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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지

기본정보

금관의 옛성을 빼앗아 성주장군이 되었으며, 수로왕의 제사와 관련된 분쟁에 개입된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충지는 금관의 옛 성을 빼앗아 성주장군이 되었으며, 수로왕의 제사와 관련된 분쟁에 개입된 인물이다. 금석문에서는 소충자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는 신라 말에 충지(忠至) 잡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금관(金官)의 옛 성(古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서 영규(英規) 아간(阿干)이라는 자가 충지의 위엄을 빌려서 수로왕의 사당을 빼앗아 음사(淫祀)를 지냈는데, 단오에 고사를 지내던 도중에 사당의 대들보가 부러져 밑에 깔려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충지는 수로왕의 영정을 그려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지만, 봉안한 진영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자 다시 사당을 불태우게 된다. 이후에 충지는 두려움을 느끼고 수로왕의 직계자손인 규림(圭林)을 불러서 종전처럼 수로왕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러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능묘(陵墓)조 수로왕릉(首露王陵) 세주에서 확인된다. 여기서는 신라 말에 장군 충지(忠至)가 금관성(金官城)을 진수(鎭守)하였는데, 영규(英規)라는 자가 장군의 위세를 빙자하고 제물을 빼앗아서 치고(致告)였더니, 사당의 들보가 부러지면서 영규의 이마에 떨어져서 마침내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서 충지가 두려워하여 왕의 진영(眞影)을 그려서 사당의 벽에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제사하였더니, 사흘이 되자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에 고인 것이 거의 한 말이 되었고 이에 충지가 두려워서 태워버렸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충지의 위세를 이용한 영규가 음사(淫祀)를 지냈다는 표현 대신에 말로만 고했다(致告)는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되어 있지만, 이후의 사건은 동일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책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명환(名宦)조에서는 “충지(忠至)”의 이름만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충지는 신라 말에 김해지역에서 수로왕에 대한 제사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관련된 인물임을 알 수 있지만, 이상의 기록을 제외하면 다른 문헌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충지에 관련된 내용을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는 효공왕 11년(907)에 해당하는 천우(天祐) 4년에 “김해부(金海府)의 소공(蘇公) 충자(忠子) 지군부사(知府)와 동생인 소율희(律熙) 영군(領軍)(金海府蘇公忠子知府及律熙領軍)”이 승려인 행적(行寂)을 맞이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소충자(蘇忠子)는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이고 그의 동생인 소율희(蘇律熙)는 군사지휘관으로 보이는 영군의 직에 있으면서 김해 지역의 유력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해지역에서의 유력한 세력이라는 점과 이름에서 음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소충자가 곧 충지라고 파악한 연구가 있다. 또한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에서는 효공왕 15년(911)에 당에서 귀국한 진철대사가 김해에 들렀을 때 “김해부지군사(金海府知) 소공(小功) 율희(律熙)”가 맞이한다는 내용으로 볼 때 효공왕 15년(911)경에는 동생인 소율희에게 김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주고 충지는 일선에서 물러난 것까지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최병헌, 1978)

즉, 충지는 김해지역을 장악한 뒤에 성주장군(城主將軍)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성주장군은 진성왕(眞聖王) 3년(889) 이후에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신들의 지역의 안전을 위하여 기존의 성을 중심으로 성주(城主)라고 칭하고 주민들을 무장시켜 장군(將軍)으로 자칭하면서 등장한 것이다.(윤희면, 1982)

또한 소충자와 충지를 동일한 인물로 파악했을 때 지제군사(知諸軍事)직을 지녔던 사실이 주목된다. 지제군사직은 신라 말에 태수나 현령이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성주, 장군 등을 칭하자 신라정부가 이들에게 붙여준 칭호라는 견해(이기백, 1974)와 신라 말의 도독제를 이어서 지방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 실시된 지방제도의 일부라는 견해(김기웅, 1987), 혹은 신라 말 지방제도의 해체에 따라서 등장한 군사조직이 지제군사제도였지만, 중앙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하급군관이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 것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이순근, 1992)

한편 이러한 추정을 바탕으로 충지는 원래 촌주급의 하급군관이었는데, 지제군사직을 참칭하면서 호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이순근, 1992) 이와 달리 효공왕(孝恭王) 11년(907)인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지제군사직을 맡은 인물이기 때문에 충지를 지방관이었을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충지는 지제군사직을 맡은 뒤 직책을 이용하여 중앙과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한 것인데, 특히 금석문들을 통해서 선종계 승려들을 초빙하여 후원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김상돈, 1996)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최병헌, 1978, 「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韓國史論』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윤희면, 1982, 「新羅下代의 城主·將軍 -眞寶城主 洪術과 載岩城將軍 善弼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81.
김기웅, 1987, 「羅末麗初의 地方社會와 知州諸軍事」『慶南史學』4.
이순근, 1992, 『新羅末 地方勢力의 構成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상돈, 1996, 「新羅末 舊加耶圈의 金海 豪族勢力」『震檀學報』8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庶云?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 玆故元君於幼?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世級干 祗?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其祭日 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降及仇衝朝末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 永無違者 其乃仇衝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是廟禮 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 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新羅季末 有忠至?干者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將軍 爰有英規阿干 假威於將軍 奪廟享而淫祀 當端午而致告祠 堂梁無故折墜 因覆壓而死焉 於是將軍自謂 宿因多幸 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 宜我畵其眞影 香燈供之 以酬玄恩 遂以鮫絹三尺 摸出眞影 安於壁上 旦夕膏炷 瞻仰虔至 才三日 影之二目 流下血淚 而貯於地上 幾一斗矣 將軍大懼 捧持其眞 就廟而焚之 卽召王之眞孫圭林而謂曰 昨有不祥事 一何重疊 是必廟之威靈 震怒余之圖畵而供養不孫 英規旣死 余甚怖畏 影已燒矣 必受陰誅 卿是王之眞孫 信合依舊以祭之 圭林繼世奠? 年及八十八歲而卒 其子間元卿續而克? 端午日謁廟之祭 英規之子俊必又發狂 來詣廟 ?徹間元之奠 以已奠陳享 三獻未終 得暴疾 歸家而斃 然古人有言 淫祀無福 反受其殃 前有英規 後有<俊>必 父子之謂乎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也 有躬?甲? 張弓挾矢 猛士一人從廟中出 四面<雨>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而散 故知陵園表裏 必有神物護之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신라 제30대왕 법민(法敏)이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 □일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 9대손 구충왕(仇衝王)이 우리나라(本國)에 항복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인 서운(庶云) 잡간(?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곧 나(幼?人)를 낳으신 분이므로, 원군(元君)은 나에게 15대 시조가 되는 것이다.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으나 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를 옛 터에 보내어 사당 근처에 있는 상상전(上上田) 30경(頃)을 주어서 제사의 재원으로 삼게 하고, 왕위전(王位田)이라고 이름하여 사당 소유의 땅에 붙였다. 왕의 17세손 갱세(?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왕위전을 관장하여, 때에 맞추어 술을 빚고, 떡, 밥, 다과 등의 제물을 차리기를 해마다 어김이 없었다. 제사일은 거등왕이 제정한 1년에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켰는데, 정성스러운 제사가 이제는 우리의 책임이 되었다. 그 제사는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이후로 구충왕(仇衝)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제사를 거행함에는 한 번도 어김이 없었다. 그러나 구충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까지 60년 동안에 이 사당에 제향이 간혹 빠짐이 있기도 하였다. 아름답다! 문무왕(文武王)[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다.]이여, 먼저 조상을 높이 받들 지극한 효성으로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서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신라 말에 충지(忠至) 잡간(?干)이라는 자가 있어 금관(金官)의 옛 성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때에 영규(英規) 아간(阿干)이라는 자가 장군(將軍)의 위세를 빌려 사당(廟享)을 빼앗아 음사(淫祀)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이하여 고사(告祀)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지면서 밑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장군이 스스로 말하기를, “묵은 인연(宿因)으로 다행히 성스러운 왕(聖王)께서 다스린 국성(國城)에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마땅히 내가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을 피우고 등을 밝혀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3척의 비단에 진영을 그려서 벽에 봉안(奉安)하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밝히고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그런데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거의 한 말(斗)이나 괴이었다. 장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가서 불살랐다. 곧 왕의 직계자손(眞孫)인 규림(圭林)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반드시 사당에 모신 영혼(威靈)이 내가 영정을 그려놓고 공양이 불손한 것에 진노한 것이다. 영규(英規)가 죽었으니 내가 매우 두려운데, 영정을 태웠으니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자손이니 꼭 종전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림(圭林)이 대를 이어서 제사를 모시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하여 제사를 지냈다. 단오날에 사당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데 영규(英規)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하여 사당에 와서 간원(間元)의 제물(祭需)을 걷어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베푸니, 세 번째 술잔을 다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에 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며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앞서 영규(英規)와 뒤의 준필(俊必) (이들) 아버지와 아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또 도적들이 사당 내에 보물들(金玉)이 많이 있다 하여, 장차 와서 도둑질을 하려고 하였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갑옷과 투구를 두른 채 화살을 끼워 활을 당긴 용맹한 무사 한 사람이 사당으로부터 나와 사방으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칠팔 명의 도적을 맞추어 죽이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수일 만에 다시 오니, 길이가 30여척이나 되는 큰 이무기가 눈을 번갯불처럼 번쩍이면서 사당 옆으로부터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는데, 겨우 (죽음을) 면한 사람도 모두 엎더지고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능원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호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