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단군

연관목차보기

단군

기본정보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의 첫임금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며, 단군(壇君)·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그런데『삼국유사』왕력편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이름이 주몽 또는 추몽이고 단군의 아들(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동명왕과 단군의 아들의 관계가 주목된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후대의 산물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고구려 자체에도 단군에 대한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초기에 왕통을 계승한 집단으로 후에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部) 중 소노부(消奴部)가 된 비류국(沸流國)은 선인(仙人)의 후예라고 하여 단군을 조상으로 인식하였으며,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각저총(角抵塚)과 장천(長川) 1호분의 그림에도 곰과 호랑이와 여인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단군신화와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후대의 산물이 아닌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승이 고려시대에 기록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이러한 역사인식의 산물로 보인다.

전문정보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며, 단군(壇君)·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한자표기는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 지만,『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에 실려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재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단군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 기이 1 고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이름이 주몽 또는 추몽이고 단군의 아들(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동명왕과 단군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 고조선조에서는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과 고조선의 건국을 서술하였다. 즉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을 다스리며 교화하다가 사람으로 변한 곰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이다. 단군은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고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는데 뒤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라고 하였다.

단군의 한자표기는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 지만,『제왕운기』이래 조선시대 사서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단군은 우리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에 실려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 충렬왕 13년(1287)에 쓰여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단종 2년(1454)에 편찬된『세종실록』 지리지와 조선 세조 8년(1462)에 쓰여진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制詩註)』등에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군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古記)』의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역사의 기원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단군신화가 그 전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다가 고려시대인 13세기의 저작물인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후대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단군신화의 출전으로 인용한 『위서』와 『고기』의 원전이 확인되지 않아 일연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今西龍, 1937)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고의적이거나 단견(短見)인 것으로 혹평받았다. 육당은 과거의 역사서 가운데 후대에 없어져 일문(逸文)만 전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고 보고, 『위서』는 북위(386-534)의 『위서』, 조위(220-265)의 위서, 중국 문헌의 범칭일 가능성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위서』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최남선, 1954)

단군신화가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왔음은 한때 후한대에 세워진 중국 산동성에 위치한 무씨사당(武氏祠石室) 화상석(畵像石)이 강력한 근거로 제시하는 의견(김재원, 1947)이 있었으나, 현재는 단군신화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편이다.

단군신화의 생성과 그 주인공에 대하여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는데,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는 것이다.(최남선, 1973) 또한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이병도, 1976) 그 외에 단군신화를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김정학, 1954) 또한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 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기도 한다.(김정배, 1973)

근래에는 고구려사회에서도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을 주목한 일련의 연구가 등장하였다. 고구려에서 국초에 『유기(留記)』 등의 사서를 편찬하여 그 전부터 구전을 통하여 내려온 고구려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보아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고기』 역시 구전을 통해서 내려온 것을 『고기(古記)』라고 표현되는 사서에서 수록한 후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형태로 전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이종욱, 1993)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247)조에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존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사회에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서영대, 1994)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씨름그림으로 유명한 각저총(角抵塚) 그림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나무 아래에서 씨름을 구경하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장천(長川) 1호분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가 단군신화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때(강룡남, 1996), 단군신화가 고구려와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5세기로 편년되는 벽화고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신화 연대논의를 더욱 높여 준다고 할 수 있다.(조법종, 2006)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하여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단순한 고조선의 건국신화일 뿐 아니라 한민족 국가들의 형성과 관련된 신화이고, 나아가 조선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나라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한민족 형성의 신화가 되기도 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이종욱, 1993)

『삼국유사』기이편 고구려조에서는 주몽=동명설화를 말하면서 『단군기(壇君記)』를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가까워져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했다(壇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夫婁)”고 한다. 북부여의 왕이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단군기』라는 책이 어떤 성격이 책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부여왕의 권위가 단군의 전승과 결부됐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경희, 1983)

단군과 동명의 관련 신화를 보면 여러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즉 동명 또는 주몽의 어머니는 금와왕에 의해서 유폐되고 있는데, 이는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삼칠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기(忌)했다”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것으로, 고구려 사회의 수신혈(隧神穴)에서 제를 지내는 습속은 이것과 관련된다. 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구삼국사』를 인용하여 주몽이 죽었을 때를 “가을 9월 왕은 승천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이 때 나이는 40이었다(秋九月 王升天不下 時年四十)”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곧 단군의 아버지 환웅의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명설화의 밑바닥에는 단군신화의 유산이 상당히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정경희, 1983)

한편, 고구려초기에 왕통을 계승한 집단으로 후에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部) 중 소노부(消奴部)가 된 비류국(沸流國) 또한 단군을 시조로 하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단군의 역사적인 관계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주목을 끈다.

비류국(沸流國) 왕 송양(松壤)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본기(東明本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이것은 선인과 단군을 동일한 의미로 파악한 견해로서 단군인식이 고구려 건국초기에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박경철, 1996)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씨름그림으로 유명한 각저총(角抵塚) 그림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나무아래에서 씨름을 구경하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장천(長川) 1호분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로 알려진 그림 속에 중앙의 나무와 그 나무를 향한 여인의 모습에서 웅녀의 단군잉태 기원모습과 연결된다고 한다. 특히 그림 좌측에 굴속에 곰 같은 동물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단군신화와 연결된다고 한다. (강룡남, 1996)

이것은 단군신화가 고구려와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대체로 5세기로 편년되는 벽화고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신화 연대논의를 더욱 높여 준다. 그런데 주몽집단에 앞서 존재한 송양집단의 단군시조인식은 고구려 사회에서는 비주류적 인식으로 유지되다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친 뒤 전민족적 시조인식으로 새롭게 확산 재정립되었다고 파악된다. 이것이 단군신화가 삼국의 시조신화와 같은 전승과정을 갖지 못하고 후대에 부각된 원인으로 보인다.(조법종, 2006)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것이나, 단군과 하백녀의 혼인을 통하여 부여왕인 부루(夫婁)가 태어났다고 하는 기록은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의 건국세력들이 혈통을 같이 한다고 보고자 하였거나 또는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단순한 고조선의 건국신화일 뿐 아니라 한민족 국가들의 형성과 관련된 신화이고, 나아가 조선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나라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한민족형성의 신화가 되기도 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이종욱, 1993)

참고문헌

今西龍, 1937,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김재원, 1947, 『단군신화의 신연구』, 정음사.
김정학, 1954, 「檀君神話와 토테미즘」『歷史學報』7.
최남선, 1954, 『增補 三國遺事』, 민중서관.
김정배, 1973, 『민족문화의 기원』, 고려대출판부.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정경희, 1983,「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宗敎社會史的 觀點으로부터의 接近-」『歷史學報』98.
이종욱, 1993,『古朝鮮史硏究』, 일조각.
서영대, 1994, 「檀君關係 文獻資料 硏究」『檀君: 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출판부.
강룡남, 1996,「단군에 대한 고구려사람들의 리해와 숭배」『력사과학』96-3.
박경철, 1996,『高句麗의 國家形成硏究』, 고려대박사논문.
조법종, 2006,『고조선·고구려사연구』, 신서원.
<참고이미지 자료>
단군영정: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4,『고조선, 단군, 부여』, 고구려연구재단, 87쪽 이미지 참고.
구월산 삼성사 삼성전: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4,『고조선, 단군, 부여』, 고구려연구재단, 82쪽 이미지 참고.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一 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제1 동명왕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으로 추몽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신(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 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方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