』,청년사,128쪽.

Ⅲ. 編纂과 刊行

『三國遺事』의 撰者는 朝鮮 前期의 『新增東國輿地勝覽』까지만 하여도 작자미상으로 남아있었다. 또한 朝鮮 後期의 『東史綱目』에서도 그 撰者가 ‘無極과 一然’으로 나오기도 하고, ‘無極’이라고만 하기도 하고, 급기야 ‘無極’과 ‘一然’을 동일인으로 오해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37) 이러한 혼란된 인식은 卷5 첫머리의 ‘一然撰’과 卷3 및 卷4 등의 ‘無極記’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38)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徑?照大禪師一然撰(卷5)

無極記(卷3 塔像4 前後所將舍利, 卷4 義解5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위의 표기에 의하자면 『三國遺事』의 撰者는 一然이며 ‘無極記’는 그 弟子 無極(1251~1332년)의 附記로 이해된다.39) 그러나 체재와 구성상의 많은 문제점들을 근거로 『三國遺事』의 편찬이 一然에 의해서 완성되지 못했다40)고 보는 시각도 한다. 다시 말해 一然의 碑文에 기록된 그의 저서 중에 『三國遺事』가 보이지 않으며, 無極이 첨가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三國遺事』는 一然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제자 無極에 의해 비로소 편찬이 완성되고 初刊되었다는 주장이다. 반면 一然編纂說에 의하면 一然의 死後에 無極에 의해 초간이 이루어졌다면 一然의 諡號(普覺國尊)를 그 職銜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無極의 부기는 初刊이 아닌 重刊 때에 補足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三國遺事』의 初刊은 一然의 생존시에 이루어졌다고 한다.41) 『三國遺事』의 編纂과 初刊의 시기는 아직까지 학계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이다.

한편 書誌學 방면에서 『三國遺事』의 간행은 一然이 卷子本이나 折帖本 형식으로 分卷없이 내용 항목순으로 제1~9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제자 無極이 一然의 竪碑가 끝난 1295년에서 그가 입적한 1322년 사이에 謄載本을 만들어 初刊이 이루어졌으며, 朝鮮初(1394년)에 『三國史記』와 같이 慶州에서 重刊된 것으로42) 이해되고 있다. 최근에는 一然 사후 불과 100여 년 만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鮮初本’에 ‘麗末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을 근거로 『三國遺事』의 初刊은 朝鮮初, 1394년을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이루어졌다43)는 주장도 있다. 대체로 근래에 들어 『三國遺事』의 初刊 시기가 점차로 하향 조정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高麗 말 恭愍王 10(1361)년에 작성44)된 <慶州司首戶長行案序>45)에 ‘三國遺事’의 書名이 분명히 전하며 더욱이 紀異篇의 내용을 압축·인용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1361년’ 이전에는 그 편찬이 완성되어 書冊의 형태-筆寫本이든 印刊本이든-로 유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三國遺事』의 편찬자에 대해선 기왕의 ‘一然說’ 외에 一然과 그 門徒들에 의한 ‘共同編纂說’46)과 ‘제3의 편찬자 존재설’47) 등의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대로 王曆篇의 찬자는 一然이 아니었을 가능성48)이 점차 높아가고 있다. 『三國遺事』의 편찬을 一然 한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며 無極 등의 僧徒들도 일부 참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三國史記』 편찬의 책임이 金富軾에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三國遺事』의 편찬에 있어 그 중심인물은 역시 一然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一然은 高麗 熙宗 2년(1206)에 慶州의 속현이었던 章山郡(현재의 慶山)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은 지방의 향리층으로 짐작된다. 일연의 속성은 김씨요, 속명은 見明, 자는 晦然이라 하였다. 9세에 출가하여 海陽(현재의 光州) 無量寺에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한 일연은 14세에 설악산 陳田寺의 大雄 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진전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道義禪師 이래 廉居,體澄으로 이어지며 선풍을 주도한 사찰이었다.

그 후 강석과 선림을 편력하면서 수행한 일연은 동료들에게 九山四選의 으뜸으로 추대될 만큼 성가가 높았고, 22세에는 승과에 응시하여 선불장에서 상상과에 합격하고 包山(玄風 琵瑟山) 寶幢庵에 주석하면서 선관을 수행하였다. 일연은 이후 22년간 포산의 여러 사찰에 머무르면서 활동했는데, 포산의 다양한 신앙 분위기는 일연이 어느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계통의 신앙과 사상을 섭렵하게 하였다.

44세 때인 高宗 36년(1249)에 일연은 鄭晏이 설립한 남해 定林社에 초청되어 주법이 된다. 정안은 부친 鄭叔瞻이 崔怡의 장인으로서 崔氏政權과 밀접한 유대를 가진 세력가였으나, 자신은 崔怡의 정권에 반대하여 남해로 퇴거한 인물이었다. 54세 때인 高宗 46년(1259)에 일연은 大禪師가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元宗 2년(1261)에 일연은 왕명에 의해 江華에 초청되어 禪月社에서 활동하였다. 金俊이 정권을 장악한 元宗 5년(1264)에 일연은 영일의 운제산 吾魚社로 물러나고 얼마 안 있어 다시 包山 仁弘社로 옮겼다.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에는 그 동안 11년 간 지내오던 包山 仁弘社를 중수하고 사액을 받아 仁興社로 개명하였으며, 包山 동쪽에 있는 湧泉寺를 중수하여 佛日社로 삼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다음 해에 일연은 仁興社에서 『歷代年表』를 간행하였다.

72세 때인 충렬왕 3년(1277)에 일연은 왕명에 의해 雲門寺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충렬왕 8년에 왕은 일연을 내전에 맞이하여 개경의 廣明寺에 주석하도록 하였고 그 다음해 78세 된 일연을 國尊으로 책봉하고 圓徑?照라는 호를 내렸다. 國師가 아닌 國尊으로 책봉한 것은 元이 그들이 쓰는 국사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간섭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이후 麟角寺에 물러나 머물면서 2회에 걸쳐 九山門徒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迦智山門을 중심으로 禪宗系 내지 불교계 전체의 교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충렬왕 15년(1289) 봄에 일연은 麟角寺에서 『人天寶鑑』의 간행을 명하고 7월에 84세로 입적하니 法臘은 71세였다. 왕이 시호를 내려 普覺이라 하고 塔號를 靜照라 하였다.49)

一然 입적 후 6년이 지난 충렬왕 21년(1295)에 混丘(無極) 곧 淸?이 작성한 행장에 의거해서 閔漬가 짓고 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한 ‘高麗國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이 麟角寺에 세워진다. 비의 뒷면에는 眞靜大禪師 淸?(1251~1322)이 세운 경위를 적고 門徒와 檀越들의 이름을 열거한 陰記를 역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一然의 저술로는 語錄 2권. 偈頌雜著 3권, 重編曹洞五位 2권, 祖派圖 2권, 諸乘法數 7권, 大藏須知錄 3권, 禪門拈頌事苑 30권, 重編祖庭事苑 30권 등 100여권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근래 『重編曹洞五位』가 발굴되어 일부나마 일연의 사상적 편린을 알려주고 있으나, 나머지 기타 저술들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지금도 경북 군위군 고로면의 麟角寺에는 閔漬가 찬한 비가 많이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일연은 불교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를 비롯한 당시의 학문에 정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전하는 저술 중에 ‘三國遺事’의 서명이 보이지 않으나, 아마 이 100여권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일연의 비문에 ‘三國遺事’의 서명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비가 세워진 1295년까지 아직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三國遺事』의 刊行은 일연의 사후 淸?, 곧 混丘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淸?은 후에 寶鑑國師로 추증되는 混丘이며, 『三國遺事』에는 ‘無極’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청분은 일연의 비문과 음기를 통해 보면 일연 생존시에는 그의 직계문도가 아니었으나, 일연의 사후 그의 행장을 지어 충렬왕에게 바친다든가, 또 일연이 입적한 해에 일연이 일찍이 주석한 바 있는 雲門寺의 주지직을 맡는다든가, 또한 일연비를 건립한 충렬왕 21년(1295)에 일연이 말년을 보낸 麟角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寶鏡寺와 內願堂의 주지직까지도 겸임한 인물이었다. 이로 보아 청분은 충렬·충선왕 양대에 걸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지산문의 핵심적 승려임을 알 수 있다. 청분은 일연의 직계문도는 아니었지만 일연을 정점으로 가지산문이 크게 부상하여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하게 되자, 일연의 입적을 계기로 하여 그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후계자로 추대된 인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三國遺事』의 편찬과 간행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계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一然이 남긴 많은 저술 중에 포함된 것으로써 卷子本이나 折帖本 형식으로 分卷 없이 전해지다가, 一然의 入寂(1289년) 후 그의 계승자로 자처한 混丘(無極)가 이를 수습하여 1296년(建碑後)~1322년(混丘의 入寂)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여 5卷으로 分卷한 登梓本 형태로 간행한 것이라 이해해 두고자 한다.





37)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은 연구로 朴魯春의 ?一然의 號와 混丘의 號?(1980,『語文硏究』25·26,一潮閣)가 있다.



38) 金相鉉, 1982,「《三國遺事》의 刊行과 流通」,『韓國史硏究』38, 2?3쪽.



39) 金相鉉,1982,앞의 논문.



40) 高橋亨,1955,?《三國遺事》の註及檀君傳說の發展?,『朝鮮學報』7,67쪽.

村上四男,1981,?三國遺事解說(その一)?,『朝鮮學報』99·100合,257쪽.



41) 金相鉉,1982, 앞의 논문,6쪽.



42) 柳鐸一,1983, ?三國遺事의 文獻變化 樣相과 變因:그 病理學的 分析?,『三國遺事硏究(上)』,嶺南大,270쪽.



43) 河廷龍,1998,?《三國遺事》 最古本의 刊行時期:鶴山趙鍾業所藏古板本을 通한 接近?,『史學硏究』55·56合(竹田申載洪博士停年退任紀念論文集),59~74쪽.



44) 盧明浩 外,2000,『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上)』,서울대 출판부,340쪽.



45) 『慶州先生案』 慶州府戶長先生案(亞細亞文化社,1982版,311~314쪽).



46) 채상식, 1986, 앞의 논문.



47) 河廷龍, 1998, ?《三國遺事》의 編纂과 刊行?,『先史와 古代』11(安承周敎授 追慕特輯號),168쪽.



48) 金相鉉, 1985, 앞의 논문: 李根直, 1996, 앞의 논문.



49) 1一然의 생애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정병삼, 1994,「일연」,『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 창작과 비평사, 77?95쪽.

고운기, 1997,『일연』, 한길사.

채상식, 1998,「일연과 삼국유사」,『한국 지성과의 만남』(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편), 부산대 출판부, 252?258쪽.

Ⅳ. 板本과 影印本

現存하는 『三國遺事』의 板本은 크게 ‘古板本’과 ‘壬申本’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壬申本이란 명명은 1512년 壬申年, 朝鮮 中宗 7년에 간행된 판본이기 때문이다. 1512년은 明 武宗의 正德 7년에 해당하는 관계로 예전에는 壬申本을 ‘正德本’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壬申本은 李繼福 등이 慶州府에서 판각한 木板本이다.
壬申本 이전에 간행된 板本들을 모두 ‘古板本’이라 하는데, 이는 高麗 後期 또는 朝鮮 初期에 간행된 것들이다. 현존 古板本의 대부분은 朝鮮 初期 판본[鮮初本]으로 비정되고 있으나50), 향후 高麗本 『三國遺事』가 出世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現存 『三國遺事』의 板本과 상태

古板本 鶴山李仁榮舊藏本(筆寫本) 卷3(△),卷4(○),卷5(△)
石南宋錫夏舊藏本(筆寫本) 王曆(△),卷1(○)
趙鍾業所藏本 卷2(○)
南權熙紹介本 卷2(○)
金相鉉紹介本 王曆, 卷1, 卷2
梵魚寺所藏本 卷4, 卷5(△)
壬申本 天理大所藏加筆本 完
高麗大晩松文庫所藏本 王曆?卷1?卷4(○),卷2?卷3?卷5(△)
서울大奎章閣所藏本 完
高麗大六堂文庫所藏本 卷3(△),卷4(○),卷5(△)
蓬左文庫所藏本 王曆?卷1?卷3(△),卷2?卷4?卷5(○)
神田家舊藏本 ?/td>
金剛山楡岾寺舊藏本 ?
大坂金太郞舊藏筆寫本 ?
國立中央圖書館所藏寫眞本 王曆(△)
南權熙紹介本 卷3(△)
南權熙紹介筆寫本 王曆?卷1?卷2(○)


이상 여러 板本들의 原冊版은 傳存하지 않으며 다만 그 印本 내지 筆寫本만이 전해지는데 이를 직접 열람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에 참고로 이들을 臺本으로 했던 기존의 影印本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遺事』의 影印本
影印本 臺 本 京都大學 年度
京都大影印本 天理大所藏加筆壬申本 王曆(△),卷1(○) 1921
古典刊行會影印本 天理大所藏加筆壬申本 古典刊行會 1932
學習院影印本 古典刊行會影印本 學習院大學 1964
民族文化推進會影印本 서울大奎章閣所藏壬申本 民族文化推進會 1973
高麗大晩松文庫影印本 高麗大晩松文庫所藏壬申本 高麗大 圖書館?오성사 1983
民族文化影印本 天理大所藏加筆壬申本 圖書出版 民族文化 1984
景仁文化社影印本 民族文化影印本 景仁文化社 1987
韓國學硏究院影印本 서울大奎章閣所藏壬申本 대제각 1987
麟角寺影印本 古板本(鮮初本)+壬申本 一然學硏究所 2003

기존의 『三國遺事』 영인에서 주로 사용된 底本은 天理大所藏加筆壬申本과 서울大奎章閣所藏壬申本 2종이었다. 이것은 현재 두 판본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도 두 판본을 중요한 臺本으로 사용하였지만, 특히 王曆篇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고려대 만송문고소장 壬申本을 주로 참조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古板本에 대해서도 인각사 일연학연구소에서 영인한 百衲本을 중심으로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50) 南權熙,1990,?泥山本 《三國遺事》의 書誌學的 考察?,『書誌學硏究』5·6合,209쪽: 河廷龍,1998,?《三國遺事》 古板本의 書誌學的 考察?,『白山學報』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