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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개

기본정보

후백제시조 견훤의 아버지.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후백제시조 견훤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지만, 견훤과는 독자적은 행보를 취하였으며, 후에 고려에 항복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후백제견훤조에는 『이제가기(李?家記)』를 인용하여 아자개를 후백제시조 견훤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 이외에 아자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50 열전10 견훤조에서는 아자개(阿慈介)로, 같은 책 신라본기 경명왕(景明王) 2년()조에는 아자개(阿玆盖)로, 『고려사』권1 태조(太祖) 원년(918)에는 아자개(阿字盖)로 나타나 있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아자개(阿慈蓋)로 표시되어 있다. 이렇듯 여러 기록에서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현상은 동음이사(同音異寫)라고 하며, 모두 동일인으로서 견훤의 아버지로 보고 있다.(신호철, 1993)

아자개의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家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아자개는 첫째 상원부인(上院夫人) 및 둘째 남원부인(南院夫人)과의 사이에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로는 첫째가 바로 견훤(甄萱)이며, 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 등이 있고,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한다. 이러한 계보를 인정할 경우 진흥왕-구륜공-선품(善品)-작진(酌珍)-아자개(阿慈?)-견훤으로 이어지는 견훤의 원계(遠系)는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2001)

아자개는 신라 말?고려 초의 지방세력가로서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아자개는 헌강왕(憲康王) 11년(885)-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가병(家兵)·사병(私兵)적 성격의 군사적인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견훤이 이(李)씨 성을 가지고 있다가 견(甄)씨로 바꾼 점을 통해서 아자개의 성이 이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난한 농민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아자개가 사불성(沙弗城)의 장군을 칭할 정도라면 경제적·사회적인 기반을 가진 토착세력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신호철, 1993) 그 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후 아자개의 행적은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원년(918)조에 “갑오일에 상주 반란군의 두령 아자개(阿字蓋)가 사절을 시켜 귀순하여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 사절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甲午 尙州賊帥阿字盖遣使來附 王命備儀迎之)”라 하여 918년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50 열전(列傳)10 견훤(甄萱)조와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李)씨였으나 뒤에 견(甄)씨를 성으로 삼았다.(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는 기록을 신뢰하여 견훤의 출생지와 관하여 경상도 상주라는 견해가 제기된 이래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견훤을 현재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박용운, 1985 ; 이기백, 1993)

그러나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上) 고이(考異), 아자개(阿慈蓋)조에는 아자개가 고려에 내부(來附)할 당시 견훤의 형세가 몹시 강하였으니 그의 아비가 투항할 이치가 없으므로 『삼국유사』에 보이는 사불성(沙弗城) 장군 아자개(阿慈介)와 『고려사』에 나타난 상주적수(尙州賊帥) 아자개(阿字盖)가 동일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고려사』에 보이는 상주적수 아자개(阿字盖)와 견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고려사』에 견훤과 아자개의 관련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아자개가 고려에 내부할 때 견훤의 형세로 보아 아들의 적에게 귀항(歸降)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는 점을 들어 양자는 출신 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으로서 부자지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견해는 견훤의 어머니가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부잣집의 딸로 묘사된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의거하여 견훤을 광주 출신으로 파악하고 있다.(김상기, 1974) 그리고 『삼국사기』권50 열전10 견훤조에 천성(天成) 2년(927)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취(攻取)하여 불태운 기록이 보이는데, 근품성은 견훤의 출신지로 알려진 상주의 속현이다. 고향지방에 대한 처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견훤의 출신지가 상주라는 점과 아자개와 견훤이 부자간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있다.(박경자, 1982)

참고문헌

김상기, 1974, 『東方史論叢』, 서울대학교출판부.
박경자, 1982, 「甄萱의 勢力과 對王建關係」『淑大史論』11?12合.
박용운, 1985, 『高麗時代史』上, 일지사.
신호철, 1993, 『後百濟甄萱政權硏究』, 일조각.
이기백, 1993, 『韓國史新論』, 일조각.
이도학, 2001, 「甄萱의 出身地와 그 초기 세력 기반」『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後以甄爲氏 父阿慈?以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皆知名於世 萱號傑出多智略 李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諡曰白□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 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 是爲阿慈?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盖 四子寶盖 五子將軍小盖 一女大主刀金 又古記云 昔一富人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牆下 針刺於大?蚓之腰 後因姙生一男 年十五自稱甄萱 …
후백제 견훤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咸通, 860-873) 8년 정해(丁亥, 867)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광계(光啓, 885-887)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이 뛰어났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하였다.『이제가기(李?家記)』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夫人)이다.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인 각간(角干) 작진(酌?)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하고 있다. 또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光州) 북촌에 살았는데, 하나 있는 딸의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들어와 관계를 합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이르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꿰어 두어라.”라고 하여,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