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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선장군 양복

기본정보

한(漢)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의 장군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한(漢)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의 장군으로, 남월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누선 장군으로 임명되어 공을 세워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그 뒤 좌장군 순체와 함께 조선을 치러 갔다가 실패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가 병사(病死)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1 위만조선조에서 『한서(漢書)』 조선전을 인용하여 조선과 한 사이의 갈등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한(漢)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의 장군인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등장한다.

양복(楊僕)은 『사기(史記)』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 등에 의하면, 의양(宜陽)사람이며, 천부(千夫 : 부족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재물을 기탁한 자에게 주던 무공(武功)의 지위)의 신분으로 관리가 되었다. 하남군 태수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추천해서 어사(御史)가 되어 관동 지방의 도적을 살폈다. 그는 점차로 승진해서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어 9경(卿)의 서열에 올랐다. 남월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누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공을 세워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사기(史記)』 권113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의하면, 양복은 원정(元鼎) 5년(기원전 112)에 수군(水軍)을 이끄는 관직인 누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예장(豫章, 治所는 지금의 江西 南昌)을 출발하여 남월(南越)을 공격하였다. 당시 누선장군은 수만 명이라는 우세한 병력으로 유리한 곳을 택해 번우(番?)를 포위하고 있었던 반면, 함께 전쟁에 나섰던 복파(伏波)는 오는 도중에 병사를 잃어버려 그 병력이 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누선장군은 화공 정책을 펴서 번우성을 공격하여 가능한 빠른 시간에 항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성을 공격할 능력도 갖지 못했던 복파장군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번우성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결국 성 전체가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부터 시작된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漢)의 전쟁을 살펴보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제(齊)로부터 병사가 5만을 이끌고 발해(渤海)로 가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는 요동을 나와서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양복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는데, 위만조선에 패해 달아났다. 순체는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이에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 위만조선에 화친을 제의하니,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기를 지니지 말고 항복하라는 말에,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갔고, 무제는 위산을 목 베었다.

이후 좌장군(左將軍)은 패수(浿水) 위쪽 군대를 깨뜨리고 전진하여 성의 서북을 포위하였고, 누선도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는데,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고, 누선은 여러 번 싸움에 패한 적이 있어서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의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조선과의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였다. 이에 무제는 다시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게 하였다. 그러나 공손수는 좌장군의 말에 따라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무제(武帝)에게 보고하였고, 무제는 공손수를 죽였다.

좌장군은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드디어 조선의 대신들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좌장군은 공(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棄市)되었다. 누선장군도 좌장군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였으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이 되었다고 한다.

양복은 제(齊) 지방으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 왕험성(王險城)에 이르렀으나, 조선 침공에서 초반에 이미 많은 병사를 잃었으므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바로 얼마 전 자기와 함께 전쟁을 치렀던 복파장군의 상황과 유사했다. 누선장군은 만약 충분한 전공이 없다면 귀환한 뒤 엄중한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임이 분명했다.『한서(漢書)』 권6 무제기(武帝紀)에는 “누선장군 양복이 실망다(失亡多)의 죄에 해당되었다.(樓船將軍楊僕坐失亡多)”고 기재하였다. 조선 정벌 당시 양복이 충분한 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남월 전쟁에서 복파장군의 사례처럼 항복을 유인하는 방식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선장군은 많은 시간을 끌더라도 더 많은 투항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쓴 것이라고 한다.(김병준, 2008)

하지만 누선장군 양복은 좌장군 순체와 함께 조선을 치러 갔다가 실패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가 병사(病死)하였다. 이에 사마천은 태사공왈(太史公曰) 부분에서, 누선장군이 남월 침공 때 번우(番?)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성하기 위해 행동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반대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병준, 2008,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 조선열전의 재검토」『한국 고대국가 멸망기의 양상과 원인(한국고대사학회 제21회 합동토론회 발표요지문)』, 한국고대사학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